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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생각해
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편지를 쓰다보면 서순 양이 어떤 사람이었는 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애초에 그리워서 쓰기 시작한 편지일텐데...쓰다보면 또 다시 당신을 생각하게 된다는 그 사랑스러운 마음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합니다. 끊임없이 당신을 생각한다는 것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마음의 다른 표현. 당신 생각에 잠기어 태운 밥을 웃으며 먹을 수 있는 마음. 잘못한 일을 반성하듯 나의 마음을 다시 돌아보고 반성의자에 앉아 당신에게 쓰는 편지. 이 책은 그런 마음을 담은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5년 묵은 남자친구와 허무한 점심을 나누며 '이 자장면을 다 먹어버리는 것으로 내 존재를 알려야겠다'는 유안이의 혼자생각은 우스우면서도 서글퍼서...내 마음에 쏙 들어왔습니다. 이십대 시절의 열정이나 신선한 기쁨 따위 까먹은지 오래, 차라리 묵은지 맛집투어를 5개년계획하고말지 사랑따위 남의 다리 긁는 듯 재미없어 싱글로 지낸지도 오래...(제 얘깁니다ㅋ). 영국작가 E.M.포스터도 말씀하셨듯, 인생을 살면서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받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가요. 그런 사랑을 만나는 것이 기적이라면 그 사랑을 지켜나가는 데는 더 큰 기적이 필요할 겁니다. 아마 그래서 유안이는 자신의 5년연애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을 겁니다. 왜냐면 우리 유안이는 정말 열심히 사니까요. 5년의 연애를 허투루 여기지않는 것처럼 인생도 허투루 여기지않습니다. '관객들이 오긴 올까요? 우리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걸 알까요?' 라고 겁내면서도 멈추지않고 달립니다. 그냥 운동삼아 달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 진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전력질주합니다. 가족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녀는 그들을 버리는 게 아니라 더 알고 싶어하고, 비록 배신당했어도 그 친구를 배신하지않으려 애쓰는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존경스러웠습니다.
살다보면 사랑을 감정의 강요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야해,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않는거니..,라는 식의 강요. 유안이의 고등학교 친구였던 정민이라는 아이가 그랬습니다. 누구나 그 시절에 그런 친구 하나쯤은 누나 마음의 삼천원처럼 다 한번씩 경험해 봤을테죠. 나의 비밀, 나의 시간을 모두 너에게 올인할테니 너도 비밀과 시간을 내 놓아보렴....아아...너무 숨이 막혀...떡하나 주면 안잡아 먹겠다는 호랑이가 떡먹으며 웃겠다! ...하지만 그 강요만큼이나 슬픈 사랑은 단절된 가족처럼 의무가 된 사랑입니다. 부모노릇도 하고 사랑도 지키려했던 할머니를 괘씸해하던 엄마도 결국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사랑을 반성하고 할머니를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사랑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을 흘러가게 내버려 둘 때 가장 빛나지않을까요.
'나는 당신과 밥을 지어먹고 이야기를 하고 나물을 캐고 그러고 싶었습니다.'라는 할머니의 소박한 바램같은 사랑. 성격개조나 맛집개척으로 버텨 근근히 유지한 사랑을 색칠해서 길 떠나보낸 수 많은 기차들만큼 큰 액션같은 사랑이 아니라, 함께 좋아하는 음악을 흥얼거리고, 그냥 옆에 앉아 농담따먹기하고, 소소하게 다투다 모른척 화해하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행복하게 햄 지글지글 볶으며 살아가는 은근한 사랑. '몸이 사라진 곳에서 마음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냥 나를 떠올렸을때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입니다.
유안의 열성처럼 말줄임표 하나 허투루 쓰지않은 작가의 표현과 감정이 오히려 마음에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며 문장을 다듬었을지 눈에 보이는 듯하여, 그 감동을 초라한 리뷰로 옮기는 것이 너무나 송구스러웠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앞으로도 계속될 그녀의 작품을, 이야기를, 시선을, 아름다운 문장들을 기대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바야흐로 이은조의 시대가 열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