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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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이것은 ‘자신의 나이가 필요했던’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눈앞에 말간 동심원이 그려지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김애란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에요.

<두근두근 내 인생> 제목을 소리 내어 따라 읽고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옥색과 은색을 섞은 듯 표지도 근사했어요. 하늘로 둥실 떠오르는 다섯 개의 풍선이 마음에 들었어요. 당장 주문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썼는지 몰라도 좋았어요. 단편으로만 접했던 김애란 작가가 첫 장편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일곱에 나를 가졌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조로증에 걸린 한 소년의 이야기. 날마다 무럭무럭 늙어가는, 어느 순간 낳아준 아버지보다 더 늙어버린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제목답게, 파스텔 톤의 싱그러운 표지답게 달착지근하면서도 톡 쏘는 이야기를 바랐는데, 공기를 가득 채워 넣은 풍선처럼 내리 눌러도 끊임없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건강하고 힘찬 소년의 이야기일 거라 짐작했는데, 몸이 아픈 소년의 이야기라니. 그것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중병들도 아닌, 어떤 중한 병들과 겨뤄도 다 물리치고 너끈히 절망1순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불치의 희귀병을 가진 소년이 자신의 두근거리는 인생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라니. 읽기 힘겨운 이야기라면 어쩌나, 괜한 걱정에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어요.

나는 안경 너머, 침침한 눈으로 가슴이 시리도록 젊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곤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우스갯소리를 했다. 칙칙하고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무색하게 어린 부부의 이야기는 경쾌하게 시작됩니다. 아직 자신들의 앞날에 어떤 장면들이 펼쳐져 있는지 알지 못하는 어린 연인들이 ‘사고 친’ 이야기가 말이지요. 졸지에 ‘그걸’ 한 서방이 된, 착한 게 장점이고 지나치게 착한 게 단점인 한대수와 ‘시발공주’ 최미라는 향기로우면서 비릿하고, 탱글탱글하고 위태로워서,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미라야, 나는......”
그러고는 뜬금없이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가에 대해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수야.”
“응?”
“새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새똥으로 위장하는 곤충이 있대.”
“근데?”
“그게 꼭 너 같다.”
‘한’ 서방 한대수와 ‘시발공주’ 최미라는 한아름을 낳고 조금 철이 들기도 합니다.
“엄마들은 원래 못하는 게 없어.”  그 철이라는 게 고작 이 정도이긴 하지만.
“사람 나이가 어떻게 하루, 보름, 한 달 그럴 수 있냐? 계란도 아니고. 하하, 말이 되냐?”

“니들 눈엔 우리가 다 늙은 사람으로 보이지?”
“......”
“우리 눈엔 너희가 다 늙을 사람으로 보인다! 하고.”
“하아, 괜찮다! 진짜 그럴걸!”
처음에는 이런 대화들이 조금 어색했어요. 아름이가 부모님과 나누는 말들, 장씨 할아버지와 나누는 말들이요. 그냥 눈물 쏙 빼는 이야기를 해줄 것이지, 왜 자꾸 어설프게 웃기려고 드는 걸까 하고요. 하지만 이내 알게 됐어요. 이 이야기의 이야기꾼은 아름이니까요. 열일곱 살 한아름의 눈에는 젊다 못해 어린 아빠, 엄마가 다 웃기게 보일 테니까요. 아빠 엄마에게 ‘웃긴 자식’이 되고 싶어 한 아름이가 아니던가요. 그리고 아름이는 웃긴 젊음이 갖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눈물과 절망이 아니라 자신도 웃음과 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요. 아니면 웃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그 절망의 무게가 몹시 무거웠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그러니 이건 아름이의 너스레예요. 지독하게 육체가 아픈 사람만이, ‘누군가의 아픔’이 돼버린 사람만이 자신으로 인해 아파할 상대방의 마음을 미리 예감하여 너스레를 떨 수 있어요.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요, 나는 그럭저럭 괜찮아요,하고 말이죠. 그래서 아름이의 너스레는 더 가슴 깊이 아프게 느껴져요. 자신의 절망보다 자신 때문에 아파하는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김애란 작가는 아름이도 언제나 매시간 괴롭고 슬픈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했는지도 몰라요.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말이죠. 쓰면서 고통스러워서 짐짓 웃고 싶어서 웃기는 장면을 자꾸 보여준 걸 수도 있어요.

아플 때는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철저하게 혼자라는. 고통은 사랑만큼 쉽게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더욱이 그게 육체적 고통이라면 그런 것 같아요. 이야기를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어요. 아름이의 너스레를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이해할 수 있어서요. 중병에 걸려본 사람이라면 알 거예요. 긴 치료기간 동안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겹게 이겨내야 하는 것은 바로 외로움이라는 걸. 길고 괴로운 시간을 견뎌낼 때 끊임없이 절망에 빠뜨리는 건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혼자서 병과 싸워야 한다는 외로움이라는 걸 말이에요. 그래서 작가는 아름이 아버지의 입을 빌어 아름이에게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시나리오 작가의 입을 빌어 아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미안하다고.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네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두근두근 그 여름> 이야기 속의 또 다른 이야기인 <두근두근 그 여름>에서는 한아름이라는 생명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한아름이 들려줍니다. 불완전한 열일곱의 한대수와 최미라가 한아름을 낳고, 조로하는 불완전한 열일곱의 한아름이 다시 한대수와 최미라를 낳은, 그리하여 한쪽 방향으로 직선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 사방으로 영원히 순환하는 동심원으로 이어진 생명의 경이로움이 느껴집니다. 아름이 아버지, 어디서 ‘쿡’ 하고 웃었어요? 나는 여기서 웃었는데.. 가슴이 시리도록 젊은 아버지 한대수에게 나도 묻고 싶어집니다.

행운을 빌어요. 혹시라도 당신에게 이 이야기가 조금 유치하고 어설퍼 보인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당신의 육체는 고난하지 않다고 할 수 있어요,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는 거죠.

김애란 작가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싶어요.  
‘웃긴 자식’ 아름이 이야기 고마워요.
내게 아름이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려줘서 고마워요.
바람이 불어 당신의 마음이 날아 나의 근처까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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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0 16: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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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aire 2011-08-2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 리뷰를 읽어가는데,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와요.
계속 여기서 자판을 누르다가는 울어버릴지도 모르겠어서 짧게 쓰고 나갈래요.
어쨌든 나도 이 책 찜해뒀었어요.
서점에서 첫 페이지 몇 장을 들추는데 쓰인 말들이 너무너무 매력적이었거든요.
하지만 세간의 평이 그저그래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역시, 사야겠어요.

(근데 난 어쩌다 이 글을 이렇게 늦게 읽게 됐을까요 ㅡㅡ:)

2012-07-25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를 생각해
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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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6개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앞으로는 너만 생각해’이다. 그리고 이 책 <나를 생각해>를 읽었다.
기억 속에 삼형제를 나란히 무릎 꿇어 앉히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백하기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화난 엄마가 있다. 까마득히 어린 나는 내가 그랬노라고 허위자백을 했다. 아마도 자백이 불러올 엄마의 관용에 기대를 걸며 셋이서 긴 시간 벌을 받기보다 혼자 벌을 받는 게 낫다는 계산을 했나 보다. 허위자백으로 형제들에게 떨어질 벌이 가벼워졌는지 기억에 없지만 그때의 행동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처음으로 남을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는 자의식 때문 아닐까 싶다.

위장 이혼이 진짜 이혼이 돼버린 배우 엄마와 사는 유안이 있다. 유안의 할머니와 엄마, 언니, 그리고 유안 자신으로 이어지는 모계의 가족은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하며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하는 가족들을 이해하지 못해 상처를 주고 아파한다.  
-우리 집안 내력인가 봐. 진실을 자꾸 숨긴다.
-그 진실이 뜨거우니까 그랬겠지.
  
그들은 깨진 유리처럼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모습 같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을 쫓아가다 보면 여전히 가늘지만 질긴 끈으로 이어져 있다.
극작가이자 홍보담당자인 유안이 있다. 유안은 협찬을 얻기 위해서는 폭탄주를 마시고 막춤을 추면서도 자신이 쓴 희곡에 대해서는 배우와 타협하지 않고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다. 지나가버린 과거에 변명하지 않고 기껍게 자신의 능력을 시험대에 올린다. 5년째 연애 중인 유안이 있다. 일상처럼 돼버린 오랜 연애가 끝난 순간에도 유안은 무연히 주저앉지 않고 자신의 온 감정을 실어 연인을 붙잡으려 한다.
소설은 가족과 일과 사랑이라는 그물 속에서 유안과 유안을 둘러싼 사람들을 촘촘하게 잘 엮어 보여준다. 제각각 다른 형태의 삶을 살며 사랑을 하는 인물들을 통해 서로의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침내 할머니가 남긴 편지들에서, 유안이 블로그에 쓴 아버지 글에서 유안을 통해 작가는 그들을 보듬고 위로한다. 세상을 향한 작가의 포용력 있는 시선이 느껴진다.
아버지, ‘밥’이라고 해봐요. 나는 아버지 옆으로 가 입을 크게 벌리고 말했다. 아버지는 신문을 보던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밥. ‘사과’ 해봐요. 사과. ‘벌레’ 해봐요. 벌레. 내 귀에 희미하게 닿는 아버지 음성. 나는 아버지 목소리를 더 잘 듣고 기억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다시 한 번 말한다. ‘사랑해요’ 해봐요. 녀석. 아버지가 쑥스럽게 웃는다. 사랑해요. 

다 커서 아옹다옹 함께 나이 먹어가는 형제들에게 문득 그때의 일을 물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벌을 준 엄마조차도 그런 일이 있었냐며 반문했다. 내 행동은 누구의 기억 속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 무의미한 행위였는데도 나는 그때의 허위자백을 선행상장처럼, 등짐처럼 지고 나이를 먹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앞가림을 잘하면서 다른 사람까지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앞가림은 제쳐두고 다른 사람을 걱정하거나 훈수를 두는 사람으로 나이를 먹은 건 아닐까. 나의 삶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수고와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공허한 말로 걱정을 하고 훈수를 두며 사소한 우월감과 함께 만족했던 건 아닐까. 이 소설은 나에게 나를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좀 늦긴 했지만 이제는 나를 생각하라고, 지금은 타인의 상처나 힘겨운 감정들에 눈길을 주지 말고, 쓸데없는 허위자백 같은 건 하지 말고 유안처럼 자신의 능력을 의심 없이 믿고 보듬고 챙기라고 말이다.  
 
유안의 모습에서 작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만난 적은 없지만 긴 시간 글을 놓지 않고, 묵묵히 한곳을 보며 꾸준히 걸었을 작가에게 애정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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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8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aire 2011-05-08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에 대한 독자의 뭉근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정갈하고 명석한 글, 반가운데요.
자주자주 들려줘요.

나는 어렸을 때 그런 선행을 해본 적이 없는데도, 마지막에서 두 번째 단락에서는
찌르르 하며 읽었습니다. 나도 그런 것 같아, 그런 점이 있어, 나도... 하면서.
하지만 나를 생각한다, 는 게 실은 더 어려운 일이어서, 더 고난의 길이어서
못한 것 같기도 해요. 역시 용기를 내는 수밖에 없겠죠? 나에 대해서.


superfrog 2011-05-08 12:36   좋아요 0 | URL
항상 카이레님은 길지 않은 댓글로 단박에 말씀해주세요.^^
맞아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게 그거예요. 나를 생각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어서, 고난의 길이어서 대개는 더 쉬운 쪽을 택하게 돼요. 그러고 만족하죠.
힘겹겠지만 이제는 나를 생각해야 할 때가 왔어요. 아.. 힘내야지.

2011-05-09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icare 2011-05-09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삶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수고와 노력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것 아닐까요.
세월에 마모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열매맺을 수 있는 키 포인트.

금붕어님에다가 카이레님...원년의 알라딘 홈커밍데이같아요^^

세월 참 빠르죠? 그때 알라딘 서재 초기만 해도 저는 30대였군요.
모모는 어찌 지내는지.부군도 안녕하신지요.

superfrog 2011-05-10 22:24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봄날 잘 보내고 계신가요?^^
머릿속 생각도 두리뭉실, 글로 꺼내놓아도 선명하지가 않네요.
hanicare님 말씀처럼 세월에 마모되지 않고 싶은데
저는 세월에 크게 한방 맞았습니다.. 이제 좀 추스리려고요.
모모는 여전합니다. 나이가 몇살이든 개는 항상 아이 같아요. 속깊은 아이요.
 
빛나 보이는 것, 그것은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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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새침한 여고생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얼굴을
프로필 사진으로 내건 가와카미 히로미라는 작가를 처음 만난 건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에 덤으로 끼어온 <나카노네 고만물상>에서였다.
접착식으로 사전처럼 장정한 노란색 표지도 맘에 들었지만
아무 기대없이 읽다가 이 작가, 범상치 않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력을 보니 수상 내역도 만만찮은데 한국에서는 그리 '뜨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거나 분위기 좋고 거기에 주인까지 맘에 드는 찻집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로 몇 작품을 더 찾아 읽고 나서 얼마 전 <빛나 보이는 것, 그것은>을 읽게 되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시침을 뚝 따고 있는 모습의 작가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외할머니와, 결혼하지 않은 엄마라는 조금 특이한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가족을 지닌,
이름도 여성스러운 소년 미도리. 아직 오래 살지 않은, 닳지 않은 소년의 이야기는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나 이시다 이라의 <4teen>과는 또 다른 색깔을 지녔다.
개인적으로는 과장되지 않은, 성장소설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료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현실에서 조금 붕 떠 있는 듯한
가와카미 히로미만의 작품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의 날에 아버지 대신 손자의 학교에 갔다가 담임선생의 '배려'로
아버지한테 편지쓰기도 안 하는 재미없는 수업을 했다는 걸 알게 된 할머니의 일갈은
인상적인 부분이다. 

"아버지가 없으면 어떻고, 어머니만 서른 명이면 어떻고, 쥐가 키우면 또 어때서? 그렇다고 꼭 불행해지라는 법이 있나?" 할머니가 계속 말했다. 쥐 슬하에서 크기는 싫은데,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애초에 남들과 똑같지 않으면 불행할 거라는 사고방식이 이런 우습지도 않은 교육적 배려를 낳은 거예요."  

이런 말씀을 해 주는 할머니라면 날마다 마주앉아 수다를 떨고 싶다. 할머니는 또 이런 말씀도 한다.  

"주변머리가 뭐야?" 어린 내가 물으면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속물근성을 동반한 정신적인 힘."이라고 대답했다.
"그 속물근성이란 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어떤 일이든 그렇게 쉽게 좋고 나쁘고를 가를 수 있는 게 아냐, 미도리." 

요즘처럼 하수상한 시절에 세상의, 인생의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는 '어르신'이 많았으면 싶다.
'애초에 남들과 똑같지 않으면 불행할 거라는' 조바심과 두려움을 안고 산 지 삼십 몇 년, 여전히 한참 더 살아야 미도리 할머니 같은 내공을 기를 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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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8-17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쪽에는 오랜만에 나오셨네요. :)
추천!

superfrog 2009-08-17 22:25   좋아요 0 | URL
치니님, 가와카미 히로미 작가 매력적이에요.^^
한번 치니님과 맞나 읽어보세요. 저한테는 무척 맘에 드는 작가.ㅎ

치니 2009-08-18 10:16   좋아요 0 | URL
저런 할머니가 되고 싶은데, 아마 안되겠죠? 흑. ㅋ
안그래도 담아두었어요, 곧 읽어보겠심다 ~

2009-08-24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25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우 이야기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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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판사가 어떤 책을 낼 때는 그 책과 저자와 독자 모두에게 한 가지 책임이 있다. 
제대로 된 책을 만들어내는 것.  

물론 책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긴 과정에서는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항상 일어난다. 출판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이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럼에도 문제는 항상 일어난다. 그럴 때 가장 속이 상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다. 출판과 관련된 일을 십수 년째 해 온 바, 인쇄되어 나온 책의 어느 한 구석에서 오자라도 하나 발견하면 순간 땀이 삐직,하고 난다. 왜 이걸 못 봤을까, 못내 속이 상한다. 하지만 따끈따끈하게-실제로 갓 나온 책은 따끈따끈하다-쌓여 있는 책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했을 때는 땀 차원이 아니라 바로 시간과 절차와 돈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다시 찍느냐 마느냐.

예전에 학원교재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진행과 교정을 맡았다. 책이 기일에 맞게 인쇄되어 나왔고 납품을 하기 위해 학원에 싣고 갔다. 표지에서 문제가 발견되었다. 제목에 알파벳 e가 하나 빠져 있었다. 학원담당자는 난감해 했고 그나마 하루 정도 시간 여유가 있어 인쇄를 다시 걸었다. 많다면 많을 수도 있는 제작비를 고스란히 부담했다.

문학수첩에서 나온 <여우이야기>를 구입했다. 주문하고 얼마 안 있어 그 한 권만 배송시기가 늦춰졌다. 일시품절이라는 거다. (아마도 이때 문제가 발견된 모양이다.) 며칠 만에 책을 받았다. 책 중간에 낱장 하나가 1밀리 정도 삐죽 나와 있었다. 파본이라 생각하고 교환 신청을 했다. 교환한 책을 이틀 만에 다시 받았다. 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같은 부분에 문제가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책을 펼쳐 자세히 봤다. 두 장이 잘려나간 흔적이 보이고 그 뒤쪽 몇 장의 제본이 엉성하다. 이때쯤 짐작이 갔다. 초판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던 거다. 그리고 출판사는 시간과 절차와 돈의 문제를 결정했을 테다. 다시 찍지 않기로. 부분 제본 수정을 하기로.

출판사에 문의 메일을 보내고 알라딘에 문의한 결과 알라딘 쪽에서 답변이 왔다. 지금 현재 있는 그 책은 다 그 모양이니 반품을 원하시면 반품할 수 있다고. 출판사에서는 그 책을 다시 새로 찍을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출판사 측에서는 메일을 확인은 했으나 아직 답변이 없다.

이제 나는 결정을 해야 한다. 애초부터 언제 낱장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제본상의 문제를 가진 이 책을 소장하느냐, 읽고 싶은 마음을 잠시 포기하고 언제 소진될지 모르는 초판본이 다 팔릴 때까지 기다렸다 제본의 문제가 없는 책을 구입하느냐.

하지만 뭔가 껄끄럽다. 뭔가 불합리하다. 아직 새로 찍을 계획은 없으니 맘에 들지 않는다면 반품하라니, 너무 무책임한 태도 아닌가. 문학계간지에, 돈 되는 유아물에, 결정적으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낸 출판사에서 고작 초판 (아마도) 몇 천 부 찍은 이 책의 제작비를 포기하지 못 해 얼기설기 수정해서 다시 팔기로 결정하다니, 제대로 된 책을 만들어야 하는 출판사의 너무도 당연한 책임의 방기를 모두 독자에게 떠맡기는 꼴이다.

세상에 돌아다닐 모리미 도미히코의 <여우이야기>가 대부분 114쪽과 115쪽이 벌어지는 불량 책일 거라는 생각에, 좋아하는 작가라 더 속이 상하는 독자의 마음을 출판사쪽에서 만분의 일이라도 이해했다면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 27일에 담당편집자님의 회신을 받았습니다.  
 
촉박하게 수정을 하게 된 연유와 함께 진심이 담긴 사과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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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무나무! 그야말로 일기일회의 만남,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사랑스러운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교토의 길모퉁이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향해 허구한 날 바깥해자만 단단히 다지고 있는 망상폭주 순정파 선배, 아가씨에게 가짜 전기부랑과 인생론을 알려준 도도씨, 내공 높은 할배 같기도 하고 무적의 악당 같기도 한 이백씨, 빤스총반장, 코끼리엉덩이 노리코씨, 규방조사단 청년부와 사무국장, 헌책방제자 소년, 축지법고타츠 텐구 히구치씨-고래술 하누키씨, 그리고 가공할 무기 친구펀치를 깜찍하게 숨기고 다니는 윤기 나는 검은머리의 아.가.씨. 그들이 밤거리로, 헌책방거리로, 축제를 맞은 학교 구석구석으로, 때로는 회오리바람에 공중부양까지, 난리법석으로 왔다갔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한바탕 별세계를 만들어낸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의미심장하고 리드미컬한 제목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다보면 코끝은 살짝 들어 올리고 잉어인형을 팔락거리며 걷고 있는 아가씨의 두 발 보행 로봇의 스텝처럼 지면과 발 사이에 얇은 공기층이 생겨 덩달아 사뿐히 그 위를 밟으며 밤길을 걷는 느낌이 든다. 물론 우리 아가씨의 뒤태에 비하자면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겠지만 말이다.

아침나절 목에 까슬까슬한 실 하나가 걸린 듯 자꾸 헛기침이 나, 설마 이백 할아버지가 다다스 숲에서부터 퍼뜨려 교토를 초토화시킨 바로 그 이백 감기가 책으로부터 옮은 것인가!라고 너스레를 떨어도 보지만 엊저녁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유행하는 목감기에 걸린 것일 뿐, 도도씨의 비단잉어센터도 없고 헌책시장도 열리지 않는 거친 아파트 숲에서 사과비가 내리고 비단잉어 회오리바람이 부는 판타지가 언감생심 펼쳐질 턱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잠시잠깐 유자비라도 어떻게 좀 안 될까요, 하고 이백 할아버지에게 부탁해보고 싶다.

헌책시장의 신 가라사대 책들은 가능한 한 세상에 풀어놓아 다음 사람의 손길이 닿을 수 있도록 하라 하셨다지만 이 책은 책상에 고이 모셔두고 여러 번 귀퉁이가 닳도록 읽고 싶다. 한 번은 ‘형님, 좋은 게 다 모였어요. 흥분은 필연지사.“라고 느물느물한 영감처럼 독자를 끌어당기는 작가의 세계로, 두 번째는 3층 전차가 다니는 봄날 밤의 환상 속으로, 세 번째는 한여름 헌책시장의 미로 판타지로, 네 번째는 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며 대학축제 시절로, 마지막으로 아가씨와 선배가 부끄러운 빗금을 볼에 그린 채 다소곳하게 마주 앉은 진진당으로 그렇게 봄여름가을겨울 시시때때로 즐겁게 빨려 들어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라는 뻔한 소리를 해대며 새초롬하고 천진하게 둔감한 아가씨와의 '우연한' 만남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선배의 망상폭주 장면을 인용하자면,

“그녀가 어린 시절 아직 어리고 귀여운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이름을 써넣은 그림책이 내 눈앞에 있었다. 만일 그녀가 이 책을 본다면 그리움이 치솟아 기절하고 말 것이다. 이 책이야말로 천하유일의 보배이며 또한 나의 미래를 열어줄 하늘이 내린 한 권의 책이리라. 이것을 입수한다는 건 그녀의 처녀마음을 내 손에 쥐는 것과 같고,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보장받는 것과 같으며, 나아가 그건 만인이 부러워할 영광의 미래를 약속받는 것과 같다.
제군. 이론이 있는가. 있다면 몽땅 다 각하다.
나는 승리를 향하여 포효했다.“


하하, 선배, '편리주의도 적당히 할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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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3 0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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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5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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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4 2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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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5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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