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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야 하는 딸들 - 단편
요시나가 후미 지음 / 시공사(만화)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요시나가 후미는 소위 야오이라 불리는 보이스 러브 계열 만화작가 가운데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이다. '서양골동양과자점'이라는 불후의 명작(?)으로 몇 년 전에는 국내 만화 판매순위 1위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었다. 간간히 '아이의 체온'과 같은 따뜻한 가족물을 발표하기도 했었지만, 슬램덩크 패러디를 통한 동인 활동을 시작으로 십여년간 계속 보이스 러브 쪽에서만 활동해왔기에, 이렇게 본격적으로 '여자'를 제목에 그리고 내용에 끌어들인 책은 처음인 것이다.
늘 남자들을 주체로 그들만의 세계를 다뤄온 작가가 왜, 무슨 마음으로 여자를 직접 다루고자 했을까? 무슨 얘기가 하고 싶었길래? 요시나가 후미와 매치되지 않는 이 제목이 너무 낯설어, 사놓고 몇 달 동안 포장도 뜯지 못했다. 사실 난 여자가 많이 아프다. 그리고 무섭다. 내가 본 너무 많은 소설과 만화, 드라마 속에서 여자는 주체이기보다 객체였고, 승자 아닌 패자였으며, 가해자보다는 피해자 쪽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모습은 실제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내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 마당에 늘 남자 얘기만 하던 작가가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진지하게 여자에 대한 얘기를 풀어나간다니 겁이 난다. 이 좋아하던 작가한테 실망할게 될까봐? 아니, 그런 것보다 좋아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영향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내가, 그녀의 독설에 또 상처받을까봐 겁났다. 그래서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이제서야 조심스레 비닐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결론은?
역시 내가 사랑하는 요시나가 후미. 가능만 하다면 별점의 별을 열 개라도 주고 싶다.
물론 예상했던 대로 심하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심지어 자기에게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결핍된 인간들, 여자들이 잔뜩 나오지만 문제는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어떤 손길로 어루만져주는가였다. 모두가 누군가의 딸인 우리, 그런 딸들끼리의 어울림과 사귐, 할머니-어머니-딸-손녀로 이어지는 혈연과 여성성,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닮아가는 사람들, 그러면서 또 달라지는 사람들.
딸보다 나이 어린 남자와 결혼하는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소재도 동원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주변에서 밤낮으로 보는 바로 우리와 우리 친구들이었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던 소녀 시절의 당당한 포부를 잊은 채 세상사에 치이다 그저 누군가의 아내 자리에 만족하는 나, 맞벌이인데 왜 늘 여자가 더 많은 집안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나,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노라 말하면서도 그런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기 힘든 나, 내가 포기했던 꿈을 끝까지 간직하며 살아가는 친구의 모습에 작게 위로받는 나.. 너무 내 얘기고 네 얘기여서 읽고 난 후에도 이 책에 달라붙은 감정을 떼내기가 힘들었다.
요시나가 후미의 그림체는 가늘고 차가운 편이다. 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는 짓이 우스꽝스러워 보여도 알고 보면 상처와 그늘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충 봐서는 굉장히 메마르고 버석버석한 얘기를 하는 작가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는 선과 대사를 놓치지 않고 쭉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서 상상치도 못했던 샘물을 찾을 수 있다. 눈물의 샘, 또 더 크게는 인간애의 샘을.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성공한 사람이든 인생의 낙오자든, 그의 만화 안에서는 모두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어떻게든 상처를 다독거려 주려 애쓴다. 그래서 그의 주인공들은 실컷 울고 난 다음날 아침 다시 기지개를 켜면서 케이크를 팔러 갈 수 있고, 서로 실컷 상처만 주던 엄마와 딸이 말없이 따뜻하게 포옹할 수도 있다.
또 하나 요시나가 후미의 가장 큰 매력 가운데 하나는 대사 없이 그림으로만 전달되는 내용들이다. 그녀의 책에는 거의 공통적으로, 몇 컷 혹은 몇 페이지에 걸쳐 주인공들이 아주 미묘하게 변하는 표정으로만 말하는 대목이 있다. 대사가 없으니 그냥 휘리릭 책장을 넘겨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입가에 어린 작은 미소나 살짝 올라간 눈꼬리, 얼굴 위로 지나가는 그림자, 작게 뻗친 머리카락 하나가 때로는 어떤 비명이나 신음성, 의성어, 의태어보다 더 강한 의미를 큰 소리로 전달해준다. 이런 게 진짜 만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