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소설
비굴
구룡포 시장 안으로 먼지 뒤집어쓴 승합차가 미끄러지듯 들어간다. 방금 찬물로 아침세수를 한 개량시장에는 어제의 난장(亂場)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마른 몸에 두툼한 점퍼를 걸친 남자가 차에서 내린다. 질퍽거리는 고인 물을 피해 드문드문 문이 열린 식당을 기웃거리더니 한 곳에서 일행에게 손짓한다.
손바닥만 한 식당에 아주머니 혼자 냉큼 난로를 켜고 보일러를 올리고 분주하다 “금방 따뜻해질 겁니더.”
방석 위로 냉기가 엉덩이에 착 올라붙는다.
기호도 취향도 모르는 사람들과 생글거리며 다니는 건 생각보다 고역이라는 걸 순영은 알고 있다. ‘그래도 그렇지. 허난설헌을 모르다니... 역사가라도 되는 줄 안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순영은 어제 강릉에서의 일이 생각나 또 속으로 날이 선다.
“땡초 좀 많이 넣을까예?”
전라도 같기도 경상도 같기도 한 억양인데 둘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다.
“매운탕은 조금 맵싹해야지예.”
우럭매운탕이 끓는 동안 아주머니가 밑반찬과 밥을 내온다. 온장고에서 꺼내준 누런 밥은 사흘은 돼 보이고 그마저도 돌덩이다. 순영은 온도가 어정쩡한 국물로 까끌한 목구멍을 적신다. 점퍼를 벗은 종수는 어젯밤 일은 전혀 기억도 안 나는지 매운탕 한 그릇에 밥을 말아 잘도 넘긴다. 예민한 사람인데 아닌 척하는 건 둘이 똑같다. 숟가락을 그만 놓은 순영은 지난밤 일이 꿈만 같아 어깨를 웅크린다. 숨통이라도 틔우자는 생각에 종수도 순영도 무작정 사람들에 섞인 게 사흘째다.
아침은 늘 신기하기도 무섭기도 하다. 딜리트키를 눌러 어제 일은 싹 지우고 새로 시작하라고 세상을 눈앞에 떠다미는데, 그게 감사한 일이기도 하지만 때론 간이 안 맞는 국물 같이 역겹다. 사는 일이 원래 간이 잘 안 맞는 음식 같지 뭔가. 맛나게 만들려고 하면 간이 더 안 맞기 일쑤다. 순영은 이런 생각이 들자 오스스 어깨를 떨며 종수 손에 떠밀린 쇄골 부위를 손으로 문질러 본다.
갑자기 웬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시장 안을 찢는다.
“아침부터 누가 저렇게 싸워요?”
종수는 식당 아주머니에게 말 걸기를 좋아한다. 어떨 땐 무심한데 어떨 땐 사정없이 정답다. 종잡을 수 없는 인간, 곧이곧대로 얼굴에 다 드러나는 순영에게는 그게 매력으로 다가왔던 때가 있었다.
“오죽하면 저라겠나? 남자가 깨끗하이 해 주고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든가 말든가. 이혼도 안 해주고 다른 여자캉 살고 생활비도 안 주고... 저랄 만도 하재. 쯧쯧.”
순영은 아주머니 말을 뜨거운 숭늉 한 모금으로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제야 바닥이 따뜻해져 온다.
“일본가옥거리에 일본 사람들은 없던데요. 아베 한번 만날까 했더니 아베도 없고.”
“그 사람들은 다 죽고 없지예. 집만 쪼매 남아 있지예.”
순영은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어젯밤 일만 해도 일면식 없는 타인에게 마스크도 하지 않고 자꾸 말 거느라 벌어진 일이잖은가. 순영은 시장판에서 악다구니하던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 밖으로 나간다.
여자는 그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제 낮에 걸려 있던 세로로 반쪽 난 소머리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빈 머릿속을 시장판에 내어 걸고 역시 텅 빈 회색 눈동자만 뜨고 있던 출구가 막힌 미로. 속을 보인다는 것도 속을 훤히 본다는 것도 고통 속을 통과하는 일이란 걸 순영은 안다. 늙은 엄마가 생에 마지막으로 위대장 내시경 시술을 받는 동안 모니터로 지켜본 속을 떠올린다. 수면 중인 엄마의 신음이 늘어진 괄약근에서처럼 무방비로 새어 나왔고 노쇠한 그 짐승 소리는 시퍼런 배설물이 고인 구불구불한 속과 함께 순영의 창자를 몹시도 흔들어댔다.
종수도 식당을 나와 담배 한 대를 물고 세상을 악다구니로 살던 때를 떠올린다. 비전이 보이지 않던 회사를 탈출해 바다를 찾아다니던 때 아내와 소원해지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이기적인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긴 쉽지 않고, 거리가 생기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내는 졸혼 비슷한 걸 선포했다. 종수는 억울했다. 세 아이들에겐 친구 같은 아빠로 아내에겐 마당쇠 같은 남편으로 산 게 얼만데... 이쯤에서 더 비굴해지고 싶진 않았다.
역마살이 맞춤이던 그해 봄, 놀이 멋진 서쪽 포구마을에서 동화책 삽화를 그리며 혼자 사는 여자를 알게 되었다. 과거를 입에 올리지 않는 순영은 당차지만 여리고 물러설 줄 아는 구석도 있었다. 바람 따라 사는 종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이쁜 글씨로 편지를 자주 썼다. 여자가 좋아하는 걸 정확히 아는 남자다. 때때로 모르는 척할 뿐. 종수는 순영이 본 세상에서 두 번째로 복잡한 남자였고 순영은 종수가 본 세상에서 두 번째로 까칠한 여자였다. 서로 결핍이 무언지 잘 알았다. 순영은 가시를 능숙하게 숨기는 대범한 여자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았고,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어젯밤엔 그게 잘 안 되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불평 한마디했기로 막무가내 튀어나온 말도 안 되는 질타 앞에서 순영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자존심도 감추고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절벽 앞에 선 것 같았다.
“왜 울어? 지금 우는 거 비굴한 거야. 너 그렇게 비굴한 여자였어?”
굴비도 아니고 비굴인데 순영은 그깟 단어가 뿜는 비린내에 구토가 나왔다.
집에 돌아온 순영은 서랍을 정리하다 잊고 있던 걸 발견했다. 쓰지 않은 장이 많이 남은 줄지 스프링 노트에 이십 대의 고민이 휘갈겨져 있다. ‘하나도 안 변했어.’ 제대로 한번 펀치도 날려보지 않고 무릎 꿇는 자신이 바이러스보다 암세포보다 마흔다섯 순영은 무서워졌다. 속이 또 울렁거렸다.
촌평 _
손바닥소설은 통상 엽편소설, 콩트라 지칭하지만 콩트는 프랑스어의 단편소설에 해당된다. 그래서 20매 안팎의 소설을 우리는 '손바닥소설'이라 편의상 지칭하고 작고 좋은 소설을 골라 게재하려 한다. 또한 크로스오버 시대에 대응하는 장르해체와 융합에 대한 실험과 새 지평을 열기 위한 코너임도 밝힌다.
짧은 스토리로 원형적인 삶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날카롭게 인간과 삶, 그리고 세상을 비판하는 소설, 소설 같은 소설을 계속 찾으려한다. 배혜경의 <비굴>은 이 맥락 상에 놓인 짧은 소설로, 결말 부분의 반전을 언어 트릭으로 시도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었다. '굴비'와 '비굴'의 음운도치로 콩트적 기법을 살리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개성적인 소설문체이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명증한 관계양식을 보여주기 위한 소설문장에 대한 관심이 더했으면 한다.
(손바닥소설 심사위원회)
- 계간 <인간과문학> 2021겨울호(제36호), 손바닥소설.
책에는 싣지 않은 창작노트 _
그해 겨울 한 해가 가기 열흘 전이었나. 구룡포 시장 바닥에서 두개골을 훤히 열고 가게 앞에 걸려 있는 소의 머리를 보았다. 14매, 손바닥소설은 거기서 출발했다. 시장 한복판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시장에 가면 양가감정이 이는 어떤 원형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 곳에 마치 굴비가 걸리듯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세로로 쩍 갈라놓은 두개골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훤히 열리는 듯 바람이 슝하고 불었다. 토악질이 나려했지만 한편 시원했다. 비굴하게 살지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순응과 현실타협은 한끗 차이다. 순응과 타협의 속내가 다르다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
한 때는 용왕을 꿈꾸고/ 삼천정병을 이끌고 토끼를 잡으러 가고 싶었을 게다/ 속살까지 퍼렇게 물든 바다에서 혁명을 꿈꾸다/ 태어나 처음 공기를 맛보고/ 은빛 비늘이 벗겨지고/ 아가미에 소금이 뿌려진 채로/ 제 태어난 바다를 동공에 담고/ 나일론 끈에 효수당한 채로/ 석 달 열흘을 매달려 있다가/ 지폐 몇 장에 팔려/ 불빛 가난한 이의 밥상에 누웠다// 우르르 달려든 쇠꼬챙이에/ 몸뚱이는 산산이 부스러지고/ 앙상한 뼈와 헤진 내장을 드러낸 채 / 누웠다/ 두 눈 부릅뜨고 / 누웠다// 아버지가/ 누웠다. ― 박현 시 <굴비> 전문
_비굴의 시대
_비굴이 아니라 굴비옵니다
_굴비낚시
구룡포 적산가옥 카페, 가지야 & 까멜리아(배혜경 아이폰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