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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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어디 그럼 나도 소설 따위나 써 볼까’, 하고 마음 편히 생각했다. 하루키에 따르면, 누구나 소설 따위는 쓸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한다, 이건 나잖아.’ 나 역시 머리가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과연 하루키처럼 35년 간 소설을 써 낼 수 있을까.

 

19784월 진구 구장, 야구트르 스왈로스와 히로시마 카프의 센트럴리그 개막전, 1회말 히로시마의 선발투수 다카하시가 제 1구를 던지자, 힐턴은 좌중간 2루타를 쳐냈다. 이때 하루키는 생각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에피퍼니의 순간. ‘본질의 돌연한 현현’.

 

하루키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해 소설을 쓸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에 반해, 나에겐 에피퍼니의 순간 따위 없었다.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하루키는 무언가를 쓰는 게 고통이었던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서 커피를 데워 큼직한 머그잔에 따르고 그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켭니다.....그리고 , 이제부터 뭘 써볼까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소설이 안 써져서 고생했다는 경험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내 생각에는,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고역으로서 소설을 쓴다는 사고방식에 나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허걱, 무언가를 쓰는 게 고통이었던 적이 없었다니! 소설의 형식은 아니지만 사실 나 역시도 무언가를 계속 써왔다. 지금이야 훈련이 되어서인지 글을 쓴다고 해서 체력이 고갈되지는 않지만, , 삼십대 시절엔 하루 종일 글만 쓰다보면 다음날은 거의 기진맥진으로 뻗어버렸다. 그럼에도 일인지라 계속 써야할 수밖에 없었다. 고역이었다. 어떤 작품에 대해 그것도 소설이냐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써내는 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분명 고된 일이다. 하루키는 수영이나 달리기를 한다. 숱한 작가들이 산책이나 운동에 시간을 들이며 건강을 챙기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보니, 불현 듯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로서의 각오>가 떠오른다. 두 사람은 차이점만큼이나 공통점이 많다. 하루키나 겐지나 습작시절이 없었다. 하루키가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군조 신인상으로 등단했다면 겐지는 22살 때, 첫 소설 <여름의 흐름>으로 아쿠타와 상을 수상했다. 이후 문단과의 거리를 두는 점도 비슷하다. (마루야마 겐지는 이후로 문학상을 거부했다.) 또한, 두 소설가는 삼십년이 넘도록 전업 작가로 소설을 써내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하루키가 다자이 오사무 과라고 한다면 마루야마 겐지는 단연 미시마 유키오 과. 겐지는 게이나 여자에게 인기가 있으면 끝장이다라는 성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당연히 마루야마 겐지보다는 하루키가 더 잘 팔린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어디 그럼 나도 소설 따위나 써 볼까싶다가도 <소설가의 각오>를 떠올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마루야마 겐지도 사소설 같은 건 누구라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겐지에 따르면, 그래봤자 미국의 웨하스보다 가벼운 일인칭 소설의 뒤를 쫓아가는 피에로로 전락할 뿐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가볍다면 겐지의 소설은 묵직하다. 그럼에도 두 작가의 조언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작가의 조언을 종합하자면 소설가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능력은 얼마만큼 고독을 견뎌낼 수 있느냐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의 자세라고 말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일이고 정신의 깊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는 행위다.

 

소설가는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심연 속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려내야만 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텅빈 백지 앞에서 하루키처럼 마냥 즐거움을 느끼며 글을 쓸 수 있을까. 혹은 겐지처럼 몸 전체를 예민한 레이더로 만들어 촉각을 곤두세울 수 있을까.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면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평생토록 고독을 견뎌낼 수 있는가?’

 

Yes라면 쓰시라.

 

나는 소설 따위쓰고 싶지 않다. 그저 읽고 싶다. (읽는 것만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는 게 문제다.)

 

소설가는 바닥까지 내려가서 쓰시라.

독자인 나 역시 바닥으로 내려가 읽겠다.

 

우물에서 만나자.   


밑줄 친 글 


p110.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p150.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 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된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책상을 마주합니다. 하루에 20매의 원고를 쓰면 한 달에 600매를 쓸 수 있습니다. 단순 계산하면 반년에 3,600매를 쓰게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의 초고가 3,600매였습니다.

 

내가 경애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도 그런 망치질을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내고 그것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쉼표 몇 개를 삭제하고,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똑같은 자리에 다시 쉼표를 찍어 넣을 때, 나는 그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라고. 그 기분, 나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 정도가 한계다. 이 이상 더 고치면 도리어 맛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라는 미묘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P245. 그처럼 나는 새로운 소설을 쓸 때마다 좋아, 이번에는 이런 것에 도전해보자라는 구체적인 목표 대부분은 기술적인, 눈에 보이는 목표-를 한두 가지씩 설정했습니다. 나는 그런 식의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새로운 과제를 달성하고 지금까지 못 해본 것을 해내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작가로서 성장한다는 구체적인 실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단 한 단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는 것처럼. 소설가의 좋은 점은 설령 쉰 살이 되더라도, 예순 살이 되더라도, 그런 발전과 혁신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P251. 그는 뭔가 얘기 끝에 고교 시절의 친한 친구 네 명에게서 거부당했던 체험을 사라에게 말합니다. 사라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즉시 나고야로 돌아가 십팔 년 전에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 한다고 쓰쿠루에게 말합니다.“ (너는)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볼 게 아니라 꼭 봐야 할 것을 봐야 해.”라고.


사실 나는 사라가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지 다자키 쓰쿠루가 그 네 명의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건 생각도 못했습니다. ....즉 사라의 말 한 마디가 거의 한 순간에 이 소설의 방향과 성격과 규모와 구조를 바꿔버린 것입니다.

 

P270. 리키 넬슨이 만년에 발표한 노래 <가든파티>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이런 기분, 나도 잘 압니다.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봐도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소모될 뿐입니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만일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책이 별로 팔리지 않더라고, ‘, 어때,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즐거웠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즈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멍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 된다는 거야.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건 생각할 것 없어.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서 너를 세상에 이해시키면 돼. 설령 십오 년,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야.”

 

P283. 예전에 개인적으로 존 어빙을 만나 대화했을 때, 그는 독자와의 관계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봐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독자에게 메인라인을 히트hit하는 거예요. 말이 좀 험하기는 하지만.” 미국 속어로 메인라인을 히트한다는 것은 정맥주사를 맞는다, 즉 상대를 애틱트(마약중독자)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커넥션을 만든다......이건 알아듣기 쉬운 비유이기는 한데 이미지가 좀 반사회적이라서 나는 직통 파이프라는 온건한 표현을 썼지만 뭐,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략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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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ika 2016-05-28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얼마전에 미루야마 겐지 소개 받았는데 읽어봐야겠군요. 다자이 오사무과와 미시마 유키오과의 비교가 재밌네요 ㅎㅎ

시이소오 2016-05-28 08:02   좋아요 0 | URL
저도 마루야마 겐지 작품을 더 읽어봐야 겠어요.
`국가`는 진도가 잘 나가시는지요? ㅎㅎ

ethika 2016-05-28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부터 시작했는데 1권 다 읽으면 말씀드릴게요 ㅎㅎ아직까지는! 재밌네요 ㅎㅎ

시이소오 2016-05-28 08:05   좋아요 0 | URL
재밌다니 다행이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물에서 만나자.... 줗군요.. 아. 갑자기 그 시가 생각나네요. 벼랑에서 만나자..

시이소오 2016-05-28 11:40   좋아요 0 | URL
기억이 날듯 날듯한데 모르겠ㅇㅓ서 검색했어요
조은 시인 시죠 ㅋ
조아요^^

cyrus 2016-05-28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가 혼자 글 쓰는 작가를 음울하다고 표현해놓고선 자신은 글 쓰는 일이 즐겁다고 말하니까 하루키는 작가 세계의 ‘먼치킨’(센 캐릭터)입니다. ^^

시이소오 2016-05-28 12:03   좋아요 0 | URL
쎄죠ㆍ단 한번도 라이터스 블럭을 경험한 적이 없다니
천부적인 소설가죠^^

깊이에의강요 2016-05-2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매일 20매정도의 원고를 쓴다는 성실성이 뭔가 너무 직장인스러운...^^;

시이소오 2016-05-28 22:35   좋아요 0 | URL
ㅋ ㅋ ㅋ 대가들은 다들 직장인ㅊㅓ럼 썼어요 ^^

깊이에의강요 2016-05-2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력없어요ㅋㅋ
영감을 받아 번개처럼 며칠밤을 새우며 썼을거라는 환상은 ...
말그대로 환상^^

시이소오 2016-05-28 22:44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도 앤소니 트롤롭 ㅇㅖ를들죠
직장인처럼 썼다는게 알ㄹㅕ지자 인기 확 떨어졌대요.
영감으로 쓰는건 릴케나 ㅋ

2016-05-29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9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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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사랑은 재 발명되어야 하는데.....

안락한 자리만을 바라지.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마음은,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지.“

 

-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철>

 

강신주, 이상용의 <삼십금 쌍담의 인트로>는 랭보의 시로부터 시작한다. 이 책 <에로스의 종말>의 서문은 알랭 바디우가 썼다. 서문의 제목은 <사랑의 재 발명>이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사랑을 재 발명하기 위한 투쟁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 <투명사회>, <심리정치>에 이어 <에로스의 종말>에서도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인간의 사물화 경향을 고발한다. 무엇이 에로틱한가? 감추어진 것, 베일에 싸인 것, 무언가 미지의 것,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비밀스러운 것, 금기를 위반하는 것, 위험을 동반하는 것, 등이 아닐까.

 

보통의 포르노그래피는 질투를 미화해. 괴로움을 제거해버리지. 뭐가 미화할까 aestheticizing? 왜 마취하지 anesthetizing않을까?” 글쎄, 어쩌면 둘 다겠지. 그건 대신하는 거야. 보통의 포르노그래피는 타락한 예술 형식이야. 그것은 진짜인 체할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진실을 버려. 포르노 영화에 나오는 여자를 원하지만 누가 그 여자와 씹을 하든 그 사람이 자신의 대리가 되기 때문에 질투는 일어나지 않아. 아주 놀랍지만 그게 심지어 타락한 예술의 힘이야.

 

그 사람은 대역이 되어, 그렇게 보는 사람에게 봉사를 하는 거야. 그것이 가시를 제거해서 영화를 즐길 만한 것으로 바꾸는 거야. 보는 사람이 그 행위의 보이지 않는 공모자이기 때문에 보통의 포르노그래피에서는 괴로움이 제거되는 반면 내 포르노그래피에서는 괴로움이 그대로 유지돼. 나의 포르노그래피에서는 신물날 정도로 자신을 잔뜩 채운 사람이나 얻는 사람이 아니라, 얻지 못하는 사람, 잃는 사람, 잃어버린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니까.

 

- 필립 로스, <죽어가는 짐승>

 

반면 포르노에선 모든 것이 낱낱이 적나라하게 전시된다. 포르노에서 타자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구경거리를 단지 소비할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인간을 포르노 화시킨다. 점점 더 나르시시트가 되어가는 성과주체는 사랑 (에로스)을 두려워한다.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아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부정성이다. 내가 사랑하는 타인은 동일자의 지옥에 끌려오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정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한병철이 사랑을 에로스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충동이자 용기이며 이성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타자는 소비되지 않는다.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 자아가 깨지고 무너지고 파편화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또한 에로스는 사유를 촉발한다. 에로스 없는 로고스는 공허할 뿐이다.

 

하이데거가 아내에게 보낸 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타자, 즉 당신에 대한 사랑과도, 그리고 다른 면에서 나의 사유와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것이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렵소. 나는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르는데,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신인 에로스의 날개짓은 내가 사유에서 중대한 일보를 내디디며 전인미답의 지대로의 모험을 감행할 때마다 나를 건드린다오.

 

에로스는 우리로 하여금 전인미답의 지대로의 모험을 감행케하는 것이다. <옆집의 나르시시스트>에 의하면, 오늘날 나르시시트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 한병철에 따르면 그게 포르노다. 나르시시스트에게 타인은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거울속의 자신의 얼굴(face)가 아니라 타인의 얼굴(visage)을 바라봐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같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신자유주의는 사랑을 포르노로 속화시킨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개인은 사랑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을 소진시키고 소비하고, 포르노 화 할뿐이다. 에로스를 회복할 때에야 우리는 타인과 신비로운 공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타인과 연대를 통해 시스템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고, 신자유주의의 동일자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상처받기 싫어 사랑하지 않겠다? 자신을 포르노 화시키는 짓이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에로티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죽어도 좋아야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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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당살롱 2016-05-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읽었어요.
늘 그랬지만
감탄과 희열을 느낍니다.
질투날 정도로 이해가고 설득됩니다.
와....

시이소오 2016-05-27 15:16   좋아요 0 | URL
한병철 교수 책을 읽다보면
저 역시 희열을 느껴요^^

우민(愚民)ngs01 2016-05-2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라는 말도 생각나네요

시이소오 2016-05-28 08:03   좋아요 0 | URL
아, 사랑은 머리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이죠. ^^

Classicolor 2016-06-0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정말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시이소오 2016-06-08 17:31   좋아요 0 | URL
오,리뷰쓴 보람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

초란공 2016-09-19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가만히 읽고 보니 카치아피카스가 <한국의 민중봉기>에서 20세기 파리코뮌이라고 평가한 광주민주항쟁에서 보인 사람들의 행동을 `에로스 효과`라고 명명한 것이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 아니구나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시이소오 2016-09-19 12:39   좋아요 0 | URL
카치아피카스의책을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에로스 효과란 명명은 충분히 적절하다고 보여지네요 ^^

아라치 2022-05-2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어려운 책이 정리가 되네요. 읽었는데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책이었는데^^
 

 

따라서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인 동시에, 전적으로 안락함과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싹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함정과 위협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

 

사랑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타자의 공급이 넘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타자의 침식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와 아울러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atopos(장소가 없는)로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차이는 타자성과 반대로 일종의 긍정성이다. 오늘날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다듬어지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점점 강화되어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리비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주체성에 투입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추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 속을 철벅거리며 나아가다가, 결국 그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이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꺾여버린 상태이다. 그는 세계를 상실하고 타자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 반면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사랑의 주체는 특별한 약화의 과정 속에 붙들리지만, 이러한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물론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

 

동일자의 지옥에서 아토포스적 타자는 묵시록적인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에는 묵시록만이 우리를 동일자의 지옥에서 건져내어 타자를 향해 해방시키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멜랑콜리아는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흉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치유와 각성의 효과를 낳는 부정성이기도 하다. 멜랑콜리아는 그것이 멜랑콜리의 특수한 형태인 우울증을 치유하는 행성이라는 점에서 역설적 이름이다. 그것은 저스틴을 나르시시즘의 늪에서 건져내는 아포토스적 타자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저스틴은 죽음을 가져오는 행성 앞에서 말 그대로 활짝 피어난다.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

 

점점 다가오는 재난을 그녀는 연인과의 행복한 합일처럼 기다리고 있다. 이졸데 역시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환희를 느끼며 세계의 숨결이 불어오는 우주에 몸을 던진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녀는 타자를 향해 열린다. 저스틴은 이제 나르시시즘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클레어와 그녀의 아들을 따뜻하게 보살핀다.....타자의 아토피아(무소성)는 에로스의 유토피아임이 드러난다.

 

<멜랑콜리아>의 묵시록적 하늘은 블랑쇼가 유년 시절의 원초적 장면으로서 경험한 저 텅 빈 하늘을 닮아 있다. 블랑쇼에게 그 하늘은 동일자를 갑자기 중단시킴으로써 완전히 다른 자의 아토피아를 계시해준다.

 

나는 일골 살이나 여덟 살쯤 된 아이였다. 나는 어느 빈 집 안에 있었다. 닫혀 있는 창문 근처에서 나는 밖을 내다보았는데- 갑자기, 그보다 더 갑작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을 듯 했다- 마치 하늘이 열리는 것 같았다. 무한자를 향해 무한히 열릴 듯했고, 이 압도적인 열림의 순간은 무한자를, 하지만 무한히 공허한 무한자를 인정하라고 내게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결과는 낯설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하늘의 절대적 공허, 보이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하늘 신의 공허함. 그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것은 신성한 것에 대한 단순한 암시를 훨씬 뛰어넘는 사건이었다 - , 그 하늘을 본 충격이

너무나 매혹적이고 너무나 큰 기쁨을 주었으므로, 아이의 눈에는 일순간 눈물이 가득 고였다.

 

2장 할 수 있을 수 없음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 (‘해야 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는 실제로는 자유로워져라라는 역설적 명령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명령은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 상태 속에 빠뜨린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예속된 주체Subjekt가 아니라 프로젝트Projekt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자본주의가 종교일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죄(채무)와 죄사함(채무 면제)의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죄(채무)를 만들기만 할 뿐이다.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에로스에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 다르다는 것의 부정성, 즉 할 수 있음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타자의 아토피아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 “타자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질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이질성을 절대적으로 원초적인 에로스의 관계 속에서, 즉 할 수 있음으로 번역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찾으려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타자는 성애화되어 흥분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도니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타자는 성적인 부분 대상들로 파편화되기에 더 이상 하나의 인격성르 지니지도 못한다. 성적 인격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예의가, 예의바름이, 바로 이격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즉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랑은 욕구, 만족, 향락,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에 타자의 결핍이나 지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검색 엔진이자 소비 엔진으로서의 사회는 찾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소비할 수 없는 부재자를 향한 모든 갈망을 폐기한다. 그러나 에로스가 깨어나는 것은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들visage”에 직면할 때이다. “얼굴은 비밀이 없는 페이스의 대척점에 있다. 페이스는 포르노처럼 발가벗겨진 채 전시되는 상품이며,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고 남김없이 소비된다.

 

레비나스의 에로스 윤리는 과잉과 광기로 표출되는 에로티즘의 심연을 인식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오늘의 사회에서 나르시시즘적 경향의 심화와 함께 사라져가고 있는 타자의 부정성,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아토포스적 이질성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또한 레비나스의 에로스 윤리는 타자를 경제적 수단으로 사물화하는 데 대한 저항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질성은 소비 가능한 차이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도처에서 이질성을 제거한다. 에로스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인 관계다. 에로스는 교환 관계를 중간시킨다. 이질성은 부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질성은 대차대조표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3장 벌거벗은 삶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책에서 연인의 성적으로 흥분된 눈(erotikon omma)를 묘사한다. 그것은 흥분된 엄니와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 “당신의 눈은 나의 눈을 꿰뚫고 들어와 나의 골수에 뜨거운 불길을 일으키나니 당신으로 인해 사멸해가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라.”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따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략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노동과 벌거벗은 삶은 죽음의 부정성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벌거벗은 삶을 지키려는 경향은 더욱 첨예화되어 건강의 절대화와 물신화로 치닫고 있다. 현대의 노예는 자주성과 자유보다 건강을 더 중시한다. 그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 즉 건강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간과 흡사하다.

 

오늘날의 성과 주체는 헤겔의 노예와 유사하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헤겔은 그 누구보다도 타자에 대한 강한 감수성을 지닌 사상가였다. 이러한 감수성을 개인적 기벽으로 깍아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헤겔을 데리다나 들뢰즈, 또는 바타유 등이 가르쳐준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들의 독해에 따르면 절대자는 폭력과 총체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헤겔에게 절대자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의미한다......절대적이라는 것은 곧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원하기에 타자에게서 등을 돌리는 정신은 제한된 정신이다. 절대적인 정신은 이와 반대로 타자의 부정성을 인정한다. “정신의 삶은 헤겔에 의하면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삶이다. 정신이 생동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죽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절대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긍정성이 나이다. 정신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며그 곁에 머물러있는다. 정신은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것의 정의는 헤겔의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것은 결론이다.” .......모든 결론, 모든 끝맺음이 폭력정니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맺고 우정을 맺는다. 우정은 하나의 결론이다. 사랑은 절대적 결론이다.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에로티즘이란 죽음 속에 이르기까지 삶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부정성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이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4장 포르노

 

포르노는 전시의 대상이 된 벌거벗은 삶과 관련된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포르노는 성애 자체를 파괴한다. ...포르노의 매력은 살아 있는 성애 속에서 죽은 섹스를 예감하게 한다는 데서 나온다. 포르노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란하게 만든다.

 

가상공간에서의 섹스만이 포르노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실제 섹스 역시 포르노로 변질된다. 세계의 포르노화는 비속화의 과정 속에서 실현된다. 포르노화는 곧 에로티즘의 비속화다.

 

물론 박물관도 사물을 격리한다는 점에서는 사원과 같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물이 박물관에 소장되고 전시될 때,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의해 파괴되어버린다.

 

에로틱한 것에는 언제나 비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시가치로 터질 지경이 된 얼굴에서 성애의 새로운, 집단적 사용법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감벤의 기대와는 반대로 전시는 모든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비밀도, 표현도 없는 얼굴, 오직 전시성만으로 환원되어 버린 맨얼굴은 음란하고 포르노적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

 

 

그저 따뜻함, 친밀함, 안락한 자극을 넘어서지 않는 오늘의 사랑은 신성한 에로티즘이 파괴되었음을 암시한다. 포르노에서 완벽하게 배제되는 에로틱한 유혹 역시 환상의 연출, 가상 형식과의 유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심지어 유혹이 사랑과 대립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제의는 유혹의 질서에 속한다. 사랑은 제의적 형식의 파괴, 제의적 형식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생겨난다. 사랑은 이러한 형식의 해체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제의적 성격을 상실한 사랑은 결국 포르노에서 완성된다. 속화라는 아감벤의 구상은 제의적 공간을 격리의 강제 형식이라고 의심함으로써,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의 탈제의화, 포르노화 과정을 더욱 부추긴다.

 

5장 환상

 

그리하여 시각적 정보를 최대화하는 포르노는 에로틱한 환상을 파괴한다.

 

사물의 내밀한 음악은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울려 나온다. 눈을 감는 순간에야 사물 앞에서의 머무름이 시작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카프카의 다음 문장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사물에서 의미를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 감기다.”

 

평탄하게 다듬어진 공간은 투명하다. 문턱과 다리는 아토포스적 타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지대다. 경계와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는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6장 에로스의 정치

 

에로스에는 보편적인 것의 씨앗이 담겨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정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또한 에로스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에로스의 자극에 의해 용기는 아름다운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아마도 에로스와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같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사랑은 둘의 무대.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한다. “내가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있을 때, 만일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평소 나의 상황을 살아가는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뒤집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성적 대상은 결코 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성애는 동일자를 재생산하는 습관적인 것의 질서에 속한다. 그것은 한 개별자의 다른 개별자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에서는 둘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이질적인 것의 부정성을 찾아볼 수 없다. 포르노그래피는 이질성을 완벽하게 소거함으로써 습관화의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포르노그래피의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별자의 무대 위에 거주한다. 포르노적 이미지에서는 어떤 타자의 저항도, 어떤 실재의 저항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예의도, 어떤 거리도 없다. 포르노적이라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접촉,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낯선 것의 접촉과 감정적 격동에서 지켜주는 자기성애적인 자기접촉, 자기 애착은 포르노적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강화한다. 반면 사건으로서의 사랑,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은 탈습관화, 탈나르시시즘화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습관적인 것과 동일한 것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뚫는다.

 

사랑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의 핵심 관심사였다.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사랑의 정의는 예술적, 실존적, 정치적 행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에로스는 갱신의 에너지원으로 숭배되며, 정치적 행위도 그러한 에로스에서 양분을 얻어야 한다. 에로스는 그 보편적 힘으로 예술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한데 묶는다. 에로스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준다.

 

7장 이론의 종말

 

하이데거가 아내에게 보낸 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타자, 즉 당신에 대한 사랑과도, 그리고 다른 면에서 나의 사유와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것이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렵소. 나는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르는데,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신인 에로스의 날개짓은 내가 사유에서 중대한 일보를 내디디며 전인미답의 지대로의 모험을 감행할 때마다 나를 건드린다오. 오랫동안 예감했던 것이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으로 옮겨져야 할 때, 그럼에도 말해진 것이 아직도 오랫동안 외로이 남겨져야 할 때, 나는 어쩌면 에로스의 날갯짓을 다른 때보다 더 강렬하고 오싹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소. 그것에 순수하게 부응하면서도 우리의 것을 보존하고, 에로스의 비행을 쫓으면서도 다시 잘 귀환하고, 두 가지를 같은 정도로 본질적이고 합당하게 수행하는 것, 나는 그렇게 하는 데 너무 쉽게 실패하곤 하오.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의 유혹이 없다면, 사유는 늘 같은 것을 재생산하는 단순한 노동으로 위축되고 말 것이다.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사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터가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은 그저 계산일 뿐이다. 사유에는 계산 불가능함이라는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론은 세계를 설명하기 전에 세계를 정제한다. 우리는 이론이 제의나 예식과 공통의 기원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세계에 형식을 부여한다.

 

정신이란 본래 불안을 의미한다. 정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정보사회는 체험사회다. 체험 역시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점에서 체험은 경험과 구별된다. 경험이란 대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체험에는 변신시키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지않다.

 

에로스의 힘을 도반하지 못하는 로고스는 무기력하다.....에로스는 사유를 이끌고 유혹하여 전인미답의 지대를, 아토포스적인 타자를 거쳐가게 한다.....전승되어온 견해와 달리 플라톤은 포로스가 에로스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포로스는 길을 의미한다. 사유는 과감하게 전인미답의 지대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에로스는 포로스의 아들답게 사유에게 길을 일러준다. 철학은 에로스를 로고스로 번역한 것이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철학자, 즉 지혜의 친구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유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내적 현존, 사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하나의 생동하는 범주, 초월적인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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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책
폴 서루 지음, 이용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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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나의 일상은 책과 산책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가까운 근교의 산이나 길을 걷는다. 하루 종일 걷기도 하는데, 지하철에선 주로 폴 서루의 <여행자의 책>을 읽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만일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사서 가져가야지.

 

삼년 전에도 삶의 위기가 있었다. 동네 뒷산도 가 본적이 없었건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겨울 지리산 종주를 감행했다. 겨울산은 위험하다고 주변에서 말렸지만, 산에 올라 죽을 운명이라면 일찌감치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위기인걸까. 이 책엔 매장마다 필사하고 싶은 문장과 작가, 책들이 즐비하도록 소개되건만(필사 포기), 가장 눈에 들어온 문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었다.

 

“solvitur ambulando.”

솔비투르 암불란도.

 

걸으면 해결된다는 뜻이다. 스티브 잡스의 말대로,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면 나는 이 문장을 믿겠다. 솔비투르 암불란도. ‘걸으면 해결된다를 읊조리며 삼악산을 올랐다. 고작 5km의 코스건만 4시간 30분이나 소요되었다. 너무 소요하며 걸어서일까? 다음날 임금 체불한 대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번 내가 전화해서 재촉했었다. 전화 끊고 나서 1분 만에 체불된 임금이 입금되었다. 나처럼 지금 당장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갈 수 없는 형편이라면 동네뒷산이라도 오르자

걸으면 해결된다.

 


폴 서루가 이곳에 살고 싶다가 아니라 이곳에서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 아홉 군데의 장소.


 

발리



태국



코스타리카



오크니 군도



이집트 - 카이로가 아닌 다른 곳.



트로브리엔드 군도



말라위



메인 주




하와이



 

폴 서루가 뽑은 장소 중, 나는 고작 발리와 태국만을 가 봤을 뿐이다. 언젠가는 다른 곳도 갈 수 있겠지

그러나, 지금 이곳도 나쁘지 않다. 여행은 마음의 상태니까.


여행은 마음의 상태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이국적인 곳에 있는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행은 거의 전적으로 내적인 경험이다.

 

- 폴 서루,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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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16-05-26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흠 아침부터 풀썩. 넘 이쁩니다.

시이소오 2016-05-26 08:17   좋아요 0 | URL
싱그리님, 싱그러운 아침되시길 바래요 ^^

지니 2016-05-28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걸으면 해결된다`
오늘 저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단 한마디 갔습니다.
시이소오님의 글을 읽는 순간 `이거다.` 싶었습니다.
오늘은 여기저기 틈나는 대로 걸어 보겠습니다.
저 사진 중 코스타리카에 있다고 상상하며 불편한 모든 생각 내려놓고 걸어봐야겠습니다.
오늘을 잘 보낼 수 있는 해결책 감사합니다~~
이래서 북플이 좋아요~!!
책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시이소님~^^*

시이소오 2016-05-26 14:15   좋아요 1 | URL
좀 걸으셨는지요? 안 좋은 일들이 잘 해결되길 바랍니다.

계속 좋은 하루 되세요 ^^

hnine 2016-05-2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어디 저장해두어야겠습니다.
저도 현재로선 위의 장소보다 우선 제 집 뒷산이 더 중요합니다. 당장 걸을 수 있으니까요 ^^

시이소오 2016-05-26 14:16   좋아요 0 | URL
그쵸? 오늘 비가와서 아쉽네용^^;

2016-05-26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26 14:21   좋아요 0 | URL
죽어도 좋아, 할만한 장소들이죠. 걸으셨다니
리뷰 쓴 보람이 있네요.
제가더 감사하죠 ^^

물고기자리 2016-05-26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걷는 걸 무척 좋아해요.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하루에 12킬로 정도를 걷는데 그 시간은 책 읽는 시간과도 바꾸지 않죠.

5월엔 아카시아꽃향기 때문에 책을 못 읽었어요;; 달콤한 숲 향기와 걷기는 지상의 축복 같아요^^

시이소오 2016-05-26 14:28   좋아요 1 | URL
하루에 12키로라니 대단하십니다
저도 4월, 5월은
책 보다는 산책이 더 좋드라구요 ^^
 
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남성으로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선 위선이거나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박해와 차별을 당한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볼테르 식으로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여성을 착취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페미니스트의 적이다. 설거지도 안 하고, 밥도 안 하고, 빨래도 안 하는 내가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변명을 하자면 가사노동을 분담하려고 해도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우리 와이프가 못하게 한다. (와이프가 이 글을 안 봤으면)

 

다만 나는 성폭력이나 성희롱, 성추행을 해 본적은 없다. (성추행을 당해본 적은 있다. 남성에게. 또한 몸무게 100kg를 훌쩍 넘긴 듯한 여성에게. 맞을까봐 조용히 있었다. 이런 된장.) 고등학생 때, 여동생을 한 번 때린 적은 있다


(낮잠 자는데 피아노를 치 길래 치지 말라고 했더니, 여동생은 더 세게, ‘포르티시시모<엄청 강하게>’로 피아노를 쳤다. 그래서 나는 여동생을 쳤다.. 그래도 나는 메조포르테<조금 강하게>’정도로 쳤을 뿐이다. 남동생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이 때렸으니 피아니시시모<엄청 약하게>’에서 포르티시시모까지 모든 강도로 - 성차별은 아닌 것 같다.....성차별일까)

 

최근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남성의 무차별 살인 사건에 희생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금 이 순간도 여성 혐오냐 아니냐로 논란이 되고 있다. 나는 여성 혐오 범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대다수 여성들이 여성 혐오로 인식한다는 게 아닐까. 그만큼 그동안 여성들이 여성 혐오를 직접 몸으로 겪어왔다는 반증이다.

 

여성을 왜 혐오하는지 잘 모르겠다. 일자리에 대한 남성들의 위기 때문일까.

여성은 당연히 숭배해야 하거늘.

 

비록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책에 대한 독후감은 쓸 수 있지 않을는지. 프로이트는 작은 차이를 가지고 끊임없이 대립, 반목, 경멸하는 현상에 대해 사소한 차이의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다. 페미니즘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페미니즘 내에서도 리버럴, 마르크시즘, 래디컬, 백인, 흑인, 근본적인, 온전한, 포괄적인 등등 여러 분파가 난립, 각자가 자기만이 옳다고 하고, 다른 페미니즘에 대해 이를 가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즘’(혹은 부족한)을 주장한다. 페미니즘을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토대로 록산 게이는 미국의 문화, 즉 영화, 소설, 드라마, 팝송 등에서 은폐되어 있는 여성의 성차별을 들추어낸다. 책의 어떤 부분들에선 저자의 관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다가 다른 곳에선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도 했다. 내 관점에서 록산 게이는 전혀 배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어떤 장에선 가혹하다 할 만큼 작품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헝거 게임>이 이렇게 대단한 소설이었다니! 영 어덜트 소설이라 무시했거늘. 읽어봐야겠다.

 

여성 캐릭터는 왜 항상 호감만 연기해야 하는가하는 저자의 문제제기엔 동의할 수가 없다. 록산 게이의 말대로 나는 여성 캐릭터가 호감만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저자는 다른 글에서 남성 캐릭터가 비호감이라고 비난한다. 이건 완벽한 모순이다. 그녀의 논리대로라면 강간을 일삼는 개차반 남성 캐릭터를 비난할 근거가 없어진다. 성차별이다.

 

얼마 전에 리뷰를 썼던 주노 디아스의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도 록산 게이의 도마에 올랐다. 록산 게이는 소설의 작품성을 인정하지만 그 안에 성차별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주노 디아스는 여성들을 착취하는 수시오’(난잡한 놈)이자 페로’()인 도미니카노(도미니카 남자들)에 대해 썼다. 록산 게이는 이 수시오들이 잘못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꺼림칙하다고 말한다. 록산 게이는 소설속의 여성들이 단지 유니오르의 성적 쾌락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썼다. 만일 그렇다면 유니오르는 왜 떠나간 애인을 몇 년동안 잊지 못하는 걸까. 단지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여자로 대체하면 그만 아닌가.

 

이외에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같은 소설, 드라마 <걸스>, <헬프>, <노예 12>, <장고 : 분노의 추격자>등의 영화도 록산 게이의 도마에 오른다. 예를 들어, <헬프>같은 경우 뇌를 아파트에 놓고 영화를 보러 간다면괜찮은 영화라고.

 

록산 게이는 공인들이 커밍 아웃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직도 게이란 단어가 여진히 비방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게이 남성들이 주목받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나는 공인들이 왜 커밍아웃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공인이 아니라면 더 더욱. 왜 사람들은 타인의 잠자리 취향까지 알려고 하는 걸까. 사적 영역이란 개인의 은행 잔고라고 말했던 이는 누구였더라. 록산 게이는 이 책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집단 강간당한 사건을 고백한다. 굳이 이 사실을 꼭 밝혀야만 했을까.

 

강간 농담, 강간 유머가 있다는 것은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한국에도 있나? ‘합법적 강간’? 강간이 어떻게 합법적일 수 있을까? 선거철만 되면 선거 공약으로 낙태 제한권을 들고 나오는 정치가가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미국 정치가들은 한국의 새누리당 정치인들만큼 제 정신이 아닌 것들이 많구나. 여성들이 그리스 희극 <리스스트라타>처럼 성 파업을 일으켜야 하는 것은 아닐런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남자와 어느 정도 사귀고 나서 남자가 희망이 담긴 목소리로 피임약 복용하니?”라고 물었을 때 내가 아니? 그러는 너는?”하고 답할 때이다.

 

윗 문장을 읽고 남성인 나는 왜 이리 통쾌했던걸까. 나는 남성으로서의 나의 특권을 인정한다. 이게 출반선이 될 수 있을까.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허무라도 욕망하라고 말했던 니체의 경구가 떠오른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앞으로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을 욕망하고 싶다.


 

린 히긴스, 브렌다 실버 <강간과 재현>

다이애나 스페츨러, <스키니>

케이틀린 모란, <진짜 여자가 되는 법>

가렛 카이저, <프라이버시>

수잔 콜린스,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 제이>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케이트 잠브레노, <그린 걸>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조앤 디디온, <플레이 잇 애즈 잇 레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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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25 15: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성을 ‘숭배’해야 한다는 표현이 오히려 남성혐오자들의 반감을 부추기는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숭배라는 단어가 신 같은 종교적 대상을 우러러 보는 행위를 뜻합니다. 여성혐오자들은 남성의 존재감이 여성보다 아래에 있는 상황을 싫어합니다. 과거 남성 중심의 위계적 질서를 그리워합니다. 옛날에는 남성이 신이었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말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여성들도 남성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남자들은 위계질서를 누리는 주인공이 여자가 되었다고 착각합니다. 남자들은 천성적으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지기 싫어하는 성격입니다. 자신들의 위치가 협소해질까 봐 불안감이 생기고,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현실을 못마땅합니다. 저는 여성혐오의 원인을 이렇게 봅니다. 이거 말고도 다른 원인이 있을 겁니다. ^^

저는 숭배보다는 여성의 말과 행동에 ‘공감’해야 한다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남성은 여성의 말과 생각에 공감해야 합니다. 공감하는 행위 자체가 여성의 말을 인정한다는 의미니까요. 제가 남자 입장에서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느낀 게 남자는 여자의 사소한 말 한 마디를 귀 담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자가 올바른 소리를 해도 한 쪽 귀로 흘러 듣습니다.

:Dora 2016-05-25 17:16   좋아요 1 | URL
정신적으론 숭배찬성 태도는 공감...웬지 자존감이 급상승하는 느낌이 들어서 찬성합니다

시이소오 2016-05-25 17:36   좋아요 0 | URL
아고 답글이계속 사라져 힘드네요 ㆍ공감이더 적절한 표현이겠네요 ^^

cyrus 2016-05-26 15:57   좋아요 0 | URL
To. Theodora, 시이소오 // 처음에 ‘공경’이라는 표현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여성을 노인처럼 대하는 것 같아서 고민한 끝에 ‘공감’으로 바꿨습니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녀 모두 평등하게 사는 삶을 만드는 방식도 차이가 있거든요. 제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입장도 있을 겁니다. ^^

시이소오 2016-05-26 16:16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

:Dora 2016-05-25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에게는 친밀함의 유전자가 없다고 누군가 쓴 걸 읽었어요. 모든 불평등과 차별에 반대하는 의미에선 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시이소오 2016-05-25 16:44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친밀한 남성들도 있지 않을까요?

:Dora 2016-05-25 16:55   좋아요 1 | URL
ㅋㅋ맞아요 흔하지는 않지만 있긴 있죠

시이소오 2016-05-25 17:06   좋아요 2 | URL
제가 그렇다는거는아니구요ㅋ

:Dora 2016-05-25 17:15   좋아요 1 | URL
확인불가 사항이라 딱히 드릴말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