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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1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이 마치 자신만을 위해 씌여졌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몽테뉴의 수상록이 자신만을 위해 씌여진 것 같았다고 말한 이는 누구였더라. 나는 20대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니체의 책들을 읽었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소 재수없게 들리겠지만 저는 철학과 였답니다.^^물론 지금은 다 까먹었어요. ) 그렇다고 해서 삶이 완전히 뒤바뀐 건 아니었는데, 이 소설속의 주인공은 책 한 권 때문에 그가 쌓아왔던 몇 십년간의 삶을 내던지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별명이 문두스(Mundus, 세계, 우주, 하늘)인 라틴어 선생인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다리 위에서 뛰어내릴 듯한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는 싸인펜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이마에 전화번호를 적는다. 잊어버릴까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보는 남자 이마에??)
모국어가 뭐나는 물음에 그녀는 “포르투게스”라고 말한다. 여자는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교실로 들어가 그의 강의를 듣다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날 그레고리우스는 30년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난다. 그는 그녀를 만난 다리로 가보지만 그녀를 또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스파냐 책방으로 가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가 쓴 <웅 오루리베스 다스 팔라브라스>, 즉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에 매료된다. 서점 주인이 포르투칼어 책을 번역해서 읽어주자 그레고리우스는 그 글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씌여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글은 몽테뉴의 <수상록>이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혹은, 파스칼의 <팡세>를 연상시키는 철학적 에세이다.)
그는 포르투칼어를 공부해 책을 해석해 읽고, 작가를 만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포르투칼로 훌쩍 떠난다. 작가는 이미 죽었으나 그레고리우스는 작가의 지인들을 만나 그의 삶을 재구성해 나간다. 아마데우 프라두의 삶은 두 단어로 요약된다. 혁명과 사랑.
(‘혁명과 사랑’ 소설의 원형은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이 아닐까.)
그의 삶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딜레마’다. 프라두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독재정권하에 침묵하는 아버지를 증오한다. 그는 신을 경외하지만 한편으론 잔인한 신을 증오한다. 그는 어릴 적 지기인 조르주의 애인인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조르주는 그녀의 비상한 기억력 때문에 그녀를 죽이고자 한다. 프라두에게 우정이란 ‘의지’와 ‘결정’이며 ‘영혼의 견해표명’이다. 프라두는 에스피노자를 다른 나라로 도피시킨다. 만일 그녀가 독재 정권에 붙잡혀 고문에 의해 저항 운동의 동료들을 고발한다면? 프라두는 의사라는 직업에 충실하고자 인간백정 멩지스의 목숨을 구한다. 그를 살리는 게 수 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직업적 윤리에 입각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행동이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닐까.
프라두는 의사로서 루이스 멩지스의 목숨을 구한 이후로 삶의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사람들은 그를 피했고, 그는 상처받았고 그는 저항운동에 참여한다.
호기심을 끄는 도입부, 추리소설과도 같은 전개, 그러면서도 삶에 관한 깊은 사유를 담아내다니! 도대체 어떤 작가인가 싶어 검색해봤더니 독일 철학자였다. 페터 비에리.
페터 비에리는 ‘자기 결정’의 삶이란 철학을 제시한다. 모든 삶의 변곡점에서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삶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러기위해서는 냉철한 자기인식이 필수적이다.
과연 지금의 나의 삶은 내 스스로 결정한 삶일까.
아직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책 읽는 건 잘하는 건 같은데, 돈이 안 되니.)
못하는 건 알겠다. (몸 쓰는 건 정말 못한다. 그렇다고 머리 쓰는 일을 잘 하지도 못하니,
나 같은 한량을 어디에 쓸 것인가)
와신상담과 용사지칩의 고사를 마음에 새기고 생계를 위해 굴욕을 감수하고 버텨왔는데
과연 그게 최선이었을까? 오랜 꿈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계획해야 할까?
모르겠다.
그처럼 야간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이 책과 함께여도 좋겠다.
오랜만에 별 다섯 개로도 부족한 작품을 만났다.
밑줄 친 문장들
우린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몽테뉴, <수상록>제 2권
우린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p31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p51. “ 우리 둘 모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존경하지요. 그의 <명상록>가운데 한 부분을 기억하실 겁니다.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생은 한 번, 단 한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 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p65.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p76 그리고 자기 이름은 주제 안토니우 다 실우베이라이며 비아리츠에 도자기를 파는 사업가라고 소개했다. 비행공포증이 있어 기차를 이용한다는 말도 했다.
“자기가 지닌 공포의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p79. 헤브라이어를 담당했던 교사가 1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다음, 바로 욥기를 읽게 한 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그레고리우스는 동양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무아지경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됐다. 칼 마이의 글은 동양을 너무 독일인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다 뒤에서부터 아픙로 읽어간 이 책에서의 동양은 동양다웠다. 욥의 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 몽롱하게 만드는 이 이국적인 이름부터 벌써 먼 바다 건너편에서 온 듯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꿈같은 세상인가!
p83. 여기서 얻는 결론이 뭘까? 그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적용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의 반응은? 속으로 그의 행동에 동의하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그를 부러워할까? 그레고리우스는 몸을 일으키고 앉아 은빛으로 동이 터오는 올리브 숲을 내다보았다. 그가 지난 세월 내내 동료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 익숙함은 착각에 가득한 습관이요, 새어버린 무지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 정말 중요한 일인가?
p92. 이렇게 계속 학교로 다시 찾아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과거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갔으나 미래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던, 그 순간의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머뭇거리며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 뒤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 마리아 주앙의 갈색 무릎, 그녀의 밝은 옷에서 나는 비누 냄새로 돌아가고 싶은건가. 아니면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 –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인가.
이 갈망은 약간 이상하고 역설의 냄새가 나며, 논리적으로 독특하다. 아직 미래를 경험하지 않은, 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은 이런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살마도 돌아가려고 할까?
p96. 낯선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남의 뒤를 밟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은 아주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은 기차를 타고 오면서 경험했고, 파리 리용 역에 내리면서도 –어제였든 아니면 언제였든 – 느꼈던 새로운 종류의 각성과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가끔 멈추어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사랑하는 고전들은 각자의 삶을 산 인물들로 가득했고, 그 책들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이런 삶을 읽고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p106. <대지진>. 그레고리우스는 대지진이 1755년에 일어났고, 리스본을 폐허로 만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일로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p107. 그게 그렇게 대단했던가? 묘사된 들판은 원래의 초록빛보다 더 푸르다. 페소아가 쓴 이 문장은, 플로렌스와 그가 결혼생활을 하며 겪은 일 가운데 가장 예리한 기억을 남겼다. 그때 플로렌스는 동료들과 거실에 있었다. 웃음소리와 컵들이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고리우스는 필요한 책 때문에 할 수 없이 거실로 건너갔다. 그가 막 들어섰을 때, 누군가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정말 엄청난 문장이지?” 플로렌스의 동료 가운데 한 남자가 예술가다운 긴 머리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고, 소매가 없는 옷을 입은 플로렌스의 맨 팔에 손을 얹었다. 그 문장을 이해할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겠군요. 그레고리우스가 말했다. 갑자기 거실이 침묵에 휩싸였다. “그래서 당신이 그런 선택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건가요?” 플로렌스가 신랄한 말투로 물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이 굉장한 책이 저한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아세요?” 시몽이스가 책의 가격을 계산기에 찍으며 말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썼다는 느낌이지요.”
p112. 다시 한 번 묘비를 훑어보던 그레고리우스는 억센 담쟁이 넝쿨에 반쯤 가려진 기단의 비문을 발견했다.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그렇다면 여기 프라두의 죽음은 정치적인 것이었을까? 독재를 종식시킨 카네이션 혁명은 1974년 봄에 일어났다.
p122.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새어버리는 시간과 죽음에 대한 생각?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갑자기 모른다는 것? 자기 소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 자기 의지가 지녔던 지극히 당연한 익숙함을 잃은 것? 그래서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
.....그레고리우스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마다 독서를 하곤 했다.
p127. 담배를 입에 문 남자는 가로등에 몸을 기대고 나와 골목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자존심으로 가득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내 몸짓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나에게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연약함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그의 시선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안에 그의 시선을 만들고, 그 시선에서 나온 나의 모습을 내 안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보이는 나는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닐 때든, 병원에서 일을 할 때든 결코 내가 아니었다.
평생 단 일 분도.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외모에서 스스로를 알아채지 못할까? 그들에게도 자신의 영상이 천박한 왜곡으로 가득 차 있는 무대처럼 생각될까?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받는 인상과 그들 스스로 경험하는 방식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느낄까? 그들에게도 내면의 익숙함과 외부의 익숙함이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동일한 사람의 익숙함이라고는 생각될 수 없을 정도일까?
이런 의식이 불러오는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는, 스스로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바깥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욱 커진다. 사람들이 타인을 보는 방식은 집이나 나무, 벼을 볼 때와 사뭇 다르다. 이들을 특정한 형식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기 내부의 한 부분으로 만들려는 기대를 가지고 보는 것이다.......우리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도중에 이미 딴 곳으로 돌아가고, 우리를 우리라는 사람으로 만드는 특별하고 특이한 온갖 소원과 환상으로 흐려진다. 내면세계의 외부세계조차도 우리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다.
이런 낯섬과 거리감은 해악인가? 화가가 우리를 그린다면 서로를 향해 멀리서 팔을 뻐디고 있는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도달하기 위해 헛된 몸짓을 하는 사람들로 그려야 할까? 아니면 보호벽이 되기도 하는 이중 장애물의 존재에 안심하는 모습을 표현해야 할까? 서로를 낯설게 하는 이 보호벽에, 그리고 이 생소함이 가능케 하는 자유에 감사해야 할까? 해석된 몸이 주는 이중 굴절이라는 보호벽이 없이 우리가 마주선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사이를 분리하거나 조작하는 것이 없어 서로 보는 즉시 와락 달려든다면?
p131. 모든 사람이 똑같은 그를 보았지만, 프라두가 말하듯 사람들이 보는 외부세계의 한 부분은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프라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던 때는 자기 인생에서 단 일 분도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외양에서 –익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런 생소함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p140.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타호 강은 더 이상 흐릿한 갈색 평면이 아니라 그야말로 강이었고, 상 조르지 성은 하늘을 향해 세 방향으로 솟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세상은 피곤했다. 콧잔등에 놓인 가벼운 테가 편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익숙한 무거운 걸음걸이는 가벼워진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은 더 가까워지고 강제적이 되었으며, 뭔가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보이지 않는 이 요구가 너무 커지면 모든 것과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단어와 글 저편에 과연 외부세계가 있기나 할까라는 의심 – 이 의심은 즐겁고 소중했다. 이런 의심이 없는 삶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을 가능하게 했던 옛날 안경을 다시 썼다. 그러나 새로 얻은 세상도 이제 잊을 수는 없었다.
p149.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의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살마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무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 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찯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들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
.....스쳐 지나가는 덧없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다른 사람을 향한 눈빛이나 시선 교환은, 모든 것을 흔들고 덜컹거리게 만드는 엄청난 속도와 기압에 마비된 기차 승객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며 던지는 지극히 짧은 시선의 만남과 같은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p154.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p180. “체스를 가장 잘 두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타르타코버는 ‘체스가 전투라면 라스커가, 학무이라면 카파 블랑카가, 그러나 예술이라면 알제친이 최고다’라고 대답했소. ”
p196. 마리아 주앙이 저를 못 본 척하는 것이 왜 대단한 게 아니었나요? 제가 그 일 때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는데도.....아버지의 고통과 그 고통이 준 명철함이 왜 모든 일의 척도가 되어야 했나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제가 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럼 도대체 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죠?
영원이라는 관점요? 그런 건 없습니다.”
p214. 신은 자신이 들 수 없는 돌덩이를 창조할 수 있을까? 만들 수 없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제 들 수 없는 돌덩이가 생겼으니까.
p222.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드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p235. “어떤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군. ‘아마데우가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에는 더 이상 글씨가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데우는 책의 의미만 삼키는 게 아니라 잉크까지 먹는다니까요.”
p245. 그때의 분위기는 아마데우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 이상이었어요. 우리는 그의 부재를 보았던 거요. 그의 부재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소. 그가 없다는 사실이 마치 사진에서 예리한 가위로 오려내어 뚜렷하게 비어버린 윤곽, 그래서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눈길을 끄는 빈 공간처럼 다가왔소. 그래요, 아마데우는 그랬소. 예리한 부재.....
p263. 신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혐오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범속함에 맞설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필요하니까. 반짝이는 교회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그 천상의 색에 눈이 부시고 싶다. 더러운 제복의 단조로운 색깔에 맞설 광채가 필요하니까. 교회의 혹독한 냉기로 내 몸을 감싸고 싶다. 병영의 단조로운 고함 소리와 들러리 정치인의 재기 넘치는 수다에 맞설, 명령을 내리는 듯한 그 정적이 필요하니까. 행진곡의 새된 천박함에 대항할 물 흐르는 듯한 오르간의 울림이, 흘러넘치는 그 숭고한 음색이 듣고 싶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하니까. 난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읽고 싶다. 언어의 황폐함과 구호의 독재에 맞설, 그 시가 지닌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 또 하나 있다. 우리 몸과 독자적인 생각에 악마의 낙인을 찍고 우리의 경험 가운데 최고의 것들을 죄로 낙인찍는 세상, 우리에게 독재자와 압제자와 자객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세상. 마비시킬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설교단에서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나다.
난 신의 말씀을 경외한다. 시적인 그 힘을 사랑하므로. 난 신의 말씀을 혐오한다. 그 잔인함을 증오하므로. 이 사랑은 아주 힘든 사랑이다. 말씀의 광채와 자만하는 신이 만드는 엄청난 예속을 끝없이 구분해야 하니까. 이 증오도 아주 힘든 증오다.
우리는 죄를 짊어져 꼬부라지고, 품위를 잃게 하는 예속과 고해성사로 위축되어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긋고, 그의 품 안에서 더 나은 인생을 누리기 위해 수천 가지 희망을 거부한 채 무덤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모든 기쁨과 자유를 빼앗은 그의 품 안에서 어떻게 인생이 더 나아진다는 말인가?
영원히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으랴?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할까? 말 그대로 끝없이 많은 날과 달과 해가 앞으로 오므로, 오늘롸 이 달과 올해에 일어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하고 공허한가? 정말 영원히 산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놓치는 것도 없으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있는 시간이 된다. 모든 것을 안다는 신이 왜 이것은 모르는가? 견딜 수 없는 단조로움을 의미하는 무한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유리창의 반짝임과 서늘한 고요함과 명령을 내리는 듯한 정적이, 오르간의 물결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무의미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p300. 오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가차 없이 솔직했던지! 자기기만과의 싸움에 그렇게 사로잡혀 있다니! ‘사람은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어.’ 늘 이렇게 말했어요. 그건 종교적인 고백과 비슷했어요. 조르지와 자기를 묶었던 맹세이기도 했고, 결국은 그 철석같은 우정을 깬 신조이기도 했어요.
p322. “난 지금 내 인생이 완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게 아니야. 현재 완성되지 못한 자기 인생에 대한 의식 자체가 불행이라면 누구나 평생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지. 반대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자각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인생을 위한 조건이야. 그러나 불행을 만드는 요소는 분명히 이와는 다른 그 무엇이지. 그건 바로, 완성되고 완전한 경험을 하는 건 앞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이야. ”
p325.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이지.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삶이 완전하지 못할 거라고 미리 생각만 해도 이마에 땀이 솟는다. 완전한 삶, 그건 과연 뭘까? 단편적이고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변하기 쉬운 우리 인생을 생각해볼 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완전한 삶을 구성하는 건 과연 무엇인가?
지금 내 삶이 이미 상에 상응하도록 생각을 바꾸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도 여전히 공포가 남아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스스로 상을 만들긴 했지만, 그 상이 변덕스러운 기분에서 나왔다거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나를 나로 만드는 감각과 사유의 놀이에서 자라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p340.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p341. ‘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아마데우가 늘 하던 말이오.
p347. 그는 신의란 감정이 아니고 의지요 결정이며, 영혼의 견해표명이라고 말했소. 우연한 만남과 감정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 무엇이라고, 영혼의 숨결이라고 했지. ‘그저 낮은 숨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영혼의 한 부분이지’라며.
p356.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