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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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영면하시기 하루 전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그래서 더 충격이 컸을까.

그래서 더 아팠을까.

그래서 일까. 생전에 선생님과 단 한 번의 일면식도 없었으면서도

그 분을 내 선생님이라고 여기는 까닭은.

 

<변방을 찾아서>는 선생님이 쓰신 글씨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기획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해남 송지초등학교 서정 분교, 강릉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박달재. 벽초 홍명희 문학비와 생가. 오대산 상원사.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 김개남 장군 추모비. 서울특별시 시장실.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석.

 

언젠가는 선생님의 글씨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변방을 찾아서.

변방은 다름 아닌 자기 성찰이기에.

 

 

메모한 문장들.

 

 

그러나 벽초와 <임꺽정>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다. ‘오래된 미래이다. 좌우를 아울렀던 벽초의 유연한 사고와 진정성이 그렇고, 임꺽정과 그의 동무들이 보여 준 노마디즘의 삶이 그렇다. 벽초 홍명희 문학비는 분명 변방의 작은 공간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그것은 탈냉전과 탈근대의 장이다. 평화와 공존의 철학을 앞서서 보여 주고, 영토와 소유의 협소한 틀을 깨뜨리고 미련 없이 흘러가는 길 위의 삶을 앞당겨 보여 준다. 한마디로 미래 담론의 창조 공간이다.

 

이번의 변방 여행에서 느끼는 감동은 변방 개념의 일정한 발전이었다. 변방을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변방에 대한 오해이다. 누구도 변방이 아닌 사람이 없고, 어떤 곳도 변방이 아닌 곳이 없고 어떤 문명도 변방에서 시작되지 않은 문명이 없다. 어쩌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변방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변방은 다름 아닌 자기 성찰이다.

 

용과 고래의 한판 승부라는 타종의 엄청난 굉음을 좇아가 이윽고 도달한 곳은 묵언이었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소리의 뼈는 침묵이었다. 충격에서 시작하여 긴 여운을 거쳐 정적으로 끝나는 생성과 소멸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탈주와 접속의 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혜는 자기와의 불화이고 시대와의 불화이다. 지혜가 고요와 깨달음의 초월 공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에 대한 오해이다. 마찬가지로 무소유 역시 사회와의 불화이다.

 

추억이란 세월과 함께 멀어져 가는 강물이 아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숱한 사연을 계기로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거듭할수록 우연이 인연으로 바뀐다고 하는 것이리라.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사소한 일들도 결코 우연한 조우가 아니라 인연의 끈을 따라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필연임을 깨닫는다.

 

문명도 생물이어서 부단히 변화하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한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부단히 변화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중심부가 쇠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변화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서정분교는 틀림없이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꿈을 담는 학교로 빛날 것이다. 스테판 에셀은 그의 작은 책 <분노하라>의 마지막 구절에서 저항이야말로 창조이며 창조야말로 저항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서정분교는 저항이었으며 창조였다.

 

꿈을 담는 도서관이라고 했는데 어디다 꿈을 담지?” 가방에다 담는다는 아이도 있었고 머리에 담는다는 아이도 있었다. 내내 배우기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가르쳤다. 꿈은 가슴에 담는 것이라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서정분교 자체가 꿈이었다. 서울 아이들의 꿈이 바로 서정분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p52. 허균의 <호민론>은 백성을 항민, 원민, 호민으로 나눈다. 항민은 순종하며 부림을 당하는 백성, 원민은 윗사람의 수탈을 원망하지만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나약한 백성임에 비하여, 호민은 허균이 찾는 이른바 변혁 주체라 할 수 있다. 사회 부조리를 꿰뚫고 때를 기다렸다가 백성들을 조직 동원하여 사회 변혁을 영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가 쓴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바로 호민으로 캐스팅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p57,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이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자기에게 맞춘다는 의미가 세상을 인간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라면 글자 그대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이처럼 우직한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조금씩 새롭게 바뀌어 왔다는 사실이다.

 

p100 종메는 고래요, 종은 용뉴에 틀고 앉아 있듯이 용이다. 용과 고래의 한판 승부가 바로 타종이라는 것이다. 나는 생전 처음 타종의 경험을 하게 된다. 종소리는 과연 정념스님의 설명처럼 용과 고래의 충돌이었다.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단정하고 겸손한 모습과 달리 종소리는 높은 파도가 되어 온몸을 덮쳤다. 깨달음이란 우선 이처럼 자신이 깨드려지는 충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종소리는 나를 깨뜨리고 멀리 오대산 전체를 품에 안았다. 나는 나를 남겨두고 종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대산 1만 문수보살의 조용한 기립이 감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종소리는 긴 여운을 이끌고 가다가 이윽고 정적이다. 소리가 없는 것을 정이라 하고 움직임이 없는 것을 적이라 한다. 1만 문수보살은 다시 산천으로 돌아가고 세상은 적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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