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해방노예의 비애를 오늘날의 현실에 투영해본다면 지나친생각일까요. 돈과 경제력에 관한 한 모든 이가 노예와 다름없음을그대로 인정하고 인식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노예인 줄도 모르고 노예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돈과 권력 앞에 납작 엎드려 조용히 순종하는것이 삶의 지혜라도 되는 양 그렇지 못한 사람을 비웃고 짓밟습니다. 해방노예가 노예를 짓밟는 것 같은 구도가 연상되는 현대의 슬픈 풍속도입니다. 문득,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묻게 됩니다. 2천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인간의 존재와 태도 가운데 변치 않는 비겁과 악습이 존재함을 아프게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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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s vivendi ut vult
유스 비벤디 우트 불트

당신이 원하는대로 살 수 있는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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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도끼는 인류역사의 대부분을 함께 한 석기이며 초기 인류가 만들어낸 놀라운 기술의 진보를 보여준다. 주먹도끼는 그 용도가 다양한 만능도구라는 점과 함께 그 모양이 좌우 대칭의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주먹도끼가 가진 좌우 대칭의 조형성은 공들여 만들어 내야만 가능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그렇게 정교하게 돌을 떼어내려면 공이 많이 들어갈뿐더러 솜씨도 좋아야 한다. 초기 인류가 만든 주먹도끼는 평면도상에서도 옆면에서도 정면에서도 모두 대칭이다. 160만 년 전의 주먹도끼가 심지어 현대인의 눈으로 봐도 매력적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먹도끼의 대칭성은 매우 흥미롭다. 고고학자들이 아는 한 주먹도끼는 동물을 도축하고 식물을 자르고 나무를 깎는 일에 사용되었던 도구이기 때문이다. 도구의 기능만을 생각하면 굳이 이렇게 공들여서 좌우 대칭의 주먹도끼를 만들 필요 없이 간단히 떼어낸 돌조각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주먹도끼의 대칭성이 인류의 예술본능과도 같다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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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도자 이야기 - 유네스코 세계 공예 도시 이천 도자의 어제와 오늘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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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는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아니, 실용적으로 그릇을 쓰기 시작한 역사는 오래되었을텐데 가만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를 배우면서 이미 신석기인들이 토기의 미적 감각까지 활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사용하는 그릇의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겠지만 지금 저자는 미적 예술품으로서의 최고봉에 이르는 백자와 청자의 기원과 현대 도자기의 근원이 되는 이천 도자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저자는 도자의 역사와 관련하여 일본과 유럽을 여행하며 본격적인 도자기 이야기를 한 이력이 있고 그 중 몇편의 책은 읽었기에 이번 우리의 도자 이야기는 그 종결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납치되어간 장인들이 우리 도자의 맥을 일본에서 이어가고 오히려 일본에서 더 발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려니 우리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기도 했고.

 

이 책은 칠기- 쉽게 말하자면 자기와 옹기의 중간쯤에 들어갈 수 있는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이천의 도자기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1,2세대 명장들과 그 뒤를 이어 명맥을 이어가는 장인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현대에 이르는 칠기가마와 장인들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리나라 자기의 역사를 짧에 언급하고 있기는 한다.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미 우리나라는 수많은 것을 수탈당했는데 도자기 역시 예외가 아니며 그 당시에는 완성된 자기만이 아니라 기술을 가진 도공들이 노예처럼 끌려가고 납치 당해 일본에서 정착을 하며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수탈은 노골적으로 가속되었고 전문적인 자기기술은 일본인들이 독점을 하면서 나중에는 오히려 조선이 일본에서 도기를 입을 해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 분개만 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잘 보존된 가마터를 지켜내어 가마의 역사와 도자의 흔적을 찾아도 쉽지않을텐데 현실은 오히려 그런 가마터를 무너뜨려 스키장을 만드는 것이라니.

물론 저자는 그런 부분만이 아니라 이천 도자기 축제를 이야기하며 우리의 도자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도 제시하고 있다. 수요를 기다리는 소극적이고 정적인 방법을 벗어나 적극적인 마케팅을 할 필요가 있으며 청자와 백자 역시 과거 양식이 아닌 현대적 미학의 다양한 실험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그런 노력의 이면에는 국내에서의 소비 증가에 대한 필요성도 언급하고 있다. 고급스러운 도자기만을 연상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도기의 수요가 늘어나고 공급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더욱 발전된 자기의 생산이 이어질 것이라는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식당에서 물을 마시더라도 플라스틱 컵보다는 못생기고 이가빠져도 도기컵으로 마시는 기분이 더 좋았지 않은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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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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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해요'는 내가 사과를 할 때 쓰는 말이다. 직장에서는 늘 이 말을 썼는데, 사람마다 아주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사과 말이다. 미안해요, 제 실수예요, 라는 뜻일 수도 있다. 내가 널 망쳐주겠어, 나쁜 년, 이런 듯을 수도 있다."(117)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이라는 말은 이렇게 소설속에 인용되어 있다. 사람마다 아주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라는 말에서 어쩌면 이 소설은 작가의 의도대로 읽히지 않는것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면 작가 역시 자신의 의도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밖으로 내보내게 되었다는 것일지도.

 

이 이야기는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소녀 헬렌이 같은 가정으로 입양된 한국인 남동생의 자살 소식을 듣고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어내기 위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래 전에 떠나 온 집으로 돌아가서 지낸 3일동안의 이야기이다. 물론 커다란 줄거리는 자살을 한 동생의 죽음의 이유에 대해 확인을 하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고 양부모를 비롯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3일이지만 헬렌이 과거를 회상하며 입양된 가정의 양부모에 대한 이야기라거나 학교생활, 동생과의 일화 등을 따라가다보면 선뜻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미국 중산층 가정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방인인 한국인 입양아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살한 동생의 죽음을 파헤치는 뜻밖의 스릴러일까, 싶었지만 이 소설은 전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헬렌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던 그들의 가족과 그녀의 친구들, 그녀의 직장생활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그녀가 만난 인물들에게서 튀어나오는 한마디 말에 흠칫 하며 다시 헬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오히려 동생이 철저히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마지막에 죽음 이후 자신의 장기를 기증할 수 있는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도대체 그들의 삶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싶어진다.

이쯤에서 다시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해요'......

 

"1년 전쯤, 나는 내 윤리의 나침반을 박살 냈다. 그 파편들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박살 나기 전, 그 나침반은 내게 무용지물이었다! 차라리 파편이 나았다! 나는 그것들을 쓰레받기로 쓸어 모아 내다버렸다. 좌절하는 시기에 윤리의 나침반은 흔들릴 수 있으며, 사실극단적으로 윤리적 자세가 바뀔 수도 있다. 윤리적 자세는 콘크리트안에 고정돼서는 안 되며, 가끔은 윤리의 나침반을 흔들 필요가 있고, 때로는 파괴해야만 한다."(165)

삶은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것이다.

입양아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방인이면서 이방인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전혀 다른 가정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문화와 사회환경은 그들을 숨막히게 하고 따돌림을 당하게 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가, 라고 묻는 듯 하지만 결국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극적이지도 않고 이야기같지도 않고 그래서 어쩌면 이것이 현실이고 작가의 자서전일까 라는 궁금증도 생기지만 이야기의 끝에서 그 모든 의문은 사라지고 - 자살을 택한 동생의 입장은 그 누구도 모르기때문에 - 헬렌의 입장에서, 또 독자의 입장에서 작가가 말하는 것, "나는 그저 목소리를 따라갔다. 스토리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마침내 헬렌의 이야기가 끝에 다다랐을 때, 나는 어떤 면에서 그 결말이 희망적이고 고무적이라고 생각했다."라는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떠올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인생이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남들 눈에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겠지만, 내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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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 나는 내 윤리의 나침반을 박살 냈다. 그 파편들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박살 나기 전, 그 나침반은 내게 무용지물이었다! 차라리 파편이 나았다! 나는 그것들을 쓰레받기로 쓸어 모아 내다버렸다. 좌절하는 시기에 윤리의 나침반은 흔들릴 수 있으며, 사실극단적으로 윤리적 자세가 바뀔 수도 있다. 윤리적 자세는 콘크리트안에 고정돼서는 안 되며, 가끔은 윤리의 나침반을 흔들 필요가 있고, 때로는 파괴해야만 한다.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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