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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이성관계를 위한 세 단계의 방법이 있다. 첫번째 단계는 '인식'이다. 다음 세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라.

 

- 커플의 관계는 어떠한가? 처음 사랑에 빠진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 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은 없는가?

- 각자가 어린 시절 가족과 맺은 관계는 어떠한가? 가족, 특히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아픈 기억은 무엇인가?

- 부모의 부부관계는 어떠했는가? 아픈 기억은 없는가?

이 세 가지 사이에 연관성은 없는지 살펴보라. 그러면 자신이 상대방에게 왜 매력을 느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커플 사이의 갈등이 자신 때문에 발생했으며, 따라서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왜 그사람을 선택했는지 깨닫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을 좀 더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스스로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면 상대방을 향하던 인식의 불빛은 자신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관계에 대한 실망감을 상대방 탓으로만 돌리고 책임을 회피하려던 행동은 끝이 나게 된다.
두번째 단계이자, 많은 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단계는 '감정이입'이다. 이 단계에는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고 공감을 표시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한다. 구별짓기 수준이 낮을수록 '감정이입'은 더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좀 더 쉬운 방법을 소개하겠다. 바로 '거울에 비춰보기'이다. 규칙은 단순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다. 서로 번갈아가며 자신의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한다. 이때 상대방은 귀 기울여 듣는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절대 평가, 비난,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만 분명히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외 어떤 반응도 보여서는 안된다.
이야기가 끝나면 듣는 쪽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거울을 비추듯이' 반복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들은 대로, 이해한대로 반복한다. 이때 처음에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했는지' 귀기울여 듣는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설명한다.

하빌 헨드릭스는 이러한 고전적인 심리치료기법을 좀 더 발전시켰다. 즉 거울 역할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한 후 "그게 다예요?", "다른 건 없어요?" 라고 묻는다. 이렇게 모든 일들을 꺼내놓게 한 후 상대방이 어떻게 자랐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말로 표현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입으로 표현되는 자신의 감정을 듣는 것은 너무나 황홀한 경험이며,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는 일은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강력한 디딤돌이 된다.

세번째 단계는 '행동변화'이다. 자신들의 관계를 지배했던 힘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상대방의 감정과 욕구에 공감을 표현하고 나면, 이제 상대방이 가장 바라는 것을 줄 수 있게 된다. 이성관계에 있어서는 상대방의 욕구를 인정하려는 노력이 개인의 성장을 가져다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즉 상대방에게 투시하거나 잠재의식 속에 억눌렸던 자아의 일부분을 드러내 표현한다면 남편과 아내, 개개인의 인격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혼 생활도 크게 성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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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있다면.

해 보세요. 형제 여러분,

해 보시면 가능하다는 것을 보실 겁니다.

복음은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비폭력은 폭력보다 건설적입니다.

정결은 부끄럼을 모르는 환락보다 더 맛스럽습니다.

가난은 부유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

잘들 생각해보도록 하세요. 우리 앞에 얼마나 놀라운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를.

프란치스코의 꿈과 포부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핵의 파멸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지 않은가요.

하느님은 평화를 제안하십니다.

그런데 왜 해 보려고도 하지 않으십니까.

 - 까를로 까렛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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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나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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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10-03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물만두 2005-10-03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감^^
 

 

 


대한민국사 3을 읽다가, (화장실에서 흥분모드로 돌입. 읽던 책 집어던지고 이 책의 끝을 볼 것만 같아지는.)

28쪽.

박정희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정말 우리가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한가지 부탁하고 싶다. 박정희 시대에 민주주의가 그립다고 말하다가 중앙정보부의 지하실에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마냥 매달려 본 사람들 앞에서는 제발 박정희 시대가 그립다는 말은 삼가주었으면 한다. 박정희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은 오늘의 기준으로 그 시절을 평가하지 말자고 한다. 좋다. 그런데 박정희가 한 짓, 다른 나쁜 짓 제쳐놓고 총 거꾸로 들고 민주정부를 뒤엎고 헌법을 두 번씩이나 짓밟은 것은 그 시절 기준으로 해도, 국가보안법은 봐주고 형법을 적용한다 해도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로서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형법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이라 함은"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박정희, 그 시절 기준으로 해도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지른 국헌 문란의 수괴가 아닌가? 형법 어디를 찾아봐도 경제 발전에 기여하면 그 죄를 사해준다는 말은 없다.

==================================== 작년이었던가. 아는 동생이 대학원 수업 얘기를 해 줬다. 친구가 받는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이라며 그 교수가 수업하다 말고 갑자기 '경제'에 대한 얘기를 하더니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얘기를 침 튀기며 얘기했다고 한다. 근데 그 말을 전해주는 녀석도 뭔가 찜찜하게 그에 대한 아무런 반론도 없이 그럴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어쨌든 경제성장은 이뤄진거쟎아요...

뭐?

기분좋게 얘기하며 가던 차 안에서 나는 또 흥분을 해버렸던 것 같다. 대학원씩이나 다닌다는 것들이 역사인식도 없고말야, 공부는 뭐하러 하냐?

..........

....................

그때 대한민국사가 있었더라면 나는 차분히 한마디만 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사라는 책이 있는데, 사줄테니 읽으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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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2005-09-0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그나저나 1,2권에 비해, 3권은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끝내줘요... ^^

chika 2005-09-0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좀 더 시원해진 느낌이... ^^

dog054 2006-02-16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 꼭 읽을래요!! 그리고 글 내용 퍼갈께요^^
 

 대한민국사 2를 읽는 중입니다. 혹시라도 이 책을 읽으신 분은 그냥 페이퍼를 닫아주시고, 읽어보지 않았다면 좀 길지만 읽어보시길.

무단 전제하면 안된다고 했지만 이건 용서가 되겠죠?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이 아픔일때가... 정말 슬픈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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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찢어지던 전화를 기억합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의혹이 한창 제기될 무렵, 저는 한 방송사 TV토론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김 상사님의 옛 정우들에게서 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 전화의 대부분은 거친 전화였지만, 한 분의 전화만큼은 달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님께 송아지라도 한 마리 사드리려고 머나먼 남쪽 나라로 가는 배에 올랐는데, 돈 있고 백 있는 놈들은 다 빠지고 자기 같은 사람들만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데, 그런 자신이 용병이고 학살자냐고. 울음섞인 전화에 저의 가슴도 찢어졌습니다.

김상사님.

지난 3년 간 진실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진실은 귀중한 것이지만 진실과 마주선다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를 인정하느 ㄴ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미국인들이 노근리를 비롯한 한국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과 마주서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일을 우리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죽임을 당한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힘겨운 생을 살아내야 했던 생존자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김상사님도 민간인 학살이라는 말에는 부르르 떨며 분노하셨지만, 김 상사님을 비롯한 파월 장병들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이 이제와 생각해보면 베트남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큰 아픔을 주었다는 점은 동의 하셨쟎아요. 그런데 저는 베트남전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베트남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박정희의 정략적인 파병으로 한국사회에 군사독재가 강화되고, 우리 사회 전체가 하나의 병영이 되었다는 거창한 이야기는 접어두겠습니다. 그러나 착하디 착한 우리 남편이 월남 1년 갔다 오더니 영 딴사람이 되었다는 친구분 사모님의 말씀이나, 월남 갔다 온 뒤에는 내 눈에 너무 살기가 등등하다고 한동안 가족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는 김상사님 말씀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마음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이지만,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번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 적이 없이 전쟁을 정당화하고, '기념'해온 우리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저희 진실위원회에서는 베트남에 (가칭)평화역사기념관을 세우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평화역사관을 짓는 일은 저희가 심부름이야 하겠지만, 저희 진실위원회만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김 상사님, 김 상사님이 청춘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낸 그 땅을 김 상사님을 모시고 한번 다녀왔으면 합니다. 김 상사님의 소중한 추억이 어린 곳이기도 하고, 또 김 상사님과 가족들의 고통의 뿌리가 내려 있기도 한 그곳, 그리고 김 상사님과 김 상사님의 옛 전우들, 아니 당신들을 그곳에 보낸 자들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김 상사님과 함께 다녀오고 싶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바람이 아니라 지난 일주일 제가 만난 모든 베트남 사람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합니다.

고통이란 함께 나눌수록 가벼워지는 법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과 서로 총을 겨누던 사람들이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서로 고통을 나누며 당신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희가 베트남에 가니까 역사의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왔다고 호치민시의 역사학 교수 여러 분이 나와주셨습니다. 놀랍게도 그분들의 대부분은, 정말 옆집 아주머니처럼 생긴 역사박물관장님을 비롯해서 젊은 사람들만 빼놓고는 항미전쟁 기간에 총을 든 베트콩 출신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아픈 역사로 만나 것도 인연이라며 어떤 이유로 만나든 인연을 더욱 소중히 발전시켜가고 싶어하십니다.

저희가 평화역사기념관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것은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셨던 문명금, 김옥주 두 분 할머니께서 생전에 저희에게 수천만 원의 큰 돈을 남기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두 분 할머니께서는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해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정부의 생활보조금과 민간단체에서 모아 드린 귀한 돈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썼으면 한다고 저희게 보내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쓰라리게 전쟁의 고통을 당하셨던 두 분 할머니께서 똑같이 전쟁의 고통을 당한 베트남의 이름 모를 사람들을 위해 당신들의 전 재산을 남기셨습니다. 고통의 연대, 고통받은 자들이 서로 아픔을 나누며 힘을 모을 때 고통은 가벼워지고, 또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일도 막을 수 있습니다. 김 상사님, 평화 역사관 계획이 구체화되는 데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2003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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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춘 2005-09-13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전했던 울 아부지는 베트남전 이야기를 거의 피하는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인지
베트남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고 가끔 말씀하시죠.
저도 읽고 아부지께 선물해 드려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