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2를 읽는 중입니다. 혹시라도 이 책을 읽으신 분은 그냥 페이퍼를 닫아주시고, 읽어보지 않았다면 좀 길지만 읽어보시길.

무단 전제하면 안된다고 했지만 이건 용서가 되겠죠?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이 아픔일때가... 정말 슬픈거 같습니다.

 

================================================================

가슴 찢어지던 전화를 기억합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의혹이 한창 제기될 무렵, 저는 한 방송사 TV토론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김 상사님의 옛 정우들에게서 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 전화의 대부분은 거친 전화였지만, 한 분의 전화만큼은 달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님께 송아지라도 한 마리 사드리려고 머나먼 남쪽 나라로 가는 배에 올랐는데, 돈 있고 백 있는 놈들은 다 빠지고 자기 같은 사람들만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데, 그런 자신이 용병이고 학살자냐고. 울음섞인 전화에 저의 가슴도 찢어졌습니다.

김상사님.

지난 3년 간 진실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진실은 귀중한 것이지만 진실과 마주선다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를 인정하느 ㄴ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미국인들이 노근리를 비롯한 한국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과 마주서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일을 우리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죽임을 당한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힘겨운 생을 살아내야 했던 생존자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김상사님도 민간인 학살이라는 말에는 부르르 떨며 분노하셨지만, 김 상사님을 비롯한 파월 장병들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이 이제와 생각해보면 베트남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큰 아픔을 주었다는 점은 동의 하셨쟎아요. 그런데 저는 베트남전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베트남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박정희의 정략적인 파병으로 한국사회에 군사독재가 강화되고, 우리 사회 전체가 하나의 병영이 되었다는 거창한 이야기는 접어두겠습니다. 그러나 착하디 착한 우리 남편이 월남 1년 갔다 오더니 영 딴사람이 되었다는 친구분 사모님의 말씀이나, 월남 갔다 온 뒤에는 내 눈에 너무 살기가 등등하다고 한동안 가족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는 김상사님 말씀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마음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이지만,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번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 적이 없이 전쟁을 정당화하고, '기념'해온 우리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저희 진실위원회에서는 베트남에 (가칭)평화역사기념관을 세우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평화역사관을 짓는 일은 저희가 심부름이야 하겠지만, 저희 진실위원회만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김 상사님, 김 상사님이 청춘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낸 그 땅을 김 상사님을 모시고 한번 다녀왔으면 합니다. 김 상사님의 소중한 추억이 어린 곳이기도 하고, 또 김 상사님과 가족들의 고통의 뿌리가 내려 있기도 한 그곳, 그리고 김 상사님과 김 상사님의 옛 전우들, 아니 당신들을 그곳에 보낸 자들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김 상사님과 함께 다녀오고 싶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바람이 아니라 지난 일주일 제가 만난 모든 베트남 사람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합니다.

고통이란 함께 나눌수록 가벼워지는 법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과 서로 총을 겨누던 사람들이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서로 고통을 나누며 당신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희가 베트남에 가니까 역사의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왔다고 호치민시의 역사학 교수 여러 분이 나와주셨습니다. 놀랍게도 그분들의 대부분은, 정말 옆집 아주머니처럼 생긴 역사박물관장님을 비롯해서 젊은 사람들만 빼놓고는 항미전쟁 기간에 총을 든 베트콩 출신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아픈 역사로 만나 것도 인연이라며 어떤 이유로 만나든 인연을 더욱 소중히 발전시켜가고 싶어하십니다.

저희가 평화역사기념관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것은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셨던 문명금, 김옥주 두 분 할머니께서 생전에 저희에게 수천만 원의 큰 돈을 남기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두 분 할머니께서는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해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정부의 생활보조금과 민간단체에서 모아 드린 귀한 돈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썼으면 한다고 저희게 보내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쓰라리게 전쟁의 고통을 당하셨던 두 분 할머니께서 똑같이 전쟁의 고통을 당한 베트남의 이름 모를 사람들을 위해 당신들의 전 재산을 남기셨습니다. 고통의 연대, 고통받은 자들이 서로 아픔을 나누며 힘을 모을 때 고통은 가벼워지고, 또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일도 막을 수 있습니다. 김 상사님, 평화 역사관 계획이 구체화되는 데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2003년 1월 25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사춘 2005-09-13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전했던 울 아부지는 베트남전 이야기를 거의 피하는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인지
베트남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고 가끔 말씀하시죠.
저도 읽고 아부지께 선물해 드려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