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고통 받고 있는 여자의 한숨이라고 했었다. 그 모든 한숨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작은 눈송이로 나뉘어 아래에 있는 사람들 위로 소리 없이 내리는 거라고 했었다.
"그래서 눈은 우리 같은 여자들이 어떻게 고통당하는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거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걸 우리는 소리 없이 견디잖니"(125)
그녀는 엄마의 상실감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그런데 다른 사람의 죽음을 다른 사람이 가져왔다. 지금은 자신이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엄마의 고통에 냉담했던 것에 대한 벌일까?
라일라는 엄마가 어떻게 땅에 고꾸라졌으며, 어떻게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는지 기억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손끝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무릎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고 마음이 날아가도록 했다. 그녀는 그것이 아름답고 안전한 곳을 찾을 때까지 계속 날아가게 했다. 푸른 보리밭이 있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수천 개의 사시나무 씨가 공중에서 춤추고, 바비는 아카시아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타리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낮잠을 자고, 그녀는 시내에 발을 담고고, 햇볕에 하얘진 바위로 된 불상들의 눈길 밑에서 좋은 꿈을 꾸는 아름답고 안전한 곳을 찾을 때까지.(282)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완득이만 했을 때 완득이처럼 행동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때는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했었는지... 아니, 기도가 아니라 나는 간혹 하느님에게 항의를 하곤 했었다. '그러시면 곤란하죠~'는 그래도 애교라도 느껴지지. '그래도 돼요?'라고 따져묻던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하나가....
너무 좋아서.. 리뷰를 정말 잘 쓸꺼야! 라고 외쳐대다가 결국 리뷰쓰기를 포기했다.
아아, 세상은 넓고 훌륭한 책은 널려있다.
두 사람과 비교하면 다치바나는 나무랄 데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구청에 근무하고 어머니는 피아노 강사를 하고 있어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그러나 '그런 비교는 누가 하는 걸까'하고 기타는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어떻게 하면 불행하다는 건가. 어디에 선을 긋는다는 말인가.
유복하고 부모가 다 있는 가정에서 자란 다치바나의 언동에서 새빨갛게 찢어진 상처와 깊고 어두운 구멍을 볼 때가 더 많다. 그것은 오히려 기타나 다쓰미의 것보다 생생하고 딱한 현실로 보인다. 바닥이 보이지 않아 도저히 구원이 힘든 구멍, 바꾸어 말하면 과격하고 가차없는 자기 파괴욕과도 같은 것이다. 치기 어린 불행에 대한 동정이라면 어차피 '도련님'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다치바나라는 남자에게 장난기 어린 면이라고는 없다.(99-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