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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 때 우리 동네 왕할머니인 이 할머니가 얽힌 실타래를 풀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어머님, 너무 얽혀서 이젠 더 못풀겄그만이라우. 그만 끊읍시다" 하고 며느리가 하소연을 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왕할머니는 이렇게 대꾸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매듭은 풀어야제 끊어내는 것이 아니여. 끊었다 다시 이은 실로는 바느질을 할 수가 없는 법인께"

얽힌 매듭을 단칼에 끊어낸 알렉산더 대왕의 용단을 기릴 때마다, 저는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얽힌 매듭 풀기에 아낌없이 시간을 쏟던 왕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저에게는 왕할머니가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커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끊어진 실을 이어서는 옷을 지을 수도 이불 홑청을 꿰맬 수도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이런 왕할머니 한 분 모시는 것이 제 가장 큰 소망입니다.

윤구병, 알렉산더 대왕보다 위대한 왕할머니 중에서/ 살아갈 날들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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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소포상자를 풀때 가위가 아니라 송곳만을 사용하던 분을 알고 있습니다. 묶었던 끈을 풀어 재활용하겠다, 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모든 매듭은 풀어지게 마련이라며 시간과 공을 조금 들이더라도 매듭을 꼭 풀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바쁜 세상에, 인스턴트처럼 일회성 관계가 늘어만 가는 세상에 깊은 생각하나를 건네줍니다.  편하게 싹둑싹둑 끊어버리면 귀찮고 힘들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쉽게 끊어버리는 가위질이 내 삶에 침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묶인 매듭은 반드시 풀어지게 마련이고, 내가 좀 더 시간과 공을 들이면 못쓰게 되는 끈이 아니라 끊이지 않는 하나의 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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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0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가위부터 들고 설치는 인간 이 글 읽고 얼굴이 뻘게졌습니다.

날개 2004-10-20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방에서 읽고는 감동을 받아 추천하고 갑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4-10-21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듭만 붙잡고 앉아 있으면 스트레스 받는 인간이 여기도 있습니다. 매듭은 끊는 게 아닌데 그걸 간과하고 사는군요. 좋은 글이에요, 치카님... ^^

chika 2004-10-2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부끄러워 하실것까진 없는데요... 화끈하고 간결하고 단순한 해결. 때로는 그런 방식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원래 느릿느릿해서 이런 마인드가 맞는거구요. ^^;;;;;;;;;;
날개님/ 첨 뵙습니다. 반갑네요 ^^
이 안님/ 헤~ 감사합니다 ^^

숨은아이 2004-10-22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며칠치 글을 찾아 읽자니, 감동스런 글이 왜 이리 많답니까... ^^
 

하늘의 것을 먹은 새악시


새악시는 먹보였습니다. 먹보 새악시는 오늘 아침에도 밥 한 양푼을 다 먹어 치우고 트림을 끄윽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놀라서 호들갑을 떨어도 먹보 새악시는 밥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새악시는 시집 올 때부터 많이 먹었습니다. “야야, 제발 음식 조심하거라. 숟가락은 들었다 놓고 신부 술도 권하면 잔에 손만 부딪치고 고갤랑 다소곳이 숙이고 있어야 헌다.” “걱정 마이소. 어무이예.”

시집을 가는 딸을 앞에 놓고 신신당부를 하시던 어머니께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새악시가 시댁에 도착했을 땐, 벌써 속이 헛헛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연지곤지 찍고 치장하느라 아침도 대강 먹었고, 시댁 식구들에게 절을 하고 어쩌고 하다 보니 점심때가 꼭 차서, 아주 허기증까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폐백 절차가 끝나고 겨우 각시방에 들어가니 그제서야 커다란 새각시 상이 들어왔습니다.

음식을 본 새악시는 어머니의 당부도 까맣게 잊고 밥이며 국이며 떡, 과일을 정신없이 입안으로 끌어넣었습니다. 화장이 지워지고 노랑 웃저고리에 국물이 튀어 얼룩이 지는 것도 몰랐습니다. 새색시를 보러왔던 마을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시어머니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새악시 방을 들락거렸습니다. 하지만 새악시는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졸음이 쏟아져 코까지 골고 쿨쿨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때부터 며느리를 구박했습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내 참! 며느리를 본 게 아니라 식충이를 데리고 온 기라카이” 하고 흉을 보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새악시는 시집올 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소경 3년으로 살라고 하신 어머니의 당부대로 시어머니의 구박과 험담에 아예 벙어리 시늉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먹보 새악시는 더욱 더 먹는 일로 마음을 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가 나도 먹고, 억울해도 먹고, 외로워도 먹었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9년, 그런데 그때부터 먹보 새악시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가슴에 꾹꾹 눌러 참은 소리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날도 언제나처럼 시어머니가 면박을 주자, 새악시가 이상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아……”

시어머니는 새 트집거리가 생겨 좋아하다 며느리가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자 겁이 덜컥 났습니다. 괴상한 소리는 솜으로 틀어막고, 이불을 두르고, 골방에 가두어 놓아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사람들은 한마디씩 했습니다. “하이고, 시집 올 때 그리 곱고 참하더이만 얼마나 구박했으면. 쯧쯧.”

돈이 아까워 귀신이 들었다고만 우기던 시어머니는 그제서야 의원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 의원, 저 의원 다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다 침술이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원이 새악시에게 침을 놓자 소리가 조금씩 줄더니, 의원이 뭐라고 소곤거리자 푹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이게 웬 날벼락인교?”

“걱정마세요. 할머니, 며느님은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허전할 때는 하늘의 것을 먹어야 하는데 그걸 몰랐으니 저런 병이 생긴답니다.”

“그라믄 우째야 낫는 깁니꺼? 돈이 많이 들면 우짜지예?”

“돈은 한 푼도 안 듭니다. 대신 할머니가 오늘부터 잔소리 대신 매일 한 번씩 며느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세요. 그리고 재 너머 용담계곡에 가면 하늘의 정기가 서린 옹달샘이 있답니다. 그 물을 떠다 먹이면 며느리의 병이 나을 겁니다. 반드시 할머니의 손으로 떠와야 약효가 있습니다.”

그날부터 시어머니와 먹보 새악시는 의원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날마다 십리길을 오르내리는 일이 귀찮았지만, 돈을 들이지 않고 병을 고친다는 말에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구박만 하던 시어머니가 먼 길을 걸어 약을 구해 주는 정성이 고마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새악시는 시어머니가 떠다 주는 하늘의 물이 밥보다 더 기뻤습니다. 새악시는 몸을 아끼지 않고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까 하는 생각으로 종일 동동거리고 다녔습니다.

시어머니도 진심으로 며느리가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고 약수물을 떠다 먹였습니다. 새악시는 하늘을 먹은 듯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집안 일도 부지런히 끝내놓고 들일도 하고, 두엄도 져 나르고 볏가리도 날랐습니다.

“아이구, 야야. 그러다가 병나문 우짜노! 뭘 좀 묵어야제.”

시어머니는 이제 며느리가 밥을 달게 안 먹는 것만 가슴이 아팠습니다.

박숙희, <새를 기다리는 나무 중> ‘하늘의 것을 먹은 새악시’ 요약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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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리 2004-10-15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이야기... 착한 이야기네요. 추천^^

chika 2004-10-16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알라딘의 많은 서재지기님들이 새악시마냥 착한분들이란 생각을 해봤답니다. ^^
 

"진짜가 뭐야?"

하루는 토끼가 가죽말에게 물었습니다.

아줌마가 방을 치우러 오기 전에

애기자리 곁에 나란히 누워 있을 때였습니다.

"속에서 잉하고 소리가 나고

손잡이가 튀어나온 거, 그런거야?"

"진짜라는 건 네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달려있는 게 아니야"

하고 가죽말이 말했습니다.

"그건 너한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 말하는 거란다.

어떤 아이가 너를 오래오래 사랑해 주면,

그냥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정말로 너를 사랑하면,

그러면 넌 진짜가 되는거야"

"그러면 아파?"

하고 토끼가 물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고 가죽말은 말했습니다.

- 마저리 윌리암스, <사랑받는 날에는>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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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9-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라면.....
진짜 딸기가 들어있고..진짜 바나나가 들어있다는 그우유를 말하는게 아닌가요?..헤헤

chika 2004-09-23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 진짜 딸기...먹고싶어요~ ^^;;

내가없는 이 안 2004-09-23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저도 이 책 읽었어요. 아주 오래된 책이지요? 밋밋할 듯한데도 읽다가 울었다죠. 흑흑.

진/우맘 2004-09-23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때는....

chika 2004-09-23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저도 이 책을 읽고 싶답니다. 저기 인용된 부분은... 다른책에 적혀있는거 보고 옮긴거예요. 잔잔하게 끝없이 감동이 밀려드는 거 같아서요. ^^
 
 전출처 : 릴케 현상 > 이름없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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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4-09-21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고 꼬집어 말하지는 못하지만 섬찟한 느낌이 있는 '무서운 동화'라는 생각이 든다.
<몬스터>라는 만화책 속에 나온 동화이야기이지만.. '이름'이 없는 괴물..
존재에 대한 상실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우리안에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는 괴물땜에 무서워했었다.. ㅠ.ㅠ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만물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말씀하셨을 때, 인간에게는 자신이 이름지어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만이 아닌, 그 모든것을 사랑하고 보살펴야할 책임과 의무를 갖게 되었다고만 생각을 했었는데...그저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라는 상징만을 떠올렸었는데, 뭔가, 가슴에 탁! 막혀오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지금 우리가 이름을 잃어가고 있는건 아니겠지...?
 
 전출처 : 릴케 현상 > 이름없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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