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Bouguereau,  <The Abduction of Psyche>

  에로스와 프쉬케가 날아오르는 장면입니다. 프쉬케의 표정이 제목과는 좀 걸맞지 않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이란 저런 황홀경이겠지요. 저는 이 장면을 제목을 모른 상태에서 먼저 보게 되었는데 프쉬케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시험을 통과하고 드디어 어른이 된 에로스와 함께 둘만의 보금자리로 가는 풍경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려나 사랑은 저리 아름답고, 인연이라는 건 저렇게 갖은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성취해내는 것,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거라는 건 믿습니다.

  인연이 풋, 설익었는데 연서(戀書)를 보내니 픽, 웃음은 나오고 핏줄이 도드라지고 피부가 속내처럼 붉어집니다. 우선 제가 좋아하는 가수 김윤아의 노래 하나를 보내드립니다. 그녀의 노래나 몸짓과 말을 모두 사랑하지만 특히 좋아하는 건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였습니다. 97년 자우림이 로 갓 데뷔했을 때 스물일곱의 남자친구는 아무런 병도 없이 조용히 잠자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군요. 김윤아의 목소리를 들으면 아름답고 사무치는 꽃잎이 떠오릅니다. 꽃 진 자리에서 열매는 돋는 것처럼, 사람은 죽음처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만 사랑이 피어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랑을 기원하는 엽서에 죽음을 말하는 건 생뚱맞지만, 사랑에는 죽음이 깃들어야 더 성스러운 의미를 얻는 게 아닐까요.


  이 노래의 제목은 <17171771>입니다. 뒤집으면 ‘ILLILILI’ 이걸 영어로 바꾸면 ‘I LUV U’라는 의미가 된다고 합니다. 예전 삐삐 메시지를 이렇게 보냈다고 하는군요. 목소리의 상큼함과 앙증맞음도 좋지만 가사도 곱씹을수록 맛깔스럽고 정겹네요.


        <17171771>


천사의 미소처럼 새들의 노래처럼

이토록 사랑스런 당신이 좋은 걸요

어서 내게로 와요, 영원히 함께 해요

우리 함께라면 두렵지 않은 걸요


세상에 단 한 사람, 당신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

이 세상에 태어난 걸 알고 있나요


어쩌면 우린 예전부터 이름 모를 저 먼 별에서

이미 사랑해왔었는지도 몰라요


오월의 햇살처럼 시월의 하늘처럼

그렇게 못 견디게 당신이 좋은 걸요

어서 내게로 와요 느끼고 있잖아요

어느새 슬픔이 사라져버린 걸


때로 폭풍우 거센 밤에

별에서 찾자 온 악마들이

우리를 갈라놓으려 할 때면


조용히 서로 마주 앉아

가만히 서로의 손을 잡고

향긋한 낙원을 떠올리지요


바람은 잦아들고 먹구름 사라지고

햇살이 따스하게 미소 짓고 있네요

우리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은 걸요

악마도 지옥도 검은 운명도


아가의 살결처럼 소녀의 향기처럼

그렇게 못 견디게 당신이 좋은 걸요

어서 내게로 와요 다 알고 있는 걸요

서로를 위해 우리 태어났잖아요


천사의 미소처럼 새들의 노래처럼

이토록 사랑스런 당신이 좋은 걸요


  혓바늘이 돋을 때마다 계속해서 혓바늘을 치아 끝에 문지르게 됩니다. 알싸한 고통을 통해 존재를 어루만집니다. 그러고보면 사람은 가끔씩 아픔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느끼게 됩니다. 부디 오는 인연과 잘 만나서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맞춤한 시 하나 보내드립니다.

          수선화에게 묻다


                                          복효근


말라비틀어진 수선화 알뿌리를 다듬어

다시 묻고 나니

비 내리고 어김없이 촉을 틔운다


한 생의 매듭 뒤에도 또 시작은 있다는 것인지

어떻게 잎사귀 몇 개로

저 계절을 건너겠다는 것인지

이 무모한 여행 다음에

기어이 다다를 그 어디 마련이나 있는지


귀 기울이면

알뿌리, 겹겹 상처가 서로를 끌어안는 소리

다시 실뿌리 내려 먼 강물을 끌어오르는 소리

어머니 자궁에서 듣던 그 모음 같은 것 자음 같은 것


살아야 함에 이유를 찾는 것은 사치라는 듯

말없이 꽃몽오리는 맺히고

또 한 세상 도모하며

잎은 잎대로 꽃대궁은 또 꽃대궁대로 일어서는데


이제 피어날 수선화는 뿌리가 입은 상처의 총화라면

오늘 안간힘으로 일어서는 내 생이,

내생에 피울 꽃이

수선화처럼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꽃, 다음 생을 엿듣기 위한 귀는 아닐까


  아,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백석 시인의 시 한 편도 보내드립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사무치게 아름다운 꿈 속을 부유하는 느낌입니다. 올 겨울 사랑하는 인연과 함께 읽으시라고요.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는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것이다.

 

 



http://mfiles.naver.net/518264bdaaf29c29055a/data1/2004/10/19/278/17171771-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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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넘어 2005-10-18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윤아 좋아하는데 노래 가사만 보니까 그것도 좋군요. 그런데 제목을 보고 전 프쉬케를 사이코로 읽고 선 "사이코 유괴"인 줄 알았습니다.

로드무비 2005-10-18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해 거의 천착하는 가수더군요. 김윤아.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언제 어디서 읽어도 좋고.
그런데 노래가 나오나 해서 저 주소로 가보니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다'고
나옵니다.

kleinsusun 2005-10-18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詩我一合雲貧賢 님, 넘넘 감사합니다.
특히...맞춤시....감동적이예요.

"내생에 피울 꽃이
수선화처럼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슴이 짜~안해요. 제 이름이...소중하게 느껴지는데요.
진심이 느껴지는 좋은 글, 행복한 오후입니다.^^


인간아 2005-10-1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폐인촌님, 네, 가사도 직접 김윤아가 많이 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사 몇몇은 굉장히 깊은 의미를 담고 있더군요. 재능도 많고 깊이도 있는 가수라서 더 애정이 갑니다. 프쉬케(Psyche)는 '나비'라는 의미도 있고, '영혼'이라는 의미도 있으니 폐인촌님 말씀대로 '사이코 유괴'도 맞는 말이네요. 사랑이란 영혼이나 정신을 빼앗아버리니까요. 헤헤. 유괴당하는데도 프쉬케의 얼굴은 그득한 황홀경이네요.
로드무비님, <새>같은 노래는 정말로 귀기와 죽음의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너에게 죽은 나를 선물할게' 이런 가사도 있지요. 클릭하시면 노래는 잘 나오는데 이상하네요. 제가 해보니 잘 되는데요, 갸우뚱.
수선님, 네, 시 찾느라고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앞으로도 좀더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