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그러니까 2005년 5월 26일 목요일,
이사를 했다.

84년부터 쭉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20년 넘게 살아온 집을 떠난다는 것...

실감나지 않았다.
아침 7시 반,
이삿짐 센터에서 올 때 까지만 해도....

월~수 중국 출장이었다.
목요일 하루 휴가를 내려고
수요일 저녁에 인천공항에서 막바로 사무실로 가 일을 했다.

힘들고 빡센 일정이었지만 덕분에 감상에 빠지지 않았다.
중국 출장이 없었다면

아.... 이 집에서 잘 날이 이제 사흘 남았네, 이틀 남았네 하며,
아..... 이 놀이터를 언제 또 지날까 하며,
아..... 술 취하면 나도 모르게 이집 벨을 누르지 않을까 하며

온갖 감상에 빠져 힘들어 했을지도 모른다.

이사를 앞두고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책"이었다.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했다.

다 들고 갈 것인가,
일부를 해방시킬 것인가?

결국 커다란 상자 두개 만큼의 책을 미련 없이 버리고
쓰레기통에 퉁 던져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책들은
헌책방 책창고 사장님께 드렸다.
책창고 사장님이 직접 오셔서 두 상자의 책을 가져 가셨다.

책창고로 보낸 책들은
30권이 넘는 아빠의 라즈니쉬 콜렉션과 남회근 선생의 책들,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 10권(완전 새 책이다),
중고등학교 때 읽은 문고판 책들,
신경숙과 조경란 등 요즘 소설가들의 책들
(나는 다신 읽지 않을꺼지만 헌책방에선 잘 팔리는 책들),
책 값이 비싸 버리긴 아깝지만 필요없는 법규집 등....

쓰레기통에 퉁 던져 버린 책들은
한 때 공부했던 PR 관련 책들,
온갖 구라와 잘난 척으로 가득한 MBA 안내서들,
(Top 5 합격자들의 수기는 "국영수를 중심으로 학교 수업에 충실했어요" 하는
서울대 수석의 9시 뉴스 인터뷰 멘트랑 똑 같다.)
허접한 재테크 책들, 영화 개론서 등....

그렇게 버리고도 책들이 참으로 많았다.

몇몇 친구들이 책이 너무 많으면
박스째 자기 집으로 보냈다가
결혼할 때 가져가라고 친절한 배려를 했다.

난 씩 웃으며 대답했다.
" 됐어. 결혼 언제 할지도 모르는데 뭐."

어짜피 포장이사이기에 짐을 싸는건 어렵지 않았다.
숙련된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이 일사천리로 박스에 물건들을 척척척...
씨름선수 같은 덩치 큰 아저씨가 내 책들을 우악스럽게 잡아서
박스에 퉁 던져 버릴 때는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막내동생이 말했다.
" 이사가 이렇게 스트레스 쌓이는 일인지 몰랐어."

그랬다.
노가다 보다 힘든건
온갖 허접한 감상들과
한때 소중하다고 껴안고 있었던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퉁 던져 버릴때의 낯설음,
익숙한 곳을 떠난다는 서운함과 두려움,
애써 덮어두었던 기억을 들추는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오는 빛바랜 사진과 쪽지들,
쓸데 없이 쏟아지는 눈물....
이런거였다.

어제 출근할 때 정신이 없었다.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방에서 옷을 찾아 입고
화장품 상자를 못찾아서 엄마 스킨을 바르고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탈진할 만큼 피곤하고 허했다.
출근시간 30분 전에 도착.
회사앞 라면집에서 라면 한그릇을 게걸스럽게,공격적으로 먹었다.
왜 그렇게 허한지....

어디 콕 짱박혀서 좀 자고 싶었다.
그러나...8시부터 상무님이 호출하셨다.
성.대.리!

오랫만에 출근해서 아침부터 깨졌다.
"영업사원이 말이야........(기타생략).....생각이 있는거야?......."
말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그냥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낯선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며칠 굶은것 처럼....
왜 이렇게 허할까?
캔맥주를 하나 마시고 엎어져서 잤다.

술 취하면 나도 모르게 그집으로 갈 것 같다.
동생도 같은 얘기를 했다.
"그러니....당분간 만취하지 말라구!"

오늘 아침,
나의 멘토 송홍지 선생님께 만보기를 선물받았다.
"하루에 15,000보를 꼭 걷기로 약속해요.걸으면서 생각도 정리하구요!"

네....네...네....
허접한 감상은 오늘까지.딱 오늘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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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5-05-2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을 살았군요. 한 집에서... 오래 정들었던 것을 바꾼다는 것은 낯선 환경으로 간다는 것은 낯설고 불편한 감정이지요. 아니, 누가 우리 성대리를 저렇게 무시한답니까. 아마 저 사람은 성대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격려>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요. 알고 보면, 세상에 멘토 아닌 것은 없다니까요.

바람돌이 2005-05-2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20년정도를 산 친정집을 두고 결혼하고 첫날 내 집(이제는 부모님의 집이 아닌 전셋방일망정 내집이었죠) 으로 퇴근하던 날이 생각나네요.

로드무비 2005-05-29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분간 만취하지 마세요.^^

kleinsusun 2005-05-29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세상에 멘토 아닌 것이 없어요.
어떤 사람에게서도 뭔가를 배우니까요.
아직도 제 방은 난장판이랍니다. 오늘은 꼬박 방정리를 하려구요.
20년간 이사를 안해서 그런지 짐이 넘 많네요.

바람돌이님, 결혼하고 환경 바뀌면 당분간 힘들지 않나요?
무척 피곤할 것 같아요. 저도 체험해 볼 날이 있겠죠.^^

로드무비님, 방명록에 다독다독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