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 천하무적 홍대리>를 읽고 삶의 아이러니를 느꼈다. 홍대리는 더 좋은 만화를 그리기 위해, 회사를 접고 프랑스로 갔다. 그 곳에서 만화를 배우고 그린다. 그러니까 홍대리는 이제 없다. 그 대신 프랑스에는 만화가 홍윤표가 존재한다.더 좋은 만화를 그리기 위해, 자유롭게 창작에만 전념하기 위해, 회사를 접고 저 멀리 프랑스까지 갔는데.... 독자들은 <신 천하장사 홍대리>가 예전의 1편, 2편보다 현장감도 없어지고, 재미가 없다고 말한다.뭐.... 그림은 예전보다 좋아졌단다. 홍대리가 회사 생활이라는 스트레스 속에서 만화를 그렸을 때는 재미가 있었다. 홍대리가 회사를 떠나 만화가가 되자, 만화의 재미가 반감되었다. 왜? 만화가 홍윤표는 더 이상 홍대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 생활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기업들은 직급을 파괴하고, 호칭을 없애고(과장, 부장 이런 호칭 없이 OOO님이라고 부르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다),모든 결재는 전자결재로 하고, 사직서 조차 인사시스템에 입력하고, 전자결재를 받아야 한다.옛날처럼 양복 주머니에 사표를 넣어서 다니다가,더러운 일이 있으면 확 던져버리는 그런 낭만(?) 은 없다.그러니 만화가 홍윤표가 어떻게 홍대리의 생생한 스트레스를 전달할 수 있겠는가? 옛날 기억을 되살려서?No. 옛날 기억은 왜곡된다. 미화되기도 하고, 감상에 젖기도 하고.... 상식적으로 아무 것도 안하고 만화만 배우고 그리면 훨씬 많이 그리고 훨씬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은데,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홍대리 얘기가 아닌 프랑스 견문록 이런걸 그리면 모르겠지만, 홍대리 얘기를 계속 그리기에는 소재의 빈곤에 시달린다. 그러면 홍윤표는 홍대리를 그리기 위해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나?아이러니다.아이러니.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입사를 하는 대신 대학원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떨까? 영화 Sliding Doors 처럼 말이다.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공부도 쉬운 일이 아니니까, 스트레스를 받겠지. 박사과정 하는 친구들 보니까, 교수들의 만행이 팀장들의 만행 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더만...만약 내가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다면, 번듯한 명함 있고, 월급 꼬박꼬박 받는 나 같은 애를 부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아멜리 노통의 <두려움과 떨림>을 읽고, 커다란 위안을 받았다. 일본 회사에서의 그 피 말리는 경험이 없었다면, <두려움과 떨림> 같은 역작은 결코 쓸 수 없었을 테니까.... 스트레스도 힘이 된다. 좀 부풀려서 말하면 스트레스가 창작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무엇인가를 풀어 내고 싶으므로.... 계속 담아 두었다가는 터져 버리니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 나는 조직생활에 적합한 인간이 못돼."난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조직생활에 적합한 인간이 어디에 있을까?모두 편하고 싶어한다. 모두 자신의 개성을 존중 받고, 자신의 취향에 맞게 삶을 꾸려가고 싶어한다. 조직 생활에 적합한 인간이 따로 있을까? 그런 유형의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부도 잘하고, 싫은 소리와 각종 통제를 참아내는 피학적 취향을 갖고 태어 났을까?스트레스도 힘이 된다. 내가 소설이나 드라마를 쓴다면, 3각 관계, 4각 관계로 허구한 날 꼬이고 꼬이는 연애만 하다가 갑자기 여자 주인공이 인도나 아프리카로 떠나 버리거나, 갑자기 결핵에 걸려 죽어 버리는 그런 현실에서 유리된 인물은 등장하지 않을 꺼다. 소설의 여자 주인공이 항상 출판사 직원이거나 방송 작가, 잡지사 기자로 제한되지도 않을 꺼다. 최소한 내가 회사생활을 묘사하면,끔찍할 정도로 "리얼" 할 꺼다. 스트레스도 힘이 된다. 스트레스 속에서 황량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끊임 없이 외부적인 자극을 찾는다. 굶은 듯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 가고.... 아침 마다 종합비타민을 한 알 씩 먹듯이, 메마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감성적인 것들을 본드 마시듯이 코를 킁킁거리며 들이 킨다. 스트레스는 나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