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땐가?

아마도 사회 시간에 1차 집단과 2차 집단에 대해 배웠다. 1차 집단과 2차 집단의 구분은 중간/기말고사,각종 모의고사 등 온갖 시험의 단골 출제문제였다.

1차집단 - Gemeinshaft(공공사회) 2차집단 - Gesellshaft(이익사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참고 : 중학교 때 공부 디따 잘했다.)

1차 집단은 구성원 간의 대면 접촉과 친밀감을 바탕으로 결합되어 구성원들이 전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집단(예:가족)을,

2차 집단은 구성원 간의 간접적인 접촉과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적인 만남을 바탕으로 결합되어, 구성원들은 전인격이 아닌 인격의 일부만을 토대로 의식적, 인위적 상호 작용을 하는 집단(예: 회사)을 말한다.

내가 신입사원이었을 때, 정확히 말하면 97년 1월 부터 IMF가 터진 11월, 10개월 동안 난 회사가 왜 2차 집단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적어도 구성원들의 "친밀감"에 관해서는...,

우리팀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우리팀은 일명 "카츄샤"라 불렸다. 왜? 다른 팀과 달리 멋대로였다. 한마디로 "헐렁했다".

우리팀에서는 아무도 "대리님", "과장님" 이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 "형"이라고 불렀다. (예외 : 팀장한테는 "부장님"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여자 사원이었던 나. 아무도 나를 "성수선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다 "수선아!"라고 불렀다. 오버하는 선배들은 "우리 수선이"라고 불렀다.

술먹고 지각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시의 지각이란 의미는 5분,10분 이런게 아니라, 오전 10시~11시를 일컫는다.)

술먹고 지각하는 사람들이 허다했는데, 별로 뭐라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분위기였다. " 누구 아직 안왔어? " " 네.전사한 것 같은데요."

지각한 사람은 멋쩍게 들어오지도 않았고, 장렬히 전사한 지난 밤의 기억을 뽐내기라도 하듯 당당하게 들어왔다. 그리고....점심시간에 다함께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퇴근시간이 지나면 사이 좋게 사무실에 남아서 "전투 테트리스"를 했다. 비슷한 실력끼리 파트너가 되어 "전투 테트리스"를 피 터지게 하고, 어깨동무를 하고(드라마 <야인시대> 처럼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술을 마시러 갔다.

나는 최초의 여자사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귀여움"을 받았다. 내가 가끔 싸가지 없는 행동을 하거나, 돌출행동으로 팀장을 놀라게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선배가 없었다.

그저 "허허" 또는 "하하".

그런데.... 그렇게 "단란"하던, 1차 집단의 "친근감"을 우습게 여기던, 형님과 동생들만 있었던 우리팀은 11월에 진정한 2차 집단으로 탈바꿈했다.

IMF가 터지면서, 우리팀은 "부도 사고"를 당했다. OEM(위탁생산)으로 당시 우리팀의 제품을 생산하던 중소기업에서 부도를 냈다. 와장창.

액수가 작지도 않았다. 금액도 기억한다. 13억.

우리팀은 13억을 날렸다. 회사에서 난리가 났다.

모두들(신입사원이었던 나만 빼고) 업체 찾아 가고, 감사팀에 불려가고....신경전이 시작되었다.

감사팀에서는 왜 "담보" 없이 거래를 했냐고 추궁을 했다.

이 때, 나는 2차 집단이 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담당 임원, 팀장 다 오리발을 내밀었다. 몰랐다고 했다. (듣는 내가 더 놀랐다. 모르긴...)

그 당시 담당 과장이었던 사람은 사고가 터지기 얼마 전, 개인적인 이유로 퇴사를 했다.

그래서.... 그 과장을 "형님"이라 부르며 시키는 일만 묵묵히 했던 대리가 "독박"을 썼다. 그 착하디 착한, 미련하기까지 했던 대리는 "권고사직"을 당했다.

회사 사람 모두, 적어도 우리팀 사람은 모두, 그것이 "부당한 처사"라는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침묵했다.

사태는 그렇게 수습되었다.
그 때, 내게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래서....회사는 2차 집단이구나....
99년에 회사를 그만 뒀다. 유학을 간다고 설치다가 얼마 안되는 퇴직금을 다 쓰고 다른 회사에 입사했다.

02년에 회사를 또 그만 뒀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설치다가 슬그머니 또 다른 회사에 입사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참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저 멀리 아프리카에 가 있는 지혜, 저 멀리 마드리드에서 정신 없이 일하고 있는 소연 언니, 나의 Morrie 김영하 상무님. 모두 회사가 맺어준 소중한 인연이다.

그렇게 정을 나누고 정을 주면서, 머리 나쁜 나는 자꾸 까먹는다.

회사는 2차 집단이라는 것을....


그래서... 자꾸 기대하고, 자꾸 실망하고, 자꾸 배신감을 느낀다.

그래서.... 맨날 힘들어 한다.

오늘 팀장하고 면담을 하다가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쓸데 없는 일을 했는지를...

얼마 전에 <천하무적 홍대리>를 보니, 그냥 웃어 넘기기에는 씁쓸한 내용의 만화가 있었다.

출근길의 홍대리는 갑자기 나타난 UFO에 납치를 당했다. 그 UFO는 홍대리를 대전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대전에 홀로 남겨진 홍대리. 서울까지 올라와 사무실에 출근하니 오후 네시. 지금이 몇시냐는, 왜 늦었는지 말하라는 부장의 닥달 앞에 홍대리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홍대리의 처절한 독백.
" 말하고 미친 놈 되느니...."

그래. 홍대리의 말이 맞다.
나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약지 못한 내가 바보지... 그렇게 미련하게 일하고 알아주지 않는게 서운하다고 울먹거리면 뭘 어쩌겠다는거냐?

내가 잠시 미.쳤.었.나.보.다.
욕 먹지 않을 만큼만 일하고,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건전한 취미생활로 날리면서 그렇게 약게 살아야지....
난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미련할까? 다시 <마피아 경영학>을 읽어야 하는걸까?

오늘의 면담은... 뭐 하나 건진게 없는 밑지는 장사였다. 바보, 바보, 바보!!! 건지기는 커녕 이래서 "여자"는 안된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됐다.

예수님도 유다한테 배신당했다. 하물며..... 인간이 인간한테 기대를 한다는게.... 다른데도 아니고 회사에서,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달라고 한다는게... 말할 수 없이... 진짜로... 진.정. 웃긴다.
우하하하하하!
회사는 2차 집단이다. 기대를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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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4-11-17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페이퍼의 글과 홈피의 글들 모아서 책 내셔도 되겠습니다. *^^* 구독료는 못드리니 추천한방!

세벌식자판 2004-11-1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어째 섬뜩합니다.

역시나 사회는 무서운 곳... 그래도 뛰어들어야 하는...



에효~~~ 내일 걱정은 내일 해야지!

더마릴라 2004-11-17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깊이 공감합니다.

회사는 2차 집단. 매번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입을때 '기대를 버려야지'라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쉽게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저도 누군가에게는 실망을 안겨줄수도 있겠죠..

에고고.


kleinsusun 2004-11-17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 이렇게 조직생활을 힘겨워 하면서 다른 대안이 없으니 자꾸만 반복해야 하고...힘들다."

친구가 말하길.... " 매 맞는 아내들하고 같은 속성 아닐까?"

그날 친구랑 싸웠습니다.ㅋㅋ

릴케 현상 2004-11-17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