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회사에 다닐 때,
"또라이" 라 불리는 여자 대리가 있었다.
( "똘아이"가 맞는 표현인지, "또라이"가 맞는 표기인지는 모르겠다. 사전에 없겠지? 아마?)

왜 "또라이"냐구?

일을 못했냐? 아니다.
낙하산이냐? 아니다.
툭하면 사고를 치느냐? 아니다.

그 여자는 명문대 출신에,
얼굴도 이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번듯"하게 생겼다.
아주 날씬하기도 했다.
영어도 잘했고, 일도 깔끔하게 잘했다.

그런데 왜 "또라이" 냐?

하나, 특이한 옷 차림.
- 그 여자는 몸에 딱 달라 붙는 가죽 바지,
회사원치고 너무 밝게 염색한 긴 머리,
아주 강렬해 보이는 날카로운 아이라인,
저런건 어디서 팔까 궁금한 희한한 색깔의 가죽 잠바
이런걸 입고 다녔다.

둘, "꼴초"였다.
- 남자는 담배를 많이 핀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 몸에 나쁠 뿐이지...
하지만....
여자가 회사에서 담배를 피면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한 것 보다 더 관심이 쏠린다.
그것도 회식 할 때, 팀장 앞에서 담배를 핀다면....

그 여자는 "꼴초" 였다.
절대 눈치보지 않고 "당당하게" 아무대서나 담배를 피웠다.
물론 회식할 때도 팀장과 맞담배를 피웠다.

처음엔 말이 많았지만
본인이 워낙 당당하니 그 누구도 그 여자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셋, 남자를 불러 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 회사원들이 회식을 하면 주로 고깃집에서 소주를 마신다.
술잔 돌리고,
".....을 위하여!" 제창을 하고 난리가 난다.
예전엔 등심이나 차돌백이 같은 소고기를 주로 먹었지만,
경기가 나쁜 요즘엔 주로 삼겹살을 먹는다.
그리고 어데를 가느냐?
맥주를 한잔 더 하러 가기도 하고(그러니깐 다들 배가 나오지)
노래방을 가기도 한다.

그리고.....
"단란"을 가기도 한다.

보통 영업팀에는 여자 영업사원이 거의 없다.
드물게 한두명씩 있는 팀이 있다.

"단란"을 갈 경우,
팀장 또는 주무가 여자 팀원에게 택시비를 챙겨주며,
"피곤할텐데 일찍 가서 쉬어요." 하며
평소와 다른 친절을 보인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집에 간다.

그런데 그 여자는
"단란"이건 "룸"이건 어데건 끝까지 따라갔다.
남자들이 여자를 부를 때,
그 여자는 당당히 요구했다.

"저는 남자를 불러 주세요!"

"또라이"라 불리던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짤렸냐구?
일도 잘하는데 왜 짤리냐?
눈에 튀는 일을 해도 워낙 당당하면 사람들도 할말을 잃는다.
그 여자는 일 참 잘했다.
그 여자는 지금 그 회사의 해외법인에 주재원으로 나가있다.
거기서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신나게 자~알 지내고 있을 꺼다.

오늘 그 여자가 생각났다.
왜냐구?

오늘 내가 "또라이" 같은 짓을 했기 때문이다.

어제 팀에서 대규모 환송회가 있었다.
내가 아끼던 귀여운 Girl들 세명이 한꺼번에 회사를 그만뒀다.

난 어제 독일에서 거래선이 와서,
그 닳고 닳은 독일 아저씨와 거의 2시간 동안 신경전을 펼친 후
비싼 일식집에서 밥을 먹고
(유럽 사람들은 스시라면 환장한다.)
환송회 장소로 갔다.

이미 사람들의 혀는 다 꼬여있었고,
냉면까지 다 먹은 후였다.

내가 도착하자 마자 2차 노래방에 갔다.
난 노래방 정말 싫어한다.
특히 회식 끝나고 가는 노래방은....
하지만 분위기를 맞추려면 어쩔 수 없다.

한명이 노래하면
다들 일어서서 탬버린 치고
오버하며 춤 추고, 환호하고 난리가 난다.
나도 뒤질세라 동참했다.

노래방에서 광란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집에 가려했다.
정말 너.무.도 피곤했다.

그런데...
Girl들이 나를 붙잡았다.
자기들의 마지막 날인데 어떻게 그냥 갈 수가 있냐고....
81~82년의 girl들은 나에게 나이트를 갈 것을
애원 또는 강요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girl들과 함께 나이트에 갔다.
올해 두번째다.
girl들과 나이트를 가면 인간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철인경기에 도전할 아무런 필요가 없다.
girl들은 발라드 시간에 잠시 목을 축이고,
한번도 쉬지 않고 계~속 춤을 춘다.
그것도 열광적으로....

"마지막 날"이라는 특성상,
나도 girl들의 분위기에 맞추어 열광적으로 춤을 췄다.
태어나서 스테이지에 10번 이상 나가본 건 처음인 것 같다.

나는 애들이 지치길,
"이제 그만 가요!"
이 말을 하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애들은 몸을 더 심하게 흔들었고,
시간이 갈 수록 더 신나했으며,
아무도 집에 갈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우리(차장 1명, 과장 1명, 대리 2명)는 계산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그만 가자!"

애들은 대답했다.
"먼저 가세요! 우린 더 놀다 갈께요!"

그 때 울 차장님은 이미 그 시끄러운 나이트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우린 체력의 한계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 그럼 조심해서 놀아! 너무 늦지 말고." 란 말을 남기고
나이트에서 나왔다.

그 때가 2시였다.
출근시간은 8시.
집에서 7시에 나와야 한다.

아침에 나는 필사적으로 결연하게 노력을 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달 넘는 야근으로 이미 에너지의 고갈 상태에 있었고,
그 상태에서 스테이지에 10번 이상 나가는 진기록을 펼쳤고,
심각한 수면부족에 내 몸은 일어나기를 거부했다.

나는 팀장에게 문자를 날렸다.
" 죄송합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반차를 내겠습니다.
오후에 가겠습니다."
( 소심한 성대리, 전화하기가 두려워서 문자를 날렸다.
혹시 팀장이 문자를 보지 않을까봐 동료에게 팀장이 문자를
받았는지 확인해 달라고 확인사살까지 했다. 그것도 문자로.)

그러고는 시체 처럼 잠을 잤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일어나니 15시 30분.
충격적이었다.

나는 얼른 샤워를 하고,
거의 포기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회사에 도착하니 5시 15분 전.
꼭 내가 공장의 2교대 근무자 같았다.
들어가기가 .... 쩍 팔렸다.

엘레베터에서 IR 팀장님을 만났는데,
내가 그 때 출근하는건지 상상도 못하시고
" 외근했나봐? " 하셨다.
나는 멋적은 미소로 대답했다.

슬쩍 들어가서 팀장님 자리로 직행했다.
그리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죄를 지은 사람 처럼 고개를 처연하게 숙였다.

팀장님은 건강관리를 잘하라고 하셨다.
생각보다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내 자리로 가서 컴을 켰다.
그리고 멋적은 표정으로 이메일을 확인했다.

내 앞에 앉은 친애하는 Bruce 대리님.
눈이 마주치자 의미 있는 미소를 띄우며
" Susan! 멋있어! " 하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세시 반에 일어났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지 알았는데
뭐 별일도 아니었다.

난 항상 "범생이" 컴플렉스에 시달렸다.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한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
친구들에게 잘해줘야 한다,
남보다 잘해야 한다 등등....

끝없는 "Should".
그 많은 강박관념.

그런데...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 욕 좀 먹으면 어떠냐?
가끔 미친 짓 좀 하면 어떠냐?
가끔 망가지면 어떠냐?

나도 "또라이"가 될 수 있다.
뭐 "범생이" 표가 따로 있냐?

이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나도 "또라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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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9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0-2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너무 예뻐요.
그 또라이라는 분 너무 멋지네요.
어젯밤의 수선님도.

겨울 2004-10-3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라이가 되신 걸 축하드려도 될까요? 작정하고 늦은 것도 아니고 늦잠이지만, 그 불안과 더불어 쾌감에 공감합니다.

kleinsusun 2004-10-30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
저의 일탈을 함께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릴케 현상 2004-10-30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세상에 수선님이 이런 정도의 범생인 줄은 몰랐네요. 범생이의 삶을 알 길이 워낙 없었는데^^ 재밌어요 글도 참 잘 쓰시네요

kleinsusun 2004-10-3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범생이의 삶을 더 알고 싶으시면 연락주세요!
예를 들어 아직도 저녁을 먹고 3분안에 이를 닦지 않으면,
울 엄마가 잔소리를 해요!

릴케 현상 2004-11-17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닦기에 범생이의 삶의 단면이 있었다니...저는 이 닦으라는 말 평생 못 들어 본 것 같은데...치과에서 이를 몇 개 뽑기 전까지는 이를 닦은 기억이 머리에 입력 안 돼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