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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해부] 서울대 철학과 97학번 31명 인생 궤적 따라가 보니… [조인스]
대한민국 ‘인문학 위기’ 檢證 보고서
■ 8명 국내외에서 학문 계속…사시 합격 2명, CPA 1명, 취업 9명 ■ 철학이 직장에서도 먹힌다…인문적 문답수업 직장생활에 큰 힘 ■ 영국 케임브리지 고전철학 전공자 10명 중 9명 취업 주목 ■ 전문성 잃고 교양 수준의 인문학으로 변화…위기 돌파구일 수도 ■ 위기 진단 자체가 비인문적 발상…인문영역 예술로 확대 중
1997년도 학번은 대한민국을 벼랑으로 내몰았던 IMF 외환위기세대다. 그들 중 가뜩이나 어렵다던 인문학 전공자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서울대 철학과 97학번의 인생 궤적을 추적한다. 그들의 내성은 얼마나 강하며, 인문학은 얼마나 위기인가?
고래를 잡으러 간 영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병태는 입영열차를 탔다. 영자와의 뜨거운 입맞춤만 남긴 채-.
요절한 천재 영화감독 하길종의 대표작이자 히트작인 <바보들의 행진>. 1970년대 중반의 시대상을 잘 반영한 이 작품 속 두 주인공 병태와 영철은 철학도였다. 군부독재라는 냉엄한 현실 아래서 철학을 하기에 고뇌해야 했고, 돈이 안 되는 학문이기에 이성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던 인간군상들. 딱 32년 전 이야기다.
그리고 만 10년 전. 꿈을 안고 출발한 대학생활도 타성에 젖어갈 무렵, 그들이 딛고 선 이 땅은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아 비틀거렸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는 바람에 국가 파산 위기에 처했던 것.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저금통을 털고 장롱 속 금붙이를 들고 나와 위기를 넘기는 일이 벌어졌다.
대학 졸업반 선배들은 취업의 길을 열지 못해 주저앉았다. 그에 놀란 2~3학년 선배들은 군대로 도피하거나 휴학의 길을 택해 시간 벌기에 들어갔다. 아직 물정도 잘 모르면서 그냥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던 그들. 바로 97학번이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고비를 넘기고 급격한 산업화를 거쳐 지식정보사회로의 빠른 페달을 밟고 있다. 군사정권도 끝난 지 오래다. 이제는 풍성한 민주화의 열매를 따 먹는 시절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서 인문학은 냉대받는 학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심지어 한 인문학도는 “암울했던 군사독재시절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다”고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다.
“돈이 되는 것과 돈이 되지 않는 것.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대한민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 인문학도는 학문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만 존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탄했다.
이 학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해석하는 많은 학자의 주장도 다르지 않다. 몇몇 학자들은 그 시발점을 1997년 말부터 갑작스럽게 닥친 ‘외환위기’로 보고 있다. 소위 ‘IMF 시절’을 겪으며 사람들은 참 많이 변했다. 수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노숙자와 청년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나는 혹한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IMF 위기가 초래한 사회 변혁의 틈바구니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듯하다. 아니 오히려 더 거세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무역기구(WTO)와 자유무역협정(FTA)이 상징하는 신자유주의의 조류 앞에 사람들은 한층 더 돈을 중심으로 한 이분법적 사고에 세뇌당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해 9월 전국 인문대 학장들이 모여 시국선언을 했다. 유사 이래 최초라는 ‘인문학 위기’ 시국선언. 이후 폭발할 것만 같던 이 이슈는 약 반년이 흐른 지금 벌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먹고사는 일에 바쁜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던 이슈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인문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 전공자들의 삶은 어떨까? 10년 전 진리에 목말라 철학이라는 학문을 선택했던 이 시대의 영철과 병태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서울대는 한국사회에서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서울대망국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대한민국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몰리는 곳이다. 일종의 브레인 집단이기에 서울대가 차지하는 위상은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인문학에서 서울대 인문대는 국내 어느 대학보다 규모가 크고 연구 성과도 높은 것으로 정평나 있다. 이는 상아탑발 인문학의 위기를 논할 때 서울대 인문대를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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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철학과가 있는 인문관 6동으로 들어가고 있다. | 이런 연유로 서울대 인문대의 한 학과 중 한 학번 학생들을 표본으로 삼아 이들의 진로가 어떻게 됐는지 조사해 보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선정한 집단은 서울대 인문대학 철학과 97학번.
우선 철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철학이 모든 인문사회과학의 출발점이자 가장 기초가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97학번일까?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사회는 1997년 말부터 시작한 외환위기 사태를 계기로 급속하게 사고의 전환이 이뤄졌다. 사회가 그러한데, 대학과 그 구성원들도 변화가 없을 리 만무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철학을 전공하기 위해 입학한 97학번 동기생들은 학교에 다니며 가장 다이내믹한 인문학의 위기상황을 목격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선배들과 달리 ‘서울대’라는 간판만으로 취업하던 시절도 끝나고, 또 ‘철학도’라는 꼬리표가 더 이상의 자랑이 될 수 없는 마지막 세대가 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사회로 진출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들 97학번 집단이야말로 사회 변혁기에 가장 큰 혼돈 속에서 진학과 취업을 저울질해야만 했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인문대학 철학과 97학번으로 입학한 학생은 모두 31명(97학번 편입생 1명 포함). 이들 31명은 정말 다양한 길을 걷고 있었다. 아직 졸업하지 못한 재학생도 3명이나 됐다. 이들 재학생을 제외한 28명 중 3명은 끝까지 행적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졸업 후 진로가 확연히 드러난 사람은 총 25명.
이들 25명의 졸업 이후 진로 스펙트럼은 각양각색이지만, 크게 범고시파·취업파·진학파로 나눌 수 있었다. 물론 이들 그룹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갈래로 다시 나뉠 수 있다.
우선 범고시파의 경우 사법시험 합격자가 2명,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자가 1명이었다. 사법시험 합격자 중 한 명은 이미 수원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재직하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현재 모 지방법원에서 연수 중이다.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자는 현재 공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다. 그는 6월에 전역하면 국내 4대 회계법인(삼일·삼정·안진·한영) 중 한 곳에 바로 입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삼수생 이상 입학자 중 학구파 많다
특이한 점은 아직 취업하지 못한 미취업자 그룹 역시 범고시파라는 것이다. 확인된 미취업자 3명은 전원이 사법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취업파는 졸업생의 거의 3분의 1 수준인 9명이다. 인문계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취업하는 대기업과 금융권 취업자가 각각 3명씩 6명이었다. 대기업 진출자 중에는 사무직이 아닌 정보기술(IT) 개발 쪽으로 취업한 경우도 한 명 있었다. 금융권은 은행 2명, 보험회사 1명이었다. 이외의 취업자들은 공기업·출판사·IT벤처기업에 각 1명씩 진출했다.
의외의 분야는 진학파였다. 진학파는 모두 10명으로 우선 수적으로 타 그룹을 압도했다. 철학 또는 철학과 연계된 전공으로 진학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중에는 벌써 박사과정에 진입했거나 해외 유명 대학 대학원에서 유학 중인 경우도 있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8명의 철학 관련 진학자 중 4명은 본과 대학원, 1명은 협동과정인 고전학 분야로 진학했고, 나머지 3명은 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유학 중인 사람은 각각 미국의 카네기멜론대·브라운대, 영국의 옥스퍼드대에 재학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진학파 중 나머지 2명은 전공을 바꿔 진학했다. 한 명은 같은 대학 경제학과 대학원으로, 다른 한 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전문사과정에 진학했다.
이들 진학파를 분석하면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철학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삼수생 이상의 장수파였다. 같은 대학원 철학과로 진학한 4명은 전원이 삼수생이었다. 유학자 중 2명은 아예 고령 입학생으로 70년대 초반 출생자였다.
나머지 한 명의 유학생도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한 후 철학과 97학번으로 편입한 학생으로 나이가 많은 축이었다. 한 동기생은 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나이가 좀 들어 입학하는 사람은 스스로 진지한 고민 끝에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겠으나, 나이가 든 이후 입학한 학생들의 진학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97학번은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확인된 것으로만 봐도 지방학생 비율이 과반을 넘었다. 무려 18명(확인자만) 이상이 수도권이 아닌 지방 출신이었다. 요즘 서울대에 서울 강남권 학생이 집중되는 현상과 비교하면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에 대해 한 97학번 졸업생은 “지방 출신 학생이 줄어들면서 대학원 진학이나 철학 자체에 대한 관심도 현저히 줄어드는 것 같다”고 잘라 말했다. 여학생은 4명뿐이었다. 하지만 97학번을 기점으로 여학생이 점점 늘어나 요즘에는 거의 정원의 반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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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공부 계속하는 사람 점점 줄어…
이렇게 다양한 분야로 진출한 서울대 철학과 97학번들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들 중 대면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총 6명. 대체로 이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단순한 취업문제가 아닌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교양 수준 부재와 시스템상의 한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먼저 올해부터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유태권(30) 씨.
“요즘 고등학생들을 보면 전교 순위로 이과 1~20등은 의대, 문과 1~20등은 법대, 이런 식 아닙니까?”
유씨는 97학번 동기 중 가장 빨리 진학한 경우다. 유씨의 설명에 따르면 철학과에 입학하는 신입생 역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제가 입학할 때는 그래도 공부 잘하는 학생들 중에서 지적 호기심이나 관심이 있어 철학과를 지원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어요.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더군요.”
유씨는 “기본적으로 취업이 안 돼서 인문학이 위기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전제한 뒤 “돈이 안 되면 쓸모없는 것(학문)으로 치부하는 사회현실이 위기라면 위기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려 섞인 목소리로 이어지는 그의 말.
“서울대의 경우 인문2계열(역사·철학계열, 인문1계열은 어문계열)에서 국사학과의 인기가 압도적인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그나마 취직공부를 하기 편하기 때문인 것 같더군요.”
취업에 불리한 인문대에서 학문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접근보다 그나마 취업에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 국사학이라는 말이었다.
인문학 전공자의 강점 사회에서 인정 안 해
유씨의 주장처럼 실제로 인문2계열 전공 진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과는 국사학과였다. 2007학년도 전기 학과별 전공 진입 지원자 50명 중 절반인 25명이 국사학과를 지원한 것. 상대적으로 철학과·미학과·종교학과 등은 지원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
특히 종교학과의 경우에는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입학 전에 전공이 확정된 10명 안팎의 ‘전공예약제’ 학생 덕분에 폐과 위기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유태권 씨는 또 다른 ‘인문학의 위기’로 볼 수 있는 현상 하나를 지적했다.
“언론에서도 그렇고 이공계가 위기라고 하지만… 그래도 인문대에 비하면 혜택을 많이 받는 편이죠.”
그가 든 사례는 서울대 홈페이지에 떠 있는 ‘2007 이공계 국가장학생사업’(과학기술부·한국과학재단 주관)이라는 정부의 지원정책이었다.
이 사업은 이공계열 학과(부)에 입학한 우수 신입생을 대상으로 총 2,400명을 선발해 학비 전액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게다가 다음 학기에 성적이 좋으면(전체평점 A 이상) 50만 원의 교재비까지 지급한다는 세부사항도 붙어 있었다.
유씨는 “이런 정부의 지원정책은 바람직한 방향”이라면서도 “왜 인문학에는 이런 지원이 없느냐”고 반문했다.
유씨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최동호(31·철학과 석사과정 수료) 씨는 인문학 전반보다 철학에 대한 부분을 주로 언급했다.
“철학은 인문학 중에서도 특별한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제시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학문이 철학입니다. 이런 철학이 위기를 맞으면 문제가 심각해지겠죠.”
최씨는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의 상황은 ‘상대적 위기’로 해석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상대적 위기’란 어떤 의미인지? “미국을 예로 들자. 미국에서도 의학·법학과 같은 실용학문의 인기가 높다. 그렇다면 미국에서도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봤을 때 한국보다 철학에 대한 관심, 나아가 인문학적 교양에 대한 관심의 수준이 높은 편이다.”
―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 있나? “논문만 봐도 그렇다.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인 측면에서도 한국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철학이란 학문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진학하는 학생이 줄어들고 해서 실력 없는 사람들이 경쟁하면 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최씨는 “결국 인문학 자체가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교양 수준에 그칠 것”이라면서 “취업활동에 바쁜 사람이 칸트니 헤겔이니 하는 것을 들을 수준이 되겠느냐”며 개탄했다.
대면 인터뷰에 응한 나머지 4명은 모두 철학이 아닌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연기자 지망생에서부터 현직 판사까지 철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방향으로 진로를 선택한 이들을 만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물어봤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예술전문사과정을 밟고 있는 허정도(28) 씨를 만난 것은 지난 4월8일. 허씨는 인터뷰 도중 한 동기생의 진로를 지목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사회에서 조금만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해줬으면 잘했을 친구인데 참 아쉽다.”
허씨가 언급한 A(29)씨는 재학시절 적극적으로 빈민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활동 등을 하다 졸업 후 공익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일반 기업에 재취업해 현재는 온라인게임을 개발하는 한 IT벤처기업의 총무팀 직원이 됐다.
허씨는 “졸업하고 진짜 하고 싶었던 분야로 진출했는데 어쩔 수 없이 다른 길로 가야 했던 경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인문학 위기 진단, 교수마다 달라
사회 시스템의 한계로 대학에서 고민하고 실천했던 부분을 사회활동으로 연결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는 것 자체가 ‘인문학의 위기’의 한 단면 아니냐는 것이 허씨의 논리였다.
취업이나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은 ‘인문학의 위기’ 자체에 대한 생각보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능력이 뛰어남에도 사회에서 잘 몰라주는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SK C&C에 근무하는 이현수(30) 씨는 “철학을 공부한 것이 사회에 나와보니 큰 힘이 된다”면서 “수업방식 자체가 10명 내외의 학생과 교수가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식이어서, 내게는 일상적인 것이 직장과 조직사회에서는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술적인 부분은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지만, 기초가 되는 부분(인문학적 교양과 의사소통 능력)은 그렇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런 생각은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한 뒤 공군 장교로 복무 중인 이용권(28) 씨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은 흡수력이 빠르다. 재료만 갖다주고 조금만 기술을 익히면 무엇이든 잘 해내는 사람들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수준이 높지 않나?”
이씨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미래상도 이와 결부시켜 답했다.
“조직에서 직급이 높아지고 책임이 늘어나면 관리능력 측면에서도 철학을 공부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수원지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인 고상교(30) 씨도 “굳이 인문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인문학적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 존경받는다”는 말로 이현수 씨와 같은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이들 철학과 97학번 역시 취업의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은 듯했다. 졸업을 앞두고 철학과 동기 2명(2명 모두 현재 은행에 취업)과 함께 면접 스터디를 한 이현수 씨는 “나는 학부시절부터 IT벤처기업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 그나마 나았지만, 다른 철학과 동기나 후배들은 그런 정보에 취약했다”고 한다.
이현수 씨는 현재 서울대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학기 단위로 2~3명의 후배에게 사회 선배이자 대학 선배로서 사회생활을 위한 여러 가지를 조언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씨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유는 자신이 취업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후배들만큼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이씨는 “특히 인문대 후배들을 더 챙기게 마련”이라면서 “취업 정보에 가장 취약한 학생들이 인문대생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실제로 요즘 서울대 인문대생 사이의 최대 화두는 취업이었다. 서울대 경력개발센터에 문의한 결과도 취업과 관련해서는 역시 인문대가 가장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력개발센터의 유현실 전문위원은 “서울대 역시 인문대 학생들은 취업에 힘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교내 리크루팅을 와도 일차적으로 선호하는 전공은 상경계열과 이공계열 학생이라는 것.
최근 인문대 학생들 사이에 상경계열이나 법학과 등으로 ‘전과 열풍’이 부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또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으로 상경계열을 택하는 학생이 많은 것도 취업문제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직접 학생을 가르치는 인문학 교수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해 9월 고려대에서 ‘인문학의 위기’ 시국선언을 주도했던 조광(62·한국사학과) 전 문과대학장은 “전반적으로 사회에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미약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정리했다. 다음은 조 전 학장과의 인터뷰.
― ‘인문학 위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 정신의 위기를 의미한다. 국가 연구비 지원이 적고, 대학원생 수가 줄어드는 것은 말단의 문제다. 인문학 정신이 부재해 우리 사회가 황폐화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 학생들은 전공 교수들이 취업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데.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 아니다. 취업문제에 교수가 관심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일반 응용학문(사회과학 등)이 아닌 이상 한계가 있다.”
인문학 위기 진단 잣대가 비인문학적이다
― 일부 폐과 위기에 있는 학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대표적인 것이 독문학과와 불문학과인데… 물론 이 두 언어가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인문정신은 우리 사회를 풍요하게 하는 데 상당부분 기여한다. 그런데 이 분야 전공자가 너무 줄었다. 국가 100년대계에 상당히 불행한 일이다.”
― ‘인문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일반의 인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시장원리가 적용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분야가 있다. 교육부가 곧잘 그러는데, 그 자체가 비인문학적 발상이다.”
조 전 학장은 “가령 모든 대학에 독문과가 있을 필요는 없다”면서 “몇 개 대학, 꼭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가 아니더라도 집중할 필요는 있다”는 생각도 피력했다.
서울대 철학과 97학번을 직접 지도했던 박찬국(47·철학과 학과장) 교수는 조 전 학장과는 다른 분석을 내놨다. 박 교수는 “전통적인 인문학의 범주인 문학·역사·철학의 범주 설정이 시대에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운을 떼었다.
“크게 봐서는 음악·영화 등과 같은 예술도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면 새로운 인문학의 영역이 많이 생기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인문대 진입 학생 수가 줄고 졸업자들의 취직 자리가 준다고 해서 위기라고 말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인문학의 위기라기보다 기초과학 전반의 위기로 봐야 옳다. 예전에는 수학·물리학 등의 분야에 대한민국 수재들이 가지 않았나?”
박 교수는 서울대 내에서도 인문학은 여전히 인기 있는 분야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서울대에서 철학 관련 교양과목을 수강한 학생은 연인원으로 무려 4,000여 명. 이는 1만9,000여 명 서울대 재학생의 거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를 인문대 전체로 확대하면 인문학 교양강의 연 수강인원은 3만여 명이나 됐다.
하지만 박 교수는 이런 인문학 교양과목의 인기를 이야기하면서도 “직장문제가 불안하니까, 서울대 나와도 예전처럼 바로 직장을 잡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니까 취업에 유리한 전공에 학생들이 몰리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인문대학장인 이태진(64·국사학과) 교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을 ‘위기’가 아닌 ‘비상’이 걸린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다음은 이 학장과의 일문일답.
― 어떤 부분에서 ‘비상’이라고 봐야 하나? “내가 공감하는 부분은 연구보다 교육의 위기 쪽이다. 인문대 학생들이 법대나 경제학 강의를 많이 듣기 위해 전공 강의는 최소화해 듣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정상적인 교육이 이뤄지겠나? 하지만 인문학이 할 일이 많아지는 시대다. 표현수단과 도구가 많이 바뀌고 인간의 삶도 바뀌고 있다. 이런 것을 연구하는 것이 인문학 아닌가? 그래서 ‘위기’가 아닌 ‘비상이 걸렸다’고 표현하고 싶다.”
― 그렇다면 교육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기업들이 실용학문 전공자를 선호하는데, 이런 것을 뛰어넘어 인문학 전공자의 장점을 인정해 차별하지 않는다면 쉽게 해결될 부분이라고 본다.”
― 대학에서 노력할 부분도 있을 텐데…. “원래 인문학자(교수)들은 학문 성격상 보수적인 편이다. 그렇다 보니 교육 프로그램도 단조롭다. 하지만 학부생들 모두가 다 진학해서 공부할 사람은 아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취직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학문 후손세대 양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전통적 교육 방식에 변화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역문화전공과 같은 과정을 만들어 학생 스스로 자신을 확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서울대에서 이런 시스템을 채택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본다.”
인문적 창조력 존중해야 다음 먹을거리 나온다
이 학장은 그러면서도 “기존의 대학원 진학자에게는 확실한 장학제도를 보장해 공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인문학은 과연 돈이 안 되는 비실용적 학문일까? 인터뷰에 응했던 한 서울대 철학과 97학번 졸업생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국의 케임브리지대에서 고전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한 학년에 10명인데, 그 중 한 명만 진학하고 나머지는 모두 취업한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취직이 너무 잘되기 때문이다. 회사 교육은 단기간의 연수를 통해 금방 가르칠 수 있지만, 기본적인 바탕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고 기업이 판단한 결과다. 한국도 현실에서 검증이 안 돼서 그런 것이지,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의 동기생 중에는 기업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한 명인 이현수 씨는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지식이 아닌 폭넓은 사고가 중요한데, 이런 것을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인문학”이라고 강조했다.
수많은 사람이 한국사회의 다음 먹을거리를 걱정한다. 하지만 그 먹을거리가 인문학에서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미국·영국 등 선진국에서 검증된 인문학도들의 창조적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한 한국의 발전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위기’는 또 다른 말로 ‘기회’다. 이런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문학도들이 공부할 수 있고 취업할 수 있는 길을 사회가 마련해 줘야 하지 않을까.
인터뷰 | ‘연구공간 수유+너머’ 고병권 대표 |
“대중의 인문학 목마름은 오히려 높아져…상아탑 인문학의 위기일 뿐”
재야 인문학자들의 공동체인 ‘연구공간 수유+너머’. 남산 자락에 위치한 이곳을 찾은 것은 지난 4월4일. 연구공간 내 카페에서 고병권 대표를 만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인문학의 위기는 굳이 말하자면 제도권(대학·대학원) 인문학의 위기다. 물론 한국사회에서는 큰 부분일 수 있다. 문제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대학이 지식의 생산과 소비를 독점해 왔다는 점이다. 인문학의 생산과 소비를 대학이 모두 독점하고 있으니 제도권 인문학이 위기에 빠지면서 사회 전체로 확산하는 것이다.”
― 제도권 인문학이 위기에 빠진 원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문제는 최근 대학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요즘 대학에서는 이른바 ‘아카데미 캐피털리즘(Academy Capitalism)’과 ‘기업가 정신’이 첨예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법인화 움직임이다. 대학이 점점 기업화돼 가고 있다. 또 한국사회가 지식기반사회로 진입하면서 사회는 지식상품의 생산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지식이 이런 부분에서 뒤떨어지는지 찾게 마련이다. 상품 생산에 경쟁력이 없는 학문, 인문학이 바로 거기에 딱 들어맞는다.”
― 지난해 9월 전국 인문대학장들의 ‘인문학 위기’ 시국선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인문대 교수들이 거국적으로 시국선언을 한 경우는 유사 이래 최초라는데… 내가 기억하기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한국사회의 뜨거운 이슈에 대해 인문학자들이 발언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면서 돈 안 들어오고, 제자 안 들어오니 그런 선언을 한다는 것이 난센스라는 말이다.”
― 대학 이외 공간에서의 인문학은 어떻게 보나? “전반적으로 인문학을 사유하는 방식이 얕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도 대학이 인문학을 독점하려다 대학이 망한 데서 기인하는 문제다. 사실 일반인들은 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목말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이런 인문학의 생산과 소비를 독점했던 대학의 문턱은 너무 높다. 그 문턱 역시 상아탑 스스로 쌓은 것이다.”
― 고 대표가 생각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동안 지역 도서관이나 재야 학술단체처럼 대중이 인문학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인문학에서도 다른 방식의 새로운 긍정적 가능성이 커졌다. 가령 ‘독서클럽’의 증가가 그런 경우다. 누구든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이런 프로그램을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곳이 지역 도서관 같은 공간이다. 인문학 운동은 충분히 가능하다.” |
김상진_월간중앙 기자 (kine3@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