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연인은 동시에 똑같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

출근 길에 이 말을 읽는 순간

잠이 확~ 깼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 항상 이게 문제였어!

그래서......항상 연애는 어렵다.

 피아노,  외국어, 테니스, 서예....

어렸을 때부터 많은 걸 배워 왔지만

이렇게 해도해도 늘지 않는,

이렇게 학습효과가 젬병인 건 정말.....연애 밖에 없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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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연인] 정사(情死)로써 사랑의 열정을 구원

당대 최고 가수와 지식인 유부남은
열정적 일탈로 기존 체제를 먼저 공격했고
사회는 도덕을 들먹이며 신경증적으로 응전했다
이에 동반투신한 것은 비정치적 정치일 수밖에

한겨레
» 윤심덕
동무와 연인/⑭ 윤심덕과 김우진

플로베르였던가, ‘두 연인은 동시에 똑같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다’고 했던 사람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롤랑 바르트)는 연애의 진실은 연인들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만고의 고민처럼 보이지만, 플로베르처럼 돌이켜 생각하면 바로 그 고민의 형식이야말로 연애의 유일한 가능성이다. 내가 연애를 ‘물매’의 효과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체제와 더불어 굴러가는 대중은 혼인 제도로써 그 중층적 모순의 속살을 가린다. 그리고 관습 속에 순치되며, 종교나 이데올로기로써 그 제도를 정당화한다. 제주도 유채꽃의 신화는 그렇게 쉼없이 재생산된다. 이것은 아무런 냉소가 아니다. 만일 제도와 관습이 연애의 자기모순적 진실을 숨기지 못할 경우, 그리고 ‘제도라는 매듭’(알랭 바디우)이 풀린 채로 갑순이와 갑돌이가 정직하게 상대를 대면할 경우, 연애의 종말은 총알보다 빠르게 다가온다. 우주 만상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사랑 속의 평형(equilibrium)은 곧 현상유지(status quo)에 다름 아니며 현상의 평화는 곧 권태로 이어진다. (그런데,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권태가 아닌 것’!) 니체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나태한 평화’인 셈인데, 말할 것도 없이 평화가 모든 부분에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정사(情死)는 묘한 위상을 갖는다. 영원한 평화를 향한 상상적 도약이면서도, 한편 그것은 권태로운 체제의 평화로부터 사랑의 열정을 구원한다. 그러므로 기존의 체제를 먼저 공격하는 것은 오히려 연인들의 열정적 일탈이다. 물론 체제는 관습과 이데올로기, 도덕과 종교를 들먹이면서 신경증적으로, 혹은 폭력적으로 응전한다. 윤심덕이 애인 김우진과 정사하기 15개월 전인 1925년 3월호 <신여성>에는 그녀의 애정 행각을 비난하는 ‘윤심덕 사건에 대하여’(박신애)라는 글이 실린다: “윤씨의 이번 행동은 타락한 행동이다. 예술가이면 예술가, 사업가이면 사업가, 가정부인이면 가정부인, 교육가이면 교육가, 직업부인이면 직업부인으로 똑똑히 사람이 좀 되어 갑시다. 윤씨야! 기왕 국외로 갔다는 소문이 있으니 거기서 태평연월이나 노래하면서 건강히 일생을 지내라. 누구나 그대 보기를 원치 않을 테니.” 여기에서도, ‘예술가답게… 그리고 가정부인답게’라는 체제수호의 동일성 윤리는 연애라는 물매와 그 변신 욕망과 절망적으로 대치한다. 그러므로 윤심덕이 1926년 8월 5일 새벽, 그녀의 애인을 부둥켜 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진 일은 결국 비정치적 정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권태로운 체제의 평화와 그 평화의 폭력으로부터 사랑의 열정을 치명적으로 구원하는 일이다.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1999)에서도 1920~30년대 조선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의 변동에 따른 ‘주체의 격심한 변동’을 말한다. 역시 그의 표현처럼, 이로 인한 신구 여성들 사이의 갈등은 세대 갈등에 앞질러 적대적 관계로 치닫는다. 통속적인 해석처럼 윤심덕의 비극은 봉건적 사회 구조를 뚫고 막 태동하던 신여성들의 좌절된 사회적 정체성을 극명하게 보이는 ‘자살적 몸짓’이다.

최초의 여류성악가, 당대 최다의 음반판매량을 보유한 최초의 대중 가수, 방송국 사회자, 그리고 패션모델이었던 윤심덕은 매력적인 외모에 맵시있는 스타일의 선구적인 신여성이었다. 특히 내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쾌활하다 못해 당돌하고 일견 무례해 보였다는 그녀의 성격이다. 이것은 힘겹게 미래를 선구하려는 사회적 약자의 징후적 태도로서 주의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약자가 꼭 무례한 것도 아니고 무례한 자가 반드시 약자도 아니지만, 총명한 약자의 무례함 속에는 종종 중요한 사회적 징후가 담긴다. 가령, ‘자신보다 예쁘고 명석하고 말까지 빠른 여자(샤틀레 부인)를 애인으로 두는 일’에 볼테르는 비교적 성공적이었을 뿐 아니라 극히 생산적이기도 했지만, 김우진은 ‘자신보다 예쁘고 명석하고 당돌했던 여자(윤심덕)’와 더불어 현해탄에 몸을 던져 서른 살 젊은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러나 1926년 8월 5일의 새벽에 관부연락선의 선미를 박차고 현해탄의 심연 속으로 몸을 던지게 한 그 절망은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물론 그것이 (‘구’남성 이문열씨의 ‘시대와의 불화’와는 완전히 다른 뜻에서) ‘신’여성 윤심덕이 겪어야 했던 ‘시대와의 불화’와 그로 인한 절망의 몫이라는 데에는 아마도 이견이 크지 않을 테다.

» 김영민/전주한일대 교수·철학
하지만 그 불화와 절망이 온전히 그의 유부남 애인이었던 김우진의 것이기도 했을까? 연정의 일심동체라는 그 완벽한 거짓말을 잠시 믿어두더라도, 이 두 연인들을 대마도 앞바다에 투신하게 만든 어느 먼 신새벽의 절망은 대체 어느 정도의 공감과 합의에 의해 조형되었을까? 두 사람을 치명적 결정으로 내몰아간 그 절망의 내용은 서로간에 평등한 것이었을까? 가령, 윤심덕이 ‘김우진보다 예쁘고 명석하고 당돌했던 여자’라고 한다면, 바로 그 편차만큼 그 죽음에 이른 절망의 내용 역시 둘 사이에서 어긋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내와 자식을 가진 유부남과의 정사라면 그 결행 속에 개입하는 수없이 복합적인 감정의 난반사와 태도의 빗금(偏倚)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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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1-26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는 하다 보면 늘어요.맘 편하게 먹고-뭐 꼭 사랑해봐야겠다-이런 맘을 좀 내려놓고 접근하면--언제나 연애하는 맘이쥐.^^
저도 오늘 한겨레 봤는데...몇 권의 책이 눈에 띄더군요.윤대녕의 새소설집<제비를 기르다>새로 번역한 장자,..그리고 <오늘의 세계적 가치>

글샘 2007-01-26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는요... 학습 효과, 반복 학습으로 실현되는 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연애는 '잠재적 양태'가 '현실적 양태'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느끼는 심리적 감정이 아닐까 합니다. 봄이 여름이 되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오늘부터 여름! 이런 거 없잖아요. 봄 속에 여름이 있었고, 그렇게 봄과 여름은 몸을 섞어 자연스러운거죠. 주역에 보면 태양과 소양이 있는데, 봄이 태양일까요? 여름이 태양일까요?
봄이 태양이에요, 여름이 소양이고. 뜨거운 열기를 '잠재적 가능태'로 안에 품고 있는 사람이 훨씬 뜨거운 사람이지요. '현실적 실현태'로 이미 드러난 열기는 주체하기 힘든 법 아닐까요?(아침부터 무슨 삽질하는 소린지...) 즐건 하루 보내세요^^

2007-01-26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7-01-2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드팀전 2007-01-26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퇴근하기전에 글샘님의 글을 보니까... 정답이 하나는 보입니다.
저런 이야기하면 연애하기 힘들다..^^

로드무비 2007-01-2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똑같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재미없지요.
아시면서......^^

2007-01-29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29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