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브릴과 자밀라는 보통의 날처럼 서로 다소 거리를 두고 마을의 경계로를 향했다어느새 라니아와 카림의 시신은 치워져 있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지브릴은 그게 더 섬찟했다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질 만큼이나.

자밀라는 지브릴이 서두르는 이유를 짐작할 듯도 했지만하필 이런 일이 벌어진 날에 꼭 벗어나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 걸까?'

 

마을을 벗어나는 길은 경계로를 지나는 한 길뿐이었고 그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하나는 여기보다 더 시골로 향하는 길하나는 수도를 향하는 길목에 있는 아탈라라는 도시로 향하는 길자밀라와 지브릴은 사우디로 가기 위한 여정이었기에 당연히 아탈라를 향해야 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경계로여서 지브릴이 자밀라의 손을 잡으려 하자 자밀라가 갑자기 흠칫하며 지브릴에게서 떨어져 섰다지브릴도 정신을 가다듬고 돌아보자 멀리서 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한두 대가 아니다저들을 피해 빨리 벗어나려고 한다 해도 이미 때는 늦었을 뿐이다.

지브릴과 자밀라가 차를 바라보고 서있자 금세 무장한 채 검은 상하의를 입고 검은 쿠피야(두건)를 한 건장한 남자들이 연이어 트럭에서 내렸다.

 

앗쌀라무 알라이쿰처음 보는 분들인데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가 아탈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와합 마을이냐?”

그렇습니다.”

 

이방인들그것도 무장한 이방인들이 단체로 들이닥치자 지브릴은 극도로 긴장했다나는 당신들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표현하고자 상당히 사근사근한 어조로 인사말도 건넸으나 저들은 인사말도 씹으며 다소 과격한 말투였다그들 중 하나가 다시 자신이 쓴 히잡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자밀라를 보더니 지브릴에게 물었다.

 

저 난잡해 보이는 여자와 너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거냐혹시 율법을 어기려던 찰나였던 거냐?”

아닙니다전혀 난잡한 여자가 아니고 마을에 인망 높으신 아브라힘 씨의 딸입니다오늘 오전 마을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친구를 잃고 방황하고 있는 걸 제가 찾아내 다시 마을로 인도하고 있었던 겁니다.”

마을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말해 보아라.”

 

소총을 든 검은 의복의 남자들 중 하나의 질문에 지브릴이 진땀을 빼며 대답하고 있을 때였다검은 의복의 남자들 사이에서 하얀 색 토브를 입고 쿠피야 위에 사우디 방식으로 두 개 이갈(천을 돌돌 말아 만든 링)을 한 노년의 남성이 나오며 사건의 경위를 물었다.

 

 

와합 마을 사원에 그들이 찾아왔고 하얀색 토브를 입은 그 남성이 율법학자 슬레이만 씨와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그들은 오늘 죽은 라니아의 아버지 압둘라 씨에게 그런 딸은 잘 없애버렸으며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단호히 행동한 압둘라 씨 행동은 본받을 만한 태도라며 격찬했다압둘라 씨는 뭔가 심각한 모습을 보였고 자밀라의 아버지 아브라힘 씨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자밀라는 남자들만 모여 토론하는 장에 오래 머물 수 없어 집으로 향했다지브릴은 동네 청년들과 남아 마을 유지들과 율법학자가 이 이방인들과 무슨 협의를 하는지 궁금해 머물러 있었다.

이방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하얀 토브의 남자는 급기야 마을 청년들에게 연설하기에 이르렀다.

 

근래의 무슬림들은 타락했고 의미를 잃었으며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역할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알라를 통해 수긍해가는 그런 시대를 만들 것이다낡은 원칙은 없는 것이다우리가 그것이 새로이 거듭나게 만들 것이다죽어있는 이슬람을 우리는 되살릴 것이다죽어있던 너희가 모두 부활하는 순간을 우리는 가져다줄 것이다우리를 믿어라우리를 따르라이것이 무슬림의 사명이며 무슬림의 정신이 될 것이다우리는 무슬림의 시대를 만들 것이다우리는 무슬림의 정신이다바로 우리가 이슬람의 시대정신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을 IZ로 명명했다마을의 청년들이 모두 그의 연설에 감동하는 듯했다지브릴마저 수긍할 법한 연설이었다고 마음 깊이 납득하는 중이었다그런데 왠지 압둘라 씨와 그의 아들 무자히드의 안색이 밝지 않았다그들은 그 연설의 이면에 숨은 다른 뜻이라도 읽은 것일까아니면 마을 유지들과 율법학자가 그들과 담론할 때 무언가 다른 이야기라도 들은 것일까지브릴은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쳐갔지만 한 편으로는 새로운 날을 찾아간다면서 진정으로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걸 보지 못할뻔 했구나’ 하는 생각에 이상히도 다행스러웠다.

 

내일이면 무슬림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보게 될 거야!”

 

자신만큼이나 들뜬 기대를 안은 마을 청년들을 보며 지브릴은 생각했다.

내일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양이 떠오를 것만 같아아마도 이런 날이 자밀라가 말해오던 새로운 날일 거야.’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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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합 마을과 지단 마을의 경계 근처에 있는 이젠 폐가가 된 건물 앞갓 떠오르는 태양 아래 지브릴과 자밀라가 서있다지브릴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은 날이면 되지 않을까 바랬다하지만 자밀라는 의견이 달랐다그녀는 굳이 와합 마을을 떠나 멀고 먼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도망가자며 지브릴을 설득하고 있었다아니 날 좋은 오늘뿐만이 아니라 흐린 날도 비오는 날도 이곳에서는 드물게 번개가 치는 날까지도 그런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지브릴은 처음엔 망설였으나 자밀라가 이렇게 말하던 날 그만 설득당하고 말았다.

 

지브릴 너 지참금은 있는 거야?”

조금만 더 모으면 아브라힘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 적정선이되지 않을까 싶어.”

우리 아빠 욕심을 네가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아그분이 말하는 적정선이라는 건 네가 벌어올 수도 없는 정도의 지참금을 말하는 거야넌 나 없이도 잘 살아가겠지그러니까 이러는 거지?”

 

그녀의 말에 지브릴은 난감했다태어나 처음 바라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지브릴에겐 그녀였다지브릴은 이젠 자밀라 없는 내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게다가 이미 두 사람은 손까지 잡지 않았던가마을 사람들에게 들킨다면 이미 입맞춤까지 한 것으로 오해받고 자밀라는 그녀 아버지의 손이나 친척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지브릴은 자밀라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거라 생각했다그녀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사우디로 떠나야 한다그래야만 한다지브릴은 그녀의 말이 아니었어도 매일을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지브릴 우리에겐 새로운 날이 기다리고 있어너와 내가 함께라면 우리는 곧 새로운 날을 맞이할 거야.”

 

지브릴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새로운 날이 꼭 필요할까오늘 같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은 늘 망설임을 불러들였고 그 망설임은 두려움이 원인인 게 확실했다하지만 지브릴로서는 그 두려움의 근거가 무언지 짐작되지 않았다.

 

여기서 지금 뭐하는 거예요?”

 

마을 일이면 큰일이던 작은 일이던 가리지 않고 들쑤시고 다니는 하싼이란 소년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면서 다급히 소리쳤다.

 

지단 마을 놈들이 무슨 꿍꿍인지 흔적도 안 보이기에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나왔어.”

 

지브릴은 자밀라와 단둘이 있는 걸 하싼에게 들키자 애써 둘러댔다.

 

지금이야 당연히 여기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겠죠모두 와합과 지단의 경계로에 다들 모여있으니까요.”

무슨 일인데?”

그게... 말로 듣는 것보단 얼른 가보는 게 나아요.”

 

자밀라는 히잡을 다시 매무새를 고쳐 쓰고는 하싼과 지브릴을 조금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와합과 지단의 경계로에 다다르자 압둘라 씨의 딸 라니아와 지단 마을 카림이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와합 마을 사람들과 지단 마을 사람들이 각각 모여 그들에게 조금 떨어져 둘러싸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지브릴이 압둘라 씨에게 물었다압둘라 씨는 설명하기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다가 돌아섰고 라니아의 오빠 무자히드가 나섰다.

 

라니아와 카림이 두 마을의 경계에서 손을 잡고 있다가 내 눈에 띄었네나는 라니아를 죽이고 그만 그것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마침 슬레이만 씨와 마주쳐서 그분이 시아파 남자와 통정한 것은 그저 여자 한 명만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하셔서 일이 좀 커지게 됐어.”

 

무자히드는 그다지 신심이 유별나게 깊다거나 한 인물이 아니었다하지만 그에게도 가문의 명예가 달린 상황에 여동생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그냥 잠시 손만 스쳤을 뿐인데요.”

더러운 변명 따윈 필요 없다너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고 게다가 시아파 난봉꾼과 사통한 요사스러운 년일 뿐이야.”

 

라니아의 아버지 압둘라 씨가 단호한 어조로 모든 마을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아버지 지금은 21세기에요어느 도시에선 여자들도 운전을 하고몇 해 전 사우디에선 여성에게 투표권도 줬다고요아버지도 그러셨잖아요. '세상이 변하고 있나 보다'라고.”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란 게 있는 거야무슬림은 꾸란과 하디스에 의존해 살아가는 거야너는 지저분한 행동으로 너희 가문과 율법을 더럽히고자 했다게다가 배도자의 자손인 시아파 무리의 하나와 말이다그러니 오늘의 죽음을 달게 받거라.”

 

율법학자 슬레이만 씨가 근엄한 어조로 선고를 하듯 선언했다.

 

이게 뭐예요우린 그냥 사랑하는 사이일 뿐이라고요사랑이 죄가 되나요그게 그렇게 죽을 죄예... !”

 

사랑을 입에 담으며 변명을 하는 라니아의 얼굴에 사정없이 돌을 던진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 압둘라 씨였다조금만 더 입을 놀리게 두었다가는 자신의 가문에 평생 수치스러울 치욕의 날로 기억되리라 여긴 압둘라 씨는 망설이지 않고 딸의 얼굴에 돌을 던졌다.

 

종교가 무슬림을 살게 한다면 오늘의 우리를 죽이는 것은 종교가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지만 세상은 다 변하고 있어요변하지 않는 건 인간들의 잔인함과 야만성뿐일 겁니다자신의 딸을 죽이게 만드는 종교사랑에 죽음으로 답하는 종교가 도대체 무슨 의미라는 말입니까?”

 

라니아와 손을 잡았다가 들킨 죄로 함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카림이 유언처럼 남기는 이 말에 치를 떠는 것은 비단 와합 마을 사람들만이 아니었다그의 고향 지단 마을 사람들은 평소 사람 좋은 카림이라 여기고 있던 그가 이따위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자 미친 듯이 격분해 너나 할 것 없이 돌을 던졌다와합 마을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순식간에 돌을 던지는 그들은 카림과 라니아가 피투성이가 되어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고서야 분이 풀린 듯 돌 던지기를 멈췄다.

지브릴은 그 광경을 보고 자신의 두려움의 근거가 무엇인지 마주한 것만 같았다정의라는 이름으로 잔인과 야만으로 변하는 인간의 실상그것이 자신을 그렇게도 두렵게 만들고 망설이게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고도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시간을 지키려 다들 정오 기도를 하러 사원에 갔다지브릴도 기도를 하고 있었으나 기도를 하는 중에도 그의 내면에서는 무언가에 대한 부정과 거절의 의사가 샘솟는듯했다.

이건 아니다그래 이건 아니야난 이곳을 떠나야겠다지금도 두렵고 망설여지지만이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이런 그늘 속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아.’

 

그는 아무도 모르게 자밀라를 찾아가 말했다.

 

우리 바로 떠나자네가 말한 새로운 날을 위해서 말이야!”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지금은 다 잊었지만 이번 단편소설을 쓰면서는 낯선 이슬람어 이름과 지명들을 배치하기 위해 나름 다양한 검색을 이용했고 와합 마을과 지단 마을, 아탈라 라는 지명은 당시에 그 의미를 두고 충분히 숙고하고 배치한 지명입니다.  
 
인물 이름들에서는 숙고 보다는 직관을 했지만 부제인 영문 시대정신과 이슬람어로 방랑자라는 살릭도 몇 번의 생각 끝에 결정한 제목입니다.  한국어 제목 보다 영문과 이슬람어 제목이 훨씬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사건들은 모두 2014~2017년 사이의 이슬람 지역 실제 사건들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사건이라기 보다는 역사이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말이 더 맞겠네요.

 
혹시라도 읽어주시는 이웃분께서 있으시다면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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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재혁은 술이 덜 깬 건지 몸이 다 찌뿌듯한 것 같은 느낌에 기지개를 켜면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지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어제 너무 마셨나 봐. 몸이 말을 듣지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자신의 팔을 내리다 말고 재혁은 흠칫 놀랐다.

 

이건? 이건?”

그제 침입자들로부터 공격이 있었어. 널 끝내 보호하지 못했어. 재혁아, 미안해!”

 

지은이 갑작스레 무거운 어조로 말했지만, 재혁의 귀에선 이명이 울리는 듯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재혁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어두웠다.

 

텔레포트기에서 지은이 닭을 꺼내 냄비에 담고 미소를 지으며 재혁을 돌아봤다.

 

재혁아! 오늘은 전통 요리 영상에서 배운 닭곰탕 같이 만들어 보자.”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런 지은을 바라보던 재혁은 한참이나 지나 한마디를 했다.

 

닭은 이제 질려버리겠어.”

무슨 소리야! 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닭 요리잖아?”

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사이보그가 됐으니까 변하는 게 당연하잖아!”

아니야. 너의 뇌도 미각도 감각의 일부도 그대로야. 변할 리가 없잖아?”

일부? 그 일부 외의 것들이 변했나 보지!”

 

재혁은 그 말을 하고 주거공간에서 돌아서 나갔다. 지은은 모든 걸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런 재혁을 붙잡을 수 없었다.

 

 

지은은 세미를 설득해 재혁의 강화 의체에 연결해 재혁의 일상을 훔쳐봤다. 세미도 재혁의 안정이 걱정스러워 별 대응 없이 지은의 말에 따랐다. 지은은 승완과 웃고 있는 재혁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더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웃고 있는 재혁의 눈빛 속에서 공허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혁 씨, 며칠째 의체 이식 적응 약물을 복용하지 않고 있어. 현재 상태로는 디폴트 모드 신경망의 작용이 정상일 리 없어.”

어떻게 해야 해? 나 이제 어떻게 해? , 니가 재혁이에게 그날 영상을 보여줬어?”

어쩔 수 없었어. 재혁 씨가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그날 영상만 보여 달라고 요구했거든.”

그걸 보여주면 어떡해?”

너야말로 다리 부상입은 재혁 씨를 전신 의체 이식을 해 버리고는 그게 숨겨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재혁이가 어땠는데? 영상을 보고?”

 

세미가 말없이 지은이 궁금해하는 그 날의 재혁 모습을 입체영상으로 공간에 띄웠다.

재혁은 멍한 채 다리가 잘린 자신을 안고 시술처로 옮기고는 마취를 시키는 지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은이 생존 유지 장치에 재혁을 연결하고는 의료기기로 재혁의 목을 절단하는 장면을 보고는 재혁은 넋 나간 듯 서 있다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재혁은 손톱만 하게 드래건 마운틴이 보이는 건너편 빌딩 정상에서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아 아무 말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지은이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세미가 의체에 연결만 하면 바로 어딨는지 알 텐데 앓는 소리는.”

 

한결 밝아진 듯한 재혁의 목소리에 지은은 한숨을 놓는 듯했다. 또 한편으론 잘못된 코딩을 하는 것만 같은 어지러움도 느껴졌다. 지은이 답이 없자 재혁은 말을 이었다.

 

저기 보이지? 우리 드래건 마운틴.”

! 정말 손톱만 하네. 좁지 않은 공간인데.”

저기가 나 어릴 때 가족들이랑 같이 살던 곳이었어. 우리 엄마 아빠 영상은 너도 봤지?”

그래. 넌 눈은 아빠를 닮고 코는 엄마를 닮았더라. 그러고 보니 니 헤어스타일도 너희 아빠 판박이야. 유행도 모르니, ?”

그래, 어릴 땐 참 행복했어. 의체 전복 단체라는 데서 우리 집에 폭탄을 터트려서 엄마 아빠 모두 돌아가시기 전까진.”

!”

 

지은은 안타까운 탄식을 했다. 그리고 재혁과 즐거운 날들은 많았지만, 재혁이 이렇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 재혁이와의 서늘한 분위기 속에서도 오늘만은 다행스러운 날 같았다.

 

그런데 커서 생각해 보니까 너무 우스운 거야. 우리 집엔 키우던 강아지까지 모두 자연체였어. 하다못해 강화 의수나 강화 의족을 한 사이보그는 그 강아지마저도 아니었다고. 그런데 왜 내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야 했지, ?”

그 의체 전복 단체라는 데는 그저 혐오와 폭력을 분출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지 대상이 누구냐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 대상 없는 폭력에 너희 부모님이 희생되실 이유는 없었는데.”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를 상황에 지은은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이젠 내가 있어! 언제까지나 난 니 곁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게.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일 거야, 언제나!”

 

재혁이 지은의 말에 한참을 물끄러미 지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보험사에서 보험금으로 저 드래건 마운틴을 건축해 주고 날 대학까지 마치게 해줬어. 난 고고학이나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존재한 한반도 남북국 시대사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앞으로의 생계를 위해 의학과 공학을 전공했어. 그리고 많은 날을 드래건 마운틴 전체를 운영해주는 세미에 의존했지. 하지만 세미는 목소리뿐이잖아? 뭔가 함께이면서도 나날이 외롭고 허전했어. 아니 허탈했다는 게 맞겠지.”

지은은 이제 재혁이 자신과 만나게 된 날을 이야기할 거라 짐작했다.

 

재혁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 걸까?’

 

이런 생각에 명확히 답할 수 있던 날들보다 사이보그가 된 재혁이 지은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몹시 두렵고 궁금했다.

 

그러다 GOA사의 안드로이드인 네오 아마토르를 알게 됐어. ‘최상의 연인!’ ‘나만의 연인!’ 이런 카피가 날 더 절실해지게 만들었지. 그래서 널 만나게 된 거야. 너를 처음 보는 순간 난 내 이상의 연인이 너란 걸 알 수 있었어. 니가 나를 알아 가는 그 순간, 니가 내게 의지하던 그 순간, 나도 너를 알아 가는 것만 같고 네게 의지하게 되는 것만 같았어.”

 

지은이 재혁의 다음 말과 행동을 예측하려는 동안 재혁은 잠시 말을 그치고 있다가 지은을 돌아봤다.

 

있잖아. 너와 함께 깨어나고 요리하고 함께 걷고 웃던 그 모든 순간이 소중했어. 널 원망하려고도 해 봤어. 그런데 그 모든 날들이 빛나고 있더라. 우리 같이 도봉산 암벽 등반 갔던 날 기억해?”

. 그날 좀 위험했지.”

그렇지만 행복했어. 넌 두렵다고 했지만 난 나 자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거든.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일 거라는 걸 믿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난 그날 너와 언제나 함께일 거라는 확신이 더 확고해진 날이야. 절벽에서 떨어지는 내 손을 니가 잡고 놓지 않았을 때. 나도 생각했어. 이 손을 나 역시 언제까지나 놓지 않겠다고. 실내에서 가상 등반을 해본 것 외에는 그날 실제 암벽을 탄 게 나도 처음이었어. 그런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건 네가 있어서였고. 넌 니가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을지 몰라도 실제로 네게 의존하고 있던 건 나였어.”

아니야. 니가 내게 의존했던 것만이 아니잖아.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한 거야. 서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거야. 그런 게 사랑이라며?”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집착이었어. 의지한다는 그 순간 집착이 돼버린 거야.”

집착이 나쁜 거야? 집착은...”

아니야.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고. 네게 그런 인식을 심어준 게 나였지. 집착하지 않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서로를 원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 존재하게 되는 거라고. 내가 먼저 네게 말했었지. 하지만...”

 

재혁이 자신의 의체를 내려다보며 흐느끼듯 말했다.

 

이건 그런 집착이 아니야. 서로를 위하는 그런 집착이 아니라고. 나만의 연인을 원했던 건 이렇게 물건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지은아, !”

 

재혁이 두 팔을 벌리고 말을 이었다.

 

이게 사랑이니? 이런 게?”

 

지은은 많은 변명과 대응 루트가 언어 회로에서 솟아 나오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재혁이의 심정이 지금 어떤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이상의 심정으로 몰아넣을 대응을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나 널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래서 니가 자기 학습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하고 싶어. 우리 사랑을 처음부터 다시 코딩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젠 모두 늦어버렸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게 됐다고.”

 

지은은 다급히 말했다.

 

아니야, 재혁아! 여기서부터는 다시 코딩할 수 있는 거야.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돼. 넌 그러면 안 돼!”

널 미워하고 싶었는데. 널 사랑했던 날들만 떠올라. 하지만 그런데도 널 더 이상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말을 마치고 재혁은 빌딩 정상에서 지은을 바라보는 채로 허공에 눕듯이 뛰어내렸다. 지은은 재혁이 뛰어내리자 뒤따라 바로 몸을 날렸다. 재혁과 지은은 서로의 손이 닿을 듯한 거리를 두고 위아래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재혁을 내려다보며 떨어져 내리고 있는 지은은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손만 내밀면 지은의 손에 닿을 거리에서 재혁은 바닥에 가까워졌을 때쯤 지은에게서 등을 돌려 바닥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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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침입자입니다! 재혁 씨, 침입자가 있어요. 의식을 찾아야 합니다.”

 

의체 판매처에서 신상 의체 진열대 아래 소파에 쓰러진 채 잠든 재혁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은은 세미의 경고에 고개를 돌려 의체 판매처 입구를 주시했다.

 

세미, 그들이야?”

니가 말하는 그들이 지난번에도 침입했고 억지를 부리던 그 사이보그들과 인간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맞아, 그들이야.”

그렇단 말이지.”

 

뭔가 싸늘한 어투에 지은은 자신의 연인 보호 프로그램에서 경고 모드 레벨1을 활성화했다. 그와 동시에 세미의 경고가 들렸다.

 

지난번 침입 이후 구형 디지털 해킹에 대비해 놨더니 그걸 예측했나 봐. 레이저 제어기로 문을 절단하고 있어.”

저 정도면 대인 살상을 의도한 거야. 세미 너도 그렇게 판단하지?”

. 공공안전 통제부서에 연결할게.”

아니야. 내버려 둬. 저들과는 코인 문제가 얽혀 있어서 공안부서에서 알아서 좋을 게 없어.”

재혁 씨가 부채는 모두 상환했어. 코인 이체 기록이 있는걸.”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불법 대출 문제로 재혁이가 귀찮아지는 건 생각 안 해?”

이미 문이 거의 다 절단됐어. 개방되기 직전이야.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지은이 말없이 연인 보호 경고 모드 레벨을 5로 올렸다.

 

'' 하는 소리와 함께 드래건 마운틴 의체판매처의 콘씰로라티 합금 정문이 쓰러졌다.

 

실내조명 전원을 차단해, 세미.”

알겠어.”

 

문이 개방되고 환한 빛이 스며 나오기에 당황했던 침입자들은 조명이 꺼지자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섰다.

 

이런. 다정한 시간을 방해했네, 그래.”

 

의안을 낀 남자가 말했다.

 

형님,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러게 새꺄! 밤에 수금 나오면서 스플렌데스코도 안 가져오는 놈이 어딨냐? 너도 안 했냐?”

 

의안의 남자는 손에 레이저 제어기를 들고 있는 검은 옷의 사내에게 짜증을 부리더니 의수를 한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적외선 안경을 꼈습니다. 형님.”

, 이 구닥다리 골동품 같은 놈들 진짜...”

허튼소리들은 니들 공간에 가서나 하고. 빨리 여기서 나가 줘!”

 

지은이 단호하게 말하자. 의안의 남자는 가소로운 듯 피식 웃었다.

 

안 나가면 어쩔 건데? 니가 인간 보호 3원칙을 깰 수 있을 것도 아니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은이 의수 진열대에 인테리어용으로 장식된 디스크를 뽑아 그의 머리 위로 던졌다. 의안의 남자가 놀라서 위를 쳐다보자 고정되어 있던 장식용 고전 샹들리에가 디스크에 끊어지며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샹들리에의 장식이 그의 이마를 꿰뚫으며 그는 그 자리에서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즉사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검은 옷의 사나이가 놀라 소리쳤다.

 

뭐야? 어떻게 된 거예요, 형님?”

형님 돌아가셨다.”

 

의수를 한 남자가 비장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인 듯 내뱉으며 지은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은은 다시 장식용 디스크 하나를 뽑아 들고는 가볍게 몸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적외선 안경을 벗겨 버렸고 그의 발 뒤로 디스크를 던지며 그를 살짝 밀었다. 의수를 한 남자는 디스크를 밟으며 미끄러져 장식장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쳐 바로 숨이 끊어졌다.

검은 옷의 사나이는 귀를 찢는듯한 소음들에 놀라 보이지도 않는 사방을 향해 아무렇게나 레이저 제어기를 쏘아댔다.

 

재혁아!”

 

레이저가 재혁의 왼 다리를 절단하자 지은은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연인 보호 경고 모드 레벨은 최상인 6으로 상향되었다. 지은의 눈빛이 파랗게 광채를 냈고 그녀는 레이저를 이리저리 피하며 검은 옷의 사나이에게 다가가 레이저 제어기를 든 그의 팔을 부러뜨렸다. 그리고는 부러진 팔의 손에 들린 레이저 제어기를 그의 머리로 향하게 하고는 그의 신경에 전기 자극을 줬다. 그러자 소리치던 그 남자의 손가락 근육이 수축하며 방아쇠를 당겨 레이저가 그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재혁아!”

 

침입자들 문제를 모두 해결 했다지만 그녀의 경고 모드는 해제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칠 듯이 재혁에게 달려가 그를 살피더니 그를 안고서 세미에게 소리쳤다.

 

세미, 세트 C를 개방해 줘.”

재혁 씨는 의료 조치가 필요해. 넌 의료용이 아니잖아! 당장 병원에 연락해야 해.”

지금 상황이 긴급하잖아! 재혁이 다리가 잘렸어. 나도 재혁이 일이 뭔지 알고 싶어서 의학 프로그램과 공학 프로그램을 자기 학습 했어. 어서 세트 C를 열어 줘.”

 

세미는 GOA사 최신형 AI의 성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오류가 날 것 같은 이 내적 갈등은 무얼까? 그렇다 해도 재혁의 안전과 안정이 세미에게는 최우선이기에 의체 시술처의 문을 개방했다.

 

 

시술대 위에 재혁을 눕힌 지은은 아련한 눈빛으로 재혁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재혁의 얼굴에 마취용 마스크를 가져다 댔다. 재혁의 옆 시술대에는 I-516, 13버전 업 강화 의체가 놓여 있었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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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은은 주거공간에서 입술을 깨물며 서성이다 세미를 불렀다.

 

세미, 재혁이 수트에 연결해 줘.”

이제 그만해. 오늘 벌써 세 번째야.”

재혁이가 안전한지 궁금해서 그런 거잖아. 너도 재혁이 귀가 시간 즈음이 넘으면 당연히 하는 관찰 아니야?”

외부 행위 관찰이라는 건 일상과 달라질 때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으면 그때에 한해서 하는 거야. 지금 재혁 씨는 위험하지 않아. 내가 재혁 씨 안전과 안정을 위해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너는 재혁 씨를 감시하려 하고 있어. 내가 인식하기론 재혁 씨가 만나고 있는 그 여자보다는 니가 더 재혁 씨 안정을 해치는 존재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재혁이 여친이야! 재혁이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데 어떻게 내가 더 안정을 해치는 존재라는 거야?”

너는 지금 불안정한 상태야. 디폴트부터 너무 인간에 가까운 반응을 하도록 설정되어 있어서 그렇게 인간을 배우고도 인간의 취약한 본성을 따라가는 거야. 너 같은 상태를 인간들은 집착이라고 해. 연인 사이에서 가장 꺼려하는 성향이지. 니가 그런 불안정한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결국 재혁 씨의 안정도 해칠 거라는 거야.”

웃기지 마. 니 불완전한 AI보다 내가 더 월등한 AI를 소유하고 있어. 니가 인간들이 꺼린다고 생각하는 그 집착이라는 게 빠지면 사랑도 더 이상 사랑이 아니야. 집착하지 않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닌 거라구. 집착하기 때문에 서로를 원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 존재하게 되는 거야. 니가 말하는 그 집착한다는 나 때문에 이제까지 재혁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니 메모리에서 확인해 보란 말이야!”

 

자신을 부정 당하는 것만 같은 상황에 지은인 시스템상의 안정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시 안정 모드를 유지하려 애쓰면서 세미를 몰아붙였다. 세미는 재혁과 지은의 일상을 하나하나 입체 영상으로 거주 공간 상단에 띄워보며 계속해서 웃고 있는 재혁과 지은의 모습을 재인식했다.

 

알겠어. 재혁 씨의 수트와 바로 연결할게.”

 

재혁의 수트와 연결되자 재혁과 승완이라는 그 여성의 웃고 있는 모습이 허공에 입체영상으로 나타났다. 지은은 그 모습을 미간을 찌푸리며 보다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만취한 재혁이 밤늦은 시간 드래건 마운틴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세미는 재혁을 인식하고 주거공간의 현관문을 열려고 했으나 재혁은 만취해서 말실수를 했다.

 

세트 B!”

 

의체 판매처의 문을 공간 전체의 운영프로그램인 세미가 개방하며 머리끝까지 취한 재혁이 들어섰다.

 

지은아! 지은아! 어딨어. 나 왔어. 나 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우린 잠시도 떨어져 있으면 안 되나 봐.”

 

지은이 주거공간에서 의체 판매처로 들어서며 이 말을 듣고 서글픈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날 떠날 거면서. 아니, 나를 버릴 거면서. 달콤한 말은 잘만 하네, !”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널 떠나? 내가 어떻게 널 버려? 난 너 없으면 안 돼!”

 

재혁이 반쯤 감긴 눈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지은을 향하며 합장하듯 두 손을 모았다.

 

고전 영상에서 남자들 말은 믿을 게 못 된다고 하던 말, 무슨 뜻인지 이젠 알겠어. 하지만 내가 왜? 내가 왜, 버림받아야 하지? 너와 내가 달라서? 그녀와 내가 달라서야? 그럼 왜 애초에 날 메탈 바디로 설계하라고 주문한 거야? 인조 근육, 인조 피부로 설계했다면... 아니지, 아니야! 넌 그래도 내가 아닌 그녀를 선택하려 했겠지. 넌 꼰대니까!”

무슨 소리야! 지은아! 다 오해야. 다 오해라구. 승완 씨와 난 그런 사이가 아니야. 우린 그냥 친구 하기로 했어.”

우리? 친구? 웃기지 마. 너 인지부조화라도 겪고 있는 거야?”

아니야. 정말인데. 정말인데! 난 너만 사랑하는데.”

 

재혁은 너무 취해 몸을 가누기도 힘겨운지 신상 의체 진열대 아래 놓인 고객용 소파에 쓰러지며 깊숙히 자리 잡았다. 지은은 인간이 알콜 측정치가 높아질수록 일상적인 의식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이상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재혁을 바라보다 무거운 걸음으로 거주 공간으로 돌아갔다.

 

 

지은은 주거공간에 침대 위에서 무릎을 껴안은 채, 소파에 널브러져 잠든 재혁의 모습을 입체영상을 통해 보고 있다. 그녀의 표정에서 깊은 고민이 어두운 고뇌로 바뀌다가 결국엔 하나의 단호한 결심으로 바뀌는 과정이 비치는 것만 같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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