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로는 온통 새하얀 공간에서 자신을 감싸는 파동이랄까 빛의 일렁임 같은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정좌하거라!”

?”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라고!”

 

어디선가 동굴 소리 같은 노년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로는 그 말을 따라 정좌를 하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아무 생각도 하지 말 거라. 내면의 요동에 반응하지 말고 그냥 느낌만 따라가면 된다.”

 

아랫배부터 뜨겁고 찌릿한 기운이 일어나자 유로는 놀라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노인이 무언가 미더운 목소리로 주의를 주자 그의 말대로 의식이 따라가고 있었다. 불 같기도 하고 전기 같기도 한 그 기운이 아래를 거쳐 꼬리뼈로 가더니 용암 줄기라고 할까, 아래에서 위로 치는 번개 같다고 할까 뭐라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느낌이 머리까지 곧장 올라갔다. 유로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치 자신의 정수리에서 빛의 불꽃이 터져 오르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유로는 한참만에 의식을 차리고는 오히려 더 깊은 잠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는 듯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낯모르는 두 남녀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아이를 왜 천당에서 관리하려고 드느냐구요? 이 아이는 기독교도예요. 어디까지나 저희 천국 소관입니다.”

천국에 영혼이 없어? 무슨 호객행위 하듯이 영혼을 홀려가려고만 해. 이 아이는 생전에 손씨 형의권을 사사 받은 아이야. 어느 모로 봐도 우리 천당하고 더 인연이 깊다구.”

 

하얀 슈트 차림의 중년 남자가 검은 슈트를 입은 젊은 여성에게 따지고 들자 젊은 여성도 근거를 대며 반박했다.

 

그깟 무술 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해요. 크리스천을 천국에서 관리하겠다는데 운동을 이걸 했으니 얘는 우리 애다.’ 이런 논리가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세요?”

공부(功夫)를 배우는 아이의 정신 속에는 동양의 정신이 자리 잡아. 허울뿐인 종교 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해? 그 영혼에 어떠한 정신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아니, 그래서 상도덕도 없이 이러자는 겁니까?”

너네는 영혼을 장삿속으로 관리하니? 정신을 이야기하는데 상도덕이 웬 말이야?”

 

하얀 슈트의 중년 남자는 갓 입문한 초보 천사였고 검은 슈트의 젊은 여성은 경력이 있는 저승차사였다. 그런데도 남자가 흥분하며 논리 없이 따지고 들자 여성까지 성이 차오르고 있었다. 마침 그때 새하얀 그 공간에 그보다 더 새하얀 빛이 어리더니 붉은 도복의 노인이 나타났다.

 

규약대로 하시게! 규약대로! 이 아이 자신의 결정이 중요한 게야.”

. 어르신. 규약대로 해야죠. 안 그래도 물어보려던 찰나였습니다.”

맞습니다. 영감님. 아이 의사가 가장 우선이죠.”

 

노인의 말에 젊은 여성은 난처한 빛을 띠었고 중년의 남자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유로는 이 상황이 오기 전에 들리던 동굴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나자 왠지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할아버지, 아까 제게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내가 네 조부는 아니다.”

! 그럼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어르신 정도가 좋겠구나.”

. 어르신. 그런데 아까 제게 뭘 하신 건가요?”

중유에 이르기 직전에 너의 임독맥을 타통한 것이다.”

저는 아직 내공 수련은 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게 가능한가요?”

네가 몇 해나 꾸준히 공부(功夫)를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게지.”

 

유로는 노인의 말에 의문이 풀리나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속에 뭔가 꼭 묻지 않고는 안될 의문을 하나 품게 되었다.

 

그런데 말씀하신 중유라는 게 뭔가요?”

그건 바로 우리가 있는 이 공간과 이 세계의 일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네가 인간계의 시간으로 49일 동안 머물러야 하는 곳이지.”

 

그 말을 듣고 유로는 그렇구나. 나는 역시 죽었구나!’ 하는 수긍과 함께 내가 도대체 왜 벌써 죽어야 하나하는 억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것이란다. 억울함이나 난감함이나 당혹스러움 같은 것들은 망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인간계의 생에 미련만 가지며 영계에서 새로운 생을 부정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너는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니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제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어요. 책임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구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를 책임지며 살아가는 거란다. 네게 어찌 그 모두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냐? 그런 생각은 자만이고 오만이다. 너도 너 스스로를 책임지는데 전념하는 것이 좋다. 현재의 너 자신 말이다.”

 

유로가 너무 답답한 이 심정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하얀 수트의 남자가 유로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이봐, 고유로! 너는 크리스천이니까 천국 가야잖아, 그치?”

 

유로는 확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금방 죽은 자신의 심정 따윈 중요하지도 않게 여기다니 이 작자가 정말 천사가 맞는 건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아니야. 너의 내면 깊숙이에서 올곧게 동양의 전통을 애호하는 그 정신의 흐름을 믿고 따라야 해. 우리 천당으로 오면 네가 배우고 싶어 하는 십대 문파의 절기를 가진 고수들이 숱하게 있단다.”

 

유로는 외모와 다르게 노숙한 어투의 이 누나 역시 짜증이 났다. 이 둘은 방금 죽은 사람의 심정이 어떨지 전혀 감이 오지도 않고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 아니 영혼들인 것만 같았다.

 

천국이고 천당이고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저는 약속이 있다고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유로는 이 순간에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이가 걱정됐다. 이 두 사람 아니 두 영혼의 말보다 오늘 날씨가 일기예보하고 다르면 곧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수이가 우산은 갖고 나왔을지 하는 걱정부터 먼저 들었다.

 

그 아이가 오래 기다릴까 봐 걱정이냐? 비에 젖을까 봐 걱정이냐? 더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단다.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하게 될 걱정들이니까 말이다.”

저는 이제 어째야 하는 거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노인의 말을 듣고 유로가 참담한 심정으로 울부짖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노인은 조용히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올려 작은 원을 그렸다. 딱 그만한 크기의 빛의 구슬이 생기자 노인은 그걸 유로의 가슴께로 밀어 보냈다. 유로가 가만히 바라보자 그 빛의 구슬이 자신의 가슴께서 스며드는 것 마냥 사라졌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너에게는 아직 7재 동안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사이에 결정하려무나.”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사이 무얼 할 수 있나요?”

우선 네가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보아라. 잠시 가슴 아픈 이들의 마음에 안식을 주기 위해서라도 네가 빨리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며 노인이 허공에 손바닥을 펴고 내밀자 허공에서 상복을 입은 어머니와 유향의 모습이 비쳤다. 아니 유로는 모습이 비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차원의 문 같은 것이었다. 유로와 흑백 두 슈트의 남녀가 함께 차원의 문을 넘어가자 오열하고 있는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오빠! 오빠! 유로 오빠!”

 

눈물을 흩날리며 달려오는 수이를 보고 유로는 두 팔을 벌렸다. 수이는 유로를 관통하고 지나쳐 영정 사진 앞에 가 쓰러져 울었다.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

수이는 숙소에 소미와 같이 쓰는 1실 이층 침대 아래 칸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휴대폰 플립을 열었다가 닫았다가를 반복하며 오늘 안무실에서 한 고정도 대표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너희 다른 건 몰라도 사생활 관리가 제일 중요하다는 건 꼭 명심해둬. 활동기간 동안 절대 연애 금지다. 알지?”

 

그러면서 고정도 대표는 명심하라는 듯 수이를 지긋이 쳐다봤다.

수이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유로 오빠가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지난 47개월 노력의 시간과 M.G.I 데뷔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빠가 나 없이 살 수 있을까? 난 그런 오빠를 두고 혼자서 내 일이나 잘하자면서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까?’

 

소미가 샤워를 마쳤는지 젖은 머릿결을 수건으로 닦으며 들어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 헤어드라이어를 들었다가 거울에 비친 수이의 모습을 보고는 수이를 돌아봤다.

 

언니 무슨 걱정 있어?”

음 아니야? 걱정은 무슨 걱정

언니 무슨 걱정하는지 알 것 같은데 인생은 선택과 집중의 문제래. 우리에겐 지금 2007214일보다 중요한 건 없어, 알지?”

 

소미가 고정도 대표가 알려준 데뷔 확정일을 되새기며 수이를 각성시켰다. 수이도 생각했다.

선택과 집중! 그래 난 이미 선택했고 집중만 하면 되는 거야!’

 

수이는 휴대폰 플립을 열고 입술을 앙다물고서 유로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우리 일요일 오전 10시에 거기서 만나.’

 

그 순간 수이와 소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수이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원 안에 왼쪽에 초승달과 오른쪽에 태양이 서로 등지고 있는 마법 써클 같은 음영이 잠시 생겼다가 사라졌다.

 

 

200679일 일요일 아침, 유로는 아침부터 청바지를 입고 흰 티와 갈색 브이넥 티, 빨간색 셔츠 등을 입어보며 거울 앞에 서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로 엄마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수이 만나러 가는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엄마 눈은 못 속이겠다니까.”

속이고 말고 할게, 뭐 있어.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 게 아니면 네가 언제 옷 입는 거 고르는데 망설이는 애야?”

엄마 뭐가 어울려요?”

내 눈엔 그냥 흰 티가 나아. 화려한 옷보다도 심플한 옷이 잘생긴 우리 아들 얼굴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으니까.”

 

엄마 말씀에 유로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엄마 아들이니까 그렇지. 뭐 그렇게 잘생겼다고 그래요?”

누구 아들이라도 이만큼 생긴 아들이 흔할 것 같니?”

 

유로는 엄마 말에 웃으며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늘 수이는 마지막이라도 유로보다 먼저 나와 유로를 기다리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홍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이는 등에 맨 가방 옆 주머니에서 미니카세트 플레이어 워크맨을 꺼내더니 이어폰을 연결하고 귀에 꽂았다. sg워너비의 '사랑했어요'가 흘러나왔다.

 

유로는 바쁘게 지하철역으로 가 홍대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집중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4~5살 정도 되는 아이 둘이 서로 쫓으며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유로는 아이들이 좀 걱정돼 아이들 엄마가 누굴까 하고 아주머니들을 쳐다보았지만 마침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화면을 보고는 한 걸음 내디뎠다.

 

마침 그때 유로를 기다리던 수이의 머리 위 공간에 붉은색 원이 서서히 그려졌다. 그 원 안으로는 역삼각형이 그려지더니 삼각형의 윗면에 뿔처럼 X자가 새겨졌다. 수이가 어지러운 듯 머리를 짚으며 쓰러지려는 찰나 머리 위의 마법 써클 같은 것이 사라졌다.

 

수이의 머리 위에 마법 써클이 사라지는 그 순간, 지하철을 기다리는 유로의 머리 위로 수이 머리 위에 생겼다 사라진 바로 그 마법 써클이 생겼다. 유로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으앙!”

 

유로가 정신을 차리고 아이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들 중 한 아이가 철로에 떨어져 정신을 잃고 있었고 같이 놀던 아이는 놀라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멀리서 지하철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지만 유로는 생각할 틈도 없이 철로에 뛰어들었다. 정신을 잃은 아이를 아이 엄마인듯한 사람 손에 안기고 이제 자신도 승강장으로 올라가려는데 무슨 에너지 장벽이라도 막고 있는 것 같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지하철이 빠른 속도도 다가왔고 유로는 정신을 잃는 듯 멍하니 철로에 서서 지하철이 오는 걸 바라봤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눈앞에 이를 데 없이 새하얀 빛이 보였다.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200677일 금요일 저녁 938, JD엔터의 안무실에서 앨범 녹음을 마친 후 몇 주 전 갓 나온 신곡으로 다섯 명의 소녀가 비지땀을 흘리며 안무 연습 중이다. 안무의 합이 너무도 잘 맞다가 머리를 뒤로 묶은 소녀가 반 박자 느리게 동작을 취하자 리더 수이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카세트 플레이어를 정지시키더니 돌아본다.

 

이연아, 이제 우리 데뷔가 얼마 남지 않았어. 너 평소에 잘하니까 평소처럼만 해. 조금 긴장도 하면서 말이야. 데뷔 무대에서 이러면 우리를 응원하는 팬들도 줄어들 거 너도 알잖니?”

잠깐 담이 왔나 봐 언니. 미안!”

이연 언니 왜 틀렸는지 나는 알지.”

 

효윤이의 말에 선희가 함께 대답하려고 준비를 했다.

 

쉴 틈이 없으니까!”

좀 쉬었다 하자, 언니. 잘 쉬는 것도 연습이라고 대표님이 그랬잖아.”

 

효윤이와 선희가 합창하듯 대답하자 소미도 대표님 말씀을 무기 삼아 쉬자고 나섰다.

 

너희 다 참 태평이다. 데뷔 날짜가 조만간일 텐데 쉬자는 말이 나오니.”

언제인지도 모르는데 좀 쉬어가 언니! 쉴 땐 쉬는 거지.”

 

나만 조급한가 하는 생각에 수이가 답답해하면서 하는 말에 이연이 대꾸했다.

마침 그때 안무실 문이 열리고 어두운 파란색 슈트 차림의 고정도 대표가 비서와 함께 들어섰다.

 

그래, 실컷 쉬어. 내일부턴 너희가 너희 자신을 쥐어짜게 될 테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대표님? 지금까지 계속 안무 합 맞추다 이제야 쉬자는 말 나온 거예요.”

정말이라니까요.”

 

고 대표의 말이 자신들을 핀잔주는 말인지 알고 수이가 발끈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모두 억울해하며 말했다.

 

니들이 게으르다는 게 아니라 오늘 데뷔 날짜가 정해졌다. 얘들아, 이제 진짜 데뷔하는 거야.”

 

수이와 이연, 소미는 놀라 눈이 커다래지고 효윤, 선희는 마주 보며 주먹을 쥐고 소리를 지를 듯 좋아했다.

 

 

늦은 밤 편의점, 아직도 교대를 오지 않는 다음 타임 대학생 알바 형을 기다리며 유로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곗바늘은 11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형은 시간을 지킬 때가 없네.’

 

그리 생각하면서도 유로는 한 편으로 이 시간이 다행스러웠다. 이젠 가출했던 동생 녀석도 아버지 기일 전에 돌아왔고 큰 보탬은 안되지만 알바비도 안정적이다. 이제 몇 개월 후면 고딩 신분에서 벗어나니 아무래도 동생 학비 문제도 어머니께도 많이 보탬이 될 수 있을 걸 생각하니 한층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찰랑!’

 

차임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편의점 문을 보니 낯익은 얼굴이 들어서다 자신을 발견하고는 뒤돌아서 나가려 한다. 유로는 쫓아가며 이름을 불렀다.

 

유향아!”

! ! 여기서 알바 하냐? 집 앞에도 편의점 있잖아. 뭐 이 먼 데까지 와서 해?”

너 알고 온 거 아니었어?”

형이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고 와.”

시간이 늦었는데 너 또 왜 밤에 돌아다녀? 집에 엄마 혼자 계시잖아.”

언제는 혼자 안 계셨냐? 형이 알바를 맨날 이렇게 했으면 엄마 맨날 혼자 계셨겠네.”

 

사실 편의점에 사복을 입고 담배라도 사볼까 하고 들어서다가 딱 형하고 마주쳐서 뻘쭘해진 유향은 유로에게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때 때마침 알바 교대할 대학생 형이 들어섰다.

 

조금 늦었지 유로야? 미안해. 내일부턴 시간 꼭 지킬게.”

 

 

유로와 유향은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유향은 이 시간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고3인데도 세상 이런 꼰대가 따로 없는 형 유로에게 걸렸으니 별수 없이 집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 그 연습생 한다는 애랑은 아직 사귀지?”

. 요즘 곧 데뷔할 거라고 꽤 바빠!”

그래도 연락은 하고 지낼 거 아니야?”

바쁜데 시간 뺏고 싶지 않아서 낮에 학교에서 보고 밤에는 잘 연락하지 않아.”

. 그러다 여친 뺏긴다.”

뺏기긴 누구한테 뺏겨? 설마 너한테?”

 

동생이 가볍게 하는 말이지만 유로도 그런 두려움이 제법 들고 있었기에 되려 농담으로 넘기려 했다. 하지만 유향인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았다.

 

, 데뷔하면 폼나는 남돌이 많을 텐데 형 좀 각오든 대비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각오는 무슨 각오고, 대비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유향이 그런 말을 하기 전부터 유로도 생각을 나름 많이 해 봤다. 그런데 수이의 손을 놓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형도 기깔나는 대학 가서 뽀대나게 대학생 되면 걔도 뭔가 형한테 지속적으로 끌리는 그런 게 있을지 또 알아?”

대학은 니가 가야지. 형은 돈 벌어야 돼.”

형 같은 범생이가 대학을 가야지 내가 왜 대학을 가. 나 잘하는 거는 쌈 밖엔 없어.”

그럼 체대를 가면 되지.”

체대는 무슨. 대학은 공부 잘하는 형이 가! 나 같은 문제아를 체대 보내서 뭐 하게.”

체대 가서 경호학과를 다니면 어떻겠니? 장래성 있는 학과잖아.”

그러니까 형은 대학 왜 안 가겠다는 건데?”

돈 벌어야 한다니까.”

돈독 올랐냐? . . 돈소리는.”

 

유향은 형이 가족 생계 때문에 걱정하는 게 안쓰럽고 한 편으로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자신 역시 형과 다르지 않았다.

 

그럼 엄마 언제까지 저렇게 혼자 힘드시게 두냐? 아버지 돌아가신지도 벌써 5년째야.”

그러니까 내가 먹여 살린다니까? 형은 그냥 공부해서 대학 가. 이제 수능이 몇 개월도 안 남았는데 알바가 뭐야? 그 시간에 공부를 하라구.”

너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아! 집 나가서 파이트 클럽에서 숙식 해결한 것도 알고.”

그렇지? 어쩐지 나가라더라. 형이라고 동생 앞길 막아도 돼.”

그런 게 어떻게 앞길이야. 거기는 길거리 쌈짱 뽑아서 칼받이로 쓰는 데 아냐? 그런 데서 죽거나 범죄자가 되는 게 니가 가족을 부양하겠단 방법이야?”

그럼 할 줄 아는 게 쌈 밖에 없는대 날 더러 어쩌라구? 나 이렇게 살더라도 잘난 형이 성공하면 되잖아. 형 의대 가고 싶어 했잖아? 형 의사 되면 얼마나 좋아. 돌아가신 아빠까지 좋아하시겠다.”

형은 이미 공부 포기했어.”

 

유로는 계획이 다 있었다. 언젠가 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가세는 기울고 혼자 힘들게 일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마음속에서 계획들을 하나하나 지워가기 시작했다. 대신 동생 유향이가 나름의 성공을 하면 그걸로 마음의 위안을 삼을 작정이었다. 가끔은 답답하고 가끔은 우울해졌지만, 엄마도 동생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울타리 안에 한 사람을 더 꼽자면 그게 수이였다. 엄마를 위해서 동생을 위해서 유로는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이를 위해서도.

 

 

집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삐리릭휴대폰에서 문자메시지 수신음이 들렸다. 유로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플립을 열었다.

오빠 우리 일요일 오전 10시에 거기서 만나.’

 

유로는 짧은 그 문자가 몹시 불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끝을 이야기하려는 말처럼 말이다.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2


다영이 침대에 누운 자신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파란빛이 은은히 비치며 지현이 나타났다.


-뭘 하려는 거야?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그런 억지 부리지 마. 깨어나는 것과 지금이 뭐가 달라? 오히려 지금의 네게 구속도 한계도 덜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그래도 이건 실제가 아니잖아?


-왜 실제가 아니야? 네게 주어진 그대로 니가 창조하는 그대로가 현실이고 실제인 거지.


-난 진짜 부모님 곁으로 가고 싶어, 오빠. 내가 그려내는 가상의 부모님이 아니라. 그리고 난 이제 막 대학생활을 앞두고 있었어. 이렇게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현실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


-네가 의식만 바꾸면 무한한 자유가 여기 있어. 물리적 제한, 감각적 제한을 넘어선 자유가 있다고. 네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들이 널 구속하던 세계, 늙고 병들고 다치고 한계뿐이던 세계가 돌아갈 가치가 있는 세계라고 생각해?


-그래도 나의 진짜 모든 건 그 세계에 있어. 오빠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구속과 한계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의미를 안겨주던 세계가 그곳이야. 아니 이젠 여기지.


다영은 그리 말하며 자기 몸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지현은 안타까워하는 몸부림처럼 그런 다영을 향해 한 팔을 뻗었지만 끝내 그녀는 깨어났다.


-하악!


침대 위의 다영이 반쯤 상체를 일으키다 다시 누웠다. 다영 옆의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의 엄마가 놀라 일어섰다. 다영을 보며 얼굴을 기울여 안으며 소리쳤다.


-다영아! 다영아! 엄마야, 엄마. 깨어날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구.



23


-다영아! 학교 가야지. 얼른 일어나.


-엄마는 오늘 오전엔 강의 없단 말이야. 뭐 이렇게 일찍 깨워.


-오늘 금요일이야. 왜 오전엔 강의가 없어?


-뭐 오늘 목요일 아니었어? 


-얘가 어제를 두 번 살려고 하네. 얼른 일어나 밥부터 먹어. 이러다 늦는다.


다영은 이불을 잡아당기던 엄마와 실랑이를 하다가 그제야 오늘이 금요일인 걸 깨달았다. 어제 술을 과하게 마셔서 조금 부스스한 머릿결을 하고는 깨어난 다영은 침대 위에 앉았다. 그렇게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일어나 샤워를 하러 갔다.



24


강의실에 앉아 여름과 다원과 수다를 떨고 있던 다영은 문득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 너머 구름 한줄기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이 순간 익숙하던 누군가가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금인데 너 오늘 또 약속 있다고 할 거지?


-얘 도대체 뭘 몰래 하고 있길래 맨날 약속이라면서 금요일마다 사라져?


여름이 금요일마다 약속이 있다는 다영이 못마땅해서 한마디 하자 다원도 거들었다.


-아주 중요한 약속이야. 금요일은 정말 시간이 없어. 미안해.



25


비둘기 한 마리가 산수유 열매 하나를 물고는 병원 옥상으로 날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날아 한 병실의 창가를 지나쳐 간다. 병실에는 한 남자가 산소호흡기를 하고 누워있고 그 옆으로 다영이 앉아 있다. 


-오빠, 어제는 재원이에게 고백한다던 다원이가 계속 술만 마시는 거야. 그러더니 재원이한테 뭐라는 줄 알아? "야 너 왜 고백 안 해. 니가 이러니까 내가 고백하게 생겼잖아." 이러더라구. ㅎㅎ


다영은 언제나처럼 자기 일상을 의식 없는 지현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다영이 깨어나던 날, 다영은 의식을 차리고는 자기 옆 병실에 있다던 지현의 말이 떠올라 제일 먼저 찾아보았다. 그날 이후 매일 지현의 병실에 머물렀다. 그러다 퇴원한 이후에는 매주 금요일이면 지현을 찾아왔다. 


콤마 상태의 지현은 늘 무표정하고 말이 없었지만 가끔씩 다영이 돌아서 나가려 할 때면 바이탈 싸인이 급격하게 변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더 다영은 지현의 문병을 빼먹을 수 없었다.


-오빠, 나 자주 오빠가 보고 싶고 가끔 오빠를 생각하면 미운 마음도 들었어. "왜 내가 깨어나려 할 때 깨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말이야. 하지만 오빠 없는 현실을 살아가다 보니 그 심정을 알게 되는 것 같았어. 나도 오빠랑 너무 함께이고 싶어. 그러니까 오빠. 오빠가 내 곁으로 오면 안 될까? 나 너무 오빠가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다영은 지현의 손을 잡았다. 다시 놓지 않고 싶다는 심정으로. 지현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무언가 포근함이 다영의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러다 다영은 병실을 떠났다.


창가 아래로 그녀가 다시 지현의 병실을 올려다보고 가는 것이 비친다. 창가엔 잠시 전 비둘기가 떨어뜨리고 간 산수유 열매가 놓여있었다. 


-하아아아!


지현이 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고 그의 감은 눈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


눈을 뜨자 다영의 눈앞에 병원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들이 오고 가며 침대에 누운 엄마를 체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아빠가 애처롭게 침대에 누운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엄마가 울고 있었다. 엄마가 말이다.


말이 안 되는 현실에 다영은 놀라 침대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때 자신 옆으로 눈부시게 빛이 작렬하더니 지현이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났다.


-다영아 놀라지 마.


-오빠,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나 아직 우리 세계에 있는 거야?


-아니 넌 너의 세계와 실제 세계 그 사이에 있어. 이제 너만의 현실이 아니라 사실을 자각해도 되겠다는 너의 의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거야. 


-나만의 현실? 사실? 그 둘이 다른 거라고? 내 의식이 이제 자각해도 되겠다는 사실이란 게 도대체 뭐야?


-그건.


지현이 말을 얼버무리고 있을 때 다영은 침대에 누운 엄마와 침대 옆에서 울고 있는 엄마를 번갈아 봤다. 어느 순간 침대 위의 엄마 모습이 더 젊어 보였다. 다영이 놀라 자세히 바라보자 머리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운 건 다름 아닌 다영 자신이었다.


-이게 사실이야. 네가 만든 현실이 아니라 진정한 너의 현실인 사실. 


-어떻게 이런... 이런... 저기 누워있는 게 나라면 지금의 나는 뭐야? 


당황해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다영을 보며 지현은 단호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넌 영혼이라고 할 수 있어. 콤마 상태의 니 육체를 떠나 넌 너의 세계를 창조해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거야. 


-난 그럼 귀신인 거야? 나 죽어?


-아니야. 콤마에 빠진 육체를 벗어나 잠시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거라고 보면 돼.


-자유롭다고? 현실이라고 믿던 모든 것들이 그저 내 상상일 뿐이었다는 건데. 그리고 나는 실제로 엄마와 아빠와는 다시 볼 수 없다는 건데. 그게 자유로운 거라고?


다영이 다소 격앙되어 말했다. 지현은 그런 다영을 바라보며 뭔가 위안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육체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의식 없이 보내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 그리고 콤마에서 깨어나는 경우도 더러 있어?


-더러 있다고? 더러?


다영은 지현의 말에 위안을 받기보다는 회복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희박하지 않아. 전 세계적으로 콤마에 빠지거나 사망진단을 받았다가 의식을 되찾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천국을 다녀와 천국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런 책도 있다던데?


-나도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런 책을 검색하다 몇 권 본 것 같긴 해. 그럼 우리 세계라는 곳이 천국이야? 오빤 천사고?


사실 다영은 콤마에 빠졌다가 의식을 되찾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그 사례가 많지 않을까봐 두려워 묻지를 못했다. 그저 자신이 천국을 다녀온 것인지가 궁금하다고 물으며 넘어가려 했다.


-거긴 천국이 아니야. 공유 세계지.


-공유 세계? 


-그래, 니가 만들어낸 현실처럼 콤마에 빠진 여러 사람들이 현실을 창조해 내는데 그게 공유되는 세계가 있더라구. 우린 그걸 우리 세계라고 부르기로 했어.


-그럼 오빠도 나처럼 콤마에 빠진 사람인 거야?


-음. 난 바로 니 옆 병실에 있어. 


-오빤, 언제부터 영혼인 채로 있었던 거야?


-1년이 좀 넘었어. 


-난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지? 언제부터가 실제이고 언제부터가 만들어진 현실이야?


-내가 처음 네게 다가가 눈을 마주친 날 기억해?


-어! 그날 나 OT였던 날이야.


-그날이야. 그날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데 니 머리 위로 화분이 떨어지는 걸 봤어. 그런데 네 육체가 쓰러지는데도 넌 그대로 선 채 날 바라보고 있더라. 그래서 네게 다가갔던 거야?


-나 깨어날 수 있을까? 


다영은 지현의 말을 들으며 엄마 곁으로 다가가 엄마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엄마 손을 스쳐 지나가는 걸 보고 울먹이며 지현에게 물었다.


-가능성이 있을 거야. 우선 진정부터 해. 


다영이 울먹이자 침대 옆의 바이탈 싸인 모니터에 그녀의 바이털 싸인이 큰 웨이브를 이뤘다. 간호사가 마침 그것을 보고는 의사를 부르러 갔다.


-나 영혼이라더니 내 몸이 내가 울려니까 반응을 하는 것 같아.


-당연하지. 니 영혼과 니 육체는 분리되어있더라도 원래 하나인데. 


지현의 의상이 파란색으로 바뀌며 지현은 손을 다영의 어깨에 얹었다. 주변 사물이 한순간 일그러지며 아주 넓은 강가로 바뀌었다.


-날 왜 이리로 데려온 거야.


-너도 우리 세계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병실에 계속 있으면 니 감정만 더 격해질 거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 모두가 거짓말이었다. 언젠가부터 지현은 다영에게 빠져들고 있었고 다영과 함께인 시절이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날들이었다. 그녀가 격앙되어 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더군다나 그녀가 깨어나는 것도 지현에겐 원치 않는 일들이었다.


터번을 쓴 노인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이젠 너도 사실을 알게 된 것이구나.


-영감님, 영감님은 알고 계시면서 왜 그런 AI니 양자컴퓨터니 가상현실이니 하시면서 사람을 속이신 거예요. 


-난 속인 적이 없단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야. 이 가상 현실의 평행우주와 다차원들이 정묘하게 얽혀있는 속에서 우리 세계도 있는 것이란다. 더 나아가 천국도 지옥도 있겠지. 나는 곧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영감, 약 팔지 말라니까. 우리 앞의 현실이야 우리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영감이 말하는 내용들은 입증할 수 없는 것들이잖아. 우린 그냥 우리 세계에 있다는 이 현실만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야. 애먼 애한테 입증되지도 않는 주장 들먹이지 말아.


다영이 마치 사기당한 것 같은 기분이라 노인에게 따지고 들자. 노인은 모든 것을 사실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노인은 분명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노인과는 생각이 다른 지현은 노인이 자기만의 관점으로 다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 같아 노인에게 말했다.


다영은 그들의 주장 따위 보다 어떻게 실제 삶을 되찾을 수 있을지가 더 중요했다. 아니 간절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영감님 천국이 아니라 다시 저의 현실 아니 실제 세계에서의 삶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소멸하기에 저것이 소멸하고 저것이 소멸하기에 이것이 소멸하는 것이다. 실제라는 그 삶과 지금 너의 현실인 이 삶이 어찌 다르기만 하겠니. 니가 악몽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면 받아들일만하지 안느냐? 이 삶도 현실인 것을. 



20


다영은 언제나처럼 자기 방 자기 침대 자기 이불 속에서 깨어났다. 이젠 자기 이불 같지 않은 바스락거리는 느낌도 나지 않았다. 눈을 뜨고 나오자 식탁 앞에 아빠가 앉아있고 엄마가 식탁에 찌개를 가져왔다. 밥을 먹으며 아빠가 말했다.


-우리 딸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지. 


-네.


다영이 서글픈 어조로 대답했다. 


-오늘은 당신이 학교까지 태워주면 되겠네요.


-아니에요. 혼자 갈래요.


-아니야. 아빠도 우리 딸 학교 가봐야지.


-오늘 말고 다음에요. 고딩도 아니고 아빠 차 타고 가기 그래요.


-음, 그런가? 운전면허증부터 빨리 따. 아빠가 우리 딸 차로 생각해둔 게 있거든.


다영은 아빠 말에 울컥하는 것만 같았다. 실제 아빠도 저렇게 말씀하셨으리라 생각하니 더 울컥했다.


-어떤 차요?


-안돼. 안 돼요. 신입생이 무슨 차예요. 당분간 대중교통 이용하는 거야 알았어. 다영아!


엄마가 갓 입학한 신입생이 차를 사는 건 안된다고 말하자. 다영은 모든 게 일상 같다고만 느껴졌다.


-저도 차는 아직 생각 없어요. 운전면허증 부터 따야죠?



21


다영은 학교로 향하다 병원으로 왔다. 자신이 누워 있던 병실을 찾았다. 침대는 비어있었다.


가만히 침대 옆의 바이털 싸인 모니터를 보았다. 화면은 꺼진 채였다. 다영은 살아나고 싶기도 안주하고 싶기도 한 복잡한 심정이었다.


엄마, 아빠와 식사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뭐라고 정의하지 못할 버거운 감정이 눈물이 되어 다영의 볼을 타고 흘렀다.


그때 바이털 싸인 모니터에 삐삐 삐삐 소리가 나며 모니터가 켜지며 바이털 싸인 그래프가 요동쳤다.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이 보였다. 다영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영은 침대를 향해 조용히 한걸음 한걸음 다가섰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