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산 아래에서 물괴들이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자 일행이 모두 어쩔 수 없다는 듯 동굴로 들어갈 때 지민이 동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서방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런 시급할 때 무슨 말을 한다는 거요.


지민이 자신을 서방님이라며 부르자 동영도 더 이상 예탁을 속이려 할 필요도 없어 지민에게 단둘이 있을 때처럼 예를 갖춰 답했다. 


-저 아이를 가진 것 같습니다.


-아..


순간 동영의 낯빛이 어지러운 빛을 띠었다. 


=지금 이 상황에 아기라니.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아기라니. 가문의 존망도 알 수 없는데 축복받지 못할 상황에 찾아온 아기로구나.


이리 생각하면서도 동영은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내게 첫아이를 선물해 줘서 고맙소.


지민은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동영을 따라 억지 미소를 지었다.


17 


동굴 안에 들어서자 지성은 삼지창을 들었고 염석도 도끼 보다 긴 무기인 삼지창을 따라 들었다. 철재는 화살통 두 개를 둘러메고 다른 화살통은 동굴 입구 한쪽에 모아뒀다.


지민도 삼지창을 들었지만 제법 무쭐했다. 동굴 한 쪽에 군사들의 시신이 흩어져 있는 곳에 검이 한 자루 놓여 있었다. 예탁이 집어들려 다가서려는데 동영이 그녀를 앞질러 가더니 검을 들었다.


예탁은 무기 하나 없이 멍한 채 서있다가 화살촉으로라도 찌를까 생각했지만 '그리 덤벼들다가는 물괴에게 당하기 더 쉽상이겠구나' 생각했다.


-마님, 이리 오세요. 제 뒤에 계세요. 위험합니다. 


-어, 그래.


예탁은 쓴웃음을 지으며 지성 곁으로 갔다.


철재는 활을 들어 거의 다 와가는 물괴들의 이마 정중앙을 맞추기 시작했다. 철재가 화살을 뽑을 때마다 물괴들이 하나 둘 고꾸라졌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수의 물괴들이라 어느새 동굴로 들이닥쳤다. 


-캬악


동굴 입구에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물괴들의 목을 동영이 베고 염석과 지성, 지민이 각자 삼지창으로 찔렀으나 찔린 놈들이 하나하나 지금 뭐 하냐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팔을 뻗으며 덤벼 들려 했다. 


철재는 그 물괴들의 이마 정중앙을 맞춰 숨을 끊어 놓았다.


-에라이 씨!


염석이 안되겠는지 들고 있던 삼지창을 던져 버리고 도끼를 들어 다가오는 물괴들의 이마를 가격하자 물괴가 쓰러졌다. 


-크허허어엉 


한창 난타전이 일 때 동굴 안에서 포효하며 곰이 뛰쳐나왔다. 잠자던 곰이 자기 동굴이 소란스럽자 성난 채 깨어난 것이다. 모두 놀라서 동굴 벽에 바짝 붙자 동굴 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물괴 무리를 향해 거대한 수콤이 달려들었다.


수콤이 달려들어 물어 던지고 앞발로 이놈 저놈 머리를 치자 물괴들이 우수수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야. 일당백일세 그려.


-이제는 어쩐 답니까? 


-물괴도 걱정이지만 저 수콤이 야성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 또한 큰 걱정이 아니오.


철재는 다행스럽다는 투였지만 예탁과 동영이 걱정을 드러냈다. 


예탁이 그때 동굴 밖으로 멀어져 가며 물괴 무리들과 싸우는 수콤 뒤로 머리에 상처를 심하게 입은 물괴가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염석이 그것에 머리를 도끼로 내려치려는 찰나 바닥에 놓인 활과 화살을 짚은 예탁이 화살을 쏴 물괴의 이마를 맞췄다. 물괴가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갔다.


-어라. 타고난 신궁이라도 되는 거야. 언제 활쏘기 연습이라도 하셨어 아씨?


-몇 번, 아버님을 따라갔다가 쏴보기는 했습니다.


염석의 말에 예탁이 어깨를 펴며 대답했다.


물괴가 사라지자 다들 한숨을 놓았다. 


동영이 검을 든 손을 내리고는 지민에게로 다가갔다. 


-이제는 괜찮소. 다 지나갔소.


지민은 넋이 나간 듯 들고 있던 삼지창을 떨어뜨리고는 피 묻은 저고리 소매를 걷었다. 팔뚝에 물괴가 할퀸 것인지 생채기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을 거요. 물괴한테는 물려야 옮는 거잖아?


동영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두려운 얼굴로 검을 힘줘 잡았다. 


지민이 몇 번 경련을 하고는 동영에게 달려들자 동영은 놀라 그녀의 배를 찔렀다. 동영의 어깨를 물어뜯은 지민이 고개를 돌리자 예탁이 그녀의 이마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넋 나가 바로 옆 바닥에 쓰러진 지민의 시신을 바라보는 동영의 곁으로 예탁이 다가왔다. 예탁은 지민의 배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부인.. 부인.. 내가.. 캬악


예탁을 부르다가 경련을 하며 괴성을 지르는 동영이었던 물괴의 목을 예탁이 잘라버렸다.


-서방님 잘 가셔요.



18


예탁과 지성, 철재와 염석은 동굴에서 나와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제 곧 정상이었다.


남자들은 뒤에서 다시 물괴 무리가 쫓아올까 경계하며 천천히 오르고 예탁이 앞장섰다. 


정상에 올라섰다. 예탁은 동영의 피가 묻은 치마와 저고리를 벗었다. 


-아이고 마님, 이게 무슨 짓이랍니까? 예법이 지엄한데 양갓집 아씨가 너른바지만 입고 치마저고리를 벗어버리시다니요.


-예법이 오늘 날 살린 게 아니잖아! 벗어야... 벗어나야 사는 거야. 그래야 살 수 있어. 


그리 말하며 예탁은 가슴 아래 호피를 가로로 묶어 짧은 치마처럼 걸쳤다.


정상에 오르며 예탁은 자신을 뒤따르는 지성의 손을 잡아당겨 주었다. 


염석이 말했다. 


-이제 이 고비만 넘으면 문제인 모든 것들이 더불어 사라질 거야! 새날이 시작되는 거야. 새로운 세상이 말이야!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예탁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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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투실한 소녀가 말고기를 낚아채 자신의 입에 넣으려는 아낙의 손을 잡고 저고리 소매를 걷어올린 그녀의 팔뚝을 물었다. 


그러자 바닥에 말고기를 떨어뜨린 아낙은 성난 듯 찡그린 얼굴로 인상을 썼다.


-너 이년 어디서... 윽윽.. 캬악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아낙은 몸을 뒤틀며 경련을 하더니 갑자기 물괴로 변하며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목을 물어뜯긴 소녀의 숨이 끊어지자 사람들이 놀라 허둥지둥 도망치는 중에도 물괴는 중년의 농부에게 달려들었다. 


농부의 살점을 물어뜯은 물괴는 바로 다른 피난민에게 달려들었다.


그 중년의 농부도 금새 물괴가 되어 소리치며 도망가는 다른 이들에게 덤벼들었다. 


이런 식으로 짧은 찰나 간에 물괴는 몇 배수로 거듭거듭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달빛에 의지해 너나 할 것 없이 소리치며 달아나기 바빴다.



14


철재와 염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을 오르고 있다.


그 뒤를 지민의 손을 꽉 잡은 동영이 지민을 끌다시피 들다시피 당겨대며 산을 오른다.


그들 뒤로 입술을 꾹 다문 예탁이 원망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보며 힘겹게 뒤따른다. 그 곁에서 그런 그녀를 애처로운 듯이 바라보는 지성이 산을 오르고 있다.


걸음이 느린 예탁을 보다가 지성이 결심한 듯 호피를 뒤집어쓴 예탁을 들쳐 맸다.


-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냐?


-마님, 우선 이곳을 벗어나고 죄를 물으시지요.


예탁을 들쳐 맨 지성은 달리듯 산을 탔다. 그들을 앞서가던 지민과 동영을 지나쳐 갔다.


맨 앞에 가던 철재가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어깨에 찼던 활을 바로 잡고 옆구리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더니 산 아래를 향해 쐈다.


화살이 지성이 들쳐 맨 예탁의 엉덩이를 스쳐 지민과 동영 사이를 스쳐갔다. 그리고는 그들 뒤 몇 십보 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서 발 빠르게 뒤쫓아오던 물괴 무리 중 하나의 이마 정중앙을 꿰뚫었다.


-캬악


화살을 맞은 물괴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하지만 다른 물괴들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뛰쫓아왔다.


지성이 물괴가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 놀라 외쳤다.


-저것도 죽긴 죽는가 봅니다.


-아무 데나 쏜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인당혈 위를 맞춰야 죽더라고. 이 녀석 같은 명궁이 아니면 아무도 못 맞출 거야?


염석이 철재를 추켜세우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럼 저것들을 다 죽이면 되지 않나요?


지민이 다급히 말했다. 


-화살도 부족한데다 나 혼자서 저것들을 무슨 수로 다 쏴 죽이나?


철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때 동영의 눈에 달빛 아래 희미하게 산 중턱쯤 동굴이 보였다. 

 



15


일행은 동굴 입구에 다다랐다. 지성이 예탁을 내려놓자 예탁은 지성의 뺨을 때릴 듯 손을 올리다 그의 눈에 자신을 걱정하는 빛이 역력하자 주먹을 쥐고는 손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동영을 돌아보았고 동영이 손을 꼭 잡은 지민을 쳐다보고는 둘이 맞잡은 손을 바라봤다.


동영이 난감한 표정으로 지민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부인, 경황이 없어 부인 손을 잡고 달린다는 것이 그만 이리 되었소.


-유구무언이란 말도 있지요. 그것을 말씀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예탁은 콧방귀도 아깝다고 여기며 받아쳤다. 그런 그녀를 보고 지민이 나섰다.


-사실대로 말할게. 나 원래 동영 도령과 알던 사이야.


-동영 도령... 알던 사이... 네 이년 너 말하는 본새가 그것이 무엇이냐? 상전이 우스운 게냐?


-나도 원래 너처럼 양반이었어. 아버님께서 역모의 누명을 쓰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도망을 치다 너의 집에 의탁하게 된 거야.


-정아 네가 역도의 딸이라면 그럼 도망 노비였다는 게야?


예탁은 지민을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정아는 내 이름이 아니야. 난 유가 지민이야. 그리고 노비가 아니야. 아니 노비이면서 양반이고 양반이면서 노비인 것이 지금의 내 신세겠지.


예탁은 지민의 말이 부당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누명이었다고 한들 노비가 되었다면 노비인 것이지, 노비이면서 양반이고 양반이면서 노비라니 그 무슨 말장난이란 말인가?


-내 너를 6살 시절부터 곁에 두었는데 서방님과 네가 어찌 그전부터 알던 사이라는 말이냐?


-오라버니와 동문수학하시던 오라버니의 벗이셨어. 그래서 어릴 때 몇번 집에 오신 적이 있어.


-부인 그렇다 한들 부인과 나는 가문 간의 혼사를 치르며 조상님들과 천지신명 앞에서 혼례를 올린 진짜 부부요. 무엇이 달라진단 말이오?


예탁은 오만정이 떨어진 표정으로 동영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저 유지민이란 내 안다고 생각했으나 모르겠는 저 아이는 어쩌실 작정입니까?


-부인 아직 신행도 끝마치지 못하고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사내가 첩실을 두는 것이 예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지 않겠소.


-허..


예탁은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도망 노비를 첩실로 둘 걱정을 혼인 이후 단 하루가 지나가는 이때 해야 하는가?


-잔말은 그만둬. 진짜 큰일이야. 큰일.


철재와 함께 동굴 내부를 돌아보고 나온 염석은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일동 염석을 주목하자. 염석이 입을 뗐다.


-진퇴양난이야. 물괴를 잠시라도 피하자면 이 동굴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았는데...


-같았는데 뭐란 말씀이오.


뜸을 들이는 염석에게 지성이 대답을 보챘다.


-X벌, 곰이 있네. 그것도 사람 맛을 본 곰이야.


-그래도 무기 몇은 얻었네 그려. 군사 복식을 한 해골이 몇 구 있는데 곰을 잡으러 왔다가 다 떼죽음을 당한 모양이요. 활과 화살이 몇 되고. 삼지창이 셋, 검이 하나 그렇네. 그런데 곰을 깨울까 봐 들고 나오지는 못했소.


곰 소식을 전하는 염석의 말에 추임새를 넣듯 철재가 거들었다. 하지만 난감한 소식과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이 혼재했으나 희소식이 전혀 희소식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곰의 소굴을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산 아래로 향했다.


미친 듯이 달려 올라오는 물괴의 무리가 보였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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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람 살려. 윽윽. 카악.


물괴 천지인 전답, 들녘,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은 금새 물괴의 괴성으로 바뀌고 있다.

 

도성 안이 온통 물괴의 천지가 되었다. 


궁이라고 안전할리는 없었다. 오히려 폐쇄된 그 공간을 침범하는 단 하나가 있다면 그로 인해 궁 안 전체에 물괴가 창궐할 터였다. 



왕좌를 차지한지 오래지 않은 이유는 왕이 어찌 궁을 버리겠으며 도성을 떠나겠느냐며 버텼다.


이제 궁인들과 공신들 중 몇몇만이 그의 곁에 남아있지 모두가 떠나버린 상황이다. 


소용 박 씨,, 근빈 박 씨,, 숙원 신씨가 모여있는 정희왕후의 처소에서 이유는 참담한 심정으로 말했다. 


-이제는 벗어날 수도 없소. 


-신첩 최후까지 전하의 곁에 남겠습니다.


-소첩도 전하와 마지막을 함께 하겠나이다.


정희왕후의 비장한 말을 소용과 근빈도 입을 맞춘 듯 따라 했다. 


그때 숙원은 낯빛이 해쓱한 채로 아무 말 못하고 앉아있었다. 


-숙원 어디가 편치 않은 게요? 어찌 그리 죽을 상을 하고 앉아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하고 있는 거요?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그것이 아니오라.. 윽.. 캬아악.


숙원이 느닷없이 돌변하며 물괴의 낯으로 변하더니 바로 곁의 근빈의 목을 물어뜯고는 소용의 얼굴을 씹어 뜯어냈다. 


처소에서 괴성이 들리자 호위무사 이계가 뛰어들어 숙원의 복식을 한 물괴의 등을 베었으나 물괴는 돌아서 이계에게 달려들었다. 


이계는 한걸음 물러서며 아직 공중에서 뛰어오른 채인 물괴의 목을 잘랐다. 


피가 낭자하게 퍼지며 그의 의복과 처소 바닥에 스미었다.


-소용 근빈 괜찮은 것이오. 


공격을 받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용과 근빈은 몇 번 경련을 하듯 몸을 뒤틀더니 일어나, 하나는 놀라 일어선 정희왕후를, 하나는 이유에게 달려들었다.


이계가 재빠르게 이유에게 달려드는 소용의 목을 쳤으나 근빈을 막지 못해 정희 왕후는 왼쪽 눈을 뜯기고 말았다.


-아아악~


이계가 정희왕후의 눈을 파먹은 근빈의 목을 쳤다. 


-중전. 중전. 이를 어이 한 단 말이요.


-전하 신첩을 죽여주시옵소서. 더 늦기 전에 저의 목을 어서 빨리 쳐주시라는 말입니다. 


얼굴 전체가 피투성이가 된 중전은 피가 쏟아지는 휑한 한 쪽 눈을 왼손으로 가리고 처참한 지경이 되어 이유에게 애원했다.


망설이던 이유는 중전이 경련을 하려 하자 이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10


궁인 몇과 호위무사 이계만을 데리고 이유는 근정전으로 향했다. 하루 아침에 왕후와 비빈을 모두 잃은 이유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그는 궁인들과 이계를 남겨두고 홀로 근정전 안으로 들어섰다. 근정전 내부에는 피 냄새가 진동하며 시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널브러져 있다.


그가 용상을 올려다보자 피를 뿜는듯한 혈색의 보랏빛 입술의 피 범벅을 한 재상 복장의 물괴가 그를 내려다보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이유는 참담한 심정으로 토해내듯 이 말을 내뱉었다.


-어찌 거기 있느냐? 그것은 나의 자리다. 내가 어찌 그 자리에 오른 것인지 네 정녕 모른다는 말이냐? 썩 내려오거라.


물괴가 그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들려 몸을 날렸다.



11


예탁은 가마 위에 덮어두었던 호피를 뒤집어쓴 채 동영 곁에서 다시 집으로 향해 걷고 있었다. 며칠을 어렵게 온 길을 되짚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민은 예탁의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지만 동영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으며 묵묵히 걷자 조금 빈정이 상했다.


지성이 그런 그녀를 흘깃 보더니 동영에게 말했다.


-마님, 이제 처가에 피신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겠죠. 


동영은 대답 없이 하늘을 한번 쳐다봤다. 


-이제 달이 떴구나.


-서방님. 가문의 안위는 걱정되나 후일을 도모하시고 지금 이 순간을 이겨 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디 묵을 자리부터 보아야지요. 


본가가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 동영의 처지가 예탁은 한없이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달을 보며 한숨을 쉬며 한마디를 하는 동영에게 예탁은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 말했다.


-마님, 힘을 내셔요. 사람들이 저리 많으니 노숙을 하더라도 오늘은 안전할 거여요.


지민은 동영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피난민 같은 무리더라도 그들을 뒤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니 안심이 되지 않는가?


동영이 지민을 돌아보며 약간은 책망하는 눈빛으로 이리 말했다.


-사람이 많으면 산짐승들이 덤벼들 우려가 더 크지 않겠느냐? 호랑이라도 덤벼든다면 어찌 안전할 수 있겠어.


-안심하시오. 호랑이도 사람이 이리 무리 지어가면 피해 간다오. 


철재가 차분한 말로 동영을 안심시키려 했다. 염석은 지쳐서 그만 쉬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말했다. 


-어디 적당한 자리 찾아서 오늘은 예서 묵자. 계속 걷는다고 마을이 나올 것도 아니라잖아.



12


조금 전 저녁 아낙에게 손목이 끌려왔던 투실한 소녀가 아껴두었던 말고기 한 점을 뜯어 먹으려 했다. 그 아낙이 나서며 말고기를 낚아챘다.


-아까 얼마나 받았길래 이것이 남아있는 거여. 어린 계집이라고 더 챙겨준거여 뭐여.


-아니랑께요. 지가 아껴둔 것이랑께유. 


아낙이 못 들은 체하고 제 입에 집어넣으려 하자 소녀가 아낙의 손을 잡고서 팔뚝을 물었다.


그때 예탁은 먼 발치에서 그들을 향해 문득 고개를 돌리다 그 모습을 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던 예탁의 눈빛이 점점 떨려왔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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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래서 지금 한양은 고사하고 왕도를 둘러싼 지역 전체에서 사람들이 물괴로 변해 멀쩡한 사람 하나 없는 지경이오. 사람들 말로는 궁도 범해져서 임금도 물괴가 되었다 하더이다.


-네. 이놈, 그 요망한 입 다물지 못할까? 어디 전하의 안위를 가지고 망발이란 말이냐?


-망발은 무엇이 망발이란 말이요. 그것이 작금의 현실이오.


한성부 소식을 전하던 사냥꾼에게 동영이 놀라고 대노해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무엇이 망발이란 말인가? 그들 주위에 바위와 평지마다 피난민을 방불케 하는 지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삼삼오오 모여앉아 쉬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도 그런 그들을 거쳐 동영이 예까지 왔던 길을 서둘러 짚어가고 있지 않는가? 


-임금이 그리된다 해도 뭐 그리 망측한 일이겠소. 충신인 김종서 대감을 비롯해 숱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조카에게서 왕좌를 찬탈한 대악인이 아니오. 이제는 그 조카의 목숨마저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소. 


-옳고 그름은 역사를 누가 쓰느냐에 달린 것이다. 결국에는 현군으로 기록될지 뉘 알겠느냐?


-옳고 그름을 그리 알 수 없는 시대라 이런 일이 나는 게 아니겠소?


........................................................


예탁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옹기종기 앉아있는 틈바구니를 다니다 치마와 저고리가 피투성이인 자기 또래의 한 소녀보았다.


-괜찮으시오? 


-예, 아씨. 저는 괜찮습니다. 흑흑.. 괜찮아요.


예탁이 자기 또래의 천민 소녀에게 안스러워 묻자 소녀는 아마도 가족을 흉사에 잃은 것인지 괜찮다는 말을 하며 서러움에 북받쳐 울고 말았다.


-쟈도 그렇네. 


예탁 뒤 건너 자리에 있던 무리 중 아낙네 한 명이 예탁과 말을 주고받던 소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다친 손을 잡아 유심히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야도 물리고 멀쩡하네. 다른 사람들은 다 물리면 물괴로 변하던데 너는 어떻게 괜찮은 거여. 


-저도 모르겠어요. 


아낙은 뭐 시비 붙을 꺼리라도 발견한 것처럼 자기 자리에서 그 소녀와 비슷한 또래의 소녀 손을 끌고 왔다. 아낙이 핏자국이 낭자한 그녀 저고리의 고름을 풀어 당기자 어깨의 깊은 상처가 보였다.


-니랑 쟈랑 뭣이 어떻길래 괜찮은 거여?


-내가 그걸 어떻게 안대유? 아프니께 그냥 놔 주시랑께유. 


예탁도 두 소녀를 유심히 보았지만 깡마른 천민 소녀와 아낙이 데려온 투실하게 살찐 소녀에게서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딸도 저 처자들과 같은 또랜데 물괴가 되고 말더만 이 처자들은 어떻게 괜찮은 거야?


아낙이 소녀들을 모아 놓고 시끄럽자 소녀들 뒤에서 농부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자가 놀라 물었다.

..............................................................


지민은 놀라 가마 옆에서 귀를 쫑긋거리며 다른 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곁에서 지성은 가마꾼들과 함께 이게 무슨 일이냐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때 그들 곁으로 사냥꾼 무리가 걸어왔다. 


-철재야, 저거라도 먹자.


도끼를 든 남자가 잠시 전 동영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 사냥꾼에게 나무에 메어진 동영의 흑마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염석아. 한 명 정도라면 타고 빠져나가는 게 더 낫겠지만 저 사람들 예까지 도망 오며 먹지도 못했을 테니 먹는 게 맞겠다 싶다.


-맞긴 뭐가 맞다는 말이요. 이런 명마를 잡아먹는다는 게 말이나 되오?


도련님이 애지중지하는 명마를 잡아먹겠다며 들이닥치는 무지몽매한 자들을 가로막으며 지성이 나섰다. 


-명마? 명마가 사람을 살리면 그때는 더 유명한 말이 되는 거 아니냐? 


-내버려 두거라.


도끼를 든 염석의 말에 동영이 지민 곁으로 다가오며 지성을 말렸다.


-마님, 신행길에서 타고 가던 말을 잡아먹는다니요.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쩐단 말이냐? 신행길에서 더는 갈 곳이 사라졌지 않느냐?


지민이 하는 말은 당연한 말이었으나 동영은 본가의 모두가 어찌 되었을지 걱정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살고 나서 후일을 도모하자는 생각이 앞섰다.

예탁은 가마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며 동영을 먼 발치에서 보고 시댁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이런 일을 겪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본가를 걱정할 동영의 마음을 헤아리기 쉽지 않겠구나 싶어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무슨 물괴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사람이 다 당하는 건 아닌가 봅니다.


그들 곁에 와 예탁이 다행스러울 수도 있는 소식을 전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부인. 


-저들 중에 물괴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있는데 상처만 있을 뿐 멀쩡하지 뭡니까?


-이들 말로는 물괴에 당하면 끝이라던데 그게 아니었소.


동영은 희소식에 다행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어찌 된 일일까 하는 의아함이 일었다. 


-그거 너무 기대 마시오. 내가 이미 살아난 이들을 보았는데 오직 젊은 처자들 중에서 일부만 그러하오.


-젊은 처자는 괜찮단 말씀이셔요?


철재가 희소식을 부정하는 말을 했지만 지민은 너무나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거 내 생각에는 아마도 처녀만 괜찮은 것 같아. 그러니 첫날밤은 보내고 신행을 나섰을 이 신부는 걱정을 해야 할테고 아마도 처자는 괜찮겠지.


염석의 그 말에 지민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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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니 이유를 치고 선왕을 복위시키자는 것이 아니오.


-이 자가 미친 게로구나. 네 정녕 목숨을 내놓고 싶지 않다면 어이 내게 와 폐왕 복위를 운운하는 것이냐?


공신인 홍윤성을 찾아와 재야 사림의 남효온은 당당한 것인지 미친 것인지 폐왕이 된 이홍위의 복권을 논하고 있었다. 홍윤성은 남효온의 주장보다도 자신을 찾아온 것 자체가 이후 자신에게 문제 삼을 이들이 있을 것이 자명하기에 '이 자를 어찌 처리해야 할 것인가'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도 그리 오래 할 고민이 아니었다.


-이 중차대한 문제를 내가 왜 공을 찾아와 논하는 것인지 정녕 모르겠소?


남효온은 홍윤성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다소 짧은 그 시간 동안에도 계속 얼굴을 쓸어내리고 점점 땀을 흘리며 눈은 점점 충혈되어 갔다. 그가 그런 낯색으로 발작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몇 차례나 꺾으며 홍윤성에게 묻자 홍윤성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방 한편에 장식된 사인검을 조용히 들었다. 


하지만 그가 등을 돌린 사이 남효온은 어느새 온 얼굴의 혈관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며 땀구멍으로 피를 흘리는 듯 붉은 기가 가득한 낯빛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뜻을 내 알 필요가 있겠는가.. 공이야말로 오늘이 공의 마지막 날임을...


홍윤성은 말을 하며 남효온이었던 이 생명체인지 귀신인지 모를 것을 향해 돌아서며 사인검을 휘두르려다가 흠칫 놀라 말을 잊고 말았다.


-무엇이냐... 네 정녕 무엇이란 말이야?


붉은 피를 덮어쓴 듯한 그것을 향해 소리치는 홍윤성에게 그것이 달려들었다. 혈안이 터질 듯이 크게 뜬 눈으로 보랏빛 입술 사이의 흰 이빨을 드러내며 그것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그는 검을 들어 그것의 배를 관통하였다. 하지만 배가 뚫리면서도 그 기세 그대로 달려든 그것은 홍윤성의 양팔을 부여잡고 선 미친 듯이 홍윤성의 목을 물어뜯었다.



5


-여기서 좀 쉬어 가시지요. 다리도 아플 텐데...


아직 해가 서산마루에 있을 때쯤 가마꾼 네 명이 메고 있는 호피로 덮여있는 가마와 그 옆에 가마를 지친 듯 따라오는 지민을 돌아보며 흑마를 탄 신랑 동영이 말했다. 가마 안의 예탁은 가마를 타고 있는 자신이 다리 저릴까 봐 걱정해 주는 동영의 세심함에 가슴 깊이 '참으로 다정하신 분이구나' 생각했다.


-아니옵니다. 서방님 어찌 이 늦은 시각에 지체하겠사옵니까?


-그래도 오랜 신행길이니 잠시 쉬어 가는 것이 맞겠지요. 아픈 다리도 좀 풀어야 하지 않겠소.


신부인 예탁의 말에 대꾸하는 듯했지만 동영의 눈은 지민을 향하고 있었다.


-예. 아기씨 아니.. 마님 가마꾼들도 지칠 터이니 잠시 쉬어가시지요?


-잠시들 쉬시게나.


동영 곁의 종자인 지성이 동영의 눈치를 보고는 가마꾼들에게 지시했다. 


가마에서 내린 예탁은 가마를 향하고 있는 동영의 눈길을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인 영 대감을 찾아온 동영의 모습을 보고 잘생긴 도령이구나 하는 생각에 내심 호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년 사이 사주단자가 오가고 혼사에 이르기까지 말도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사이였다. 게다가 첫날밤에도 합환주 몇 잔 마시고 곯아떨어져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사이였기에 신랑에 대한 커다란 호감 같은 건 없었는데 가마 안의 자신이 피로할까까지 걱정해 주는 따스함에 소록소록 정이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에 말을 메어둔 신랑이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다. 예탁은 낭군의 배려와 애정만 있다면 시집에서의 삶도 견딜만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예탁은 그를 보며 마주 미소 짓고 있는 지민을 보지 못했다.


-힘들지는 않으셨소.


-제가 힘든 것보다 가마꾼과 이 아이가 힘이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기 저 바위에 앉아 조금 쉬시겠소?


널따란 바위 위에 예탁과 동영이 앉자 예탁의 앞에 지민이 동영의 곁에 지성이 서있었다. 


-정아, 너도 예 앉거라. 


-제가 어찌..


예탁이 지민을 보고 권하였으나 지민은 짐짓 사양하는 체 했다.


-어서 앉으라는데두.. 나야 예까지 앉아 왔지만 넌 그 먼 거리를 꼬박 걷지 않았느냐?


-예, 마님... 


-부인 잠깐 쉬고 계시오. 요깃거리라도 구해 오겠소. 가자 지성아!


지민이 바위 위에 앉자 동영이 사냥을 하려는 것인지 열매라도 따오려는 것인지 지성과 함께 가자고 재촉했다. 지성은 조금 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예탁과 지민이 있는 바위를 돌아보고 말았다.


-정아. 저 지성이라는 이가 너를 맘에 있어 하는 모양이구나.


-마님, 망측한 말씀 마셔요.


지민은 예탁의 말에 짐짓 화가 났지만 용케 참으며 대답했다. 


-어이. 뿔이 난 게야. 너와 내가 나이가 같은데 이제 나도 혼인을 하였으니. 너도 짝을 찾아야 할 게 아니냐? 지성이라는 자가 나이도 너와 비슷하고 용모도 저리 출중하니 네 짝으로 어떻겠느냐?


지민은 이미 자신에게 마음을 보인 동영에게 남은 생을 의탁할 생각이다. 비록 자신의 본래 신분을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앞길이 창창할 대제학 자제의 첩이 되어 남은 생을 여유롭게 보내고픈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저런 종자놈과 짝을 이뤄야 한다니... 순간 예탁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분노가 일었다.


-그런 흉한 소리 마셔요. 저는 그냥 혼자 살겠습니다.


-하하.. 알았다. 알았어. 네 마음이 정해지면 그때 얘기하자꾸나.



6


-도련님, 이제 이 산만 넘으면 마을인데 길을 재촉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는 다리도 안 아픈 게냐? 네 말마따나 산만 넘으면 마을인 것을 좀 쉬어간들 어떻겠느냐? 


동영이 말하는 찰나 지성은 나무들 사이에서 빛 좋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행이다 싶어 소리쳤다. 


-도련님 개복숭아 열매가 있습니다. 저것으로 마님 쉬시는 동안 잠시 요기는 되겠습니다.


-이놈아 너는 어찌 같이 걸어서 온 소녀 배주린 것은 걱정 안 하고 마님 걱정만 한단 말이냐?


개복숭아를 열심히 따고 있던 지성은 뭔가 들킨듯해 서둘러 둘러댔다.


-저희 같은 종들이야. 조금만 먹어도 힘이 나겠지만 마님은 귀하디 귀하게 자라신 분이라 금새 배가 주리면 어쩌나 걱정을 했을 뿐입죠.


-뛸 일도 없고 걸을 일도 적던 규수와 뛰어야 살 수 있고 허드렛일에 힘겨운 소녀 중 더 주린 이가 뉘겠느냐?




동영과 지성이 개복숭아를 싸 들고 오는 사이, 산 넘어 마을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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