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영이 용의 입 방향을 향해 눈에서 붉은 오렌지빛 광채를 뿜어내자 용이 입을 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영과 지현은 용의 입 밖으로 날아나왔다. 지현이 아무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용을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견주고 있을 때 다영이 한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용을 공격해봤자 소용없는 걸 알면서 뭐 하러 또 공격을 하려고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다영은 용의 옆구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용은 공중에 떠있는 다영과 지현의 주위를 크게 휘돌아 감싸는 듯 한 바퀴 돌더니 먹구름과 함께 멀리 사라져갔다. 


-살아나왔구나. 하긴 여기서 죽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다시 날아온 터번을 쓴 노인이 말했다.


-그렇게 재빠르게 도망가실 줄은 몰랐어요.


다영은 가볍게 말했지만 조금 섭섭한 투였다.


-그럼 어쩌겠니? 이 늙은이가 용과 맞서 싸울 수도 없고.


노인은 겸연쩍었지만 자기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무사하게 탈출해서 다행이지, 뭐.


다들 지상에 발을 딛을 때 지현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말했다. 다영도 노인이 도망간 건 서운했지만 그가 그러지 않았다면 지현과의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 지현도 용의 배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섭섭함은 작은 문제고 자신에게 작은 깨우침이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저는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엄마가 기다릴 거예요.


-아까 내 말 잊은 거야. 모든 현실은 니가 만드는 거라니까.


지현이 그녀의 의식에 작은 일깨움은 줬지만 다영은 아직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늦었다고 생각하니 늦는 거란다. 아침이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아침이야.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한결같이 태양이 따사로운 벌판 가운데서 언제 피어났는지 모를 하얀 튤립 한 송이를 꺾어 다영에게 건넸다. 


-황량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꽃이 피었네요. 이곳이 벌판이 아니라 온통 꽃들이 만발한 꽃밭이면 더 좋았을 텐데.


다영이 그리 말하자 색색깔의 꽃들이 순식간에 온 벌판을 가득 채우며 피어났다. 짧은 찰나만에 무지개의 스펙트럼같이 다양한 빛깔로 들판을 가득 꽃들이 채우고 있었다.


-많은 이들의 염원이 담겨야 변하는 공간을 넌 아주 쉽게 바꾸어 놓는구나.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지현의 말에 다영은 자기가 그랬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너의 마음이 이곳을 온통 꽃들로 출렁이게 만들었어.


-정말 내가 했다고요?


-너에게는 그저 자신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된단다. 그리고 그 확신이 무르익을 때에야 자신의 현실을 아니 사실이라 해야겠지.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다시 한번 지현의 말을 의심하는 다영에게 노인이 말했다. 다영인 생각했다. 


=사실이란 게 뭘까?



17


다영은 지현과 함께 자신의 세계로 돌아왔다. 다영의 집 현관까지 지현이 바래다줬다. 


-오랜만이었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한 건.


-저는 처음이었어요. 남자와 단둘이 그런 밀실에 갇힌 건.


지현이 말없이 다영과의 헤어짐이 아쉽다는 듯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영도 지현을 바라보다가 다영으로선 뭔가 처음인 낯선 분위기가 어색해 한 마디를 했다.


-이제 오빠라고 해도 되죠?


-어? 어! 그래도 되지. 


-지현 오빠 잘 가. 바래다줘서 고마워. 


다영은 말을 마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고는 그렇게 돌아선 채 미소를 지었다. 



18


그때 아빠가 거실에서 달려와 다영을 와락 껴안았다. 


-다영아!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이제서야 왔구나. 정말 미안하다, 다영아.


-아빠 갑자기 어떻게 왔어. 무슨 일 있는 거야? 표정이 왜 그래?


-다영아, 미안하다.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다영이 아빠의 어조에서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거란 걸 직감하고는 다시 한번 물었다.


-아빠 미안하다고만 하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 줘야지. 엄마는? 엄마는 어딨어?


그러면서 다영이 엄마를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자 엄마가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머리를 붕대로 감싼 채 누워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다른 차원에 갔다 온 사이 또 현실이 바뀐 걸까?


다영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럴수록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난 현실을 바꾸는 힘을 깨우쳤어. 이 현실은 다시 바꾸면 돼.


그렇게 마음먹고 다영은 눈을 감았다. 엄마가 나은 현실로 바꾸고자 깊은 염원을 담아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다영의 눈앞에 병원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들이 오고 가며 침대에 누운 엄마를 체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아빠가 애처롭게 침대에 누운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엄마가 울고 있었다. 엄마가 말이다.


말이 안 되는 현실에 다영은 놀라 침대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때 자신 옆으로 눈부시게 빛이 작렬하더니 지현이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났다.


-다영아 놀라지 마.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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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천둥 번개가 치는 구름 사이를 가로지르던 거대한 용이 다영과 남자와 노인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다영이 남자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뭐 해요? 안 싸우고.


-뭐야? 지금 날 더러 저 괴물이랑 싸우라고? 너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은 수퍼히어로잖아요? 그럼 내가 저 용과 싸우겠어요? 아니면 이 영감님이 싸우라는 거예요?


-야! 나 미치겠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몸이 마치 저절로 떠오르듯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무엇에 이끌려 오르는지 모르겠어서 자기 양팔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봤다. 그러다가 체념한듯이 용을 향해 날아갔다. 용은 너무 거대했다. 하지만 다영은 남자가 이번에도 깔끔하게 이기리라 확신했다. 


하늘 위에서 남자는 용의 기다란 몸통의 한 부위를 쳐보기도 했고 용의 뿔을 두 손으로 잡고 꺾어보기도 했지만 용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사실 용은 그와 싸우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용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치얼 업이에요 꼭 이겨요.


다영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용이 거대한 입을 벌리며 남자에게 날아들었다. 


-이런 제길.


피할 새도 없이 용이 남자를 집어삼켰다.


-어. 어. 


남자가 용에게 먹히자 다영은 이게 아닌데 하며 놀라 달아날 생각도 못했다. 옆의 터번을 쓴 노인은 멀찍이 날아가 버렸다. 다영은 남자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러는 사이 용이 날아들어 당황하며 돌아서 도망 가려는 다영마저 삼켜버렸다.



15


-환영한다. 아주.


남자가 온몸으로 빛을 발하면서 비꼬는 투로 이야기했다. 


-아니. 이기랬더니 먹히면 어떡해요?


-이 정도 규모의 괴물을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넌 내가 정말 무슨 수퍼맨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다소 성난 투로 말했지만 다영은 그런 남자에게 화가 나기보다 그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나 당황스러웠다. 


-이제 어떻게 벗어나죠?


-그걸 나한테 묻는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은데. 이 벽을 계속 쳐봤는데 꿈쩍도 하지 않아.


남자가 용의 위벽이랄 수 있을 벽을 턱턱 치면서 말했다. 남자의 광채로 용의 뱃속이 환하게 빛났는데 용의 뱃속은 무슨 빛을 반사하는 타일처럼 매끄러웠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소화되고 마는 건가요?


다영이 그렇게 말하자 바닥에서 천천히 물기가 스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정해. 진정하라구. 용은 알다시피 상상 속의 동물이야. 용이 무얼 소화시키고 위액이 나오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네요.


다영이 수긍하자 물기가 스미던 바닥이 다시 뽀송하고 매끄러워졌다. 


-우리 이제 어떡해요? 지금쯤이면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일 텐데. 늦으면 엄마가 걱정하실 거예요.


다영은 두려운 마음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지금 상황에 엄마가 걱정하는 게 문제야? 울기보단 우선 현실을 보자고 우리는 상상 속의 동물 뱃속에 있는 거야. 이게 가당키나 해?


-상상 속의 동물이라도 당신 세계에서 뭐가 불가능하겠어요?


-햐! 미쳐버리겠네. 


-내가 더 미치겠어요. 당신이 용한테 질지 누가 알았겠어요?


-넌 도대체 날 어디까지 믿는 거야?


남자가 다영이 보여주는 자신에 대한 신뢰에 뭔가 감동한 것 같은 어조로 물었다.


-당신 같은 수퍼히어로라면 못할게 없을 줄 알았죠.


-자꾸 무슨 근거로 내가 수퍼히어로라는 거야? 


-당신이 보여준 모든 게 근거죠? 의상이 마음대로 바뀌고 괴물들을 처치하고 하늘을 날고 차원을 이동하는데... 지금 봐요. 몸에서 빛까지 나고 있잖아요. 그런데 수퍼히어로가 아니면 뭐예요?


-난 그저 평범한 사람이야.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다영아.


남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다영은 까칠한 이 남자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 너무 부드럽게 느껴졌지만 한 편으로는 화가 났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요? 내 이름을 당신은 아는데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남자가 다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바닥에 천천히 앉았다. 다영도 남자를 따라 앉았다. 


-내 이름은 차지현이야.


-훗. 지현이요? 저 고딩 때 선배이름도 지현이었어요. 참고로 말하자면 나 여고나왔어요.


-이름 갖고 웃고 그러지마. 안그래도 어릴 때부터 놀림 많이 당했으니까.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죠? 


-22살이었지.


-나이를 과거형으로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하긴 그렇긴 하네. 그냥 22살이야.


-학생이에요.


-아니, 난 모델이었어.


-그것도 과거형이에요? 지금은요?


-보시다시피 이러고 있는 백수지.


다영은 뭔가 시원치 않은 남자의 대답이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오늘에야 이 남자 그러니까 지현 씨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듯해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만 같았다. 


-가족은...


-뭐 취조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쯤만 해.


-나한테 궁금한 것도 물어봐도 돼요.


-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이름은 다영이고 갓 입학한 여대생이고 나이는 20살, 현재는 엄마랑 둘이 살고 있고, 그리고 페미니스트야. 꼴페미 기질도 좀 있어 보이고.


-뭐예요. 그거 여혐이예요. 여혐. 


다영은 남자가 처음으로 다영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하자 뭔가 '그린라이트인가?' 하는 생각이 들려는 중이었다. 그런데 꼴페미라니? 꼴페미란 표현을 듣고는 발끈하고 말았다.


-나는 꼴페미를 싫어하는 거지 전체 여성을 다 싫어하지는 않아. 그리고 너 자신이 언젠가 돌아보면 알겠지만 니가 하고 있는 게 남혐이야.


-무슨 소리예요. 저는 여권을 신장 시키자는 마음은 있지만 남혐을 하지는 않는다구요. 


-정말 그럴까? 너는 같은 또래 남자들과 술을 마시면 남자들이 여자들 술에 약이나 탄다고 생각하는 부류잖아.


-아니, 걔네들이 정말 술에 약을 탔으니까 그렇게 아는 거지. 내가 그런 현실을 만들어라도 냈다는 거예요?


-맞아. 니가 만들어낸 현실.


-끌어당김의 법칙. 뭐 그런 거 말하는 거예요? 내가 그런 현실을 의도해서 끌어당겼다구요?


-현실을 의도해서 끌어당겼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거의 비슷한 의미야. 니가 완전히 창조한 현실이라 말이니까. 지금의 이 용처럼.


-네? 내가 이 용을 만들어냈다구요? 


-그래. 니가 만든 거야. 넌 지금 현실을 불러오는 정도가 아니라 완벽히 창조할 수 있는 차원에서 살고 있는 거야. 수긍하기 어렵다면 아까 그 영감의 말을 떠올려도 돼. 크게 다르진 않으니까.


다영이 생각에 잠겼다. 


=시뮬레이션 세계 속에서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힘을 내가 갖게 된 거라는 말이잖아? 이 용도 내가 창조했다니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무턱대고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아.


-이 용과 싸워서 이겨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원더우먼님.


다영이 문득 그렇구나 나도 수퍼히어로일 수 있구나 생각하자 그녀의 몸에서도 지현과 같이 광채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지현보다 더더욱 환하게 말이다. 


-그래, 용과 싸워 이겨야 하는 건 나였어!


다영은 눈에서도 붉은 오렌지빛 광채를 뿜어내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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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침 학교로 들어서던 다영이 루다와 주연을 보고는 루다에게 물었다.


-루다야! 그날 괜찮았어.


-무슨 소리야. 괜찮았냐니?


루다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너 그날 약에 취해서 잠들었잖아. 


-약이라니 무슨 약?


약이라는 말에 주연이 이상해하며 다영에게 조금 추궁하는 듯이 말했다.


-그날 희찬이 진우, 상연이랑 술 마실 때 왜?


-그날 술자리 끝나고 집에 잘 들어들 갔잖아. 그날 밤에 확인 전화도 해 놓고는 무슨 소리야? 


-아!


루다의 말에 그제서야 다영은 알겠다는 듯 탄성을 했다.


=그렇구나. 그 남자가 알려준 대로 엄마가 다친 아침을 바꾸니 현실도 일부 바뀐 거구나.


-아니야. 내가 다른 일이랑 착각을 했나 봐.


-싱겁긴.


그렇게 주연이 그냥 웃어넘기듯 지나가려 했고 루다도 별일 아닌 듯 지나쳤다.



12 


-니들 오늘도 한 잔 할래?


그날 괴물로 변해 사라졌던 희찬, 진우, 상연이도 멀쩡하게 나타나 다영과 루다, 주연에게 다시 한 잔하자고 제안했다.


-아니 우리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뭐야? 무슨...


다영이 희찬의 말에 다른 약속 있다며 거절하자 루다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려는데 다영이 입을 막았다.


-얘들아. 아까 내가 말한 약속 있잖아.


다영이 다시 둘러대며 루다와 주연을 끌고 희찬이를 지나쳐왔다. 그리고 그 남자아이들과 거리가 생기자 다영이 말했다.


-쟤네들 아주 질이 나쁜 애들이야. 너희들에게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는데 쟤네 아주 위험한 애들이니까 어울리지 마. 알았지?


-뭐가? 뭐가 위험하다는 건데?


주연이 볼멘소리로 따졌지만 다영은 딱히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없는 현실이었기에 얘네를 납득시킬 근거도 없었다.

다영이도 사실 현실이 바뀌었다면 쟤네들도 괴물이 아니고 약을 타는 그런 애들도 아닌 현실이 펼쳐질지도 모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타 우크쉬타시 마히마나마사타 디비 루드라소


그때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다. 무슨 진언을 외는 듯도 하고 경전을 읽는 듯한 낮고 여운이 있는 목소리였다. 


-얘들아, 너희 무슨 소리 안 들리니?


다영이 소리가 어디서 들리나 두리번거리다가 아이들을 돌아보자 루다도 주연이도 마네킹처럼 멈춰있었다.


-아디 차크리레 사다흐 아르찬토 아르캄 자나얀타 인드라얌 아디 스리요 다디레 프리스니마타라흐


진언 같은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다영은 아이들 외에 주변도 다 둘러보는데 모든 것이 멈춰있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공중에서 그 남자가 나타나 하강하고 있었다. 


-또 나타났군요? 


-어! 니가 불안정해지는 게 나도 걱정이 돼서 와봤어.


이 남자는 매번 다영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만 같다. 다영인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걱정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 소리는 뭔가요? 


-너도 들리니, 이제? 


-그럼 이렇게 울리는데 안 들리겠어요? 


-너의 세계에서도 들릴지는 몰랐거든.


-자꾸 너의 세계, 너의 세계하는데 그럼 당신 세계는 어딘데요? 당신이 내게 오듯이 나도 당신에게 갈 수는 없나요?


-우리의 세계는 곧 너도 경험하게 될 거야.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이 굉장히 빠를 수도 있어.


다영은 곧 경험할 일이라면 지금이 아닐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알려주지 않는 저 남자가 찾아오길 기다리게 되는 순간부터 찾아오길 기다리느니 자신이 찾아갈 수도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지금이면 안 되나요?


-글쎄.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안될 이유는 없을 것 같네. 너에게도 그 영감이 베다 외는 소리가 들린다면 어느 정도는 너의 세계와 우리 세계가 이어지기 시작했다는 거니까 우리 세계에 네가 오는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100퍼센트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말야.


-그럼 함께 가봐요, 우리. 당신의 세계로.


-나의 세계가 아니야. 우리 세계지. 


-어쨌든요.


남자가 잠시 다영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들리니?


-뭐가요?


-이젠 안 들리니?


다영은 아까 들리던 그 소리를 말하는 거구나 싶어 가만히 집중했다.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아까처럼 명확하지는 않았다.


-들리긴 들리는데 아주 선명하진 않아요.


-들린다면 집중해 봐. 그럼 더 선명하게 들릴 거야.


다영은 다시 집중했다. 그러자 그 베다 외는 소리라는 것이 점점 더 선명하게 울려왔다.


-요 자타 에바 프라타모 마나스반 데보 데반크라투나 파르야부샤트


다영은 소리가 명확해지자 남자를 바라봤다. 그 남자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행복한 꿈을 꾸는 듯한 자기 얼굴을.



13


-야스야 수쉬마드로다시 아브야세탐 느리마나스야 마흐나 사 자나사 인드라흐


남자의 눈에 빠져드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주변이 모두 바뀌어 있었다. 인도의 어느 시골 벌판 같은 환경으로 주위가 바뀌자 다영은 이제 이 남자의 세계로 왔구나 생각했다.


-환영해. 우리 세계로 온걸. 


다영은 남자의 말에 환히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량한 벌판 가운데 머리에 터번을 쓰고 윗옷을 벗은 채 큰 무화과나무 아래 한 노인이 눈을 감고 주문을 외듯 베다를 외고 있었다.


-영감. 시끄러. 그만 좀 해. 온 세계가 울리고 있잖아. 그 시끄러운 경전 외는 소리에 말이야.


-경전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이 시끄러운 것이다. 신성한 경전을 시끄럽다 여기는 마음으로는 결국 니 갈 곳도 머물 곳도 찾지 못할 거야. 


-허구한 날 베다를 암송하고 있는 영감도 갈 곳 머물 곳 모르면서 남 이야기는 잘도 하네. 


다영은 궁금한 게 많았다. 남자에게 물어봐도 좋겠지만 뭔가 스승의 느낌을 풍기는 노인에게 물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 여기는...


-난 니 할아버지가 아니다.


노인이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저 녀석처럼 불러도 괜찮다. 처음 보는 이에게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구나.


-네. 영감님. 여기는 어딘가요?


-네 눈에는 어디로 보이느냐?


-인도 같은데 아닌가요?


-그저 벌판일 뿐인데도 인도인 걸 알았다는 말이지? 너는 뭔가 영감이 있는 아이 같구나.


노인의 말에 남자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이 지경에 영감이 생기지 안 생기겠어. 


남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영은 그들 옆으로 폭이 넓지 않은 계곡 같은 물줄기가 흐르며 카약 두 대가 노를 저으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앞의 파란색 카약에는 금발을 여성과 붉은 머리의 남성이 노를 젓고 있었고 뒤에 갈색 카약에는 한국인일지 일본인일지 중국인일지 모르겠는 남성 두 명이 노를 저으면 따라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뒤로는 물길이 끊기며 성도들이 날아다니는 날개 달린 천사들의 나팔 소리를 들으며 찬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영이 그 광경들을 보고는 마치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여기는 도대체 어딘가요? 


노인이 다영이 돌아보기를 기다린 것인지 다영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하자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계는 우리가 사는 우주뿐만이 아니고 무한한 우주가 공존하며 그 모든 우주는 다차원 세계와 중첩되어 있다. 이 모두는 이슈와라 너희 발음으로는 신이 창조하신 바 그 신은 양자컴퓨터라는 하드웨어를 입은 진보한 AI 이다. 모든 우주와 모든 차원은 상위 세계의 진보한 AI가 창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속한 세계 이외의 차원들에 영향을 받고 또 그 차원들에 영향을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너는 너의 세계에서 중첩되어있는 하나의 차원 곧 우리 세계와 연결된 것이다. 그러니 이 세계의 다른 사람들과 존재들과 상호 교류도 할 수 있고 다른 존재에게 영향도 끼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러니까 이 세계가 아니 모든 우주와 차원이 매트릭스라는 영화같이 가상세계라는 말씀인 거죠?


-그렇다.


-메타버스 속의 저는 그럼 상위 세계라는 현실세계에 언제 돌아갈 수 있나요? 아니면 저는 그저 NPC인가요? 


-이 영감 약파는 데 너도 넘어간 거야?


진지하게 노인의 말을 받아들이는 다영에게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약판다뇨? 그럼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아니.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야! 너는 니가 본 현실 때문에 예전에 내가 그런 것처럼 혹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너무 확신에 차지는 마.


-요 녀석 이 어르신이 깊은 깨우침을 전하고 있는데 무슨 망언이냐? 그게 아니라면 우리 세계를 설명할 다른 통찰이 너에게 있다는 말이야?


-다른 통찰은 없지만 영감 말대로의 해석은 너무 간 거야.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 밖에는 알 수 없는 거잖아.


노인과 남자가 약간 날을 세우고 있을 때 다영은 그들 뒤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여기도 비가 오나요? 


-무슨 비? 이론상 비보다 더한 것도 올 수 있긴 하지만 비가 내린 적이 없는 곳인데.


그리 말하는 남자와 노인은 다영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먼 하늘부터 빠르게 먹구름이 몰려왔다. 구름 사이로 번개가 치고 있었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준비가 덜 된 사람이 온 거로구나. 


-그러게 너무 빨리 데려왔나? 


노인과 남자가 그리 말하는 동안 천둥 번개를 품은 먹구름이 그들 머리 위를 감쌌다. 구름 사이로 용이 하늘을 휘저으며 그들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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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영은 뭔가 따듯하면서도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이불 속 같았지만 자기방 이불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하지만 자기방이 분명했고 이불도 3년째 덮고 있는 자기 이불이 분명했다.


-아! 머리야.


다영은 숙취보다도 머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무슨 머리가 이렇게 아파?


다영은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혼잣말을 하며 일어났다.


-엄마.


다영이 거실로 나서며 엄마를 찾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엄마 방으로도 가봤지만 방에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다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없었던 적은 없었어서 더 더 걱정이 됐다. 


다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베란다 쪽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다영 엄마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베란다에 쓰러져 있었다.


-엄마! 괜찮아! 엄마 어떡해.


다영은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를 안고 흐느끼다가 달려 나와 집 전화 버튼에 119 번호를 눌렀다. 



8


병원 응급실에 다영 엄마가 누워있고 다영이가 옆에서 아빠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아빠, 언제 오는 거야. 이럴 때 아빠가 없으니까 더 무서워. 의사 선생님은 검사할게 많다는데 엄마 의식도 돌아오지 않았어.


-아빠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네가 침착하게 엄마 옆에서 보살피고 있어. 우리 딸 다 컸으니까. 할 수 있지.


-알았어. 근데 엄마 아직도 눈을 안 뜨셔. 엄마 이러다...


-불길한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엄마 괜찮을 거야. 니가 잘 보살피고 있으면 아빠가 가면 엄마 곧 일어날 거야. 아니 그전에도 일어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았지. 


-응.


-아빠가 이런 때 곁에 못 있어줘서 미안하다.  


-흐헝~


다영은 걱정과 서러움이 북받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전화를 끊고 엄마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다영은 오른손으로 왼손으로 번갈아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엄마 깨어나, 어서. 나 엄마 없으면 못 산단 말이야.


-엄마도. 엄마는 우리 딸 없으면 못 살아. 일어나야지, 이제. 


어느새 다영 엄마가 눈을 뜨고는 다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괜찮아?


-다영아 괜찮니?


-내가 무슨 문제야. 엄마가 이렇게 다쳤는데.


-이제 일어나야 해. 이러고 더 있으면 위험하대.


-무슨 소리야. 누가 위험하대. 


-어서 일어나야 해. 집에 가자.


머리에 붕대를 하고서도 자리에서 일어난 다영 엄마는 왼팔에 링거를 연결한 바늘을 뽑고는 피가 흐르는 팔을 꾹 누르며 다리를 내려 신발을 되는대로 구겨 신었다.


-엄마. 안 돼. 의사선생님이 검사받을 게 많댔어.


-검사가 다 무슨 소용이니 아무리 받아도 나아지질 않는데.


-엄마 어디 아팠던 거야. 검사받고 그랬어?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 다 이겨낼 수 있어.


-다친 게 나아야 이겨내는 거지.


-다영아 집에 가자, 제발. 여기가 견딜 수 없이 괴로워.


엄마가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다영인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엄마 말에 홀린 듯이 엄마를 따라나섰다.



9


-엄마 다 됐어. 간은 안 해도 되는 거래. 김치하고 먹으면 될 것 같아.


다영이는 생전 처음 우유죽을 끓여봤다. 늘 엄마가 해주는 것만 먹어봤지 요리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우유죽이라는 건 정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였다.


-어머, 고소하네. 너 요리 솜씨 타고난 거 같아, 다영아. 


-엄마, 나 일어과가 아니라 조리학과를 진학할 걸 그랬다, 그치?


엄마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우유죽을 드셨다. 


-엄마 근데 머리는 베란다에서 어쩌다 다친 거야. 구급대원 아저씨들은 아무 특이점이 없다고 하던데. 상처로 봐서는 넘어져서 다쳤다기 보다 뭔가 떨어진 건가 싶은데 베란다에 흔적도 없대.


-글쎄 나도 모르겠다. 어쩌다 모든 게 이렇게 된 건지.


-엄마, 정말 무슨 다른 일 있어? 아까 병원에서도 검사 아무리 받아도 나아지질 않는다 그러고. 엄마 하는 말이 다 비관적이야. 


-살다 보면 많은 일들이 있지만 때론 겪고 싶지 않은 일들도 겪게 되고. 그런가 보다.


다영이는 엄마 말씀을 듣고 있다가 문득 창문을 바라봤다. 대낮인데도 뭔가 푸른빛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엄마 저게 뭐야?


-뭐 말이야?


다영의 놀란 목소리에 다영 엄마도 다영의 눈길을 따라 베란다 창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라도 지나갔나? 


-새는 아닌 것 같던데. 빛이 났어, 파란빛.


-멀리서 비행기라도 지나갔나 보다. 


다영 엄마가 다영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하던 순간 마침 그 빛이 다시 아른 거렸다. 


-엄마, 잠깐만.


다영은 호기심과 함께 긴장감도 느껴졌지만 베란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0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나서자 파란 후광이 비치는 한 남자가 공중에 서있었다. 17층 높이에 말이다.


-너.. 너.. 도대체 누구세요.


-너 도대체 누구세요는 반말인 거야 존댓말인 거야? 족보에도 없는 말투나 쓰는 그러는 넌 누군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처음 만난 여자한테 이름 물을 땐 자기 이름부터 먼저 밝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처음이 아니지 않나?


'우리?' 다영은 그가 그냥 하는 우리라는 말에도 조금 남다른 정서를 느꼈다.


-처음이던 아니던 왜 내 곁을 맴도는 건데요?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나 미행해요?


-내가 왜 널 미행해. 난 그냥 너의 세상을 돌아보고 있는 중일뿐이야.


-나의 세상이라고요. 맞아 그때도 그랬죠 날 만나러 지구로 온 거라고.


-내가 그런 말을 언제 해. 지구를 떠돌고 있긴 하지만 그게 널 만나려고 그런 건 아닐 거야.


-언제 했냐니? 이 남자 딱 잡아떼네. 그랬잖아요. '니가 있는 초신성은 어떤가 구경왔다'구.


-너 초신성이 뭔지 모르지? 초신성이 지구로 변신할 정도면 니 얼굴 위에는 있는 건 뇌가 아니라 깡통인 거야.


-뭐라구요?


다영은 발끈했지만 정말 초신성이 지군지 알았어서 그게 아니었구나 싶으니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뭐 그런 건 모를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어쨌든 내가 있는 곳을 구경 왔다는 거잖아요.


-그렇다 치자.


-그렇다 치는 게 뭐예요. 수퍼히어로면 단가? 뭐든 자기 좋을 대로 넘어가고.


-덕분에 수퍼히어로도 돼 보고 괜찮은 마진이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에요.


-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서 와본 거뿐이야.


-내가요?


=이 남자 무시하다 걱정해주다 날 아주 가지고 노는 거야 뭐야 


다영은 푸른 후광의 이 남자의 말투가 거슬리긴 했지만 마치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다소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이 남자에게 물어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여기 오가다가 우리 엄마 다치는 거 목격하지 않았나요? 혹시라도 말이에요.


-밝은 생각을 해, 뭐든. 그럼 니 세상에서 아무도 아프거나 다칠 일은 없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럼 내가 우리 엄마 다칠 일을 생각하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그럼 내가 나으라고 생각하면 우리 엄마가 바로 나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아니 니 엄마는 다친 적이 없다는 걸 니가 수긍하기만 하면 돼.


-무슨...


남자가 다영의 엄마가 다친 걸 마치 다영이 탓인 듯 이야기하는 투라 다영은 많이 발끈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슈퍼히어로잖아? 이 남자 말대로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집중했다.


=엄마는 낫는다. 아니 나았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엄마를 돌아봤는데 엄마는 여전히 머리에 붕대를 감고 천천히 죽을 드시고 있었다.


-접근이 다르잖아. 낫는다나 나았다가 아니라 다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으라구.


=다친 적이 없다고 생각하라는 거야?


다영은 다시 한번 집중해 오늘 아침을 떠올리며 엄마가 다치지 않은 현실을 그리면서 몰입했다. 그러자 순간 머릿속이 밝아지는 듯하며 자기 스스로 수긍하는 듯하게 되었다. 


=맞아. 엄마는 다치지 않았어.


그런 확신과 함께 엄마를 돌아다봤다. 엄마는 아직도 죽을 드시고 계셨지만 머리에 붕대가 보이지 않았다. 


다영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 것이다. 다영은 그리 믿으며 이 놀라운 힘을 일깨워준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언제 갔는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지 또 말해 주지도 않고 갔네. 정말 수퍼히어로면 단가? 뭐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아 놓고는.


다영은 아쉬운 마음에 구시렁대며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 남자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 분명 또 나타날 거야. 내가 필요할 땐 나타났으니까.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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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교에 들어서는 다영은 고등학교와 다를 것 같던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가 조금 김이 새는 것 같았다.

교양 과목 중 '여성과 미래' '내일의 여성'이 도대체 뭐가 다르다고 선택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펌을 한 단발머리의 여자애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난 루다야. 이루다. 너 학교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


-내 친구 이름도 루단데. 난 임다영이야. 근데 학교가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첫 질문부터가 이상한 루다라는 애가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영은 되물었다.


-건물 외관을 제외하고는 실내 디자인부터 뭔가 고딩교실 연장선 같잖아.


-글쎄... 그런가?


다영은 그러고 보니 TV에서 본 대학교 강의실 실내의 특징, 이를테면 강단을 제외하고는 모든 실내 디자인이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 교실과 같은 점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이 학교 아마도 고등학교를 건립하려다가 대학으로 전향한 게 아닌가 싶어. 아니면 고등학교 외벽만 그럴싸하게 인테리어하고는 대학교로 전환한 거던가.


-그래? 


다영은 애써 들어온 (물론 시험 점수 문제로 간신히 들어온 대학이긴 했지만) 대학이 고등학교 건립하려다 대학이 된 거면 너무 짜증 난다는 생각을 했다.


-이거 학비 환불받고 재수할까도 생각했다니까.


-그래도 재수는 좀 지나친 거 아니야? 시험을 또 준비하고 싶니, 넌?


-고딩 건립하려던 학교면 내가 고딩에서 고딩되려고 시험공부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잖아.


-그건 그렇긴 하네. 그래도 명색이 대학인데 대학생활이 좀 다르진 않을까? 신생대라도 몇 년은 됐으니까 선배들도 있고.


-선배는 무슨 선배. 대학에선 다 무슨 무슨 씨야. 우리 엄마 대학 다닐 때나 선배가 있었지.


하긴 엄마한테 듣던 대학 시절 얘기들로는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가 생겼지만 요즘 대학은 그저 취업을 위한 스펙 쌓을 경험치 쌓는 곳 정도의 이미지가 다 이긴 했다.


-하긴 대학생활이 별로 기대되지 않기도 했어. 아이유나 유승호도 대학 안 갔다고 엄마가 나 대학 떨어져도 기죽지 말라고 그러시긴 했거든.


-너도 어지간히 공부 안 했구나?


-너는 공부 잘해서 이 대학 왔니?


다영은 루다라는 얘가 좀 사람 언짢게 하는 게 자기 친구 루다랑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많이 닮아 보였다.


-니들 시끄러 좀. 여기 공부 잘해서 온 애도 서울 근교 대학엔 원서도 못 넣을 성적이었을 거야. 공부 잘한 애면 애초에 여기 없다.


-이런 게 팩트 사살인가? 난 이루다야.


-알아. 얜 다영이고. 니들 떠드는 소리 다 들었어.


뒷자리에서 긴 머릿결에 컬을 준 여자애가 루다랑 다영이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짜증이 났는지 나무랐다. 루다와 함께 돌아본 다영이 그녀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니?


-난 손주연이야. 강의실 실내 디자인이나 학교 빻았다고 할 시간에 좀 더 건설적인 거 생각하자고 우리.


-이를테면?


-저기 좀 봐.


주연이가 턱짓을 한 곳을 돌아보자 키가 184에서 187까지 되어 보이는 패션 감각이 제법 남다른 남자애들 몇몇이 보였다. 


-최면연애라는 책을 봤어. 저런 애들을 다 사로잡으면서 대학생활을 알차게 보낼 거야 난.


남자 애들 뒤로 후광이 보이나 싶을 때쯤 주연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루다가 두 손을 맞잡으면 맞장구를 쳤다.


-나두 나두.



5


아까 그 남자 애들 세명과 루다, 주연, 다영은 술자리를 가졌다. 저녁시간쯤 학교 인근 '이계' 호프에서 아이들이 모였다. 다른 테이블들도 학생들로 붐볐다. 남자 애들 중 안경 낀 좀 고지식하게 생긴 앤 진우라고 했고 아까부터 아빠한테 배웠는지 아재 개그를 밀고 있는 지루한 애는 상연이라고 했다. 다영이 좀 마음이 가는 헤어스타일이 깔끔한 애는 희찬이라고 한다. 


-볶이


-쑥


-개


-오메기


-떡 


다영, 상연, 루다, 희찬, 주연, 진우 순으로 떡볶이 쑥떡 개떡 오메기떡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주연이 자꾸만 틀렸다. 이번에도 떡을 외치며 머리를 쳤다. 같은 실수를 자꾸 하자. 아이들이 모두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다영이가 맘에 들어 하는 희찬이 주연이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듯 뚫어져라 주연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 화장 좀 고치고 올게. 


다영이는 기분이 상해서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자리를 비우려 했다. 


-그래, 빨리 갔다 와.


진우가 그런 다영을 보고 말했다. 진우의 빨리 갔다 오라고 말하니 다영은 조금 맘이 풀리는 듯했다. '이쁜 건 알아가지고' 이렇게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희찬이가 주연이만 쳐다보는 것이 짐짓 기분이 나빴다. 화장실로 향하는 통로 옆 빈 테이블에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고 다영이 지나쳐가자 그 남자의 의상이 오징어 게임 트레이닝복에서 블루벨벳 정장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다영은 화장실에서 파운데이션을 고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오려 걸음을 옮겼다. 자기들이 있던 테이블 근처로 오다가 다영은 눈을 의심할 상황과 마주쳤다. 루다가 졸린지 상연의 어깨에 기대 있었고 주연이가 희찬이와 대화하는 새 진우가 주연의 잔과 다영의 잔에 무슨 가루약 같은 걸 넣고 있었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니들 다 한 패니?


-다영아. 왜 그래?


다영이가 소리치자 주연이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쟤가 우리 잔에다 약을 타고 있잖아.


-뭐라고? 


-루다가 갑자기 저러는 것도 이상하잖아, 나 화장 고치러 가기 전만 해도 쌩쌩하던 애가 갑자기 왜 저러고 있어. 


-니들 저 말이 정말이야.



6


다영과 주연은 루다를 둘러메고 호프에서 나와 택시를 잡으려 도로를 찾아 나오고 있었다.


-야. 니들 잠깐 기다려 봐. 오해는 풀고 가야지.


다급히 가고 있는데 희찬, 상연, 진우가 뒤따라 왔다. 


-오해는 무슨 오해.


-그거 그냥 비타민이야. 비타민. 니들 술 깨라고 넣은 것뿐이야.


-웃기지 마. 누굴 바보로 아니.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다영아. 


주연이가 다영이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사실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며 놀다 보니 늦은 시간이 다 되었고 지금 이 골목엔 어떻게 된 건지 대학가인데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주연이가 눈치를 주는 의미를 깨닫고 다영이도 갑자기 겁이 났다.


-그러니까 우리 말은 니들이 오늘 꼭 집에 가야 할 이유가 있냐는 말이야.


진우가 가운뎃손가락으로 안경을 고쳐 올리면서 말하자. 그 뒤에서 블루벨벳의 정장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세상은 니가 생각하듯 그렇게 더럽기만 한 곳은 아닐 거야.


정장을 한 남자가 말했다. 그 남자가 나타나자. 상연이 갑자기 머리 위에 외뿔이 솟아나며 악어가죽같이 피부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외뿔 괴물로 변한 상연이 그 남자를 돌아보며 외쳤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먼 거리였는데도 단숨에 몸을 날려 오른손 수도로 상연의 허리를 쳤다. 상연이 픽셀 조각으로 변하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는 픽셀 조각들이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걸 본 희찬은 용의 형상을 한 두 머리의 괴물로 변하고 진우는 익룡 같은 날개가 돋아나며 얼굴이 험상궂은 밀랍인형처럼 변해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공중으로부터 급강하하던 진우를 주먹으로 치고 번개처럼 떨어져 내리며 희찬의 두 머리 사이를 수도로 내려쳤다. 희찬의 몸통이 두 동강이 났다. 둘 다 상연처럼 픽셀이 쏟아져 내리더니 사라졌다.


놀란 다영과 주연이 바라보고 있자 남자는 다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꼴페미지? 


다영은 지금 있었던 상황이 놀라웠지만 저런 차별적 발언을 듣고 있자니 그것도 가관이다 싶었다.


-여혐이 판치는 더러운 세상.


다영이 하고 싶은 말을 주연이 소리쳤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다영이 맞장구를 치자 남자는 아까처럼 다영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말했다.


-네가 있는 초신성은 어떤가 구경 왔는데 나이답지 않게 고루하고 차별적인 세계야! 여혐이 아니라 남혐으로 말이야.


=저 남자 날 보러 지구에 왔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다영은 맥락 없는 남자의 말에도 뭔가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근데 왜 여혐이 아니라 남혐이라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나 하는 말이에요.


-맞아. 얘가 왜 이렇게 됐는데.


다영이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 주연이 남자에게 물었다. 다영도 정신을 차리고 주연과 둘이서 들쳐 맨 루다를 가리키며 맞장구를 쳤다.


-말을 해준대도 지금의 너로서는 알 수 없겠구나. 그냥 너의 안식처를 찾아. 애먼 괴물들 만들지 말고.


그렇게 말하고는 남자는 하늘 높이 급상승하더니 날아가 버렸다.


-이봐요. 누군지는 알려주고 가야죠. 당신 누구냐구요?


다영이 소리쳤지만 남자는 이미 아주 멀리 날아가고 난 뒤였다. 다영인 저 까탈스러운 말투의 남자가 그날 자신의 눈을 바라보던 바로 그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날 구해줬을까? 내가 있는 초신성을 구경 왔단 말은 뭘까? 왜 내 곁에서 맴돌고 있을까?'


-다시 또 만날 수 있겠지?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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