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사회 - 벌거벗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한홍구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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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장 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등장해 대한민국의 감시사회적 면모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름의 해결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등 국가 정보기관의 역사를 돌아보며 주요인사의 감시와 개인 사찰의 역사를 돌아 보기도 하고, 기업의 맞춤마케팅과 CCTV의 사회적 감시와 계층화를 논하기도 하며 불안이 자발적 감시를 불러오는 상황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편리함의 이면에 감시의 그늘이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정보화라는 것이 정보를 장악한 주체에게 우리 생활 자체가 종속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세계 곳곳의 테러 위협과 치안 불안이 더더욱 자발적으로 감시사회로 들어서게 하고 있는 현재의 세계상이, 이 책이 집필되었던 2012년 보다 더 사회 감시의 면면이 확장되고 있음이 불안하고 염려된다. 감시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타개할 방법에 대한 담론이 이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 보다 해당 문제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시작 되어야 할 일이다.


감시사회에 대한 공론이 불거져야 할 이때에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저작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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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10-31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각 분야 전문가라고 소개하면서 ˝한홍구˝ 이름 석자를 보니 더욱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이하라 2017-10-31 22:52   좋아요 1 | URL
저는 각 장의 강연자(강연 형식의 저작인지 강연 기록물인지 모르지만)분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제목과 책소개 글만을 보고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깊히 들더라구요..
 
유럽의 신비주의
게르하르트 베어 지음, 조원규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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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신비주의에 대해서라고는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통해 처음 접한 오컬트화학이나 <<카발라>>가 고작인 나로서는 저자분이 직접 답변을 남긴 어느 분의 리뷰와는 달리 이 책에서 신비주의의 다양성을 읽기보다 동서양 신비주의의 합일점이 느껴졌다. 

성찰을 통한 一者Hen와의 합일을 의미하는 고대의 에노시스enosis나, 자신으로 돌아가 신과 만나는 길(티쿤)을 추구하는 샤시디즘, 신이 인간이 되는 과정을 뜻하는 러시아 신비주의의 테오시스를 비롯 기독교의 신비적 죽음이라는 자아의 전적인 포기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신앙적 목표성취등을보라. 자아의 전적인 포기를 통해 절대자와 하나되려는 인도철학적 전통이나 비로자나부처의 여러 모습의 현현이 바로 우리라는 밀교전승, 我相 人相 壽者相 등 자신을 한정짓고 세계를 한정짓는 상을 초월하여 깨달음을 이루려는 불교의 가르침과 무엇 다른가? 
자신으로 돌아가 신과 만난다는 개념이나 인간이 신이 된다는 개념은,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신이라는 측면으로 비약해보자면 동학의 인내천사상과 결코 다른 바를 찾을 수 없으며 진실성을 말한다는 면에서는 불가의 불성론이나 여래장사상과 다름이 아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환희의 절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에크하르트의 말은 중생들을 두고 차마 열반에 들 수 없어 결코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으신다는 법화경의 부처님 말씀과 전혀 다르지 않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리행을 말하는 것이지 않은가!

금욕적 수행을 통해 자신을 변모 시키려하고 ‘情念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 했다는 것도 요가의 금욕과 권계의 실천을 중시하는 부분이나 ‘브라흐마차리아’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 불가나 중국과 한국의 선도仙道 또한 금욕과 계율의 철저한 실천을 필수 사항으로 함은 우리문화에서는 누구에게나 상식이다.

문자와 영혼이 내밀한 상호 관련성이 있다며 성서의 탐구를 통해 하나님께 다가서기를 기도하던 오리게네스의 노력은 지성을 갈고 닦으며 학문의 길을 통해 깨달음내지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한 갸나요가( Jnana Yoga )나 불가의 성문승과 한맥락이다. 
신에 대한 전적인 헌신은 박티요가와 같고, 침묵과 평정을 중시하는 면은 선불교와 동일하다. 또한 선도에서도 주천보다는 性(심성,본성,불가의 원성실성)을 중시하는 문파도 있다.

하다못해 영세를 통해 정화와 개명을 추구하였다는 것까지도 불가의 관정, 요가의 관정과도 같지 않은가?

유대인의 카발라 철학 역시 만물이 일자로부터 분화하였음을 말한다는 측면에서는 보자면 우리의 천부경이나 불가의 법성게와 동일하고 또 변화를 읽고자 하는 노력이었다는 측면만으로는 극동의 역철학과도 같다.

항상 지속되는 기도, 마음의 기도라는 것 또한 불교의 염불과 도가의 진언, 요가의 만트라와 그저 이름만이 다를 뿐이었다.

이들이 희구하는 신적 차원의 황홀이라는 것도 삼매와 다름 아닌 것이다.

글쎄, 서양신비주의에 대해 일천한 나로서는 동서양신비주의에서 차별성을 읽고자 한다해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완독하고도 정말 의아스러운 것은 이러한 신비주의적 전통을 간직한 서양이 왜 대중적 종교의 측면에서는 신과 인간을 그토록 철저히도 분리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서양인들로서는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미가 축소된다는 위기의식이라도 느꼈던걸까? 

어쨋건 이 책을 통해 서양의 정신문화를 조금은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서양이 다른 면 만큼이나 합일되는 면모 또한 있음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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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10-26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06년12월06일 타사이트에 올린 리뷰입니다

cyrus 2017-10-26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중고서점에 이 책을 발견한 순간, 이하라님이 생각나서 구입했습니다. ^^

이하라 2017-10-26 15:05   좋아요 0 | URL
cyrus님이 이 책을 선택하셨다니까 벌써 리뷰가 기대되는군요^^

cyrus 2017-10-26 15:06   좋아요 1 | URL
제가 책을 사면 바로 안 읽고 보관하는 성격이라서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ㅎㅎㅎ
 
이상한 논문 -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지적 수집품
산큐 다쓰오 지음, 김정환 옮김 / 꼼지락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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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엔 『이상한 논문』의 13가지 논문 중 「세번째 논문 불륜남의 머릿속」과 여섯번째 논문 여고생과 남자의 눈」, 「열두번째 논문 '가슴의 출렁임'과 브래지어 위치의 어긋남」에 특히나 관심이 갔었다.


하지만 실제로 재밌게 읽은 건 그 외에도 「네번째 논문 하품은 왜 전염되는가?」와 「다섯번째 논문 커피잔이 내는 소리의 과학」이 있다. 


 사람만 하품이 전염되는 것이 아니었다. 침팬치 사이에서도 하품은 전염되었고 사람이 하품하는 영상을 본 26 마리의 개 중에서 21 마리가 하품을 했다고 한다. 행동전염이라는 남의 행동을 따라하는 심리적 모방성이 사람과 사람 사이나 침팬치나 침팬치 사이가 아니라 사람과 개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것이 신기했다. 거울상 뉴런 이라는 공감과 모방을 불러오는 체계가 생명체 전반에서 모방심리나 반사적 동일행동을 일으킨다면 생명체 전반에서 공감도 불러올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긴 그러니까 고양이가 병아리를 돌보고 동물원에서 같이 자란 개와 호랑이를 커서도 한우리에 넣어 놔도 사고가 없는 거구나 싶었다. 인간만 그린피스 활동하는 줄 알겠지만 '사슴과'의 아기동물을 공격하던 숫사자를, 그 숫사자와 함께 사냥하던 것으로 보이는 어미사자가 공격하는 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 물론 세상이란게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어쩌면 영역을 침범한 숫사자라 공격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때론 머리 보단 가슴이 느낀대로 믿고 싶을 때도 있다. 


 하품의 전염은 4세 이하에서는 없었고 자폐증을 보이거나 조현증(정신분열)을 보이는 이들에게서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공감 능력을 보일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갖추어야 하품이 전염되는 거라고 단정 지은 어느 교수님의 말씀도 싣고 있다. 침팬치와 개가 지성을 갖췄다고 단정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런 단정질에 경의를 표한다. 고인이 된 존 내쉬 박사(영화 뷰리플 마인드의 실제 모델)도 조현증이었고 그런 증상 속에서도 대학 강의도 했었지 않나? 그 분이 조현증을 보였다고 갑자기 지성이 개나 침팬치 보다 저하될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할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자폐증(7세 즈음)도 조현증도 유경험자로서 이에 대해 토를 달자면, 자폐증을 보일 때는 자신의 우주 안에 갇혀서 외부세계와 단절이 되기 때문에 주위의 자극도 변화도 자폐증을 보이는 시기에는 거의 대부분 차단되어 있는 상태와 같다. 그러니 이건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극과 반응... 즉 피드백의 단절 문제로 보아야지 지성에 딴지를 거는 건 답이 없다고 본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도 동시에 다른 우주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조현증을 보이는 이들의 경우에는 반응과 자극의 부분적 차단을 보이는 자폐증을 넘어선 것으로 보아야할지 모르겠다. 자기만의 우주에 있거나 다른 우주에 있는 사람에게 지들 기준의 척도만 제시하며 지성이 낮다는 둥 하며 나서면 누군가 제시하는 랩퍼가 아마도 "니들이 뭔대 얠 판단해!" 하며 나설 것이다. 


 커피잔이 내는 소리의 과학편은 처음 읽으면서 부터 처음 스푼을 넣어서 커피믹스가 녹으라고 휘저으며 스푼이 커피잔을 두드리며 내는 소리가 당연히 높낮이가 다를테지 그게 뭔 대수냐 싶었다. 평소 커피를 안마시다 보니 이런 소리의 차이가 있는지도 몰랐다. 원인이 믹스가 물과 접촉하며 발생하는 기포가 음의 고조에 영향을 끼쳤다는데 결론이 이르자 약간 소름 돋았다. "아~ 놀라운 과학적 세계!" 뭐, 이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근데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게 기포가 있다면 분명히 수면으로 떠오르며 터질테고 그때 일어나는 미세한 파동이 스푼과 커피잔의 충돌로 일어나는 파동이 전파되는데 교란을 주어서 오히려 음이 고조되는 것이 아니라 저하 되어야 정상 아닌가? 만약 공명현상이라 누군가 말한다면 파동학을 잘 몰라서 공명은 주파수 대역이 유사한 두파장이 합쳐지며 파장이 더 커지는거라던데 커피잔과 스푼의 충돌과는 파장이 다를 기포가 파열되는 파장은 되려 음의 고조가 아닌 저하를 가져와야 논리적으로는 타당할텐데 하며 답나온 연구에 덤덤 거려 본다.




 제목이 『이상한 논문』이다 보니 논문이 수록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 했으나 각 논문에 대한 감상평이었다. 어느 논문이나 원본 논문의 번역본이 수록되어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싶었다. 특히나 열두번째 논문의 원본 논문인 「주행 중의 브래지어 착용 시의 유방 진동과 어긋남의 특성」은 원논문 번역본 도입이 시급하다고 본다^^;


 중딩 시절 남녀 공학인데도 합반이 아니라 교무실을 중심으로 남녀반이 나뉘어 있었다. 그래서 등하교 시간과 과학시간, 체육시간 외에는 여학생들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여섯번째 논문 여고생과 '남자의 눈'」에서 논문의 저자 시라이 유코의 연구결과인 남녀공학에서 남학생의 성적이 향상되는 이적은 경험해 보지 못했다. 다만, 그저 열두번째 논문에서 가로와 세로의 움직임을 보인다는 활동시 여성 가슴의 출렁임에 대해서는 체육시간에 100m 달리기 하던(그 예쁜데 무지 많이 오동통통했던) 여자애를 보며 충분히 깨우쳤던 바다. 명확히 표현하면 불규칙적으로 보이는 동선 속에서도 나름의 규칙성(그러니까 어떠한 패턴적 동선)이 분명히 보였다. 논문 저자는 가로 세로라고 동선을 기록하기 쉽도록 단순화하였는데 좀 더 명확하자면 비대칭적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칭적일 수 밖에 없는 두개의 불완전한 타원형 동선을 그렸더랬다. 미안하다 이름도 기억 안나는 여자동창아! 이제와 얘기지만 나 너 조금 좋아했다. 꼭 가슴 때문만은 아니였어^____^


 저자가 워낙에 재밌게 집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번역도 그 원문의 맛을 놓치지 않고 있는 걸 거다. (그러니 술술 읽히지...)  논문 하나하나에서 해당 논문이 적용하고 있는 연구 방식과 논문 기술 방식 등 사회과학적 원리(?)도 알려주는데 그걸 서술하는 방식이 하나도 딱딱하지 않다. 그것 마저도 재밌는 얘기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각 논문 마다 해당 연구조사 대상에 대해 각 논문 연구자들이 가졌을 관심과 흥미, 문제의식(?)을 유추해 펼쳐내는 저자의 입심이랄까 필력이랄까가 심후하다. 입담에서 고수의 풍격을 느꼈다. 책의 얕은 맛이나 (굳이) 제법 깊이를 느껴 본다면, 세상을 보는 논문 연구자들의 야릇하게 따듯한 관심과 애정이 또 사람을 따스하고 재밌는 존재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유쾌함과 함께 포근함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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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24 17: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이 책은 논문 리뷰를 모은 것이군요. 대학생 시절에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대학교재가 있어요. 그 대학교재가 강의 담당 교수가 쓴 책이라서 안 살 수가 없었어요. 그때 제가 알라딘 서재 활동을 하고 있어서 대학교재를 비판하는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어요. 전 세계적으로 따지면 학술논문을 전문적으로 리뷰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이하라 2017-10-24 17:49   좋아요 3 | URL
게다가 대상논문의 주제들이 정말 흔치않은 주제들이죠. 이런 논문리뷰도 대상논문들도 정말 예사로우면서 예사롭지 않은것 같아요^^;

사마천 2017-10-24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은 과학도 상식화를 참 잘시키는 것 같아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 ^^

이하라 2017-10-24 20:46   좋아요 1 | URL
재밌게 읽으셨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위대하고 찌질한 경제학의 슈퍼스타들 - 애덤 스미스부터 폴 크루그먼까지, 35인의 챔피언들과 240년의 경제사상사를 누비다
브누아 시마 지음, 권지현 옮김, 뱅상 코 그림, 류동민 감수 / 휴머니스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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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경제학서라고 주눅들 필요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근데 내가 워낙 찌질해서 그런지 책 제목과는 달리 그닥 찌질해 보이는 경제학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건 참 안타까운 심경이다ㅡㅜ

어떤 학문이건 세상의 부분이던 전체이던 세밀하거나 전체적으로나 조망하게 하는 시야 즉, 관점을 가져다주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일듯 싶다.

본서의 전반적 내용도 고전학파는《국부론》-《국부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의 저자 '애덤 스미스'로 시작한다. 뭐, 읽어본적도 없는 어려울 것만 같은 책인데 제목만 봐도 국가를 국민의 안전과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적 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있고자 하면 국가 부터 있어야 하며 국가가 부강해져야 한다는 전제가 바탕하기에 이딴 제목이지 않을까 싶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애덤스미스로 시작해 바로 '토머스 R. 멜서스' 라는 경제학자로 이어지는데 거듭 급증하는 인구로 결국 자원이 고갈될 것이며 인류는 궁핍과 위기를 마주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던 학자라 한다. 근데 아직도 2050년이면 수백억 인구로 인류는 위기라고들 하고 있단다. 19세기 이후 전염성 질병 전파와 기아와 전쟁과 자살로 줄창 인구 조절이 이루어졌기에 멜서스와 그를 계승한 학자들이 예견하던 최악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데, 과연 질병도 기아도 전쟁도 자살도 자연발생적이라고 미더워지는가? 대자연이 "인류의 인구증가가 인류와 지구내 뭇생명들에게 해로울테니 내가 힘좀 써야겠는데..." 라며 인구조절 해주었다고 믿어지는가 말이다. 그리 믿는다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대자연은 하나님도 여타의 신적 존재도 운명 같은 자연발생적 사건도 아닐테지...

고전학파의 '로버트 오언'(1771~1858)이 당시 효과적 경영기법으로 인정 받았다는 '공장내 체벌' 을 금지했다는 대목에서 "이건 뭐지?" 싶었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와 식민지 건설 시대에서 시작해 현재 미국이라는 역사상 최대제국이 군림하는 이 시대에 이르기 까지 서양문화가 나름 주도적 역할을 해왔지 않나? 그래서 서양하면 계몽되어선 자유니 평등이니 인권이니 하는 이상적 가치들을 주구장창 주장해왔을듯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19세기에 노동자 체벌을 효과적 경영기법이라고 했다니... 얘네, 미개인이었나 싶다.  

-물론 조선시대에 80대 노비가 4살 도련님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아이가 놀다가 다리라도 부러지거나 죽기라도 하면 80대 노인이 4살 어린아이 때문에 부모에게 상해를 입히고 살해한 죄에 입각해 처벌하기에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는 어이없는 얘기를 들어본적도 있긴하다.-당시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유교윤리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적용해, 나이가 어리더라도 주인인 양반이 부모로 나이가 많더라도 노비측이 자식으로 관계랄까 질서가 설정되기에 이는 당시로는 적법을 너머 상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자를 폭행해서 작업능률을 높인다니... 아니다. 생각해 보니 조선시대 노비도 자녀를 낳으면 주인의 재산으로 귀속되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노비는 노예인 것이고 유럽에서의 당시 노동자 계층도 준노예였던 시대였다고 본다면 노동자 체벌이 납득이 가긴한다. 노예도 준노예도 존재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노예이면서 노예인지도 모르는 시대도 존재하고... 잉태하고 태어나고 먹고 자고 입고 이동하고 자라고 교육받고 때론 병들고 여행도 하고 영화나 연극 취미 문화생활을 즐기고 결혼하고 늙어가고 끝내 죽는 모든 생활 동안 인간은 서로 그 생활을 통해 수입을 얻기도 하지만 지출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경제활동 자체가 부의 불평등을 유지도 아닌 강화하고 있고 달리 말해 배부른 사람들 배불리다가 마치는 삶이 인간의 일생이라는 말이다. 노예이면서 노예인 것을 모르는 시대가 이 시대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더불어 살아가는거지 어떻게 노예냐?"고... 더불어 살아가는 거라고? 그럼 로마시대 노예제나 조선시대 노비제나 미국의 노예제를 지속하겠다 우기던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거라는 논리를 안펼쳤을 것 같은가?-

'로버트 오언' 씨는 아이들을 조립라인이 아니라 학교로 보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아동 노동이 문제시 되는 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회문제인데 당시 유럽인들의 인권의식이 어떠했을지 어슴프레라도 짐작이 가니 혁신적이긴 혁신적이었다 싶다. -아동 노동문제는 <21세기 노예제>라고 하여 월~목 오후 6시경 kbs2 에서 방영하는 월드뉴스 프로그램에서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에 방송한 적이 있다-

1834년 영국 노동운동의 시초가 되었다는 '전국 노동조합 대연합' 을 창설한 것도 '로버트 오언' 씨라고 한다. 또 1826년 7월 4일에는 이민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미국 인디애나주의 오지에 「뉴하모니」라는 마을을 건설하게도 했단다. 선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이건 이런 관점으로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기에 시대를 무척이나 앞서간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머리로 망치질 하고 싶진 않지만 서로 뜯어먹지도 않고 서로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바보 이반의 마을이나 허균의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율도국 처럼 차별도 핍박과 횡포도 착취도 없는 사회를 소설 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솔찮게 존재해 왔다. 이 시대에도 '톰 하트만' 씨는 그의 저작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에서 점조직적 소규모 공동체 생활을 성장만을 지상의 원리라며 주장하다 서로를 망가뜨리는 이 시대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시대정신>시리즈의 제작 단체 역시 돈이라는 개념이자 제도가 사라진 소규모 공동체 생활로 환원해야만 한다며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세계 만들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고 말이다. 

-나 역시 한때는 돈이 없는 세계를 꿈꾸었다. 사회적으로 공헌했다고 여겨지는 이들과 자신이 미더운 이에게 자신의 투표권을 일임하는 제도 (투표권을 1인 1표가 아니라 퍼센티지로 분할해 타인에게 몇 퍼센트씩 양도 가능하고 회수 가능하게 제도화해서 신뢰 가능한 이에게 다수가 위임한 영향력으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면 낫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시대는 대의 민주정치가 아니라 직접 민주정치 하이지만 말이다) 로 변화시킨다면 다들 사회적 성취의 척도나 행위의 동인이 부의 축적이 아니라, 사회공헌을 지상의 목표로 삼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포퓰리즘적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다수일 악영향도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시대처럼 능력의 척도가 부이니 어떤 수단으로든 돈만 많이 획득할 수 있으면 된다는 논리로 사회가 인간이 척박해지는 시대는 아닐 것이다. 기만을 하더라도 이타적이며 나누려 하는 시대가 낫지, 지가 살고 지가 올라서자고 타인 쯤은 짓밟아도 되고 그 과정에서 죽든 다치든 상관 안하는 이 시대가 나을리는 없지 않나!

근데 문제는 이런 세계가 가능한 세계이긴한데 이런 시대로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미친 기득권층이 '돈'이라는 권력을 버리려 들 것인가? 동시다발적으로 전세계 모든 기득권층이 그렇게 권력을 내던지고서 새세계를 만들자고 동참할 상황을 어찌 가져오겠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샤를 푸리에' (1772~1837)라는 경제학자의 이상이 적용되어 그의 사후 「팔랑스테르」라는 이상적 소규모 공동체가 40 여개나 프랑스와 벨기에에 조성되었었다고 한다. 1968년 까지도 프랑스에 존재했었다고 하는데 결론은 역시나 "지금은 흔적이나 있겠냐?" 이다.

- 2005~2006년 경 몇 개월 간 노숙생활 후 돌아와서 '청와대 신문고' 라는 정부 민원사이트에 노숙자 재활을 위한 안으로 노숙자들에게 시골의 감소되는 인구로 남아도는 빈 주택들을 지원하고 국가가 그들에게 농경지나 목장과 가축 등을 제공(당시엔 농경지만 건의했었다)해 생업을 되찾아 주고 몇%의 식량 자원은 비축하면 노숙자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나쁘지 않을듯 하다고 건의 하기도 했었다. 당시엔 조만간 세계경제대공황이 오리라는... 그것도 1930년 대 미국발 세계경제 대공황 규모를 능가하는 수퍼울트라 스펙터클 경제대재앙이 펼쳐지리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종말론을 믿는데다가 예언서적들에 10대 초반 부터 심취한 영향이 아직까지 이어져 지금도 언젠가 러시아와 이슬람 국가들 특히 이란이 공모해 이스라엘을 핵폭격할 것만 같고, 분명히 홍채인식기술과 지문인식기술에 스마트폰 등이 개발 적용되고 있어 지불결제 수단으로든 신상정보 획득, 이동경로 파악, 유동인구로 인한 사회이슈 분석 등 빅데이터화의 목적으로든 바코드를 새기거나 생체이식칩을 이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그런 일이 있을 것 같고 그렇다ㅡ,ㅡ;;;) 뭐! 이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내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약소하게 펼쳐져 다행이다 싶긴 했다. 하지만 현재 서울시 차원에서만 도입하고 있는 노숙자들에게 주거비용을 지원해서 취업 등 재활의 기회를 유도하는 것은 경제적 불안정성이 극단화될 시에는 답이 아닌 처방이다.- 

19세기 경제학자들 부터 '인구'와 '통계' 등 현재까지 아니 나날이 더 주목할 수 밖에 없을 분야들이 연구되어 왔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기득권층이 빅데이터를 악용할 현재와 미래를 감당하고 말게 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빅데이터화 : 신상 정보, 이동경로 파악, 지불결제 분야에 지문과 홍채 인식기술을 적용하고 초국가적 온오프라인 감시체계의 법적 허용, 행동경제학을 각국 정부 차원에서 적용 등에 방관한다면 향후 충분히 예측가능한 시나리오대로 디스토피아 로의 이행이 진행될 것이다-



행동경제학 저서 [Misbehaving]<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을 읽고서 행동경제학은 최근에야 연구하여 성립된 학문이라 생각했다. 헌데 본서를 읽고서 '소스타인 베블런' (1857~1929)이 '소비자의 행동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는 행동경제학의 전제조건이다시피한 관점을 과거에 이미 주장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행동경제학이란 학문이 정립되기 이전부터 그 학문적 견해의 전제일 관점은 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 언급한 '리처드 틸러' 씨의 저작을 읽고 행동경제학의 발전 이후에야 신경경제학이 분화된 것이라 여겼었는데, 생몰연대가 1903~1957년인 '존 포이만' 이란 경제학자가 이미 '게임이론'과 함께 '신경경제학' 을 창시했다고 한다-
'인간의 선택과 의사결정이 비합리적' 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발전한 행동경제학은 '케네스 애로' (1921~ )라는 경제학자의 '불가능성 정리'-'개인과 집단의 의사결정 과정이 비논리적' 이라는 논리-와 위의 '소스타인 베블런'의 '소비자의 행동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는 관점을 계승한 전제에서 세워진 학문이었다.

이런 '개인의 선택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면 논리적 결과를 예측하지 못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한다' 는 전제를 수긍해 버리면 예측가능한 상황과 대중이 통제 가능하기를 바랄 것이 자명한 지배권력 입장에서 순조로운 통치를 위해 '개인의 선택과 판단, 의사결정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를 것임은 명백히 합리적인 귀결이다. 행동경제학에서 <넛지>라며 (행동을 촉구하는 약간의 제스처 정도일 뿐이라는) 선택과 판단, 의사결정에 의도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는 1930~1940년대 부터 이미 미디어를 통한 대중심리통제를 실천하던 미국을 위시한 서양으로서는 바라마지 않았을 학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영국 캐머런 총리도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행동경제학을 기반으로 하고 행동경제학자들을 관리자로 둔 정부부처를 신설했다고 한다. 이제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합일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합리적 선택을 유도하기 위한 긍정적 개입일뿐이라는 논리로, 정부차원에서 합법적으로 대중심리를 유도할 명분 즉 대중심리통제의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모리스 알레' (1911~2010)라는 학자는 역대 경제학자들의 관점과 갈등을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처럼 펼치며 분열적 양상을 보인 인물이다. 규제 완화를 격렬히 비판하면서도 사용자를 위해 노동시장이 더 유연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는데 그와 동시에 유럽 복지 연합을 꿈꿨다고도 한다. 확고한 자유무역 옹호자이면서 다국적 기업의 탐욕을 억제할 보호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니 박성호 씨가 울고 갈 다중이 캐릭터다 싶다. 하긴 역대 다중이 캐릭터 최종 갑이라면 예수님이시니 크리스찬이라면 터보의 '검은고양이 네로' 정도는 마스터해야 할 일이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장난꾸러기들도 마구 까댈 일은 아니다. 

'아마르티아 센' (1933~ ) 이라는 경제학자는 그분 보다 부인이 압권이다. 영국계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손으로 하버드 대 교수라던데 애덤 스미스 전문가란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결국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는 정의를 다각도에서 증명하기 위해 경제학자가 된 것일까?

본서는 '대니얼 카너먼'(1934~ )이란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경제학자에 대한 내용으로 대미를 맺는다. 

전체가 경제학자들이 경제로 시작하여 세상을 향하던 안목과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거시적이던 미시적이던 무역을 이야기하건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야기하건 자유를 말하건 개입과 규제를 말하건 결국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면 평등과 불평등 즉 분배를 주목할 수 밖에 없다. 

로봇과 인공지능 적용 시점이 고작 20여년 후 부터라 보고 있다던데 그런데도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근로자들의 재적용을 위한 재사회화(?)라 해야 할까 학습이라 해야 할까에 대한 논의는 저조하다. 대량실업자 양산은 예정된 결론인데 그들의 재취업이나 거대 실업인구의 복지 문제는 감당할 수준을 벗어난 난제이다. 

화성 이주 등을 현실화해 계획하고 실현하더라도 초기 이주 신청자가 이주 직후 적응 기간 맞닥뜨려야 할 문제들로 이후의 이주 신청자들이 정체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다수의 이주 신청자들이 있다한들 기술적 재정적 이유로 모두 이주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 지구에 남아 있을 인구들은 어찌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 경제란 결국 생존의 문제다.

나 또한 경제학이 그닥 살갑거나 익숙할 삶은 아니었다. 그렇다해도 경제가 생존의 문제라면 경제학을 외면하거나 건성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본서처럼 이렇게 삭막하지 않게 어렵지 않게 경제학에 들어서게 해주는 저작으로 경제학에 노크해 볼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 봐야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혹시 경제라는 여성이 자극적이고 열정적인 미녀일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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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0-24 2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만화가 너무 웃겨서 도서관에서 읽으며 웃음 참느라 한참을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하라 2017-10-24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여러모로 재밌는 책이더라구요^^
 
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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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시와 더불어 좋아라 하는 장르다 보니 관심어린 저작이었습니다.

신화 속 세계와 인물과 성스러운 무기 및 도구와 사건들... 각 상징체계가 그리려하는 것들에 흥미를 느끼다 보니 한차례의 서평으로 끝내지 못할듯 합니다. 연재서평이 될 것 같군요. 앞으로 적어도 한번은 더 리뷰를 남길듯 합니다.


본서의 저자는 이 저작을 완성하려 여러 전승의 신화집을 참고하며 각 에피소드들의 지명과 인물 묘사와 각 인물들의 대사에 완성도를 높였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화의 이야기 자체가 아마도 전승되어오던 옛신화집들 보다 구성에서 나름 치밀하게 전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기존 전승되어온 신화집 원전을 읽어보진 못한터라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저자가 나름 이야기꾼인듯 합니다. 제법 술술 읽히는데다가 신화가 원래 재밌다는걸 고려한다해도 몰입도가 나름 상당한 저작물입니다.


신화는 전체 32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엔 용어집이 있어서 신화를 읽다가 신명, 인명, 무기와 도구, 지명까지 참고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북유럽 신화의 32 에피소드를 시작하기 전 '서론'이라며 '북유럽의 세계, 우주론, 신들, 출전, 신화의 문학적 구조, 신화에 대한 접근' 까지 6분류로 북유럽 신화에 다가서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 신화 속 신들의 속성, 그러한 신화를 구조화한 유럽인들의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를 읽으며 가장 주목되던 것은 유럽인들의 기질적 잔인성이었습니다. 1~10장까지의 단지 10개의 에피소드만을 읽고나서 느낀 것도 내면 깊숙히 이런 속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이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대를 맞이해야 했기에 인류가 그토록 암흑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예견된 것이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자도 서론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북유럽 신화에서 이야기 전개의 동인은 증오입니다. 무슨 분노바이러스라도 감염된 신들인건지 오딘 삼형제 신들이 세계를 창조하게 된 동인 또한 증오입니다. 단지 최초의 존재인 거인 이미르와 그의 후손들인 서리 거인들 인구가 많아지는 것을 싫어하던 마음이 증오로 확장되어 오딘 삼형제 신들이 최초 거인 이미르를 죽이고 해체하여 세계를 완성합니다.


더구나 에시르 신들의 거주처 아스가르드에 마녀 굴베이그가 찾아왔을 때 오딘을 비롯한 에시르 신들이 그녀를 난자하고 불 속에 던져넣은 이유는 기가 막힙니다. 그저 그녀가 황금을 좋아하며 탐욕스러운게 혐오스러웠다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편협하고 잔혹한 면이 있었기에 굴베이그가 재생이랄까 회복이랄까의 이적을 보일 기회를 얻는 것이고 에시르 신들과 바니르 신들 간의 최초의 전쟁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기에는 필수적인 요소였던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깊은 증오를 보여주는 인물들, 분노를 통제 못하는 것이 신화로 까지 전승되리만치 내적 동인으로 인식되는 내면을 가진 인간들이 백인들입니다. 백인문화가 역사적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상황은 오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거듭될 것만 같으니까요.


서론에서 저자가 밝혔듯 북유럽인들의 원류인 바이킹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만 정착했던 것이 아닙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가득 채우자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발트해 연안, 키예프, 흑해, 카스피해 까지 급격히 확장했으며 유적 발굴로는 서기 1000 년 즈음에는 현재의 뉴펀들랜드 지역 까지 확장했다고 합니다. 현지에서 그들의 흔적이 발굴되었다고 하는군요. 저자의 말로는 이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기 500년 전이라고 하네요. 그럼, 명나라 정화 원정대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보다도 한 420 여 년 정도 앞선 모양입니다. 


이렇게 유럽 전체를 넘어선 확장세를 보이던 바이킹들의 속성을 유럽인들이 보이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들에게 바이킹의 유전자가 두루 남아있을테니 말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신들의 세계 창조도 신들의 최초 전쟁도 증오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게다가 최초 전쟁 후 평화협정 처럼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은 서로 지도자를 교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니르 신족은 자신들은 탁월한 지도자를 보냈음에도 에시르 신들 측이 보낸 지도자 중 허우대 멀쩡한 신 호니르가 함께 온 현자 신 미미르가 없을 때는 발언을 얼버무리기만 한다고 자신들이 손해본 것 같다며 분노에 차서 그 허우대 멀쩡한 신 호니르도 아니라 현자 신 미미르를 죽입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잘라서 에시르 신들의 지도자 오딘에게 보내지요. 분노조절장애에 극단적 폭력주의의 기원이 북유럽 신들이었습니다. 분노조절장애, 극단적 폭력주의를 신들 마저 속성 마냥 지니고 있다는 문화입니다.


또 그리스 신화의 넥타 처럼 신주神酒라는 신들의 음료가 만들어진 경로는 섬찟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지적인 인간 '크바시르'(신인지 인간인지 모르겠더군요. ep.2 신들간의 전쟁 이야기에서는 바니르 신족이 에시르 신족에게로 보낸 지도자 신들 중 현자로 등장하는 이름입니다)가 지혜롭다는 평판에 시기심을 느낀 난쟁이들이 그를 속여서 초대하고는 죽여서 그의 피로 술을 담근 것이 한번만 마셔도 시인이자 현인이 된다는 신주라는 음료입니다. 게다가 이 신주를 오딘이 마시게 되기까지의 과도기상에서 주퉁이라는 거인을 거치게 되는데 주퉁에게 오게 된 과정도 잔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현자 '크바시르'로 술을 담갔다는 그 난쟁이들이 거인 길링 부부를 초대해 대접하다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근데 앙심을 품고 증오가 가득차자 길링에게 바다로 가서 바람이나 쐬자면서 배로 유인하여 바다에 빠트려 죽입니다. 그리고는 부인에게는 남편이 사고로 바다에 빠져 죽었다며 거짓말을 하고는 보복방지 차원에서 맷돌을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뜨려 죽입니다. 이 길링 부부가 주퉁의 부모인데 복수하러 온 주퉁에게 신주를 건네주는 것으로 복수를 퉁친 것입니다. 


그리고 ep.3 아스가르드 성벽 재건에 대해 전개되며 이들의 증오와 잔혹함이 또한번 빛을 발합니다. ep.2의 신족 간 최초전쟁으로 붕괴된 성벽을, 재건해 주겠다며 찾아온 한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단기간 내에 성벽 재건을 해 주겠다고 장담하자 에시르 신들의 지도자 오딘은 그가 목적하는 바가 무언지 묻습니다. 그 이방인은 물적 인적 지원 하나 없이 성벽을 재건하는 조건으로 아름다운 여신 프레이야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신들은 그의 요구를 과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거절하려 하는데 얍쌉한 신 로키가 묘안을 내놓습니다. 그가 제시한 기간 보다도 훨씬 더 짧은 기간 내에 성벽을 모두 재건하면 프레이야를 주겠다고 하라는 거였습니다. 도저히 누구도 가능하지 않은 기간을 제안하는데도 그가 받아들이면 그는 결국 프레이야를 향한 욕심으로 힘들게 성벽을 재건하려 노동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벽을 완전히 재건 하지 못하고 시일은 지날 것이고 그래서 그에게 프레이야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은 절반이라도 재건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그 이방인은 신들이 제시하는 단기간을 받아들였습니다. 단지 자신의 말 '스바딜파리'만 이용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이 힘 좋은 명마가 암석을 옮겨주어 성벽이 약속기한에 맞춰 다 재건되어 갈 듯하자 신들은 그 이방인의 명마 스바딜파리를 꾀어 내려 묘안을 씁니다만 이건 본서에서 확인하세요^^*


이 에시르 신들의 농간으로 자신의 말이 암석을 나르지 못해서 기한 내에 성벽 재건을 완료하지 못할 것을 알게 된 그 이방인이 격분하여 본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주목하라 하고 싶었습니다. 그 이방인은 격분하여 변신이 풀렸는데 알고 보니 바위거인이었습니다. 그가 본모습을 드러내자 그저 사랑에 빠져 어떻게든 사랑하는 여신과 함께이고 싶었을뿐인 이 가련한 거인은 토르의 망치 묠니르에 무참히 짖이겨져서 살해 당하고 맙니다. 단지 거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애초에도 세계를 창조한 것이 "난 거인들이 싫어!" 이러다가 증오로 변해 죽이고 난도질하고 토막을 쳐서 세계를 창조했다지 않았습니까? 얘네들 전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인 겁니다. 이런 문화니까 우생학이니 하면서 홀로코스트가 등장하고 고작 십여년 전까지도 인종청소니 하는 말이 기사화 되었던 거 아닙니까?


신화가 기승전증오 기승전잔인 입니다. 분노조절장애 , 극단적 폭력주의, 인종차별, 계층화해서 차별하기, 집단 이기주의, 사기, 기만 등이 이들 문화의 근간입니다.


그러게 대외적으로 신사로 알려진 영국인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 축구 때문에 폭력집단으로 변모해 버리는 훌리건 사태 아닌가요? 페르조나는 젠틀맨인데 실상은 훌리건인 것이 영국 남자니까요.


그리고 간략히 제게 인상 깊었던 상징들을 몇가지 전하자면...


ep.4 오딘이 지혜를 (여기서는 마법이라고 하지만) 얻으려 자신의 한쪽 눈을 희생하고 거꾸로 매달려 아흐레를 보내야 했다는 것은 지적인 성취던 무엇이던 어떠한 의미있는 성취에는 반드시 댓가가 따른다는 걸 상징하려 한듯합니다. 물론 다른이의 탁월한 재능을 인정해 주는 내적 자원으로는 나쁠 것 없겠지만 이 이야기는 세상은 다 타고나는대로 사는 거란 걸 간과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북유럽 신화 속 그들은 날 때 부터 신이라는 자체를 간과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ep.4에서 오딘이 노래하는 첫번째 마법이 "도움으로 슬픔에 위안을 주고 고통을 덜어 주고 아픈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이다"라는 주문은 깊은 의미가 있는 듯 합니다. 유럽인도 인류 누구도 공감 받고 싶다는 바램과 공감해 주는 것이 누군가를 도우려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는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이니까요. 열여덟번째, "너 자신과 너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 항상 제일 강한 것이지"라는 마지막 주문은 신화에 깊이를 더해 주는 듯 했습니다. 자신을 깨닫고 회복하고 완성하고 그러한 삶 속에서 자신이 찾는 의미가 바로 오딘이 노래한 '너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열여섯번째와 열일곱번째 마법이 '내가 원하는 어떤 여성이던 나에게 매료되게 할 수 있다'는 것과 '나를 좋아하던 여성이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나에게서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 위트가 느껴졌습니다. 부모님 여행가셨다며 여친이 자취방에 찾아와 돌아가지 않는 감사한 날들에도 " 제발 공성전 할 때 만큼은 돌아가 주면 안되겠니?" 하는 심정을 겪어본 적 있는 남자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마법일테지요. -참고로 저는 그런 날들에도 게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만, 게임이 초능력자 게임으로 변할 뿐이었죠. "지진을 부르는 자!" "홍수를 부르는 자!" "블랙아웃을 부르는 자!" 걍 웃자고 한 이야기니 진지흡입하지 마세요-


그외에는 ep.1에서 태초에 남쪽 무스펠은 불꽃의 세계이며 그곳은 '주르트'(Surt, Black)만이 견딜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북쪽 니플하임은 얼음으로 가득찬 광활한 눈더미로 덮힌 지역이고요. 여기서 우선 주목 되던 것은  방위의 상징이 나름 동양의 방위와 오행의 상징과 유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양 방위와 오행으로 南火 北水 (그외 東木 西金 中土) 로 남쪽인 무스펠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곳인 것이나 북쪽인 니플하임은 얼음과 눈으로 가득하고 흐베르젤미르 라는 샘이 열한개의 지류로 흘러갑니다. 동양의 방위 상징과 일맥상통하지 않나요? 

게다가 성경과도 통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북유럽 신화에서 물론 남쪽은 불꽃의 세계지만 그곳에 거주자는 '주르트'란 이름으로 검정(Black)을 상징한다는군요. 흑암 즉, 어두움을 상징하는 색이 검정색이죠. 이렇듯 창세기의 상징 흑암과 물이 북유럽 신화에서 등장하지 않는게 아닙니다. 이미 북유럽의 신들이 세계를 창조한 이야기는 언급했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을 창조한 상징을 보자면 북유럽 신화에서는 인간이 죽은 나무에서 시작되었다는군요. 오딘 삼형제가 죽은 나무를 보고 들어올려 물푸레나무로는 남자인 아스크(Ask)를, 느릅나무로는 여자인 엠블라(Embla)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보자면 물푸레나무가 북유럽 신화에서 상징하는 것을 보면 세계 여러신화에서 상징하는 세계의 축인 세계수世界樹 ... 영원을 상징한다는 나무인 이그드라실이 물푸레 나무라는 것입니다. 북유럽 신화의 모든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이며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에서도 살아남을 나무라고 하는 그 나무가 물푸레 나무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 자신이며 동시에 세계를 즉, 존재적 차원 전체를 지탱하면서, 찰나를 살다가지만 영원 속에 남을 존재임을 상징하려 사람이 물푸레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물푸레 나무가 애초에 죽은 나무였다는 것은 또한번의 상징적 비아냥인 것이겠지요. 느릅 나무의 상징은 나 몰라라하며 스킵~


ep.6에서 등장하는 크바시르는 아홉세계의 모든 일과 불가사의를 꿰뚫는 통찰력을 지녔다고 하는 현자입니다. 헌데 그의 근원을 보면 최초의 신들의 전쟁 후 에시르 신들과 바니르 신들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단지에 침을 뱉어 우호관계의 증거를 삼았다고 하는데 그 단지의 침으로 에시르 신들이 만든 사람이 바로 '크바시르'라는군요. 이건 북유럽 신화 속 위트 같습니다. 인간의 지성이라는 것, 지혜라는 것은 그리고 지성인이라는 것은 그저 뱉어논 침과 다를 바 없다는 풍자가 아닌가 합니다. 그럼에도 그 침으로 만든 현자 크바시르를 모두들 부러워하고 난쟁이들은 시기하여 그를 죽여서 그의 피로 신주神酒를 만들죠. 그 음료는 누구든 한모금만 마셔도 시인이 되고 현자가 된다고 합니다. 

-시인은 주퉁의 형제이면서 신주를 지키던 바우기의 입을 빌려 언급되었듯 북유럽인들이 제일 고상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던 직종입니다-

신주의 효험을 알게된 이들은 다 탐을 냈습니다. 게다가 오딘은 미남계를 이용해 주퉁의 딸 군로드와 다정히 보낸 후 그녀를 기만해 신주를 마실 기회를 얻자 단한모금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을 만큼 신주는 욕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딘이 한모금도 안남긴 이유는 다른 이도 그것을 마시고 먼저 마신 자신만큼 총명해질 것이 두려워서였을 것입니다. 하긴 뭐, 그것도 나름 술이니까 처음 술을 마시던 것은 오딘이었다해도 마시다 보니 술이 오딘을 마신건지도 모르겠군요.


ep.8에서 여신 이둔이 그녀의 황금사과... 신들의 청춘을 지탱하는 황금사과와 함께 납치되자 아스가르드의 모든 신들이 늙어 갔습니다. 그때 아스가르드에 있는 여신이기는 하지만 신들의 최초 전쟁 후 평화를 협정하며 공존의 증거로 지도자를 교환할 때 아스가르드로 온 바니르 신족인 프레이야도 늙어갔습니다. 아스가르드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프레이야 니까 에시르 신족에서도 그녀만한 미모가 없다는 거 아닙니까?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 통합 최고 미녀 여신인 그녀도 늙어가자 로키가 그녀를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신화집 원전에서도 늙어가는 신들을 무력하고 허탈하게 묘사한 모양입니다. 그것이 북유럽 신화가 하나하나 만들어져 가던 시기, 북유럽인들이 가진 늙는다는 것에 대한 선입견이었던 모양입니다.


ep.9에서 풍요의 바다 신 뇨르드와 스키의 여신 스카디의 결혼 생활은 남녀란 너무 다를 수 있다고 말해 주는듯 했습니다. 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여유가, 다르다는건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면서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바둥거리는 것 보다는 나은 혜안이라는 북유럽식 부부 상담 닮은 에피소드였습니다.


그리스 신화도 그렇고 북유럽 신화도 그렇고 유럽신들은 대체로 다혈질에 감정몰입이 뛰어난 배우들 같은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수퍼히어로 영화 「토르」에서의 안소니 홉킨스 님이 연기한 오딘과 북유럽 신화 속 오딘은 너무도 다른 이미지 입니다. 연륜과 덕망을 갖춘 지혜로운 전사이자 왕의 이미지가 안소니 홉킨스님이 연기한 오딘이었다면, 북유럽 신화 속 오딘은 한국영화 속 조폭의 보스만도 못한 이미지입니다. 그냥 넘버3 정도 지위의 행동대장 느낌이나 드는데 북유럽에서는 신들의 지도자더군요. '액션러닝'이란 게 있던데 그것도 그렇고 유럽식은 우선 행동하면서 생각하며 답을 찾는 지도자상이 이상적이라 여기는 듯 합니다. 도덕적으로나 실리 차원으로나 빈틈없는 완벽주의자인 이상 속에서나 가능한 지도자만을 꿈꾸는 한국인들이 바램하는 지도자상 보다 훨씬 더 현실성 있는듯 합니다. 하긴 구약성경에서의 하나님상도 질투하고 분노하고 처벌하고 시험하고 환난과 재앙을 주시는 존재가 아닙니까? 물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에게는 관대하시며 죄를 면하게 해주시기도 하고 축복하시고 자신이 선택한 이는 아무리 못났어도 함께하는 분이시기는 합니다. 다만 앞서 이야기했듯 시험과 환난과 재앙이 도를 지나치게 넘어설 때가 있는 분이라는게 함정입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하기 이를데 없을 때가 있는 분이니까 말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요한일서 말씀 만큼이나 하나님께서 보이신 역사에서도 양가적인 면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을 고려한다면 '사람에게서 양가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그를 쉽게 부정적으로만 단정지어서는 안될 일이구나' 정도의 삶과 사람에 대한 해석의 폭은 지니고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을 보며 이 시대를 대응하는 방식을 알게 해 줄 해석의 깊이를 가져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처세와 이해의 폭 정도 넓힐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냥 이 순간에 잘 대처하면 된다' 정도로는 시대에 대한 대응으로 부족할듯 싶으니까 더더욱 라그나로크에서의 신들의 대응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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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2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 판타지에 흥미를 느끼고 싶으면 북유럽 신화를 먼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하라 2017-10-23 19:44   좋아요 0 | URL
네, 그리스로마신화랑은 다른 단순미가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