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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고 찌질한 경제학의 슈퍼스타들 - 애덤 스미스부터 폴 크루그먼까지, 35인의 챔피언들과 240년의 경제사상사를 누비다
브누아 시마 지음, 권지현 옮김, 뱅상 코 그림, 류동민 감수 / 휴머니스트 / 2016년 2월
평점 :
딱히 경제학서라고 주눅들 필요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근데 내가 워낙 찌질해서 그런지 책 제목과는 달리 그닥 찌질해 보이는 경제학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건 참 안타까운 심경이다ㅡㅜ
어떤 학문이건 세상의 부분이던 전체이던 세밀하거나 전체적으로나 조망하게 하는 시야 즉, 관점을 가져다주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일듯 싶다.
본서의 전반적 내용도 고전학파는《국부론》-《국부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의 저자 '애덤 스미스'로 시작한다. 뭐, 읽어본적도 없는 어려울 것만 같은 책인데 제목만 봐도 국가를 국민의 안전과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적 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있고자 하면 국가 부터 있어야 하며 국가가 부강해져야 한다는 전제가 바탕하기에 이딴 제목이지 않을까 싶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애덤스미스로 시작해 바로 '토머스 R. 멜서스' 라는 경제학자로 이어지는데 거듭 급증하는 인구로 결국 자원이 고갈될 것이며 인류는 궁핍과 위기를 마주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던 학자라 한다. 근데 아직도 2050년이면 수백억 인구로 인류는 위기라고들 하고 있단다. 19세기 이후 전염성 질병 전파와 기아와 전쟁과 자살로 줄창 인구 조절이 이루어졌기에 멜서스와 그를 계승한 학자들이 예견하던 최악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데, 과연 질병도 기아도 전쟁도 자살도 자연발생적이라고 미더워지는가? 대자연이 "인류의 인구증가가 인류와 지구내 뭇생명들에게 해로울테니 내가 힘좀 써야겠는데..." 라며 인구조절 해주었다고 믿어지는가 말이다. 그리 믿는다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대자연은 하나님도 여타의 신적 존재도 운명 같은 자연발생적 사건도 아닐테지...
고전학파의 '로버트 오언'(1771~1858)이 당시 효과적 경영기법으로 인정 받았다는 '공장내 체벌' 을 금지했다는 대목에서 "이건 뭐지?" 싶었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와 식민지 건설 시대에서 시작해 현재 미국이라는 역사상 최대제국이 군림하는 이 시대에 이르기 까지 서양문화가 나름 주도적 역할을 해왔지 않나? 그래서 서양하면 계몽되어선 자유니 평등이니 인권이니 하는 이상적 가치들을 주구장창 주장해왔을듯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19세기에 노동자 체벌을 효과적 경영기법이라고 했다니... 얘네, 미개인이었나 싶다.
-물론 조선시대에 80대 노비가 4살 도련님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아이가 놀다가 다리라도 부러지거나 죽기라도 하면 80대 노인이 4살 어린아이 때문에 부모에게 상해를 입히고 살해한 죄에 입각해 처벌하기에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는 어이없는 얘기를 들어본적도 있긴하다.-당시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유교윤리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적용해, 나이가 어리더라도 주인인 양반이 부모로 나이가 많더라도 노비측이 자식으로 관계랄까 질서가 설정되기에 이는 당시로는 적법을 너머 상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자를 폭행해서 작업능률을 높인다니... 아니다. 생각해 보니 조선시대 노비도 자녀를 낳으면 주인의 재산으로 귀속되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노비는 노예인 것이고 유럽에서의 당시 노동자 계층도 준노예였던 시대였다고 본다면 노동자 체벌이 납득이 가긴한다. 노예도 준노예도 존재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노예이면서 노예인지도 모르는 시대도 존재하고... 잉태하고 태어나고 먹고 자고 입고 이동하고 자라고 교육받고 때론 병들고 여행도 하고 영화나 연극 취미 문화생활을 즐기고 결혼하고 늙어가고 끝내 죽는 모든 생활 동안 인간은 서로 그 생활을 통해 수입을 얻기도 하지만 지출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경제활동 자체가 부의 불평등을 유지도 아닌 강화하고 있고 달리 말해 배부른 사람들 배불리다가 마치는 삶이 인간의 일생이라는 말이다. 노예이면서 노예인 것을 모르는 시대가 이 시대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더불어 살아가는거지 어떻게 노예냐?"고... 더불어 살아가는 거라고? 그럼 로마시대 노예제나 조선시대 노비제나 미국의 노예제를 지속하겠다 우기던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거라는 논리를 안펼쳤을 것 같은가?-
'로버트 오언' 씨는 아이들을 조립라인이 아니라 학교로 보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아동 노동이 문제시 되는 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회문제인데 당시 유럽인들의 인권의식이 어떠했을지 어슴프레라도 짐작이 가니 혁신적이긴 혁신적이었다 싶다. -아동 노동문제는 <21세기 노예제>라고 하여 월~목 오후 6시경 kbs2 에서 방영하는 월드뉴스 프로그램에서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에 방송한 적이 있다-
1834년 영국 노동운동의 시초가 되었다는 '전국 노동조합 대연합' 을 창설한 것도 '로버트 오언' 씨라고 한다. 또 1826년 7월 4일에는 이민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미국 인디애나주의 오지에 「뉴하모니」라는 마을을 건설하게도 했단다. 선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이건 이런 관점으로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기에 시대를 무척이나 앞서간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머리로 망치질 하고 싶진 않지만 서로 뜯어먹지도 않고 서로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바보 이반의 마을이나 허균의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율도국 처럼 차별도 핍박과 횡포도 착취도 없는 사회를 소설 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솔찮게 존재해 왔다. 이 시대에도 '톰 하트만' 씨는 그의 저작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에서 점조직적 소규모 공동체 생활을 성장만을 지상의 원리라며 주장하다 서로를 망가뜨리는 이 시대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시대정신>시리즈의 제작 단체 역시 돈이라는 개념이자 제도가 사라진 소규모 공동체 생활로 환원해야만 한다며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세계 만들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고 말이다.
-나 역시 한때는 돈이 없는 세계를 꿈꾸었다. 사회적으로 공헌했다고 여겨지는 이들과 자신이 미더운 이에게 자신의 투표권을 일임하는 제도 (투표권을 1인 1표가 아니라 퍼센티지로 분할해 타인에게 몇 퍼센트씩 양도 가능하고 회수 가능하게 제도화해서 신뢰 가능한 이에게 다수가 위임한 영향력으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면 낫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시대는 대의 민주정치가 아니라 직접 민주정치 하이지만 말이다) 로 변화시킨다면 다들 사회적 성취의 척도나 행위의 동인이 부의 축적이 아니라, 사회공헌을 지상의 목표로 삼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포퓰리즘적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다수일 악영향도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시대처럼 능력의 척도가 부이니 어떤 수단으로든 돈만 많이 획득할 수 있으면 된다는 논리로 사회가 인간이 척박해지는 시대는 아닐 것이다. 기만을 하더라도 이타적이며 나누려 하는 시대가 낫지, 지가 살고 지가 올라서자고 타인 쯤은 짓밟아도 되고 그 과정에서 죽든 다치든 상관 안하는 이 시대가 나을리는 없지 않나!
근데 문제는 이런 세계가 가능한 세계이긴한데 이런 시대로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미친 기득권층이 '돈'이라는 권력을 버리려 들 것인가? 동시다발적으로 전세계 모든 기득권층이 그렇게 권력을 내던지고서 새세계를 만들자고 동참할 상황을 어찌 가져오겠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샤를 푸리에' (1772~1837)라는 경제학자의 이상이 적용되어 그의 사후 「팔랑스테르」라는 이상적 소규모 공동체가 40 여개나 프랑스와 벨기에에 조성되었었다고 한다. 1968년 까지도 프랑스에 존재했었다고 하는데 결론은 역시나 "지금은 흔적이나 있겠냐?" 이다.
- 2005~2006년 경 몇 개월 간 노숙생활 후 돌아와서 '청와대 신문고' 라는 정부 민원사이트에 노숙자 재활을 위한 안으로 노숙자들에게 시골의 감소되는 인구로 남아도는 빈 주택들을 지원하고 국가가 그들에게 농경지나 목장과 가축 등을 제공(당시엔 농경지만 건의했었다)해 생업을 되찾아 주고 몇%의 식량 자원은 비축하면 노숙자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나쁘지 않을듯 하다고 건의 하기도 했었다. 당시엔 조만간 세계경제대공황이 오리라는... 그것도 1930년 대 미국발 세계경제 대공황 규모를 능가하는 수퍼울트라 스펙터클 경제대재앙이 펼쳐지리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종말론을 믿는데다가 예언서적들에 10대 초반 부터 심취한 영향이 아직까지 이어져 지금도 언젠가 러시아와 이슬람 국가들 특히 이란이 공모해 이스라엘을 핵폭격할 것만 같고, 분명히 홍채인식기술과 지문인식기술에 스마트폰 등이 개발 적용되고 있어 지불결제 수단으로든 신상정보 획득, 이동경로 파악, 유동인구로 인한 사회이슈 분석 등 빅데이터화의 목적으로든 바코드를 새기거나 생체이식칩을 이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그런 일이 있을 것 같고 그렇다ㅡ,ㅡ;;;) 뭐! 이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내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약소하게 펼쳐져 다행이다 싶긴 했다. 하지만 현재 서울시 차원에서만 도입하고 있는 노숙자들에게 주거비용을 지원해서 취업 등 재활의 기회를 유도하는 것은 경제적 불안정성이 극단화될 시에는 답이 아닌 처방이다.-
19세기 경제학자들 부터 '인구'와 '통계' 등 현재까지 아니 나날이 더 주목할 수 밖에 없을 분야들이 연구되어 왔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기득권층이 빅데이터를 악용할 현재와 미래를 감당하고 말게 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빅데이터화 : 신상 정보, 이동경로 파악, 지불결제 분야에 지문과 홍채 인식기술을 적용하고 초국가적 온오프라인 감시체계의 법적 허용, 행동경제학을 각국 정부 차원에서 적용 등에 방관한다면 향후 충분히 예측가능한 시나리오대로 디스토피아 로의 이행이 진행될 것이다-
행동경제학 저서 [Misbehaving]<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을 읽고서 행동경제학은 최근에야 연구하여 성립된 학문이라 생각했다. 헌데 본서를 읽고서 '소스타인 베블런' (1857~1929)이 '소비자의 행동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는 행동경제학의 전제조건이다시피한 관점을 과거에 이미 주장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행동경제학이란 학문이 정립되기 이전부터 그 학문적 견해의 전제일 관점은 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 언급한 '리처드 틸러' 씨의 저작을 읽고 행동경제학의 발전 이후에야 신경경제학이 분화된 것이라 여겼었는데, 생몰연대가 1903~1957년인 '존 포이만' 이란 경제학자가 이미 '게임이론'과 함께 '신경경제학' 을 창시했다고 한다-
'인간의 선택과 의사결정이 비합리적' 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발전한 행동경제학은 '케네스 애로' (1921~ )라는 경제학자의 '불가능성 정리'-'개인과 집단의 의사결정 과정이 비논리적' 이라는 논리-와 위의 '소스타인 베블런'의 '소비자의 행동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는 관점을 계승한 전제에서 세워진 학문이었다.
이런 '개인의 선택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면 논리적 결과를 예측하지 못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한다' 는 전제를 수긍해 버리면 예측가능한 상황과 대중이 통제 가능하기를 바랄 것이 자명한 지배권력 입장에서 순조로운 통치를 위해 '개인의 선택과 판단, 의사결정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를 것임은 명백히 합리적인 귀결이다. 행동경제학에서 <넛지>라며 (행동을 촉구하는 약간의 제스처 정도일 뿐이라는) 선택과 판단, 의사결정에 의도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는 1930~1940년대 부터 이미 미디어를 통한 대중심리통제를 실천하던 미국을 위시한 서양으로서는 바라마지 않았을 학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영국 캐머런 총리도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행동경제학을 기반으로 하고 행동경제학자들을 관리자로 둔 정부부처를 신설했다고 한다. 이제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합일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합리적 선택을 유도하기 위한 긍정적 개입일뿐이라는 논리로, 정부차원에서 합법적으로 대중심리를 유도할 명분 즉 대중심리통제의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모리스 알레' (1911~2010)라는 학자는 역대 경제학자들의 관점과 갈등을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처럼 펼치며 분열적 양상을 보인 인물이다. 규제 완화를 격렬히 비판하면서도 사용자를 위해 노동시장이 더 유연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는데 그와 동시에 유럽 복지 연합을 꿈꿨다고도 한다. 확고한 자유무역 옹호자이면서 다국적 기업의 탐욕을 억제할 보호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니 박성호 씨가 울고 갈 다중이 캐릭터다 싶다. 하긴 역대 다중이 캐릭터 최종 갑이라면 예수님이시니 크리스찬이라면 터보의 '검은고양이 네로' 정도는 마스터해야 할 일이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장난꾸러기들도 마구 까댈 일은 아니다.
'아마르티아 센' (1933~ ) 이라는 경제학자는 그분 보다 부인이 압권이다. 영국계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손으로 하버드 대 교수라던데 애덤 스미스 전문가란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결국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는 정의를 다각도에서 증명하기 위해 경제학자가 된 것일까?
본서는 '대니얼 카너먼'(1934~ )이란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경제학자에 대한 내용으로 대미를 맺는다.
전체가 경제학자들이 경제로 시작하여 세상을 향하던 안목과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거시적이던 미시적이던 무역을 이야기하건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야기하건 자유를 말하건 개입과 규제를 말하건 결국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면 평등과 불평등 즉 분배를 주목할 수 밖에 없다.
로봇과 인공지능 적용 시점이 고작 20여년 후 부터라 보고 있다던데 그런데도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근로자들의 재적용을 위한 재사회화(?)라 해야 할까 학습이라 해야 할까에 대한 논의는 저조하다. 대량실업자 양산은 예정된 결론인데 그들의 재취업이나 거대 실업인구의 복지 문제는 감당할 수준을 벗어난 난제이다.
화성 이주 등을 현실화해 계획하고 실현하더라도 초기 이주 신청자가 이주 직후 적응 기간 맞닥뜨려야 할 문제들로 이후의 이주 신청자들이 정체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다수의 이주 신청자들이 있다한들 기술적 재정적 이유로 모두 이주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 지구에 남아 있을 인구들은 어찌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 경제란 결국 생존의 문제다.
나 또한 경제학이 그닥 살갑거나 익숙할 삶은 아니었다. 그렇다해도 경제가 생존의 문제라면 경제학을 외면하거나 건성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본서처럼 이렇게 삭막하지 않게 어렵지 않게 경제학에 들어서게 해주는 저작으로 경제학에 노크해 볼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 봐야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혹시 경제라는 여성이 자극적이고 열정적인 미녀일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