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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ㅣ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생각이 살아있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말을 충분히 의심해보면 그가 말한 생각은 진리(眞理)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진리만큼 탐구하고 싶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만한 것이 있으면 모두 제거하고 출발할 것이다. 그렇게 했음에도 만약 나에게 남은 게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의심하는 과정이 ‘방법적 회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의심이 악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믿음은 얼마든지 의심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을 연거푸 의심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심과 믿음의 문제에 대해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는『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탁월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系譜學)’이다. 저자들이 데카르트의 철학을 주목하는 이유는 근대성이라는 획기적인 사고(思考)의 전환에 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근대성의 특징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하나는 다원화(多元化)이며 나머지 하나는 상대화(相對化)이다. 다원화는 계몽주의의 전통인 세속화의 반대다. 쉽게 말하자면 다원화는 선택이며 세속화는 운명이다. 아르놀트 겔렌에 따르면 선택은 전경(foreground)과 배경(background)로 나뉜다. 전경이 선택이 가능한 삶의 영역인 반면에 배경은 선택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경에서 배경으로 된다면 ‘제도화’라고 하며 그 반대 현상이 ‘탈제도화’가 된다. 따라서 근대성은 탈제도화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상대화는 절대화의 반대다. 알프레트 슈츠는 절대화를 ‘당연시 되는 세계’이며 이는 ‘내적 제도화의 결과’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타인과 상호작용을 했을 때 상대화는 관용을 촉진시킨다. 한편 상대화는 ‘설득력 구조’를 가변적으로 만든다. 뿐만 아니라 상대화가 변증법으로 진행되면서 오히려 수많은 선택의 자유에서 도피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을 지적하고 있다. 즉 “내가 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선택했다. 그것이 나를 이끌었으며,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고 자신의 선택을 위장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근대성을 두루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근대성을 ‘주관성의 귀환’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화가 심화될수록 우려할 만한 상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니체는 “불신의 기술”이라고 불렀다. 세상에는 사실이 있고 확실은 사실을 찾아낸다면 객관성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곧 ‘2차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실에 대해 의심하고, 의심에 대해 또 의심한다면 객관적인 사실은 불가능해진다. 상대주의자들에 따르면 ‘서로 다른 서술이 있고, 그런 서술은 모두 옳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사실(thing)은 사물로 보라”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상대주의의 인식론적 결합에 때문에 근본주의가 복원되고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근본주의는 ‘반동적인 현상’이며 ‘현대적 현상’이다. 보수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주의는 전통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전통주의가 전통을 당연시하는 태도이며 근본주의는 그런 당연함이 흔들리거나 상실할 때 출현한다. 근본주의는 ‘재정복 모델’과 ‘하위문화 모델’ 방식으로 상대주의에 대응한다. 재정복이란 스페인이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 기독교 국가로 돌아갈 때 쓰여던 용어였다. 그리고 하위문화는 ‘미시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상대주의가 ‘의심을 과대화’는 것이라면 근본주의는 ‘의심의 과소화’에 있다.
우리는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입장을 살피면서 의심과 확실성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로베르트 무질이 “진리의 목소리는 의심 섞인 낮은 톤이다”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객관적으로 삶은 삼단논법으로 합리적이다. 그러나 삶에서 낮은 톤을 없애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만큼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의심과 불확실성은 의심할 수 있는 진리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는데 있다. 카스텔리오는 성서의「전도서」 3장 2절을 패러디하면서 “의심할 때가 있고 믿을 때가 있다. 알 때가 있고 모를 때가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모름을 앎의 피할 수 없는 준비단계로 보았다. 그리고 의심도 믿음의 준비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의심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의심을 한층 증폭시킨다. 이러한 주된 이유는 인지적으로는 불확실성한데 도덕적으로는 상당한 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의심은 판단을 유보한다. 섣부른 결정이나 사전 결정에 대한 완충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의심이 의심받아야 할 때가 된다고 저자들은 충고했다. 만약 이 시점에서 무한한 의심을 하게 된다면 ‘뷔리당의 당나귀’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의심에 대한 의심은 절망으로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의 나쁜 영향으로 절망하는 우리를 구원하는 데 있어 도덕적 확실성이 일정 역할을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우리가 도덕적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적 존재를 다루는 분야를 ‘철학적 인류학’이라고 부른다. 철학적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구성 요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먼저 ‘제도의 필수성’을 말하고 있다. 가령, 교통 신호를 준수하는 것은 생물학적 행동이 아니다. 그 보다는 학습된 행동이며 제도적 행동이다. 또 하나는 인간은 말하고 소통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중용의 힘’을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대주의든 근본주의든 어느 것 하나만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상대주의는 ‘공연한 의심’을 근본주의는 ‘맹목적인 믿음’을 남용하게 된다. 그러나 중용의 힘은 탁월하다. 지나친 믿음이나 의심으로 빠지지 않도록 조절해준다. 그래서 일까? 괴테는 “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확신을 얻을 때의 기쁨이 있으랴?”고 말했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부조리한 진리나 현실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불행 그 자체다. 거꾸로 의심에 대한 옹호는 자유정신, 비판적인 지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건전한 의심’이라는 것이다. 건전한 의심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며 보편성을 추구한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의심은 휴머니즘에 근거한다고 저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또한 휴머니즘을 근거로 하여 ‘핵심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구별하라고 했다. 즉 핵심적인 것은 양보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의 의견 충돌은 열린 태도로 접근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건전한 의심은 ‘의심과 믿음 사이의 중용을 위한 행동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