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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로널드 L. 넘버스 엮음, 김정은 옮김 / 뜨인돌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무창포 해수욕장은 신비의 바닷길로 잘 알려져 잇다. 무창포 해수욕장과 석대도 사이의 바닷길이 썰물 때 드러나기 때문이다.『성경』의「출애굽기」 14장에 따르면 무창포 바닷길은 ‘모세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 사람들은 더 이상 모세의 기적을 믿지 않는다.『성경』대신 과학자들의 주장이 훨씬 합리적이다. 즉 무창포 바닷길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해서 생기는 자연현상이며 결정적으로 달과 태양의 인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기적을 믿는 신학자들의 심경은 미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의 설명에 일리가 있음을 어느 정도는 자신들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神)을 버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로널드 L. 넘버스가 엮은『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는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해주고 있다.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통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러면서 과학과 종교에 내재된 통념(myth)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학의 최대의 적은 종교라는 것이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창조론과 진화론의 첨예한 대립을 간접적으로 접해왔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코페르니쿠스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브루노가 순교자가 된 최초의 과학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른바 종교재판으로 자행된 희생자는 브루노만 뿐만 아니라 갈릴레이도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러한 사실들이 전복되고 만다. 그들이 과학자였다는 지엽적인 사실만으로 박해를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신학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학적 개념이 이단적이라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7세기 과학혁명이 과학을 종교에서 해방시켰다고 하지만 그 시대를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17세기 근대과학자는 없었다. 그보다는 그들은 자연철학자였다. 자연철학이란 자연의 근본 원리, 일반적인 변화와 움직임, 그리고 신의 천지 창조 등을 다루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뉴턴은『프린키피아』「일반주해」에서 “완전한 존재라 하더라도 세상을 관장하지 않는다면 주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신을 ‘성스러운 시계공’이라고 하였다.
데카르트에 의해 합리론이라는 흐름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자연철학을 답보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을 달리 기계론적 철학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계론적 철학은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단순화시켰다. 그럼에도 그들은 인과관계라는 기계론적 세계조차도 목적과 설계를 위한 공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기계론적 철학은 ‘모두 신이 물질을 창조하고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곧 피에르 가상디가 말한 ‘최종 원인’이었다. 자연철학자들은 최종 원인이라는 용어를 ‘창조에 드러나는 신의 의도’라는 의미로 재해석했다.
한편으로 다윈의『종의 기원』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자연신학이 거대한 담론이었다. 자연신학은 신의 특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증에는 ‘존재론적 증명’과 ‘우주론적 증명’이 있다. 전자는 완벽한 존재로서의 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필연적인 존재인 신이 있기 때문에 우주가 부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는 ‘설계논증’이 논의 되었다. 설계논증의 특징은 적응과 관련된 유용성과 지적 설계였다. 하지만 다윈의 자연선택은 ‘지적인 통제가 있었다는 증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말한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습니다”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스피노자의 신은 ‘인간의 운명과 행동이 자신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하는 신’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세상의 규칙적인 조화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신’을 말한다. 중세와 근대 철학에서는 자연을 초월적 신의 창조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신은 곧 자연이었다. 즉 세계는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바로 신이었다.
또한 스피노자의 신을 믿었던 아인슈타인의 종교관은 새삼스러웠다. 그는 종교의 최종 단계를 ‘우주의 질서에서 느끼는 종교적 감정’이라고 했다. 유한한 인간의 존재를 깨닫고 자연과 사고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경이로운 질서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인격화된 신’을 버릴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감정은 ‘과학과 종교 사이의 충돌에 대한 생각을 없애준다고’ 했다. 이유인즉 과학은 이해할 수 있는 우주에 대한 믿음을 종교에 의존하고 , 종교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우주의 질서에 대한 발견을 과학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과학과 종교가 적인가 동지인가’라는 통념에 대해서 비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과학적인 생각이 일상화된 오늘날 ‘서구 문화를 세속화시켰다고?’ 라는 의문은 얼핏 당연해 보인다. 세속화란 과학지식이 초자연적 현상의 지배를 덜 받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가 걸어온 길을 당대의 현실과 함께 더듬어 보면 늘 반목했다는 것은 잘못된 통념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러한 주장은 낡은 개념에 불과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