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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숨이 찼습니다. 덕혜옹주의 슬픈 이야기는 허공을 향하여 울부짖는 것 같았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참함으로 얼룩진 인생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명이 권비영 작가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이 늙은 눈물을 흘리게 했을 때 한 여자로서의 슬픔은 어떤 눈물일까요? 이제까지 나는 덕혜옹주를 안타까워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경술국치라는 분노를 삭이며 술잔에 영혼을 적셨던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작가 말대로 “처음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덕혜옹주』를 읽으면서 마음의 뼈가 으스러졌습니다.
일찍이 수잔 손택은『문학은 자유다』에서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작가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일은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권비영이『덕혜옹주』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우선적으로 느끼는 것은 교과서에 씌어 있는 역사적 지식들이 때로는 허구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역사적 이면(裏面)을 파고드는 소설적 허구들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 소설에 나오듯 고종(高宗)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이라는 가장 평범한 사실조차도 식민지 상황에서는 아무 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에 대해 언제까지 불평불만만 무의미하게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작가가 덕혜옹주를 ‘가슴으로 품은 여인’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러한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작가는 덕혜옹주에 대한 파편화되고 일그러진 자화상이 마치 진실처럼 굳어진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봤습니다. 더구나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소문에 대해 작가는 반감을 느끼면서도 소문에는 책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덕혜옹주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때 소문은 그저 소문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문보다 더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문은 떠돌다 사라지겠지만 진실은 덕혜옹주를 잊을 수 없게 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덕혜옹주에게 가혹했던 삶이 더욱 절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1912년 덕수궁의 꽃으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이름 없이 자랐습니다. 그리고 13세에 덕혜라는 이름을 얻는 대신에 황족의 일원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그때부터 덕혜옹주는 창덕궁을 그리워하면서도 조선의 황녀라는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일본인들을 질타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19세에 대마도 백작과 강제로 결혼하면서 그녀의 우울증은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딸 정혜와 평행선을 달리는 불협화음은 그녀를 돌이킬 수 없는 정신병원의 그늘에 발을 들이밀게 했습니다. 그 순간 덕혜옹주는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깨끗이 접어야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요? 그래서 ‘역사의 책갈피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말라가는 작은 꽃잎’이지 않았을까요?
덕혜옹주의 삶은 고단하고 쓸쓸했습니다. 그리고 무력해보였습니다. 망국의 운명과 함께 했던 신산스런 삶은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운명과 다른 길을 가게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셀 수없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상처받았습니다. 무릎에 피멍이 든다고 한다고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 보다는 식민지 사람이라는 차별을 견뎌내야 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메마른 땅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 말대로 ‘죽음의 길이 삶보다 편안’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덕혜옹주에게도 한 가닥 희망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낳은 딸 정혜와의 특별하고도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아이를 낳아도 될까?’라고 걱정과 두려움으로 섞여 혼란했지만 순명(順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운명에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겠다는 다짐에는 자신의 핏줄에 대한 감정의 고뇌가 빼곡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정혜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자 등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혜에게 조선말과 조선식 예절을 가르쳤습니다. 언젠가는 창덕궁 비선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인 동시에 자신의 치욕을 씻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간격은 멀어졌습니다. 정혜가 일본 이름인 ‘마사에’라는 이라는 삶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덕혜옹주는 무기력해졌습니다. 두 사람의 대립이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끝내 정혜가 “엄마, 나는 일본인이에요”라고 말했을 때 덕혜옹주는 숨이 멎을 듯한 충격으로 ‘아아, 정혜야. 일본인이라니, 정혜라고 부르지 말라니. 안 된다, 애야. 너는 내 딸이다, 너는 조선인이다. 나의 정혜야’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엄마 따라 조선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너는 엄마 딸이야”라고 하자 “조선은 이제 없어! 망해서 없어진 나라라고! 대 일본 제국의 식민지란 말이야!”라고 매몰차게 대꾸했습니다. 정녕 정혜로부터 저 소리를 들으려고 질긴 목숨을 버텨왔단 말인가? 덕혜옹주의 가슴 한 구석이 또 한 번 무너졌습니다. 저 소리를…저 무례한 말을….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덕혜옹주의 불행이 단 한 사람에게만 들이닥칠 수는 없는 일 같아서 마음이 더욱 을씨년스러웠습니다.
2010년 2월 초『덕혜옹주』라는 낯선 제목의 책을 선뜻 집어 들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덕혜옹주’라는 이름에 있었습니다.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고 보면 100년 동안 우리는 덕혜옹주를 모른 체 살아온 셈입니다. 그만큼 무심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승자(勝者)의 진실을 드러낸다고 했을 때 덕혜옹주는 패자(敗者)였습니다. 일본에서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일본이 패망하고도 이승만 정부는 덕혜옹주를 외면했습니다. 이런 끔찍한 현실에서 덕혜옹주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이 터져라 창덕궁 낙선재를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앙상한 덕혜옹주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심하게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덕혜옹주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덕혜옹주에 무관심한 우리라면 정신 병원에 갇혀야만 했던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식민지라는 국가의 정치적 몰락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딸이요,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리고 딸을 둔 어머니로서의 덕혜옹주의 개인사는 그것은 그대로 또 한 시대를 보여주었습니다. 경술국치의 참다한 시대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우리들이 잃어버렸던 부끄러운 역사가 자꾸만 눈에 밟혔습니다.
김구는『백범일지』에서 자신의 호를 백범이라고 고친 것은 “우리 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경찰들이 자신을 몽우리돌이라고 달리 부르는 것에 격분하였습니다. 뭉우리돌은 석회질이 많은 탓에 쉽게 물컹거렸습니다. 이로 인해 김구는 뭉우리돌이 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경술국치 100년을 살아오면서 우리의 나라사랑은 어떤가요? 백범이 말한 대로 ‘뭉우리돌’을 닮은 것 같아 두고두고 한(恨)은 아닐 런지요? 많은 사람들이 조국이 독립되었다고 하면 그것으로 경술국치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하는 게 아닌가, 라고 후련하면서 편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는 우리가 안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경술국치의 콤플렉스'를 다음과 같이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람들을 조국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하네. 낯선 땅에서 핍박 받으며 견뎠던 그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들이 이 땅에서 흘렸던 피눈물까지 모두 거두어가야 하네. 그걸 이루어내지 못하면 독립도 아무런 의미가 없네. 우리 동지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신념이 무엇인가? 자랑스럽고 떳떳한 네 나라를 세워 우리 민족을 모두 데리고 돌아가는 것 아니었나? 옹주마마는 그 시작에 불과하네” 이었습니다.
작가 말대로 떳떳한 나라를 세우는데 덕혜옹주가 그 시작이라는 데 무척이나 공감했습니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오늘에야 비로소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흔적도 없이 잊혀져버린 삶이 거센 바람으로 휘몰아쳤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힘이 생겨났습니다. 덕혜옹주가 슬픈 운명을 피하지 않았듯이 우리들 또한 결코 밀리거나 비켜서지 않기를 새삼 느꼈습니다. 그녀를 위한 진혼곡인『덕혜옹주』를 읽으면서 100년이라는 삶의 흔적에서 민족의식이 얼마만큼 오래되었는지 문제보다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라는 것을 진정으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록보다 불운했던 황녀의 진심이 더 깊이 읽어지기를, 좀 더 깊이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본다’는 작가의 말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