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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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1995년 서울 강남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어느 누구에게는 운이 없는 날이었다. 만약 운이 좋았다면『장자』「제물 편」에 나오는 나비 꿈(胡蝶夢)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엄연히 장주였다. 그래서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하길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分別)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만물의 조화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한 분별은 차별(差別)과는 다른 것이다. 

 
황 석영의『강남몽』은 차별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다루고 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차별한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강남(江南)에서 자신들의 한계를 온 몸으로 맞서고 있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황석영은 보기 드물게 ‘몽(夢)’이라고 했다. 몽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현란하다는 생각이 앞서는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소설을 읽을수록 몽에 대한 환상은 그야말로 한바탕 몽에 불과하다. 황석영은 몽의 애매함을 살짝 추구하면서 ‘다큐 소설’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소설은 더욱 현실적이 되었다. 

 
어디 이뿐인가. 이 소설의 묘한 매력은 작가의 비범한 거대 담론(談論)에 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작가는 ‘광복 반 세기식의 대하소설로 쓸 수는 없고 그런 접근은 낡은 방식’이라고 고백했다. 흔히 역사학을 ‘디테일에 대한 사랑(love of detail)'이라고들 한다. 가령, 한국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역겨운 화약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스케일(scales)'도 빼놓을 수 없다. 말하자면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강남몽』이라는 책 한 권을 읽으면 마치 10권을 읽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강남몽』에서 작가는 1995년 서울을 주목하고 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다반사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끔찍할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강남 형성사’의 총체적인 모순을 말해주는 지표였다. 일제시대와 광복, 그리고 분단이라는 정치적 후유증으로 얼룩진 5.16 쿠테다와 남서울 개발 계획의 굵직굵직한 현대사의 질곡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작가 말대로 ‘민중이 걷잡을 수 없는 소비 사회의 적나라한 대중으로 휩쓸려 들면서 욕망에 얽혀가는 시대’였다.

이 소설은 삼풍백화점을 연상시키는 대성백화점이 붕괴되면서 조각난 씨멘트 덩이에 깔린 서로 다른 꿈의 몰락과 아픔을 쫒아가고 있다. 대성백화점 참사는 인재(人災)에서 비롯되었다. 부실공사에 따른 건물의 안전도가 위협받았고 거기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최소한의 양심마저 반쪽이 되고 말았다. 문을 닫느냐, 마느냐는 정작 영업 이익 때문에 휴업하지 못했다. 대성백화점은 여름 정기세일이라는 좋은 찬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도무지 비정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으로 문을 열었고 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대성백화점에서 인생의 끝이며 무덤이 될 줄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박선녀와 임정아는 다행히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눈을 뜨자 생사를 오가는 참다함에 그만 놀라고 말았다. 차라리 이것마저 꿈이길 바랐으나 자꾸만 아픈 곳에 손이 가는 것마저 버거웠다. 슬픔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체념은 아직도 그녀들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삶과 죽음이 마치 종이 한 장의 간격으로 좁혀졌을 때 숨 가쁘게 살아온 과거가 아픈 속살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박선녀는 대성백화점 회장인 김진의 둘째부인이고 임정아는 대성백화점 아동매장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들은 시멘트 덩이에 깔려 있다. 단단한 시멘트를 한 꺼풀 벗겨내면 그것은 사악한 인간의 욕망 덩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잠시 실종된 것이 아니라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 소설은 다섯 명이 저마다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크게 보면 박선녀와 임정아의 평탄하지 못했던 삶의 멍에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박선녀는 이름과 달리 나쁜 권력에 편승하면서 강남 귀부인이 되었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이 진희였는데 이는 ‘요술쟁이 지니’의 발음만 따서 지었다. 그녀의 요술은 술장사를 시작으로 하여 땅장사를 거쳐 몸장사를 했다. 술장사에 있어서는 깡패 홍양태가 있었고 땅장사에 있어서는 부동산 투기업자 심남수가 있었다. 그리고 40대에도 불구하고 탄력전인 몸매를 간직했던 것은 재벌가 김진때문이었다. 그녀의 성공 가도에는 미모, 주먹, 권력이라는 트라이앵글이 매순간 불가사의한 능력을 드러냈다. 생활고를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를 걱정했던 풋풋함은 세월과 함께 우문(愚問)에 불과했다.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핸드백 하나에 1,000만원이 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러한 우문은 ‘생존만으로 충분치 않았다’는 김진에게도 당연했다. 김진이 누군가? 강남의 재벌가이면서도 굳이 남산 아래에서 살았다. 세상에 좋다는 것 다가졌으면서도 남산 집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향수(鄕愁)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산 집은 그의 애국(愛國)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일제시대 생명의 위협보다 더 악착같았던 것은 먹고 사는 문제였다. 조선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없었던 그는 일본 헌병의 개인 밀정이 되면서부터 급변했다. 그의 애국은 매국이었으며 광복 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서는 ‘반공’으로 각색되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군사정권에서는 ‘중앙정보국’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남산에 있었던 탓에 남산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할 힘을 가졌다.

그러나 이 보다 더 두려운 것은 군사정권 이후 산업화에 따른 개발논리에 파묻혀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군대의 조직력으로 사회와 국가를 개조할 수 있다는 단순명쾌한 명제’를 지닌 박정희로서는 개발이 하나의 목표였다. 이로 인해 친일파 세력들은 그들만의 패거리 문화를 형성하면서 사상을 통제하고 탄압했다. 그들이 강북이 아닌 강남을 선택한 것은 오로지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나마 안전했기 때문이다. 올해로 개통 40주년을 맞이한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이 강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삼풍백화점의 가치는 보다 분명해졌다. 강남이 대한민국 부의 1번지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강남에서 산다는 것은 엄청난 프리미엄이 작용했다. 그 순간 모든 불나방들이 서열화되었다. 즉 얼마만큼, 어느 정도 부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해졌다.

박선녀와 김진이 불우한 시대의 반인반수(伴人半獸)라고 한다면 임정아는 반인(伴人)이었다. 대성백화점에서 일하며 하루 세끼 밥먹으며 아무 걱정없이 사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었다. 비록 자기의 월급보다 많은 수입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에게 해 끼치고 산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좋은 차에 널찍한 집에 사는 부자들이 부러웠던 반면에 별로 잘살지 못한다고 여겼다. 백화점이 붕괴되고 난 후 씨멘트 틈 사이에서 박선녀가 버티지 못하고 “나 이제부터…잘 거야…”라고 하면서 깊은 잠에 빠질 때 임정아는 결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박선녀가 더 이상의 요술을 부리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이 세월과 함께 소멸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력이 있다고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대성백화점이 붕괴된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무질서한 것이 자멸하는 환영(幻影)이었다. 이러한 환영에 대해 임정아는 목이 찢어지도록 “여기 사람 있어요…” 라고 울부짖었다.

『강남몽』은 운명이었다. 거장 황석영은 디테일과 스케일을 아우르며 삼풍백화점의 참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그저 흘러가버린 과거라고 하기에 우리에게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강남형성사의 비극에는 자본주의의 사기극이 농후했다. 그럼에도 황석영은 삼풍백화점의 비극 앞에서 인간들의 너절한 양심을 호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남의 꿈을 쫓는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얼마나 희극적인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면서 인형 혹은 희극같았던 부끄러운 자화상은 불식간에 허를 찔렸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 아닌 나비 꿈(胡蝶夢)이어야 더 이상의 '강남몽'은 없지 않을까? 세상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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