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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이데올로기는 우파, 좌파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진보와 보수다. 그래서 인문학적으로 좌파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의『자본론』같은 불온서적(不穩書籍)을 읽는 것이다. 반면에 인문학적으로 우파라고 한다면 사서삼경(四書三經) 같은 책을 탐독하면서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에 대해 이택광은『인문좌파를 이론 가이드』에서 ‘인문좌파’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인문좌파란 단순하게 정치적 좌파라고 규정할 수 없는 ‘다른 주체’였다. 즉 인문좌파는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였다. 또한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것이다. 새로운 문제란 다름 아닌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드러나듯 ‘이론가이드’라는 것은 저자가 다년간 이론에 공을 들인 결과였다. 그는 ‘이론은 근육이다’라고 말하면서 왜곡되었거나 편향된 이론의 진면목을 정의하였다. 보기 좋은 근육이 아니라 힘을 쓰기에 좋은 근육이라고 했다. 이론이 쓸모 있는 근육이 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개념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으로 받아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창조에 대해 유념해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창조라는 것이 완전히 새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이론은 없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우발적인 필연성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탈정초주의(post-foundationalism)다. 탈정초주의는 토대나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불변한 것을 우발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 책의 본론으로 들어가면 ‘마르크스를 죽여? 살려?’로 시작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때문인데 데이비드 하비는 마르크스를 ‘자본주의의 근대화에 대한 포괄적 평가를 제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유인즉 우리가『공산주의의 선언』에 대한 단순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지젝이 말한 ‘이데올로기의 판타지’다. 가령, 근대화 이후의 한국성과 유교는 거의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국은 유교적인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이론에 대한 반성이 대두되면서 ‘문화이론’의 반작용이 나타났다. ‘마르크스로 돌아가라’는 것은 페리 핸더슨이 제시하는 것처럼 ‘역사발전에 관한 이론(역사이론)’으로 볼 수 있다. 역사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의 이론’이 되는 메타이론이 되었다. 그리고 라캉주의 좌파에서는 ‘정치적 기획’을 제시한다. 라캉주의 좌파에서 정치는 주이상스(jouissance)의 위상학에서 현실성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라캉의 주이상스에 관련하여 빼놓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그는 만보자를 새로운 지식 생산자로 봤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진리내용과 물질내용 그 사이에 조성되는 긴장 자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진리는 의도성의 죽음’이라고 했다. 이것은 곧 융의 의식성을 문제시하는데 역사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변증법적 사유는 역사적 각성의 기관이었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앎은 곧 기존의 지식을 부수는 새로운 것’이었다. 저자는 이 문제가 모든 좌파이론의 핵심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밖에도 이 책은 정신분석학을 일종의 이론으로 여겼던 알튀세르를 조명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알튀세르는 정신분석학을 무의식이라는 과학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이데올로기 또한 무의식의 영역으로 해석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이념이나 신념 체계 같은 것이 아니라 ‘재현들의 체계’ 곧 구조로 봤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이데올로기를 상상적 관계로 설정했다. 상상적 관계란 큰 주체에 작은 주체들이 귀속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호명(interpellation)'이라고 했다. 반면에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구조가 아니라 ‘구조와 주체의 틈새에서 작동하는 판타지’라고 했다.
다음으로 저자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예술을 여전히 반자본주의적’인 것에 주목한다. 즉 예술의 ‘창조적 상상력’을 반자본주의적 정치의 원동력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네그리는 예술가를 ‘해방을 향한 물질적 욕망에 내재한 구성적 힘의 화신’이라고 하면서 ‘다중’이라는 존재로 규정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과 ‘혁명적인 것’은 같다. 이로 인해 모더니즘을 병든 예술, 리얼리즘을 건강한 예술이라고 했던 루카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끝으로 철학의 복원 문제에 있어 알랭 바디우의 ‘탈봉합’을 제시하고 있다. 바디우에게 있어 철학은 진리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디우은 기존의 철학은 진리적 철차들을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어느 한 가지를 우월한 지위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정한 진리 생산이 다른 진리의 생산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봉합’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결국 봉합이라는 것은 ‘진리 생산의 절차를 배타적’으로 하는 것이다. 반면에 탈봉합은 ‘다양한 진리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론이 쓸모 있는 근육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단순한 미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보다는 정치적이어야 한다. 이론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론의 역할이다. 그런 면에서 랑시에르가 파악했던 ‘정치적인 것은 언제나 미학적인 차원을 통해 출몰한다’는 것이 뚜렷해진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결정하는 아프리오리(a priori: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앎)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