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잘 있어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희생은 고깃덩어리를 땅속에 파묻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 시카고의 도살장과 같았다. 차마 참고 듣기 힘든 말들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나중에 지명만이 위엄을 갖게 되었다. 숫자나 날짜 같은 것들이 지명과 함께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었다. 영광이니 명예니 용기니 신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마을의 이름이나 도로의 번호, 강 이름, 연대의 번호나 날짜와 비교해 보면 오히려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무기여 잘 있어라』중에서

 

생각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사람마다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니시트 헤밍웨이의『무기여 잘 있어라』에서 프레더릭은 “나는 생각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사람의 품위(品位)를 이성적으로 완성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생각이 아닌 “음식을 먹도록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캐서린과 잠을 자도록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먹고 자고는 단순합니다. 단순함은 굳이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끔은 우리는 영광이나 명예를 그 밖에 인간에 부여된 정의를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인 말은 그에게 마치 빗속에서 듣는 것처럼 공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설스럽다고 적당한 착각을 했습니다.

미국인이었던 프레더릭은 건축가가 되고 싶어 이탈리아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이탈리아 군대 소속으로 앰뷸런스 부대의 장교로 참전했습니다. 전쟁이 이렇다 할 공방전 없이 잠시 안개마냥 가라않자 할 일이 없어 휴가를 가게 된 그는 군종신부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날카롭고 투명한 쾌감으로 밤낮을 반복했습니다.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군종신부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습니다. 군종신부는 아가씨가 없이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신부가 말한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었는데 영국 야전 병원에서 일하는 스코틀랜드인 미스 바클리를 만나면서부터 점차 현실이 되었습니다. 약혼한 청년이 참전하자 그녀는 간호사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청년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삶을 살다

그들은 이상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청년이 전사하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 그를 만나 사랑하게 되자 그녀는 만약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캐서린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저녁 장교 위안소에 가는 것보다 밤이 되어 그녀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뻔한 게임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카드 대신 말로 하는 브리지 게임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분간 그녀에게 친절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정말로 친절하며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또한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만나러 왔다가 막상 만나지 못하면 기분이 여간 쓸쓸하고 공허한 게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공격이 개시되어 그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영국 야전 병원을 지날 때, 잠깐만이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그를 도와주기 위해 성(聖) 안토니오 상(로마 가톨릭의 기적의 수호성인)이 새겨진 목걸이를 주면서 꼭,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운전병과 함께 참호 속에서 전쟁 이야기를 하다가 적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다리에 부상을 당하는 정도였습니다. 그가 병동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군종신부와는 전쟁 혐오증을 이야기 했습니다. 군종신부는 자신은 진짜 장교가 아니라고 하면서 장교와 사병의 차이점을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장교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들(사병)에게 전쟁을 시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내 종교예요

그래서 군종신부는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가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하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었습니다. 사랑을 하면 그 대상을 위해 뭔가 하고 싶어지고 희생하고 싶어지고 봉사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두려웠습니다. 군종신부말대로 한낱 정열과 육욕에 지나지 않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는 사랑과 별도로 행복했습니다. 군종신부는 자신의 행복은 그것과는 다르며 직접 느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군종신부가 말한 그것! 그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런 행복을 느끼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물어봤지만 군종신부의 대답은 만족할 수 없었지만 견고했습니다.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밀라노에 있는 미군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정말 꿈만 같은 캐서린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녀는 그를 간호해주면서 그가 원하는 것만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곧 그녀가 원하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는 더 이상 없으며 오직 그가 원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는 아이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나’라는 존재는 없으며 내가 바로 ‘당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행복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당신 곁을 떠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면서 “당신은 내 종교예요. 당신은 내가 가진 전부”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하지만 그들은 생리적인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불안했던 이유는 바로 아기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걱정할까 봐 얘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 꼭 말해야만 했습니다.

“덫에 걸린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나요?”“약간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 때문은 아냐.”“나 때문이라곤 하지 않았어요. 바보같이 굴지 마세요. 어쨌든 덫에 걸린 기분이 드느냐는 거죠.”

“인간이라면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그 순간, 그녀는 ‘언제나’라는 말이 듣기 싫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서로 사랑하면서 일부로 오해를 만들어서 다투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두 사람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남이며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이 우리를 잡아먹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며 당신 같은 용감한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비겁한 자는 천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단 한 번 죽을 뿐’이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비겁한 사람에 대해선 잘 알지만 용감한 사람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용감한 사람이 영리하다면 아마 이천 번은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용감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율이 2할 3푼인 타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야구에서 평범한 이류 타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상에서 몸이 회복되자 그는 캐서린을 병원에 남겨둔 채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더 이상 전쟁에서 신성이니 희생이니 하는 말들이 무의미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장 밑바닥에 있는 덫을 발견했습니다. 더구나 후퇴하는 과정에서 임무를 실패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생사의 갈림길을 빠져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부대를 이탈한 죄로 야전 헌병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문을 받는 장교들이 하나같이 총살을 당하자 그는 탈출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그는 아무런 의무도 없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캐서린이 스트레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의 동료가 그를 부끄러움도 모르고 명예도 모르고 비열한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그녀는 기쁜 마음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여서 세상 사람들에게 맞선 고독을 느낄 뿐, 결코 고독하지도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밤과 낮이 같지 않다는 것,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 밤에 겪은 것은 낮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있으면 밤이 더 유쾌하다는 것만 다를 뿐 낮과 거의 다를 게 없었습니다. 또한 혼자 있을 때는 할 일이 없는 범죄자 같았지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러한 기쁨 덕분에 그는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녀 말대로 앞으로는 그가 체포되지 않을 곳에서 멋지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네가 삶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죽는다

그들은 체포를 당할까 봐 국경을 넘었으며 마침내 스위스에 도착하자 지긋지긋한 곳을 빠져나온 것을 실감했습니다. 스위스는 멋진 나라, 훌륭한 나라였습니다. 스위스에서 그들은 출산을 기다리며 멋진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병원에서 출산하는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 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초산이라는 자연의 이치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그녀의 용기는 완전히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녀 또한 전혀 죽을 까닭이 없었지만 머지않아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사랑해서 얻게 되는 결과라고 하는 것이 거짓말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덫의 끝, 즉 인간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더구나 그것에 배울 시간이 없었습니다. 마치 경기장에 던져 놓은 뒤 몇 가지 규칙을 알려 주고는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공을 던져 잡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죽음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비열한 장난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의 종말을 그는 언젠가 캠프를 할 때 모닥불 위에 던져진 개미가 잔뜩 붙어 있는 통나무로 투영했습니다. 통나무에 불이 붙자, 개미들은 뜨겁지 않는 곳에 모여 있다가 결국에는 불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그는 얼마든지 구세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컵의 물을 통나무에 끼얹었던 것은 위스키를 마시려고 해서 그런 것이지 개미를 살려주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여야 한다

그는 그녀가 끝내 사망하자 간호사를 내보내고 문을 닫고 전등을 껐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마치 조상(彫像)에게 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이토 준이치는『민주적 공공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who)는 무엇(what)과는 다르게 공약(共約)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내가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타인에게도 귀결시킬 수 없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은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심에 의해 성립된다. (…) 타자의 현상에 흥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타자의 행위와 말을 보고 들으려고 하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을 성립시키는 것은, 타자의 세계의 한 자락이 드러나는 것, 그러한 세계 개시에의 욕구이다. 현상의 공간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세계는 그 사람 자신에 의해 보여질 수밖에 없다.

 

돌이켜 보면 그녀의 죽음은 생리적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그녀의 얼굴이 조각품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에게 사랑이라는 종교적인 감정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그는 우리와 다르게 생리적 덫의 비대칭적인 위치를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즉 사랑, 죽음이라는 무엇의 덫이 아니라 존재라는 누구의 덫에 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이천 번 죽을 용기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용기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타율이 2할 3푼 그 이상을 넘어설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