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 반철학사 4
미셀 옹프레 지음, 남수인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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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반(反)철학사’ 시리즈 네 번째 책이다. 이 책에서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철학의 계보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제도권 지식인층에 밀려난 급진적 사상가 여섯 명의 생애와 철학을 재조명한다.

 

계몽주의 시대는 무엇인가?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에서 광범하게 일어난 지적 사상운동이다. 프로이센(Prussia)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주]를 비롯해 당대의 많은 사람은 “새로운 시대가 문을 두드린다”는 볼테르(Voltaire)의 외침에 심취했다.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볼테르를 만나는 것은 철학자 혹은 계몽주의자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였고, ‘빛의 시대’였다. 종교가 지배하는 계몽주의 이전은 자연과 신에 대한 질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개인은 자연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신의 뜻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전 세대보다 밝아진 이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 자유권을 강조함으로써 중세를 지배한 전제군주와 종교의 독단적 권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데 옹프레는 18세기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는 18세기가 봉건적 시대, 군주 왕정 시대, 가톨릭 시대였다고 주장한다. 볼테르, 루소(Rousseau), 디드로(Diderot) 등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 철학자들은 자유와 관용을 호소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교육을 받고 재산을 소유한 사람, 따라서 이성을 자유롭게 활용할 줄 아는 부르주아였다. 옹프레는 계몽주의자들을 ‘겁쟁이’라고 비판한다. 언행 불일치. 계몽주의자들은 말(생각)만 앞세우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사유재산제, 군주 및 가톨릭 권위에 순순히 따르는 보수주의자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유럽 계몽주의의 정점이었을까? 옹프레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는 18세기가 프랑스 혁명을 준비하는 시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뿌리 깊은 기독교의 권위를 단호하게 공격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종교를 신뢰하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무신론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급진적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무신론자’라는 오명을 씌우게 된다.

 

장 멜리에(Jean Meslier)는 ‘무신론자’ 사제이다. 옹프레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18세기를 폭파시킬만한 다이너마이트를 가진 사상가였다. 멜리에는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재산과 토지 공동 소유를 주장한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다. 라 메트리(La Mettrie)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심신 이원론을 비판하며 인간에 대해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정의를 내세운다. 그는 인간 역시 기계이며 인간의 정신은 뇌의 물질적인 작용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멜리에와 라 메트리는 급진적 유물론자이다. 모페르튀이(Maupertuis), 엘베시우스(Helvètius), 돌바크(d’Holbach)도 유물론자이지만, 이 세 사람은 공리주의적 입장을 드러낸다. 엘베시우스는 화폐의 폐지,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반대했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점진적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무신론자가 확실한 돌바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신과 종교를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모여 만든 《백과전서》의 편찬자였고, 이 책에 400개의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백과전서》 집필에 참여한 루소와 볼테르는 무신론자들을 공격했고, 무신론자를 비난한 내용이 있는 《백과전서》 항목이 기재되기도 했다. 옹프레는 이 책에서 ‘계몽주의 시대의 희생자’ 또는 ‘해방자’로 재평가받는 사드(Sade)를 비판한다. 그는 사드가 성범죄자이며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 우생학적 속성을 이해한 ‘봉건주의의 화신’이라고 주장한다. 사드의 작품 속에 나타난 파시즘의 속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드 옹호론자들에게도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한다. 사드의 소설을 읽기 전에 사드의 봉건주의적 사상을 분석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반드시 읽어볼 것!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문명에 고취되어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문화와 문명을 진보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세상을 확 바꿀만한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 있던 자리는 자유와 평등을 외친 민중이 모인 광장이 아니라 귀족을 알현하는 안락한 실내였다. 볼테르가 자신에게 연금을 주는 귀족의 방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가. 인간의 이성이 굳어지면 또 다른 권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성은 속박에 갇힌 모든 사람을 위한 만능의 열쇠가 아니다.

 

 

 

[주] 《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에서는 프랑스식 표기에 따라 ‘프레데릭 II세’라고 되어 있다.

 

 

 

 

 

※ Trivia

 

‘인간사랑’ 출판사에 나온 책에서 유독 오자 한두 개가 발견된다.

 

 

 옹프레는 18세기의 철학을 기술하기에 앞서 18세기는 이 세기의 말엽인 1879년에 일어난 프랑스의 대혁명을 준비한 시대라고 설정한다. (10쪽)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256쪽에 있는 ‘타르수수의 바오로’를 ‘타르수스(Tarsus)의 바오로’로 고쳐야 한다. 287쪽의 ‘에피큐로스’는 에피쿠로스(Epikuros)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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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9-1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 걸 이해하게 되었어요. 잘못 생각했다고 시인한 대목이 뭉클합니다. 팟캐스트에서 들었어요.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라 오판했다는 거죠. 저는 믿습니다.

요즘 스피노자에 빠졌어요. 아니 더 빠져 살 예정입니당~~

cyrus 2018-09-14 12:28   좋아요 0 | URL
철학을 공부하기 전에 철학자의 생애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왜 철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 인간다운 결점도 알 수 있어요. 저도 스피노자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일단 먼저 데카르트의 철학부터 공부하려고 해요. ^^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가장 궁극적인 철학적 혹은 종교적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알려면 그 ‘나’라는 존재 속에 채워진 내용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내용은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치부를 포함한다. 이렇게 시간을 중심으로 나의 정체성을 묻는 실마리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고백록》을 통해서 했던 작업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대한기독교서회, 2003)

* 문시영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읽기》 (세창미디어, 2014)

 

 

 

《고백록》이 고전이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시절 자신의 방탕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참회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책에 보여준 그의 신앙 고백은 신학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고백록》에서 완성된 신학은 역사에서 사라진 수많은 교부(敎父)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던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교부로 재탄생시킨 힘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 하면 떠오르는 ‘원죄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확립한 것이다. 창세기에서 아담(Adam)하와(Ḥawwāh)가 선악의 열매를 먹으면서 원죄를 짓게 되었고, 인간은 신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를 인간의 속박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자신에 내재한 죄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의 도움, 즉 구원을 받을 존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분석한 사람도 없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가 알고 싶었던 ‘나’는 죄를 짓고 살아왔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다. 《고백록》을 읽어보면 그가 어렸을 때 지은 범죄와 그 범죄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기록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무에 달린 배를 훔친 절도 행위의 동기에 대하여 분석했다(《고백록》 제2권 4장). 자기가 배를 따 먹은 것은 배가 고파서일까? 아니면 훔쳐서 팔고 싶어서였을까? 그는 배를 따서 맛만 보고는 모두 버렸다. 그러면 왜 배를 훔쳐 먹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인간 내면의 원죄 의식에서 찾았다. 인간 내면에는 원죄 의식이 자리 잡고 있고 이것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 [품절] 일레인 페이절스 《아담, 이브, 뱀》 (아우라, 2009)

* G. R. 에번스 《중세의 그리스도교》 (예경, 2006)

 

 

 

종교사학자 일레인 페이걸스(Elaine Pagels)는 자신의 책 《아담, 이브, 뱀》(아우라, 2009)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이 기독교 교리의 근간으로 자리 잡게 된 과정과 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이 책과 관련해서 기독교인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준 기독교의 변천 과정을 압축해서 정리한 《중세의 그리스도교》(예경, 2006)도 참고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확립되던 시기에 가장 중요한 교리로 발전하게 됐다. 초기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던 ‘소수의 종파’였고, 이로 인해 숱한 박해를 받았다.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낸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Constantinus I)밀라노 칙령으로 공인을 받으면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그 뒤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으나 이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에 기독교가 합법화되면서 기독교는 대중적인 종교로 발전한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은 교회에 들어온 신자들을 가르치는 과거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 《고백록》을 쓰게 된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사악한 존재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왜곡될 수 있다. 이게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통해 증명한 범죄의 원인이며 ‘원죄설’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페이걸스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발전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은 개인을 통제하는 정치적 수단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은 권력과 종교의 야합, ‘권력화된 종교’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기독교는 과거를 잊은 듯 권력자 또는 박해하는 자의 위치가 되어 다른 종교에 대해 비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구에서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는 관용이 자리 잡는 것은 백여 년간 지속한 종교전쟁의 값비싼 희생을 치른 후의 일이다.

 

 

 

 

 

* Trivia

 

선한용 신부가 번역한 《고백록》은 2003년에 ‘문화관광부(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추천우수학술도서’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 책에 고쳐야 할 오류가 있다.

 

68쪽 역주는 유노(Juno)‘주피터(Jupiter)이자 부인’으로 설명되어 있다. 유노는 로마 신화의 최고 여신이며 그리스 신화의 헤라(Hera)와 같은 인물이다. 주피터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Zeus)의 동일 인물이다. 주노가 주피터의 부인인 건 맞다. 그러나 주피터의 딸은 아니다. 주노는 주피터보다 먼저 태어난 누나이다.

 

 

 

 

 

 

 

 

 

 

 

 

 

 

 

 

 

 

* 아풀레이우스 《황금 당나귀》 (현대지성, 2018)

* [구판 절판] 아풀레이우스 《황금 당나귀》 (매직하우스, 2007)

 

 

 

오자는 아니지만, 79쪽 역주에는 《황금 당나귀》(현대지성, 2018)의 저자 아풀레이우스(Apuleius)‘아플레이우스’라고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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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12 17:27   좋아요 1 | URL
태어난 순간부터 원죄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비관적인 생각 아닐까요? 요즘 쾌락주의자, 이신론자에 관한 책을 읽어서 그런지 종교의 교리에 맞춰가면서 사는 삶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지적 편력은 다양하다. 그래서 그를 특정한 범주에 잠시나마라도 붙들어 매는 것이 불가능하다. 푸코를 영유하는 방식은 사람들에 따라 너무나 편차가 심하다. 푸코의 대머리에 무작정 오르다가는 미끄러져서 떨어질 수 있다. 다행히 요즘은 푸코의 대머리에 오르는 데 유용한 사다리 같은 책들이 많다. 다만 오래돼서 낡아빠진 사다리는 피해야 한다. 튼튼한 사다리가 여러 개 있다면 오래된 사다리까지 챙겨야 할 필요는 없다.

 

 

 

 

 

 

 

 

 

 

 

 

 

 

 

 

 

 

 

* 자네트 콜롱벨 《미셸 푸코, 죽음의 빛》 (인간사랑, 1998)

 

 

 

《미셸 푸코, 죽음의 빛》(인간사랑, 1998)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오래된 사다리’다. 푸코의 철학을 소개한 책이지만, 내가 보기엔 필독해야 할 이유가 없는 책이다. 이 책은 20년(!) 전에 나왔다. 절판되지 않은 게 용하다. 이 책의 프롤로그인 『여정과 추억』은 저자가 자신의 푸코 읽기 여정을 말년 푸코의 삶과 겹쳐 술회한 내용인데, 쓸데없이 길다. 그래도 번역자의 꼼꼼한 역주는 읽을 만하다. 번역자는 참고 문헌들에 대한 세심한 검토를 곁들여 이 힘든 작업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번역자도 사람인지라 종종 무지(無知)로 인해 잘못된 정보를 전하기까지 하는 오류를 범한다. 교정은 원고에 있는 오류를 바로잡고, 인쇄 상태를 바로잡는 행위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책은 ‘잘못된 책’이다.

 

 

 

 

 

 

 

 

 

 

 

 

 

 

 

 

 

 

* [아직 안 읽은 책] 미셸 푸코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 노르베르트 볼프 《디에고 벨라스케스》 (마로니에북스, 2007)

* 자닌 바티클 《벨라스케스》 (시공사, 1999)

 

 

 

78쪽에 푸코의 《말과 사물》(민음사, 2012)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말과 사물』은 우연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거기엔 가장 걱정스런 것이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발상은 보르헤스(Borges)의 한 텍스트로부터 연유한다”는 말로 『말과 사물』은 시작한다. 오히려 이 짧막한 문장은 『귀족의 딸들(Ménines)』의 화려한 묘사가 감추는 방법론적 서문에 의해 가려져 있다.

 

 

 

‘짧막한’은 ‘짤막한’의 오자(誤字)이다. 『귀족의 딸들』은 무엇인가?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Velázquez)의 그림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를 말한다. 이 그림은 ‘시녀들’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벨라스케스가 어린 공주와 시녀들, 그리고 공주의 놀이 상대였던 난쟁이와 개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귀족의 딸들’은 나오지 않는다. 번역자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제목을 엉뚱하게 적었다.

 

 

 

 

 

『라스 메니나스』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그림이다. 그림 속의 벨라스케스(그림 왼쪽에 붓을 들고 있는 남자) 자신은 어린 마르가리타(Margarita) 공주를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의 흥미로운 점은 거울 속의 펠리페 4세(Felipe Ⅳ) 부부의 모습이다. 실제로 스페인 국왕 부부는 그림 모델로 서고 있는 공주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 화가의 작업실을 찾았지만, 벨라스케스는 국왕 부부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비친 국왕 부부 모습(그림 중앙)을 그렸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 그림을 해석한다. 그는 이 그림이 “모든 것을 재현하려는 고전 시대의 욕망을 압축하여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면서, 이 그림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주체가 생략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푸코의 해석에 따르면 『라스 메니나스』는 어린 공주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이라 볼 수 없고, 공주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의 행위를 재현한 그림으로도 볼 수 없다.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2003)

*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읻다, 2016)

 

 

 

 

 

 

 

 

 

 

 

 

 

 

 

 

* 월터 보싱 《히에로니무스 보스》 (마로니에북스, 2007)

*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시공사, 2001)

 

 

 

 

126쪽에 있는 ‘제롬 보스(Jerome Bosch)『광인들의 배(바보 배)』를 그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를 프랑스어로 표기한 이름이다. 푸코는 보스가 그린 『광인들의 배』에 영감을 받아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13)를 쓰게 된다. 푸코는 이 책에서 『광인들의 배』가 그려진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광인은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었을 뿐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된 존재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인문주의자 작가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이 쓴 《바보배》(읻다, 2016)는 르네상스 시대 광인의 지위를 알 수 있는 문헌이다.

 

 

 

 

 

 

 

 

 

 

 

 

 

 

 

 

* 로제 마리 하겐 《피테르 브뢰헬》 (마로니에북스, 2007)

* [절판] 닐스 요켈 《브뢰겔》 (RHK, 2006)

* 월터 S. 기브슨 《브뢰겔》 (시공사, 2001)

 

 

 

보스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출신인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도 광인을 묘사한 그림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미셸 푸코, 죽음의 빛》의 번역자는 동명이인의 브뤼헐을 언급했다. 126쪽 역주에 피터르 브뤼헐이 아니라 그의 차남 얀 브뤼헐(Jan Bruegel)을 설명한 내용이 있다. 얀 브뤼헐은 아버지와 다르게 주로 정물화를 그렸으며, ‘꽃의 브뤼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브뤼헐’이라는 성을 가진 화가가 세 명(지옥, 광인 등을 주제로 기괴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린 ‘대’ 피터르 브뤼헐, 그의 장남 ‘소’ 피터르 브뤼헐, 차남 얀 브뤼헐)이나 있다 보니 번역자가 이름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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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8-09-1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파고 들고 싶은 사람이에요 ㅎ 푸코

cyrus 2018-09-12 06:55   좋아요 0 | URL
푸코가 독자에게 좌절감을 주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참고 책을 읽어보면 그의 분석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

2018-10-15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15 17:17   좋아요 0 | URL
어떤 음악인지 궁금하네요. 혹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인가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그림을 보는 건 즐거워요. ^^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 반철학사 3
미셀 옹프레 지음, 곽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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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자는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인간 개개인이 가진 덕()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는 정신적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법과 정치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 에피쿠로스도 인간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말하는 행복은 쾌락이었다. 그는 방종한 생활 같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금욕을 통한 정신적 쾌락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절제된 쾌락을 강조했지 육체적 쾌락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쾌락을 많이 추구하면 더 큰 쾌락을 양산하기 때문에 결국 정신적 고통을 얻게 된다고 보았다.

 

대부분 사람은 쾌락주의(hedonism)를 향락과 개인적 안위의 삶을 살라고 선동하는 철학으로 오해한다.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음란하고 불순한 사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에피쿠로스는 자연현상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통해 미신의 현혹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자연 현상을 신들의 행위로 인식하던 당대의 관념에 비추어 보면 매우 도발적인 주장이다. 이런 관점은 바로크 시대(Baroque period)의 자유사상가(libertins)로 이어진다.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은 서양 철학사에 잘 언급되지 않은 17세기 자유사상가 5명과 당대 자유사상가의 정신을 이어받은 유명한 철학자 1명을 소개한 책이다. 유명한 철학자 1은 세계가 곧 신이며 정신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했던 스피노자(Spinoza). 스피노자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 피에르 샤롱(Pierre Charron), 프랑수아 라 모트 르 베예(François de La Mothe Le Voyer), 샤를 드 생 테브르몽(Charles de Saint-Évremond), 피에르 가상디(Pierre Gassendi),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철학자이다. 사실 시라노는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의 희곡 덕분에 코가 큰 추남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시대를 앞서간 책을 쓴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무신론자, 유물론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철학사라는 작업을 통해 주류 중심 철학에 밀려나 잊힌 과거 사상가들을 호명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씌워진 케케묵은 편견까지 털어내어 그들이 살아온 삶과 사상을 보여준다.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반철학사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자유사상가는 인간의 개인 의지를 강조하여 기독교의 교조적인 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렇다 보니 자유사상가를 무신론자로 보는 입장이 생겼고, 그들의 도발적인 생각은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하여 배척받았다. 그런데 무신론자 옹프레는 자유사상가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피에르 샤롱과 라 모트 르 베예, 생 테브르몽은 신앙절대주의자 또는 이신론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영적인 힘, 천국과 지옥 같은 개념을 비판한 사상)였다. 가상디는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친 유신론자였다. 시라노와 스피노자는 범신론자였다. 17세기는 전쟁과 종교 분쟁으로 혼란이 거듭했던 시대였는데, 자유사상가들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군주제가 유지되면 사회적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바로크의 자유사상가 각자가 지향하는 관점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들은 당대 시대적 흐름을 타고 등장한 학자들이었다.

 

바로크는 불완전한 진주(완벽하게 둥글지 않은 진주)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이다. 바로크 문화는 파격, 불규칙, 변화를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바로크 시대의 자유사상가는 보편적인 진리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정형적인 기독교 정신을 의심한다. 성경 중심의 신앙을 실천하는 신학자나 기독교인 입장에선 자유사상가의 등장이 달갑지 않다. 그래서 그들을 과장되고, 기존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 인간으로 바라보면서 공격했다. 주류 학자들은 무신론과 거의 흡사한 자유사상가들의 생각을 거부했다. 자유사상가를 무신론자로 취급하면서 그들의 존재감은 서서히 잊히고, 서양 철학사에 그들의 이름조차 볼 수 없었다. 후세 사람들은 피에르 샤롱을 몽테뉴(Montaigne)수상록을 표절한 얼치기로 평가했고, 가상디가 과학적 관찰을 중요하게 생각한 천문학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은 인간을 위한 철학을 강조한다. 그들이 보는 신은 인간의 이성이나 육체에 개입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에 무관심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독교적 원죄의식에서 벗어나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사상가들은 기독교적 신이 중심이 되는 사회 한가운데서 인간이라면 직접 스스로 해야 할 질문들을 화두로 던졌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좀 더 인간답게살 수 있을까? 현재는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 하고자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쾌락이라고 말하지만, 자유사상가들이 지향하는 자유는 자발적 행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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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가면 책방 주인이 소중히 여기는 책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책들은 살 수가 없다. 오직 책방에서만 읽을 수 있다. 책방을 찾는 손님이 보기에는 그냥 언제든지 팔 수 있는 책이지만, 책을 가진 주인 입장에서는 아무에게나 주고 싶지 않은 보물이다. 그 마음,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읽다 익다책방 주인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글을 좋아한다. 그 분은 헤세가 쓴 작품뿐만 아니라 헤세 읽기에 도움이 되는 책도 모으고 있다. 물론 책 모으는 일에만 열중한 분은 아니다. 책방 주인이 수집한 헤세의 책은 독서모임을 하면서 읽은 것들이다. 내가 보기에 읽다 익다책방 주인은 건강한 애서가이지, 심각한 책 중독자는 아닌 것 같다.

    

 

 

 

 

 

 

 

 

 

 

 

 

 

 

 

* 톰 라비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돌베개, 2011)

*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

* 구스타브 플로베르 애서광 이야기(범우사, 2004)

    

 

 

자신을 책 중독자라고 밝힌 작가 톰 라비(Tom Raabe)는 책 중독을 깊은 수렁에 비유한다. 그가 말하는 책 중독자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장서광, 애서가, 수집가이다. 장서광은 책을 사고 또 사는 사람이다. 애서가는 책을 읽고 또 읽는 사람이다. 책의 겉모습에 열광하는 사람은 장서 광이고, 책의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애서가이다. 수집가는 책의 사소한 차이에 열광한다. 그들은 저자 친필 사인이 있는 초판본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수집가와 애서광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책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는 애서광은 남이 갖고 있지 않는 책을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1]. 19세기 초 미국 정치가 프랭클린 토머스(Franklin Thomas)는 도서수집가인 할아버지를 가장 고귀한 질병, 애서광에 푹 빠진 분이라고 표현했다. 애서광은 고귀한 광기(gentle madness)이다.

 

톰 라비는 옷보다 책을 사는 것을 좋아했다. 톰 라비가 친구에게 서점에 같이 가자고 말했을 때, 친구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옷을 샀던 날이 언제인지 기억나나?” 책 중독자는 기본적인 소비생활을 잊어버리거나 포기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이 잘 없다. 영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빌려 볼 수 있고, 사서 볼 수 있는 책이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책을 사거나 읽는 행위를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책 중독자는 심책(審冊)주의자이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주2].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 책 중독자들은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이다.

 

    

 

 

 

 

 

 

 

 

 

 

 

 

 

 

*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교양인, 2018)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문학동네, 2015)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민음사, 2008)

 

    

 

정희진폭식을 해도 괜찮고, ‘숙취도 없는 것이 바로 영화라고 했다[주3]. 책도 마찬가지다.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구(詩句)처럼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취할 수 있다. 취하라! 그대가 원하는 책에. 책에 취해도 취한 것 같지 않다. 책을 많이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자고 일어나면 책 중독자를 유혹하는 새 책들이 나오는데 지루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 알베르토 망겔 서재를 떠나보내며(더난출판사, 2018)

 

 

책 중독자의 정체를 알고 싶으면, 그가 소중히 여기는 애독서를 살펴보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알베르토 망겔(Alberto Manguel)서재를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했다[4]. 서재에 있는 모든 책은 책 중독자의 살덩어리요, 피다. , 책 중독자는 예수가 아니다. 모든 책 중독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책을 애지중지하게 여기는 심책주의자는 책을 빌려주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책 중독자 말고 책을 잘 빌려주는 마음씨 좋은 애서가를 만나길. 나처럼 어딘가 모자라고, 책밖에 모르고, 책을 빌려주지 않는 책 중독자, 심책주의자는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1] 플로베르, 이민정 옮김, 애서광 이야기, 범우사, 2004, pp. 62.

[2]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교양인, 2018, pp. 8.

[3] 같은 책, pp. 11.

[4] 알베르토 망겔, 이종인 옮김, 서재를 떠나보내며, 더난출판, 2018, p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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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9-06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이 맞다면 cyrus님의 예전 서재 사진보다 많이 정돈된 느낌입니다^^:)

cyrus 2018-09-07 19:33   좋아요 1 | URL
제가 사진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네요. 제 서재는 아니구요, ‘읽다 익다‘ 책방에 있는 책장이에요. 책방지기님이 헤세의 글을 좋아해서 사서 모은 책들을 책방에 꽂아둔거예요.. ^^

2018-09-07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7 19:38   좋아요 0 | URL
애서광은 책의 노예라고 하던데, 이 말 그대로 굿즈광도 굿즈의 노예네요.. ㅎㅎㅎ

대부분 외국의 술 도수는 소주보다 높던데 술 잘 마시는 외국인들은 소주를 물처럼 마실거예요. 특히 러시아인들은요. ^^

양철나무꾼 2018-09-07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겨울호랑이 말씀처럼 왜 이렇게 단출해졌죠?^^
님도 미니멀라이프들 격하게 실천하고 계신건 아니겠죠?

이제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도 살랑~ 불고 책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cyrus 2018-09-07 19:41   좋아요 0 | URL
‘읽다 익다‘ 책방지기님의 책이에요. 책방에 있는 책장을 제가 사진으로 찍은거예요. ㅎㅎㅎ

요즘은 지출이 많아서 책 구입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그래도 원하는 책을 만나면 반드시 구매합니다. ^^

2018-09-07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08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0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0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8-09-08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멈춤없이 흐르고 계시는군요. ㅎ 멋져요

cyrus 2018-09-09 20:4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저를 기억해주시고, 반가운 인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