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에 가면 책방 주인이 소중히 여기는 책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책들은 살 수가 없다. 오직 책방에서만 읽을 수 있다. 책방을 찾는 손님이 보기에는 그냥 언제든지 팔 수 있는 책이지만, 책을 가진 주인 입장에서는 아무에게나 주고 싶지 않은 ‘보물’이다. 그 마음,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읽다 익다’ 책방 주인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글을 좋아한다. 그 분은 헤세가 쓴 작품뿐만 아니라 헤세 읽기에 도움이 되는 책도 모으고 있다. 물론 책 모으는 일에만 열중한 분은 아니다. 책방 주인이 수집한 헤세의 책은 독서모임을 하면서 읽은 것들이다. 내가 보기에 ‘읽다 익다’ 책방 주인은 건강한 애서가이지, 심각한 ‘책 중독자’는 아닌 것 같다.
* 톰 라비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돌베개, 2011)
*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젠틀 매드니스》 (뜨인돌, 2006)
* 구스타브 플로베르 《애서광 이야기》 (범우사, 2004)
자신을 ‘책 중독자’라고 밝힌 작가 톰 라비(Tom Raabe)는 책 중독을 ‘깊은 수렁’에 비유한다. 그가 말하는 ‘책 중독자’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장서광, 애서가, 수집가이다. 장서광은 책을 사고 또 사는 사람이다. 애서가는 책을 읽고 또 읽는 사람이다. 책의 겉모습에 열광하는 사람은 장서 광이고, 책의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애서가이다. 수집가는 책의 사소한 차이에 열광한다. 그들은 저자 친필 사인이 있는 초판본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수집가와 ‘애서광’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책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는 애서광은 남이 갖고 있지 않는 책을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주1]. 19세기 초 미국 정치가 프랭클린 토머스(Franklin Thomas)는 도서수집가인 할아버지를 ‘가장 고귀한 질병, 애서광에 푹 빠진 분’이라고 표현했다. 애서광은 ‘고귀한 광기(gentle madness)’이다.
톰 라비는 옷보다 책을 사는 것을 좋아했다. 톰 라비가 친구에게 서점에 같이 가자고 말했을 때, 친구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옷을 샀던 날이 언제인지 기억나나?” 책 중독자는 기본적인 소비생활을 잊어버리거나 포기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이 잘 없다. 영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빌려 볼 수 있고, 사서 볼 수 있는 책이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책을 사거나 읽는 행위를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책 중독자는 ‘심책(審冊)주의자’이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주2].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 책 중독자들은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이다.
*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교양인, 2018)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문학동네, 2015)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민음사, 2008)
정희진은 ‘폭식’을 해도 괜찮고, ‘숙취’도 없는 것이 바로 ‘영화’라고 했다[주3]. 책도 마찬가지다.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구(詩句)처럼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취할 수 있다. 취하라! 그대가 원하는 책에. 책에 취해도 취한 것 같지 않다. 책을 많이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자고 일어나면 책 중독자를 유혹하는 새 책들이 나오는데 지루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 알베르토 망겔 《서재를 떠나보내며》 (더난출판사, 2018)
책 중독자의 정체를 알고 싶으면, 그가 소중히 여기는 애독서를 살펴보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알베르토 망겔(Alberto Manguel)은 서재를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했다[주4]. 서재에 있는 모든 책은 책 중독자의 살덩어리요, 피다. 단, 책 중독자는 예수가 아니다. 모든 책 중독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책을 애지중지하게 여기는 심책주의자는 책을 빌려주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책 중독자 말고 책을 잘 빌려주는 마음씨 좋은 애서가를 만나길. 나처럼 어딘가 모자라고, 책밖에 모르고, 책을 빌려주지 않는 책 중독자, 심책주의자는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주1] 플로베르, 이민정 옮김, 《애서광 이야기》, 범우사, 2004, pp. 62.
[주2]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교양인, 2018, pp. 8.
[주3] 같은 책, pp. 11.
[주4] 알베르토 망겔, 이종인 옮김, 《서재를 떠나보내며》, 더난출판, 2018, pp.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