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4월 4일

 

어젯밤에 영화관에 갔다. 모두 전쟁 영화였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가 지중해 근처에서 폭격을 당하는 장면이 가장 볼만했다. 크고 뚱뚱한 사내가 그를 추격하는 헬리콥터를 피해 헤엄쳐 도망가다가 사살되는 장면에 이르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18쪽)

 

윈스턴은 자신의 일기에서 잔인한 장면이 넘치는 전쟁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오늘날 세상은 폭력이나 잔인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더욱 더 차고 넘친다. 기술 발달 덕분에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재앙이나 참혹한 전쟁도 TV와 인터넷 그리고 SNS을 통해 바로 알 수 있다. 그런 이미지가 워낙 홍수를 이루다 보니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장면조차 스펙터클한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그것이 시신경을 통하여 심장을 두들길 때 우리는 관음증적인 가학적 쾌감의 유혹에 사로잡힌다. 남의 고통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틀림없이 윤리적 문제를 동반하는 일이지만, 때때로 그것은 자극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되어 쾌락의 썩은 내를 풍기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윤리의 의미는 무색해진다.

 

 

 

 

케빈 카터  「수단의 굶주리는 소녀」  1993년

 

 

타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은 온갖 시각적 이미지는 윤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고통에 대한 공감마저도 잊게 만든다. 남아공 출신의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인간의 윤리적 본능인 공감을 사진 작품과 맞바꿨다. 그 결과, 셔터를 누른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케빈 카터는 명예와 죽음을 동시에 안고 말았다.

 

수단의 식량센터에서 보급을 받기 위해 걷다가 지쳐 쓰러진 소녀, 그 뒤로 독수리가 호시탐탐 때를 기다리던 순간에 카터는 셔터를 눌렀고 케빈 카터는 이 사진으로 1994년에 보도사진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수상의 기쁨도 잠시, 그 순간의 상황에 셔터를 누를 게 아니라 독수리를 쫓았어야 했다는 여론의 비난 포격을 맞아야 했다. 카터는 사진을 촬영하고 난 후 당장 독수리를 내쫓았다고 항변했지만, 그의 내면은 종잡을 수 없는 혼란과 고통 속으로 사로잡혔다.

 

케빈 카터의 죽음은 시각적 이미지 생산과 윤리적 의무 사이의 딜레마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사례로 회자된다. 하지만 케빈 카터가 겪은 딜레마는 비단 세상 속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몸담고 있는 사람들만의 경험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사진을 찍어 일상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우리 또한 그 딜레마를 피할 수 없으며 이를 무시한다면 심각한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사진출처: 위키트리 (2014년 5월 22일 기사)

 

 

여성 응급구조사는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의 환부 상태를 직접 사진을 찍는다. 의료인 동료들끼리 공유하면서 공부하는 차원으로 그 사진을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다. 과연 응급구조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그녀의 행동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사진을 찍고 공개했다면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찍은 사진 속 환자의 환부 상태는 미미한 정도가 아니다.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할 정도로 두 눈으로 직접 보기 힘든 끔찍한 상태다. 당연히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응급구조사는 페이스북 사진에 대한 비난이 일파만파 커지게 되자, 해당 병원에 사과문을 올렸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정상적인 사람도 차마 보기 힘든 환자의 환부를 많이 목격했다. 그러한 환경이 타인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고 그저 하나의 구경거리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동료 응급구조사를 위해서, 그리고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공개 설정으로 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아무리 공부의 목적으로 사진을 찍었다하더라도 윤리에 어긋난 잘못된 행동이다.

 

사실 페이스북에는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고, 공유되고 있다. 일부러 ‘좋아요’ 수를 늘리기 위해서 자극적인 사진만 올리는 특정 페이스북 페이지도 있다. 영화배우 찰리 쉰이 우연히 페이스북에 접속하다가 신체의 일부가 절단된 사람의 사진을 보는 순간, ‘스너프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다. SNS에서 공유되는 끔찍하고 잔인한 사진들은 스너프 영화 못지않을 정도로 불쾌감을 느낄 정도다.

 

페이스북에서는 가끔 반려견이나 동물이 사람의 폭력에 의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은 사진이 오르기도 한다. 사진의 게시자는 동물학대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공개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합당한 목적을 위해 찍은 사진이라도 윤리적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 상처 입은 동물을 얼른 동물병원에 보내서 치료를 받는 것이 우선이다. 결국 이러한 사진 또한 일시적인 구경거리로 전략하고 만다.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일이 아닌 탓에 안도하며 그것을 보고, 즐기고, 연민을 갖는다. 그걸로 끝이다.

 

그러나 그걸로 부족하다. 고통 속의 타인과 우리가 같은 지구상에 살고 있다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고통과 연결돼 있을지 모른다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잔혹한 이미지 속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세계를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구 저 편에서 누군가 전쟁이나 기아, 고문 등 부당한 폭력에 짓밟히고 있음을 전하는 뉴스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내가 당한 일이 아니므로. 희생자에 대한 연민이나 가해자를 향한 분노가 솟구치는 것도 잠시, 우리는 곧 잊는다.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우리는 남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눌 힘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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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같은 가짜’ 찌라시, 괴담은 바늘구멍만 한 틈으로 파고드는 순간, 사회적 흉기로 돌변한다. 역시나 지난달에 발생한 세월 호 사고 이후 역시나 인터넷과 문자메시지로 괴담은 퍼져나갔다. 그것은 불행한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퍼지는 괴담은 사람 잡을 정도로 위력이 어마어마하다. 근거 없이 떠돌고 전해지는 루머와 괴담은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인해 뜬소문의 최초 유포자는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책임조차 물을 수 없다. 억울한 피해자만 속출할 뿐이다. 루머는 한 사람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사람들이 불안하거나 낯선 상황에 직면하면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그 불안을 덜어내려고 하는 행위를 자동으로 하게 된다. 또 문자메시지나 SNS로 괴담을 퍼뜨리는 행위 역시 불안한 생각을 남들과 공유하면서 불안감을 줄여보려는 데에서 비롯된다.

 

위기 때마다 괴담이 퍼지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대자연의 힘에 의해, 혹은 안보 환경 변화로 한 나라에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여지없이 또 괴담이 퍼져 나간다면 그 혼란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괴담과 루머에 휘말린 당사자는 극심한 상처를 받지만 ‘아니면 말고’로 끝나는 게 현실이다. 자극적인 사실이 진실이기를 기대하는 심리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도를 넘어선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 이러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항상적 불안감을 안고  산다. 괴담은 이런 불신과 불안을 먹고 자란다. 독자들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선사해 준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면 정신 건강에 해로운 나쁜 이야기 ‘괴담’을 싫어했을 것이다. 마르케스의 장편소설 『더러운 시간』은 나쁜 이야기에 휘말리는 사람들과 체제 유지를 위해 이를 악용하는 권력자의 비열한 모습을 통해 괴담이 평화로운 마을 하나를 점점 파괴시키고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더러운 시간』은 초기 단편집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와 같은 시기에 출판된 마르케스의 첫 장편소설이다. 1962년에 출간되었는데 무려 32년이나 지나서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앞표지에 적힌 카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더러운 시간』이 국내에 출간된 1994년은 마르케스와 그의 대표작『백년 동안의 고독』이 국내에 널리 알려진 시기다. 출판사는 『더러운 시간』을 마르케스의 최신작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마르케스의 약력에 관심을 가진다면 카피의 내용이 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1965년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1967년에 출간되었다. 아무래도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마르케스의 인기를 의식해서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최신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던 것 같다.

 

배경은 조용한 마을 마꼰도(이 작품에서는 마을의 이름이 잘 언급되지 않는다. 84쪽에 『백년 동안의 고독』의 배경인 마꼰도가 딱 한 번 언급될 뿐이다) 마을에 사는 세사르 몬떼로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클라리넷으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목자를 갑자기 권총으로 사살함으로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몬떼로가 자신의 부인과 목자가 동침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 분노한 나머지 그를 죽이고 만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목자의 클라리넷 연주가 자신의 아내를 위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오히려 목자는 이미 다른 여자가 약혼했고, 목자와 몬떼로의 아내가 동침을 했는지 실제로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충동적인 살인 사건으로만 치부했다. 그리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거짓 소문과 루머의 위력은 몬떼로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향해 점점 뻗쳐만 간다. 아침만 되면 말도 안 되는 루머가 적힌 전단지가 마을 사람들의 집 문 앞에 붙여져 있다. 괴상한 전단지가 점점 하나씩 문 앞에 붙여질수록 마을 사람들은 점점 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 또한 괴 전단지에 연루되어 있을까봐 불안감을 느낀다.

 

 

“전단 같은 것은 신빙성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믿게 되는 것이 더 무서운 거죠.” (『더러운 시간』중에서, 58~59쪽)

 

 

마을에서는 불신이 더욱 커져만 가는데 시장이라는 사람은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괴 전단지 사건보다는 마을을 자본화시키는데 관심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주시킬 정도로 마을에 넓은 도로를 건설하고, 자본(돈)의 힘과 위력을 이미 알고 있는 서커스단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시장은 이들과 결탁해서 서커스단원 중에서 미모가 빼어난 여자와 동침하기도 한다. 마르케스의 다른 소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도 시장은 자본을 상징하고, 비리와 부정을 일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시장의 성격과 대립하는 인물은 마꼰도에서 유일한 종교인이며 정신적 지주인 앙헬 신부뿐이다. 그는 자본과 대립하고 맞서는 ‘도덕’을 상징한다. 괴전단지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흉흉해진 마꼰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자신이 직접 시장에 찾아가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해결하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시장은 신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앙헬 신부는 괴 전단지로 인해 불안에 떠는 마을 사람들의 말 못하는 심정을 들어주면서 전단지의 근원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반면 시장은 전단지 사건을 발판 삼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통행금지령’이다.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외출을 할 수 없으며 시장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외출허가증이 있어야 가능하다. 밤에는 경찰과 협조한 시만 순찰대를 배치시킨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마꼰도는 그야말로 혼란으로 가득한 고립 상태가 되어버렸다. 보이지 않는 괴 전단지의 공포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더 이상 사람들 간에서 화해와 용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꼰도는 길고도 더러운 시간에 힘없이 지배당한다.

 

『더러운 시간』의 결론은 슬프다. 앙헬 신부는 괴 전단지 사건의 진짜 주범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믿었던 마을 사람마저 전단지 사건의 주범으로 의심받는 모습에 적잖은 혼란과 괴로움을 느낀다. 그는 평소처럼 교회로 돌아가 기도를 드리면서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드디어 마꼰도가 길고 긴 더러운 시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통행금지령은 계속되고, 여전히 전단지 사건의 주범을 찾기 위한 마을 사람들 간의 총성은 그치지 않는다.

 

『더러운 시간』은 자본과 권력의 유착 관계로 인해 정서적으로 피폐해지는 과정보다는 마을 사람들 전체에 공포를 떨게 만든 유언비어와 소문으로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이 와해되는 사회의 모습이 더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백년 동안의 고독』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앙헬 신부가 전단지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전개되었고, 시장의 권력을 유머스럽게 비꼬는 인물들 간의 대화는 있어서 마꼰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임에도 오히려 이야기가 무척 현실감이 있게 느껴진다. 괴 전단지에 불안에 떨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힘을 더욱 확장시켜 마을의 갈등을 더욱 가중시키는 권력자의 비열한 모습. 세월 호 사건 관련 악성 루머가 SNS에서 한창 떠돌아다닐 때 읽어서 그런지 악성 괴담에 두려워하는 사람과 이것을 악용해서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가 괴담과 루머가 만들어 낸 더러운 시간 속에서 갇혀있다. 과연 이 시간에서 언제 탈출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벗어나도 괴담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진짜든 가짜든지 간에 이야기의 매력에 쉽게 빠져버리는 습성이 있으니까. 허구와 진실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이야기는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쁜 이야기가 지배하는 순간, 그 시간은 갈등과 불신에 의해 더렵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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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들을 것, 볼 것, 읽을 것이 너무 많다.

2. 휴대폰을 꺼놓는 게 속 편하다.

3. 혼자 쇼핑하는 게 더 좋다.

4. 사람들과 오래 있었으면, 혼자서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5. 혼자 장시간 드라이빙하는 걸 즐긴다.

 


당신은 이 다섯 가지 유형 모두 다 평소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내성적인 사람에 가까울 수도 있다. 우연히 SNS에 보게 된 ‘내성적인 사람의 20가지 증거’라는 글에 5개만 추려봤다. (나머지 15가지 증거의 내용이 궁금한 분은 링크로 확인하면 된다.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53096)

 

여기 소개한 5개의 유형만 보면 전형적인 내성적인 사람의 특징이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것을 좋아한다. ‘내성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용하고, 소심하고, 겉으로 표현을 잘 하지 않는 특징일 것이다. 그런데 혼자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무조건 ‘내성적인 인간’의 증거라고 볼 수 있을까. 특히 4번 유형의 문항에서 혼자 ‘재충전’하는 시간이 내성적인 성격과 무관하다고 본다. 외성적인 사람도 가끔은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외성적인 사람이 되도록 강요받고 살아왔다. 외성적인 성격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 알고,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속도가 빠른 편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내성적인 자녀의 행동에 대해 걱정한다.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사람들은 학교에서, 조직에서, 사회에서 자칫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가 일쑤였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적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생각은 사회 깊숙하게 뿌리내렸다.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독한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외성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정작 세상을 바꾸는 건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수잔 케인은 역설한다. 세상을 깜짝 놀랄 변화를 일으킨 사람 중에는 의외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 많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화가 반 고흐, 간디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들은 깊은 통찰력과 창의성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격이 마냥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법이다. 내성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을 이해하고 극복해야 한다. 인생을 풍족하게 발전하기 위한 창조력으로 전환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외톨이형 은둔이 아닌 이상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평소에 자신이 하고 싶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유용한 시간이다. 이제는 혼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내성적인 사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없다. 가끔은 고독한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리 혼자 있어도 고독하지 않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에 있어서 절대로 없어는 안 될 정도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마트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이 착각하고, 소통하고 있다고 혼동하면서 혼자 고독할 기회를 가질 수가 없게 된다. 결국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고독하다. 김소월의 시에 나오는 꽃은 피고 진다. 인간도 꽃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서 죽는다. 결국 만물은 우주에 생겨났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고독하게 나고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고독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 흐름이 끊기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

 

 

 

 

 

 

사실 혼자 사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면 다 외롭기 마련이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무딘 사람이다. 물론 너무 외로움에 젖어 있어도 문제이지만 때로는 옆구리께를 스쳐가는 외로움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 정화, 자기 삶을 맑힐 수가 있다. 따라서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 (법정, 『산에는 꽃이 피네』‘홀로 있는 시간’ 중에서, 19쪽)

 

 

생전 법정 스님은 속세를 버리고 고독을 받아들임으로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분이다.  산에 저만치 혼자서 피는 꽃처럼 사람의 발길을 찾아볼 수 없는 강원도 산골에 있는 오두막에서 홀로 생활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홀로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혜택이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고독을 우리는 견딜 수 있을까. 인생은 결국 혼자서 가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외로운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스님처럼 완전한 홀로살이에 적응하지 않는 이상 마음을 짓누르는 고독감의 힘을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스님이 생각하는 고독한 삶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은둔과 고립의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고립은 출구가 없는 단절이기 때문이다.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도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57쪽)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낀다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무엇을 향해 행동할 것인지 성찰할 수 있는 ‘자기 관리’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살아있는 한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지속적인 삶의 모습이다. 고독을 두려워해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등으로 시간을 때운다면 죽을 때까지 우리 곁에 따라오는 고독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에 따라오는 그림자를 떼어내려면 햇빛이 없는 그늘에 가면 된다. 고독의 그늘에 적응한다면 고독의 그림자가 쫓아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번뿐인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 없다. 모자라고 비어 있는 인생의 여백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고독은 절망적인 의미가 아닌 인생이 완성되어 가는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내적 조건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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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4-05-2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글 보니 갑자기 위로가...ㅎㅎ
완벽히 내성적 사람인데 외양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교육 받아 왔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 이중적인 면들이 생기더라구요. 그것도 역시 고민거리 중에 하나죠.
'고독의 그늘에 적응한다면 고독의 그림자가 쫓아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 좋은 말이네요. 요새 드는 생각들과 많은 부분 일치해서 공감 버튼 꾹 누르고 갑니다~^^

cyrus 2014-05-24 00: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현맘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계시죠? ^^
저도 군대 가기 전만 해도 내성적인 성격인데 그 이후로 주변 친구들 잘 만다는 덕분인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나가는 편이에요, 그래도 역시 혼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정말 좋아요. 사람이 매일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없어요.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무엇을 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럴 때 안 외로우려면 고독을 피하지 말고 즐기는 것이 좋겠죠. 스마트폰 게임만 하고, 카톡한다고 해서 외로운 감정을 일시적으로 달랠 수 있을 뿐입니다.

풀스가든 2014-07-07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내성적 좀 심각하게 말하자면 폐쇄적인 성격인데요...
어두운것 보다는 밝은게 좋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각자 주어진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
선과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불가항력 아닐까요
 

 

 

 

예전에 '중2병'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중2병이란 사춘기 청소년이 흔히 겪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자신은 남과 다를 뿐 아니라 우월하다는 사고방식,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행동을 한다. 청소년을 가리키는 '사춘기' 또는 '질풍노도'와 유사한 의미로도 볼 수 있으나 보통은 그들을 얕잡거나 비꼬아 이르는 말로 쓰인다. 북한의 김정은도 '중2'이 무서워 남침을 못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다. 심지어 중2는 그 누구도 다루기 힘들다는 '초딩'보다 무섭다고 한다.

 

건드리면 폭발할 듯 불안한 존재인 대한민국의 열다섯 살들. 우리 사회는 그들을 ‘중2병’이라는 사회병리적 현상의 굴레에 가두었다. 누구나 다 자신을 떠받들어 주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러한 말이 그들만의 유행어가 아니라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 잡았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1598~1599년경

 

 

남보다 우월하다고 자뻑에 빠지는 모습은 흡사 자기애적 병리 현상인 나르시시즘과 유사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미모의 소년 나르키소스에 어원을 두고 있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따르고 연모하는 이들에게 늘 냉담했으며 아무에게도 사랑을 돌려주지 않았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바라보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마는데, 지하 세계에서도 스틱스 강가에서 수면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르키소스를 화가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는 점이다.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수면에 비친 환영을 현실보다도 더 생생하게 갈구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세계에 침잠한 나머지 타인이나 외부 세계에 무관심하기까지 한 이러한 태도는 후대에 와서 예술가의 초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술가들에게는 누구나 이러한 기질이 잠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렘브란트가 노년에 이르러 자화상에 매진한 데 대해서 일부 미술사가는 그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가 화가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에 보다 초점을 맞추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은 그 자신의 초상화에 다름 아니다. 중2병처럼 자기애가 심각한 정신 장애로 악화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0대의 불안한 심리를 ‘중2병’이라 부르지만 그 시기는 감정 과잉을 거쳐 감정 조절과 배려심을 배우는 자연스런 뇌 발달 과정이다.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정서적인 변화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면 아이가 힘들어진다.

 

이미 많은 청소년의 사춘기가 어른들의 조급함으로 왜곡되고 있다. 시대와 어른을 닮아 청소년들도 점점 더 냉소적이고, 거칠어졌다. 아이들을 끝없는 경쟁사회로 내몰면서 아이들의 소리 없는 절규에 귀 기울여주지 않은 어른들에게 잘못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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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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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선 그 모든 불의들을 그저 남의 일로 여기며 적당히 자신만의 안락한 성채를 쌓는 이들이 있을 터다. 알면서도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테다. 반대로 그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이들도 있다. 분노는 자기 요구의 실현을 부정 및 저지하는 것에 대한 저항 결과 생기는 정서이다. 자신보다 강자라 하더라도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하면 두려움은 크게 줄어 분노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 같은 집단적 분노는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부조리나 불평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에 분노로 표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 같은 악한 자들을 보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해가 지날수록 정상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크게 한 건씩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과거에 세상을 향한 분노는 아무나 터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분노를 삭이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는 유교적 사고가 만연해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분노하라’고 외치는 것이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분노하면 ‘너나 잘하라’는 까칠한 답변을 듣기 마련이다. 분발 없는 분노란 그저 불온에 지나지 않는 시정잡배의 것이라 교육받았다.

 

‘너나 잘하라’는 말에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 같다. 세상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사회와 국가는 사람이 만든 제도이지, 한없이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회 문제들을 해결해 세상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들리지 않고 읽히는 분노란 자기 위안이나 만족 이외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책은 분량이 짧아 단박에 읽을 수 있지만 저자가 던지는 화두는 묵직하다. 분노는 소중한 일이며 분노의 힘은 참여의 기회를 가져온다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의를 보고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오늘날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다. 스테판 에셀은 레지스탕스로 나치에 맞서 싸우며 청춘을 보냈다. 그는 하릴없이 스마트폰 화면에만 시선이 향하는 요즘 젊은이에게 과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불의의 사회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분노하라고 외친다. 이기적이고 거대하고 오만방자해진 금권, 극빈층과 부유층,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 등을 세상을 위협하는 불의로 언급하고 있다.

 

그가 분노하라고 외치는 프랑스 사회의 병폐들은 우리 사회의 병폐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여전히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 후퇴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 도덕적 해이를 넘어 불법과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관료제의 병폐가 그것이다. 또한 권력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일부 언론 등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이슈들에 대한 분노가 전국 도처에서 들끓고 있다. 그의 호소가 먼 땅에 사는 한국 사회의 가슴을 데우는 것을 보면 그것이 더 이상 프랑스만의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해 어떻게 분노할 지 가장 중요한 화두를 적절한 시기에 던져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지 3년째 되는 지금 이 순간도 에셀의 메시지는 유효하다. 분노가 필요할 시점이다.

 

현 정권과 유착된 일부 보수 언론이나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하는 방송에서는 우리 사회의 분노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좌파 세력의 선동질이라고 비난하고 평가 절하한다. 그들은 분노가 사회의 잠재된 폭력성을 유발시키지 않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기존 질서의 수호자들이나 그 질서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분노를 표출하는 대중에 대해 증오하고 적개심을 품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폭력을 부추기는 책이 아니다. 책 제목이 ‘분노하라’이지 ‘폭력하라’가 아니다. 분노는 주위의 환경이나 사람들에 대한 단순하고 원시적인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비폭력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그것을 바꿔나가는 변혁의 자세이다. 에셀이 말하는 분노란 저항을 품은 분노, 생산적인 분노, 창조적인 분노이다. 따라서 불의에 저항하는 분노란 불의의 대상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는 체제다. 권력에 대해 ‘아니요’라고 분명히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권력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참여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할이자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다. 평화롭게 저항하는 분노는 불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정당을 지지하고, 적극적인 투표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사회적 문제는 불쑥 우리 곁에 나타나고, 또 대중은 그 문제의 개선을 요구한다. 사회문제를 개선하는 데는 지식인층도 중요하지만 젊은이들로부터 나타나야 한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가 좀 더 나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자신에게 당면한 개인 문제에만 집착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은 ‘나 혼자로 되겠어?’, ‘일단 나 하나 잘 살고 보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장래 걱정하느라 대학생들은 안정적인 대기업이나 공무원시험에 집중하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보궐선거에 나가는 지역구 후보에 누가 나가고, 그들이 내건 공약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국회에서 싸우기만 하는 국회의원들의 무능함을 이유로 정치에 냉소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속박되어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사회는 서로 간의 경쟁을 부추긴다. 경쟁을 이렇게 강요하고 부추긴 세상 속에는 눈을 돌려야 할 곳이 얼마든지 많다. 인권과 생태, 환경, 빈부 격차 문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의 문제 등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 새로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생태, 환경 문제에 귀 기울이는 일 역시 많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사회의 가치를 확인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첫걸음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한순간의 성난 외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비판과 함께 체계화된 절차를 거쳐 우리 생활을 침식하는 불의를 끝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은 목적지향적이어야 한다.

 

분노는 개인의 안위를 떠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경우로 나아가야 한다. 즉, 자기를 위한, 자기 안에 갇힌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분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에 맞서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냉소적인 자세로 내 것만 챙기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참여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노라고 할 수 없다. 고통스럽게 인내하면서 무관심한 척 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화내며 끼어들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한다. 그래봐야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학습돼 점점 무관심의 늪에 빠져 죽어간다. 그 사이 세상은 악한 자들이 쥐고 흔든다. 결국 그 부조리의 칼은 우리의 삶을 향할 것이고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현실을 보면 분노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고 분노할 마음조차 억압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놓아버리면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정의가 영영 사라질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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