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고 싶은 그리운 이름 하나 없을까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바람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동안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가을이 오면 ‘편지를 쓰고 싶은 그리운 이름 하나 없을까’하고 감상적인 행동을 해보고 싶은데 시간을 먹어 갈수록 편지를 쓰고 싶은 간절한 이름 하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때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지인이 몇 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수 쓰지도 않겠지만. 요즘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저 멀리 있는 지인에게 간단한 인사나 안부 정도 할 수 있다. 오히려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편지를 보낸다면 받는 사람은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처럼 옛날에는 편지를 주고 받는 것 또한 당연한 건데 말이다. 그만큼 삭막해지고 마음의 물기가 말라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편지는 또한 공감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 누군가에는 정말 간절한 편지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있고 무엇인가 서로가 나눌 수 있는 공통점이나 발전이 있을 때 지속되게 만들 수 있다. 소통할 수 없는 편지는 독백이며 메아리와 같다. 각자 수녀원과 수도원에 들어가 살았던 중세의 연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으로써 그리움을 달래며 신앙에 정진했다고 전해진다. 엘로이즈가 처음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는 ‘무엇이든 나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편지를 써 보내 주세요’라고 보낸 편지였다.

 

 

 

 

 

 

 

 

 

 

 

 

 

 

 

 

 

 

 

 

 

 

 

 

 

 

 

시인 김남조는 '편지'라는 시에서 '한 구절을 다시 쓰면, 한 구절을 읽는 당신,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된 계기는 괴테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어 고민 하다가 우연히 끔찍한 사건(유부녀를 사랑한 남자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권총 자살)의 소식을 들었던 것에서 시작된다.

 

그는 거기서 소설의 실마리를 찾고 영감을 얻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3개월 만에 썼다. 그 소설을 샤를로테한테 편지와 함께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그토록 많은 독자들이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권총 자살 유행까지 만들어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서간체 소설이다. 처음, 괴테가 자기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함께 띄운 편지는 '잘 있어요. 사랑하는 로테, 당신에게 나와 많은 점에서 비슷한 친구 한 사람을 보내 드립니다. 당신이 그를 잘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이름은 베르테르라고 합니다'였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 되자 유럽은 물론 온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며 달려들었다. 어쩌면, 모든 문학 즉, 시, 소설 등은 누군가에게 띄우는 공개된 편지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간절한 이름 하나에게 닿기를 바라는 연서(戀書)이다.

 

 

 

 ♣ 가을에 도스또예프스끼를 읽어보자

 

소통 부재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그 누군가를 만나 마음과 영혼의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개된 연서인 것이다. 끊임없이 그 마음의 문을 노크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공감, 완전한 소통, 완전한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시와 소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도서관의 장서에 들어있는 책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편지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 먼지 쌓여 가면서 소통 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진정한 소통 부재의 현실 속에서 이 가을에 마음의 문을 조심스레 열며 소통의 통로를 마련해 주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연서를 띄우고 싶다. 열린 문과 닫힌 문 사이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이 가을에 누군가에게 보낸 연서(책)를 발견하고 가슴 떨리는 감동을 가지고 읽으며, 또 누군가에게 닿을 연서를 띄운다. 글을 쓴다. 책 즉, 연서는 고독한 영혼이 고독한 영혼을 향한 선물이며, 문을 두드림이며 진정한 소통에의 갈망이다.

 

이 가을에 기억의 창고에 아직도 남아 있는 그리운 이름 하나에게 편지를 띄워보자. 오래된 수첩 속에 빼곡하게 적힌 이름들 중에 소통의 이름 하나 찾아보자. 그리고 누군가에게 띄웠을, 혹시 당신에게 띄웠을지도 모르는 책 한권을 읽어보자.

 

혹시 나처럼 ‘편지를 쓰고 싶은 그리운 사람’ 하나 없다면 책을 읽음으로써 감성으로 마음을 살찌워보는 것도 좋다. 과학저널 ‘사이언스’ 최신호에는 ‘어떤 글’을 읽는 것이 지적 능력과 감성 능력, 주변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 등을 발달시키는데 좋은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여기서 말하는 ‘그 어떤 글’이 뭔지 아시는가. 그것은 바로 러시아 출신 소설가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와 극작가 안톤 체호프다.

 

 

 

 

 

 

 

 

 

 

 

 

 

 

 

 

심리학자들은 이번 연구를 위해 독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다른 글을 읽게 했다. 한쪽에는 체호프, 도스또예프스끼 등 유명작가의 작품을 읽게 했고, 다른 쪽은 최신 베스트셀러 등을 읽도록 했다. 이후 두 그룹은 얼굴 표정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할지를 예측하는 등의 테스트를 거쳤다. 지능·감성·사회관계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서다. 그랬더니 유명 문학작품을 읽은 그룹의 점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서로 읽은 작품의 특성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신작 베스트셀러는 대부분 작가가 흥미를 더하기 위해 작품 내용을 특정방향으로 통제해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는 특성이 있다. 반면에 유명 문학작품은 등장인물 고유의 특성에 따라 작품이 전개되는 다양성을 띠고 있어 실생활과 유사하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유명 문학작품을 읽은 독자는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작품에 몰입하게 돼 감성, 지성, 사회관계의 정도가 발달된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만 따져놓고 본다면 모든 ‘신작 베스트셀러’가 우리의 감성 범위를 제한시키는 건 아니다. 어차피 ‘베스트셀러’에도 도스또예프스끼에 꿀리지 않은 좋은 작품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먼지 앉은 채 당신의 손길이 닿기를 기다릴 지도 모르는 책을 찾아보자. 이 가을날에. 잠시 잊고 있었던 도스또예프스끼 전작 독서를 시작해볼까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커뮤니케이션은 선전에 조종된다

 

노엄 촘스키는 “영상을 통한 미국화는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무서운 효율성으로 무장한 채 우리 안으로 침투한다. 따라서 영화, TV 등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영상들에 대해 경계하는 법을 시급히 배워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

 

 

 

 

 

 

 

프로파간다', 즉 선전이라는 말은 요즘처럼 사람들의 생각을 인위적으로 조작한다는 부정적인 혐의를 받지 않았다. 1차 대전에서 일상적인 용어로 남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PR(Public Relations)의 아버지'로 알려진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선전이라는 용어에서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버리는 동시에 선전 전략과 활동을 긍정적으로 소개했다.

 

 

"영어에 '선전'만큼 그 의미가 심하게 왜곡된 단어는 없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전쟁 때 일어났다. 그 결과 이 단어는 음흉한 성격을 띠게 됐다. (중략) 본연의 의미에서 '선전'은 정직한 가문에서 태어나 명예로운 역사를 지닌, 그야말로 건전한 단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 『프로파간다』중에서)

 

 

선전이란 사람의 생각을 휘두르는 조작 방식이라는 의심을 많이 받지만, 버네이스는 "대중은 마음대로 주무르는 무정형의 덩어리가 아니다"며, 기업과 정부는 대중이 기꺼이 수용할 만한 방법을 통해 존재와 목적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버네이스의 주장은 어떤 용어나 행위가 아무리 가치중립적이더라도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손쉽게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의 복잡한 사회ㆍ경제구조에는 버네이스가 제시한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한' 선전 전략이 통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 우리가 의사소통을 힘들어하는 이유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 10명 중 3명이 가족 간에 대화를 하지 않고, 10명 중 8명이 직장에서 동료와 불화를 겪는 그야말로 각박하고 외로운 시대다. 상대방과 진심어린 마음을 주고받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맥 쌓기에 열중한다. 관리가 아닌 관계 맺기에 있어서는 서툴기만 하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저마다의 다른 개성과 색조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각자의 처한 상황과 고통에 대한 내성 그리고 타고난 천성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요즘처럼 물질적 풍요로움에만 의존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려는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생각 없이 무시하고 오히려 그것을 발판삼아 올라서기 위해서 애쓰는 인간들이 수 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과, 또한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그저 그렇게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남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일들을 저지른 사람들이 마지막 의지로 실행한 선택은 희망적이기 보다는 절망적인 쪽으로 기울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상처’다. 과연 상대방이 내 진심을 알아줄까, 나를 오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을까, 혹시 배신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과의 소통 부재와 스스로의 고립을 유발한다.

 

 

 

 

 ♣ 진정한 소통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결국,우리 사회가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현상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국민통합도, 조직과 사회의 건강성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잘못된 의사소통의 폐해에 시달린 우리 사회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있다고 본다. 비록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드라마 <굿 닥터>에 ‘늑대소녀 은옥이’가 나오는 에피소드를 보면 박시온(주원 분)은 ‘진정한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개들과 함께 자랐던 은옥이. 이 아이는 어른들의 잔인한 아동학대에 희생당한 친구다. 인간사회를 학습 받지 못하고 개들이 사는 세상에서 길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의 말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모든 행동은 개와 다름이 없다. 화가 나거나 경계를 하면 무조건 물어뜯고, 사람의 접근을 두려워하며, 인간의 소통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병실에서 길길이 날뛰는 은옥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를 진정시켜야 한다. 온몸이 피투성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도한(주상욱 분)은 강도 높은 진정제를 주사하라고 오더를 내린다. 조금은 잔인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며, 또한 치료 시간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김도한처럼 직업의식과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이 투철한 이가 있을까. 그는 의사가 가져야 할 완벽한 이성과 냉철함을 지니고 있다. 은옥이에게 그 어떤 해를 입혀서도 안 되며, 반드시 치료를 해서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그 누구 못지않다. 하지만 그에게는 없고 박시온에게만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김도한은 모르고 박시온은 알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시온은 모든 이를 경계하며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은옥에게 사람이 아닌 개로 다가간다. 마치 엄마개가 새끼개를 찾아가듯, 무릎을 꿇고 두 손, 두 발로 어슬렁어슬렁, 그리고 조심스럽게 은옥에게로 기어간다. 조금씩 은옥의 경계가 풀어지려 한다. 박시온이 내미는 손에 자신의 손을 얹으려 할 뻔도 했었다. 다른 레지던트들이 은옥의 사지를 잡아 진정제를 투여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이 짧으면서도 강렬했던 장면은 꽤 커다란 메시지를 던진다. ‘소통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소통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었다. 진정제 투여로 치료를 할 수 있었으니, 결론적으로 보면 김도한도 은옥과의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박시온은 소통의 결과가 아닌, 소통의 방법을 건드렸다. 상대방의 처지가 되는 것, 그 처지가 설사 낮고 추하며 형편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밑으로까지 내려가 보는 것, 그렇게 된 후에야 상대방과 진정한 소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박시온은 보여줬다.

 

‘커뮤니케이션’, 우리는 이 단어를 하루에도 수십 번 듣는다. TV 광고에서, 직장에서, 교육을 통해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심지어 우스개 농담 속에서도 듣게 되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소통을 하는 자세는 어떠한가. 이미 고착화된 생각을 쥔 채 상대방을 맞이하고 있지는 않은가. ‘절대’, ‘반드시’라는 말로 나의 생각을 견고히 하는 데 몰두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자세는 이기적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오고 감이 불가한 이기적인 소통만 낳게 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울 

 

                                    구석본 

 

 

그가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한 남자가 죽어 있다

죽은 남자가 웃는다 ‘웃음’이 죽었다

‘좋은 아침’이라고 죽는 남자가 말하자

‘좋은 아침’이 죽었다

남자는 ‘웃음’과 ‘좋은 아침’의 죽음을 보지 못한 채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향수를 뿌리고

로션을 가볍게 바르고는 다시 웃는다

웃음이 두 번 죽지만 남자는 여전히 보지 못한다

이번에는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이 핑그르 돌다가 죽어버린다

남자는 쌓이고 쌓인

그들의 죽음을, 남자의 죽음을, 오늘의 죽음을,

끝내 보지 못한 채 떠난다

남자가 떠난 후,

시취(尸臭)가 향수처럼 한동안 맴돌다가 사라지자

비로소 거울 속에는 복제된 어제의 풍경들이

속속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죽음은 일상에 미만해 있다. 일상의 죽음은 그렇게 거울 속 허상에게도 검은 손아귀를 내민 셈이다. 가히 ‘죽음의 죽음’이라 할 사건이 우리가 아침마다 마주하는 거울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웃음’이 죽고, ‘좋은 아침’도 죽었다. 그가 부는 휘파람마저 “핑그르 돌다가 죽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이 모든 죽음을 끝내 보지 못하고 떠난다. 그는 이 모든 죽음의 근원이자 이유를 알지 못하고 떠나지만, 우리는 그 답을 시의 결미에서 보게 된다. 이 모든 죽음은, 그러니까 모든 것이 “복제된 어제의 풍경들”이라는 점이 근본 이유이다. 즉, 실체는 이미 죽어 부재하며, 거울 속 같은 허상들만 속속 살아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매일 죽음처럼 반복하는 일상이라는 전언이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 연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꿈의 작업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꾼다. 이 꿈에 대한 해석은 많은 선각자들의 숙제 중 하나였다. 히포크라테스도 꿈을 통해 몸을 치료하고자 했으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와 의학자들도 꿈의 존재와 인식에 대해 수많은 고찰을 해왔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실체가 요원한 분야는 아직 도처에 산재되어 있다. 우리네 일상생활에서도 여러 분야와 현상들이 과학으로 완벽한 해석을 하기 어려운 바가 존재하는데, 꿈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한다.

 

인간이 꿈을 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면서도 꿈을 꾸는 것은 현실세계와의 통로를 열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외부자극에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잠든 사이에 온도나 촉각, 소리에 대한 자극이 꿈으로 만들어지는 이유도 이렇게 설명이 가능하다. 몸은 잠들었어도 지각신경은 살아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꿈을 해석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무의식적 활동에 이를 수 있는 왕도라고 봤다. 그렇다면 자는 동안 수없이 꾸게 되는 꿈은, 의식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평소에 원했던 소망이 환각적 경험 속에서 충족되는 과정의 편린들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꿈은 현실의 반대'라는 속설처럼, 꿈속에서 표현된 소망은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춘 채 늘 위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에 관한 기억은 '꿈의 내용'이란 것과 '꿈의 사고'라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실제 드러나는 꿈 속 세계에서 있었던 직접적이고 현시적인 꿈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그 드러난 세계 이면에 있는 보다 간접적이고 잠재적인 꿈이다. 다시 말하자면, '꿈의 내용'이 우리가 경험하거나 기억하는 것으로서의 꿈이라면, '꿈의 사고'는 꿈의 진정한 뜻과 의미를 파악하게 해주는 측면으로서의 꿈이다.

그렇게 '꿈의 내용'이 '꿈의 사고'로 전환되는 과정을 프로이트는 '꿈의 작업(Traumarbeit)'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압축', '전치', '표상'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세 과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꿈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일은 늘 현실 세계의 조건과 맥락을 초월한다. 수면 위로 드러나는 빙산이 전체 얼음 덩어리의 극히 작은 일부이듯이 실제 우리가 기억하는 꿈은 잠재적인 꿈보다 늘 작은 내용을 갖도록 축소된다(압축). 또한 실제의 소망은 그대로 나타나지 않고 다른 얼굴로 변장을 한다(전치). 그리고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고 떠올리던 것들은 꿈속에서 생생한 이미지로 치환되어 나타난다(표상). 이처럼 꿈이란 것을 꾸게 됨으로서 우리는 심리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정서를 우회적으로 충족시키거나, 망각하거나, 억압하거나, 퇴행시키는 것이다.

 


 ♣ 인생은 꿈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에서 나온 것이든, 혹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이라는 철학적 자세에서 나온 것이든 인간이 한때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게 혹시 꿈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갖는 것은 본능의 수준이 아닌가 싶다. 고래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의문에 빠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깊은 단계까지 가는 사람은 공연히 정말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꿈이 아니라면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 나만의 비정상이라든가 과도함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셰익스피어도 그의 작품 『뜻대로 하세요』에서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일 뿐이다”라며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다. 그는 『맥베스』에서도 “인생은 변하는 환영(幻影)일 뿐/ 짧은 순간 무대 위에 있다 사라지는/ 아무 뜻도 없는”이라고 설파한다. 더 나아가 “이 짧은 인생은 한순간의 잠일 뿐”이라고까지 발전한다.

 

셰익스피어와 비슷한 시기의 바로크 시대 문인들도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지 않으면 꿈에 비유했다. 스페인 작가 칼데론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이라는 희곡에서 “한순간의 꿈이 인생”이라고 했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극작가인 루드비히 홀베르는 <산(山)사람 에페>의 줄거리를 ‘인생은 꿈’이라는 모티브를 칼데론에게서 빌려왔다

 

에페란 사람이 도랑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남작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래서 꿈속에서 자기가 가난한 농부였을 뿐이라고 믿게 됐다. 다시 남작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사람들이 도랑 옆으로 옮겨 놓았다. 이제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에페는 자기가 남작의 침대에 누워 있던 것이 꿈일 거라고 생각한다.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하지만 인생을 꿈에 비유한 것은 훨씬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고대 인도나 중국에서부터다. 대표적인 것이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이다.

 

“어느 날 장주(莊周)는 꿈을 꾸었다.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가 되어 있었지만 문득 깨어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닌 장주였다. 그런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나 자신은 나비인데, 장주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장자(莊子)의 이름이 주(周)다. 장주(莊周)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 자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꿈속에서 장주는 유유자적하여 자기가 장주인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꿈을 깨자 장주로 돌아왔다. 장주는 자기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자기가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애매모호함’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경계가 애매하고 색깔이 분명하지 않아 유심히 관찰해도 이것이 저것인지, 저것이 이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뜻. 애매모호함의 이러한 특징은 장자의 호접몽에서 잘 나타난다.

 

장주와 나비, 나비와 장주가 또렷이 변별되면서 또한 변별할 수 없으니 지극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치는 변별을 양식으로 삼는 지식 너머에 있는 것이므로 아무리 큰 성인이라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호접몽 외에도 장자는 '제물론'에서 '큰 깸이 있은 뒤에야 현실이 꿈이었음을 안다(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고 했다. 꿈이라 인식되는 현실뿐만 아니라 꿈인 줄 아는 자신조차도 꿈속의 사람이므로 주관과 객관이 모두 큰 꿈인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장자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았던 서양철학자인 데카르트도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해답을 찾는 일이다. 그 해답을 처음으로 구한 것은 데카르트라 할 수 있다. 그조차도 처음에는 깨어 있는 상태와 잠든 상태를 확실히 구분하는 특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성찰>에서 “내가 지금 여기서 윗도리를 입고 화롯가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이 꿈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보증은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나온 것이다. 데카르트 이전의 많은 석학들이 바로 그 직전에서 철학적 고찰을 끝내고 말았지만 데카르트가 비로소 ‘생각하는 나’만은 틀림없는 ‘현실’이라는 답을 찾은 것이다.

 

 

 

 

  ‘다른 세계’라는 절망적인 환상

 

 

 

 

 

 

 

 

 

 

 

 

 

 

 

 

최근 자각몽(lucid dreaming, 自覺夢)이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자각몽이란 수면자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꿈을 꾸는 현상을 말한다. 꿈을 꾸면서 스스로 그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에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자각몽을 꾸는 비결이 있다. 꿈속에서 초현실적인 현상이나 비정상적인 사물을 발견하면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고 자문한다. 처음엔 그 순간 꿈에서 깨기 쉽지만, 연습을 계속하면 깨지 않고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 지각하지 못하고 꾸는 꿈의 내용에 비해 현실적이며 일관성이 있다. 또 꿈을 꾸는 동안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수면상태와 깨어있는 상태의 차이가 거의 없다. 아직까지 확실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루시드 드림』의 저자 스티븐 라버지는 드림을 통해 스트레스 해소, 슬럼프 극복, 악몽 극복 등 자기를 괴롭히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루시드 드림은 자신을 치유하고 성장할 수 있는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자각몽으로 현실 속의 고민을 해결하는 사례도 제시하고 있다. 골프황제 잭 니클라우스는 어느 날 갑자기 슬럼프에 빠졌다. 아무리 애써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공이 원하는 대로 잘 맞기에 살펴봤더니 자신이 평소와 다르게 클럽을 쥐고 있음을 알았다. 다음날 현실에서 꿈속의 방식대로 스윙을 해보니 공이 잘 맞아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의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원자량에 따라 원소를 분류하는 법을 발견하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 1869년 어느 날, 그 문제와 씨름하다 지쳐 쓰러져 잠에 든 그는 꿈속에서 어떤 표를 보게 됐다.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곧바로 꿈에서 본 그 표를 종이에 옮겨 적었다. 그 표 가운데 잘못된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늘자 국민일보는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자각몽 열풍이 불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젊은 층에서 자각몽이 대유행하는 것은 만화, 소설, 게임 등 개인적으로 현실 도피를 접할 수 있는 세대인 만큼 현실과 또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욕망 때문다. 이를 반증하듯, 최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자각몽’ 관련 글들이 속속들이 올라오며 현실과 다른 세계인 꿈에서나마 자유를 만끽하려는 젊은이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후기들 중에는 부작용에 가까운 것들도 있다. 한 자각몽 경험자는 “꿈 속에서 자해를 했는데 깨어난 후에도 몇 주일간 고통을 느꼈다. 악몽이 두려워 불면증이 생겼다”라고 적었다. 또 다른 자각몽 경험자는 “꿈속에서 내가 해를 입힌 사람이 자꾸 떠올라 괴롭다. 어린 시절 당했던 학교폭력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서 힘들다”라고 토로했다. 무리한 자각몽 시도로 피곤한 상태가 계속되거나, 자각몽에 몰입하다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현실을 인식하는 주체도 객체인 현실도 몽땅 한바탕 큰 꿈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가 모두 꿈속의 허망한 일이라면 눈앞에 엄연히 전개돼 시시각각 접하는 사물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물을 인식할 때 사물과 인식 주체인 자기 사이에 '나'란 관념 또는 이러저러한 상념들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무너지고 허망한 꿈도 사라진다. 이것이 큰 꿈을 깨 변별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유일한 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뉘르주는 팡타그뤼엘의 부하로서 사악하고 교활할 뿐만 아니라 남을 골탕 먹이기를 잘 하는 주정뱅이다. 그가 마침 배를 타고 여행 중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양을 잔뜩 실은 상인과 함께 배를 타게 되었다. 상인은 허름해 보이는 팡타그뤼엘의 행색을 보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다.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파뉘르주가 주인을 위한 복수를 꾸민다.

 

그리하여 좋은 말로 살살 구슬러 그 자가 데리고 가는 양들 가운데서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제일 큰 양 한 마리를 비싼 값으로 산다. 그런 후에 그 양을 집어 들어 냅다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린다. 양들에게는 크고 기운 센 우두머리 양을 따라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습성이 있었으므로 파뉘르주는 그런 습성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파뉘르주의 양떼' 같은 부화뇌동(附和雷同)의 무리를 의미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