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  「화가와 바느질하는 모델」 (발자크  『미지의 걸작』 삽화)  1927년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의 모델은 바느질을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주 멋진 초상화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이상하다. 사람의 형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다. 불규칙한 곡선과 직선이 실타래가 엉켜져 있듯이 그려져 있는데 얼핏 낙서처럼 보인다. (아니면 추상회화?) 평범한 자세를 취하는 모델에서 화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힘든걸까? 캔버스에 그려진 낙서는 창작을 위해 고민하는 화가의 심정을 연상시킨다. 그래도 화가의 눈빛은 사뭇 진지하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그린 오노레 드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에 수록된 삽화 중 하나이다. 판화 방식으로 제작된 삽화는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는 화가와 모델의 모습만 100여 점 정도 제작되었다. 삽화에 나오는 화가는 위대한 명작을 남기기 위해서 집요한 창작욕을 고집한 늙은 화가 프렌호퍼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생동감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무려 10년 동안이나 제작에 매달린다. 그는 다른 화가에 비해서 '완벽한 예술'을 지향한다. 그가 생각하는 '완벽한 예술'은 그림 속 모델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다른 화가의 그림을 지적하는 프렌호퍼의 모습을 통해 '완벽한 예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이 팔과 그림의 바탕 사이에서 여백을 느낄 수가 없네. 공간과 깊이가 결여되어 있어. 그렇지만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좋고, 여백의 감정이 정확히 지켜져 있네. 그러나 그토록 칭찬할 만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육체에 따뜻한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져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네." (발자크  '미지의 걸작' 중에서, 『사라진느』 84~85쪽)

 

그러나 그 누구도 프렌호퍼의 '완벽한 예술'이 온전하게 표현된 그림을 본 적이 없었다. 오직 그가 완벽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프렌호퍼는 소문으로만 알려진 그 미지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완벽한 걸작을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난 후에 공개하고 싶은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그림 공개를 꺼리게 만든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림 속 여인의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소유물로 남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면 아직 붓이 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생기는 아우라를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화가가 되기 위해 독학 중인 젊은 니콜라 푸생(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를 발자크가 덜 알려진 화가 지망생으로 설정했다)은 대가의 걸작이 어떤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프렌호퍼가 그렇게도 입이 닳도록 강조하던 완벽한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직접 느끼고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푸생은 프렌호퍼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안한다. 자신의 연인인 질레트를 모델로 한 그림을 제작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모델을 소개해준 보상 차원으로 미지의 걸작을 공개하는 것이다. 푸생의 연인 질레트는 빼어난 외모를 지녔기에 아무리 고집이 센 프렌호퍼도 푸생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프렌호퍼는 미지의 걸작이 보관된 자신의 아틀리에로 초대한다. 푸생은 프렌호퍼의 손에서 탄생된 수많은 작품들에 감탄했지만, 오히려 프렌호퍼는 그동안 제작된 작품들은 그저 습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제 드디어 미지의 걸작이 공개되는 순간. 그것은 특별하게 모포로 가려져 있었다. 프렌호퍼는 처음으로 자신이 집요하게 매달렸던 미지의 걸작을 공개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있어야 할 캔버스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푸생은 프렌호퍼에게 텅 비어 있는 캔버스라고 말했지만, 프렌호퍼는 완벽하고 생동감과 깊이감이 느껴지는 여자의 그림이라고 우긴다. 푸생은 오랜 창작 과정으로 인해 이성을 상실한 프렌호퍼의 모습을 보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미지의 걸작이 공개되고 난 후, 프렌호퍼는 아틀리에에 있는 모든 그림들을 불태워버리고 자살을 하고 만다.

 

특이하게도 피카소는 발자크의 소설에 수록되는 삽화를 '화가와 모델'의 모습만 제작했다. 비록 소설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여인의 모습이 아닌 낙서 같은 선만 그려 넣는 화가가 프렌호퍼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피카소는 삽화 이외에도 줄곧 '화가와 모델' 소재에 의한 그림을 많이 제작했다. 예술가에게 모델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모델은 위대한 작품을 낳게 만드는 어머니와 같다. 화가는 아름다운 모델의 모습을 캔버스에 영원히 담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화가의 길을 걷는 피카소 또한 '화가와 모델'의 관계에 강한 인상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도 프렌호퍼처럼 수많은 데생과 연작을 통해서 위대한 걸작을 하나 남기고 싶은 열망을 지녔을 것이다.

 

발자크는 프렌호퍼의 예술적 광기와 죽음을 통해 완벽한 예술에 대한 집착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프렌호퍼를 '악마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광기로 인해 자멸하는 실패한 화가로 묘사한다. 그러나 피카소의 데생에 나오는 젊게 그려진 프렌호퍼는 인간적인 화가의 모습이다. 비록 그가 그린 그림은 형태를 알 수 없는 낙서에 불과하지만, 젊은 프렌호퍼의 시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피카소가 자신의 연인들인 프랑수아즈와 자클린 등의 모습을 수많은 그림과 데생, 판화로 남겼듯이 말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완벽한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화가의 숙명, 즉 창작의 고통을 고독한 열정으로 부각시켰다. 회화를 보는 소설가와 화가의 시점에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푸생은 프렌호퍼의 예술적 광기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피카소는 충분히 공감했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창작의 산고 끝에 나온 작품 하나가 냉담한 평가를 받는다면 화가 입장에서는 맥이 풀리고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실망하게 된다. 그러기에 수많은 습작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최종적인 작품이 완성된다. 작은 데생에서 습작을 거쳐 완성하는데 걸리는 세월이 족히 일 년이 넘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화가 입장에서는 창작은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소설 『깊이에의 강요』에서도 예술에서 말하는 '깊이'에 사로잡혀 비관적인 최후를 맞는 화가가 등장한다. 화가는 만인이 극찬하는 자신의 그림에 깊이가 없다고 했던 한 평론에 신경이 쓰인다. 그녀는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하다가 대체 어떤 것이 깊이가 있는 그림인지 알 수가 없어 비관하다 목숨을 끊는다. 그녀가 죽고 난 후, 그 평론가는 관점을 확 바꿔 그녀의 그림에서 깊이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백남준의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의 의미가 새삼 와 닿는 순간이다. 우리는 때론 자신도 모르는 말을 지껄이기도 하고, 능력 밖의 일을 우연하게 성취하기도 하지만 마치 원래부터 본인의 깜냥인 양, 어깨에 힘을 주고 객기를 부린다. 지적인 허영심과 교만에 취한 우리들에게 쥐스킨트는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쥐스킨트도 예술가를 바라보는 발자크의 시선과 유사하다. 프렌호퍼도 작품의 '깊이'를 아는 척 행동했으나 결국은 그것을 예술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자신이 만든 덫에 걸리고 만 셈이다. 쥐스킨트는 화가뿐만 아니라 그들의 예술을 평가하고 소개하는 평론가마저도 '깊이'라는 의미를 모르는 무지한 직업으로 봤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극단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화가의 삶에서 창작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예술가의 고독과 연민이 느껴진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의 죽음 뒤에 비로소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창작의 고통을 처절하게 느끼다가 세상을 떠난 예술가들은 이 말에 씁쓸하게 느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겪었던 창작의 산고보다는 오랜 진통 끝에 나온 작품의 결과물만 기억하고 있다. 억 소리가 날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된 반 고흐의 작품은 처음에 제작될 당시에는 그 누구도 구입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생전에 고흐는 수천 점이나 남긴 그림들 중에 단 한 점만 팔았을 정도로 실패한 화가에 불과했다. 동생 테오와 몇 몇 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고흐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어설픈 수준의 그림으로만 생각했다. 끊임없이 불타오르게 만드는 창작 욕구는 고흐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화가로서의 자의식과 고집으로 버티면서 작품을 완성해나갔다. 작품이 하나씩 완성될수록 고흐의 정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그래서 외로운 고흐는 미친 사람 소리를 들을 수밖에. 생전에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내내 고통에 겨워 외치는 고흐의 절규를 들어 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림이 재벌을 위한 값비싼 상품이 된 요즘, 그림이 탄생되기까지 화가가 겪는 심정은 ‘0’이 무수히 많은 가격표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다.  예술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고통 받는다. 이제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언에 ‘고통도 길다’라는 말도 추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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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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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에도 인간처럼 수명이 있을까? 4년 전에 컴퓨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한동안 인터넷을 접속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고장 난 컴퓨터는 내가 고등학생 때 구입한 것이라서 거의 4년째 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컴퓨터의 성능은 점점 떨어지고, 인터넷 접속 속도도 예전만큼 빠르지 않았다. A/S를 통해 컴퓨터를 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컴퓨터를 수리를 담당하는 사람은 아무리 고쳐 써도 오래 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컴퓨터 본체를 교체할 것을 권했다. 컴퓨터 본체는 오래 사용되고 나면 기계 내부에서 열이 발생하는데 컴퓨터 성능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인간도 일을 하면 쉬는 시간이 있어야하듯이 컴퓨터를 장시간 사용하면 잠시 전원을 꺼서 본체에 달아오른 열을 식혀줘야 한다. 컴퓨터 한 번 켜면 기본 5시간 이상을 썼으니 컴퓨터 본체가 지칠 만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동안 컴퓨터가 5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고장 나는 경우가 많았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인터넷 서핑에 문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들였을 뿐인데 컴퓨터의 수명은 왜 짧은 것일까? 컴퓨터 한 번 고장 나면 일단 가족으로부터 원망의 눈초리를 받아야 한다. 집에서 내가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친구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을 비교한다면 나는 훨씬 적은 편에 속한다고 확신한다. 도대체 이상하게 내 컴퓨터만 수명이 짧은 걸까. 한편으로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리 담당자에게 컴퓨터 본체의 수명을 어느 정도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컴퓨터를 장시간 켜지 않고, 잠깐 전원을 꺼두는 방식으로 사용하면 본체의 수명이 보통 5년이라고 했다. 하루에 컴퓨터를 5시간동안 켜는 것이나 그 이상 시간을 켜나 장시간동안 전원이 켜져 있으면 컴퓨터 본체의 사용 수명은 줄어들게 된다.

 

결국 새 컴퓨터로 장만했고, 어느덧 4년째 사용하고 있다. 이제는 오래 사용했다 싶으면 컴퓨터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컴퓨터를 노예처럼 부려 먹고, 절대로 쉬지 못하게 만드는 이 못된 습성을 고치지 못해서 지금의 컴퓨터 역시 상태가 영 시원찮다. 정작 고쳐야 할 사람은 노쇠한 컴퓨터의 상태를 알면서도 험하게 다루고 있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은 5년 이상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나마 오래 사용한 가전제품이라면 냉장고를 10년 넘어서 사용한 것이 고작이다. 텔레비전, 스마트폰, 컴퓨터는 하루 자고 나면 새로운 성능이 추가되고 멋진 디자인으로 출시되어서 고장이 나면 새로운 것으로 교체한다. 특히 스마트폰은 통화 상태가 불량이거나 인터넷 접속 속도가 느려졌다 싶을 때 마침 최신 스마트폰이 등장하여 우리를 유혹한다. 위약금 약정 기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돈을 지불해서 최신 스마트폰을 사고 만다.

 

<홈 퍼니싱스 데일리>라는 잡지가 가장 쉽게 고장이 나는 가전제품을 조사해서 목록으로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소개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최근에 실시한 조사는 아닌 것은 분명하다. 가전제품이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화 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1. 세탁기
2. 냉장고
3. 빨래 건조기
4. 텔레비전
5. 건조 겸용 세탁기
6. 레인지와 오븐
7. 에어컨
8. 냉동고

 

 

인류의 수명이 원래 50세 이하였다가 시대가 좋아지고, 의학기술이 발달되면서 수명이 점점 늘어졌다. 마찬가지로 이 8가지 가전제품도 초기에 보급되던 것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나고, 쉽게 고장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수명도 길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구매한 제품을 10년 이상 쓸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고장이 나서 바꿀 때가 되면 지금의 제품보다 성능이 좋은 제품들이 출시되기 때문이다. 제품을 오래 사용하면 새 제품으로 교체하는데 드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지만, 아무리 제품을 조심히 사용한다한들 제품의 수명을 연장할 수 없다.

 

만약에 제품의 수명이 많아진다면 제품을 만든 기업이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다. 기업은 제품을 생산하여 끊임없이 수익을 내야한다. 상품을 많이 팔아야 이득을 얻는다. 제품이 오래가는 건전지처럼 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려는 구매자의 수요가 줄어들게 된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제품이 나오더라도 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교체할 필요가 없다. 구매자의 지갑을 열게 만들이 위해서 기업은 신상을 알리는 광고를 만든다. 광고가 대중의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홍보 수단이다. 

 

탈성장 이론가인 세르주 라투슈는 가전제품이 쉽게 고장이 나게 만드는 주범을 제품을 사용하는 우리 구매자가 아닌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라고 말한다. 기업들이 상품을 설계할 때부터 일부러 수명을 줄이거나 결함을 집어넣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품의 교체 주기를 앞당겨 소비자들은 끝없이 상품을 다시 구매하게 된다.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해서 새 제품을 구입하게 하려고 일부러 상품의 수명을 단축하는 것을 '계획적 진부화'라고 한다.

 

이미 ‘계획적 진부화’는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보편적인 경향이 되었다. 물신만능주의 는 우리로 하여금 상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일회용품, 식료품의 유통기한, 수명이 2~3년에 불과한 스마트폰은 대표적인 계획적 진부화의 산물이다. 우리는새 물건을 사고 '득템'했다며 즐거워하지만, 이는 끊임없이 이전 물건의 가치를 소멸시키고 새 물건을 사도록 하는 낭비사회의 일면일 뿐이다. 새 물건도 언젠가는 낡고 성능이 저하된 물건이 된다. 우리는 또 '신상'에 관심을 가지고 고쳐서 사용하기보다는 무엇을 살지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집결한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의 가장 좋은 자리에 올라앉은 '상품'을 우러르며 소비자는 살아있음을 만끽한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이러한 소비왕국의 탄생을 놓고 "소비가 사람들을 한 무리로 느끼게 만든다"고 말했다. 재화를 계속 생산해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숙명이다. 마치 자본주의의 태엽을 감아주기 위해 사력을 다하듯 이 땅의 소비자들은 밤낮으로 상품 소비에 나선다.

 

하지만 소비를 부추기는 계획적 진부화는 자원 낭비와 쓰레기 범람이라는 중대한 생태적 문제를 야기한다. 무제한적으로 부추겨진 소비는 오염과 쓰레기를 낳고, 지구 생태계를 파괴시킨다. 새로운 차원의 인간 존엄성 훼손도 발생했다. 인간과 자연이 뒷전으로 물러난 채 물질이 주체의 자리에 올라선 낭비사회를 경계하는 라투슈의 생각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을 연상시킨다. 자본주의의 무제한적인 생산 욕구와 새로운 상품을 갈구하는 소비자의 소비 욕구가 맞물려, 모든 상품은 사실 버려지기 위해 생산되고 있다.
 
성장 중독에 빠진 낭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라투슈의 대안은 ‘탈성장’이다. 제품을 지속적으로 사용할수록 고치거나 재활용으로 대체해 성장 없는 번영과 검소한 풍요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성장’이라고 해서 이미 길들여진 성장의 편리함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생태 발자국 줄이기, 환경을 파괴하는 상품을 멀리하고 기술적 금욕을 실천하는 대안은 이미 탈성장론자들에 의해 언급된 내용이라서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계획적 진부화’가 고착된 이 진부한 세상을 개선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소비 패턴이 계획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 위에 있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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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음악가는 어떻게 고독해지는가

 

 

 

 

 

 

 

 

 

 

 

 

 

 

 

 

백아는 거문고의 달인이었다. 그는 유독 친구인 종자기에게 연주를 들려주는 것을 즐겼다. 어느 날 종자기를 곁에 두고 금을 연주하며 속으로는 높은 산을 생각하고 있는데, 음악을 듣고 있던 종자기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태산처럼 높구나!" 이에 백아가 이번에는 넓은 강를 그리며 금을 타니 종자기가 "황하처럼 넓구나!" 라고 맞장구쳤다. 백아의 거문고 연주는 가장 높은 태산과 가장 넓은 황하에 비견될 만큼 훌륭하다고 칭찬한 것이다. 종자기는 백아가 무엇을 노래할는지를 잘 알고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진정으로 백아의 음악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벗이었다.

 

그러나 종자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백아는 너무 슬프고 절망한 나머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거문고의 줄을 끊어 버리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친구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이가 세상에 없으니, 더 이상 계속할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와 종지기의 아름답고 슬픈 우정을 의미한다. 눈빛만 보아도 마음을 읽어내고 영혼을 읽어내는 사람, 자신을 잘 알고 자신에게 믿음과 존중을 주는 그런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타인으로부터 애정과 인정을 받으려는 뿌리 깊은 욕구가 있다. 이러한 욕구는 원초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음악가들은 일반인보다 욕구가 강할 것이다.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악보를 찢고 버려야 하고, 엄청난 시간과 노력 끝에 만든 음악이 대중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음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쇤베르크는 이런 에세이를 썼겠는가. ‘어떻게 사람은 고독해지는가’ 제목에서 쇤베르크의 심정이 느껴진다. 쇤베르크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형식으로 무조음악, 12조 기법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만들었다. 고전적 음악에 익숙해진 대중으로부터 냉담한 외면을 받아야했다. 자신의 음악을 환호해주지 않으니 고독해질 수밖에. 쇤베르크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의 음악은 난해한 것이 아니라 연주가 잘못된 것이다.”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 세상을 디스(diss)하는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Scene #2  콘트라베이스는 유일한 자존심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의 주인공 베이스주자 역시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음악가이다. 베이스는 외로운 악기다. 뒤에서 묵묵히 저음을 만들어 주는 게 주 역할이다. 현악기 가운데 가장 낮은 소리를 내는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자리한다. 높은 의자에 앉아야만 연주가 가능한 큰 덩치와 굵직한 저음으로 현악기가 가지는 여성스러운 이미지에 두드러진 남성성을 얹어놓은 콘트라베이스는 그런 특징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음질은 어둡고 분명치가 않지만 앙상블에서는 묵직한 하모니를 형성하는 불가결한 음원이다. 음악연주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는커녕 관객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하는 연주자의 기분은 어떨까.

 

콘트라베이스는 ‘우울’ 그 자체다. 어쩔 수 없이 베이스주자가 된 주인공은 자신의 분신인 베이스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경멸한다. 주인공은 자신과 악기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시한 존재임을 스스로 잘 안다. 무대 위에서는 스타의 들러리이며 무대 아래에서도 마찬가지 인생임을 모를 리 없다.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손이 부르트도록 연주하지만 관객의 박수갈채에서는 늘 소외된다. 그늘에 가려진 그는 메조소프라노 성악가 사라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가 알아차리기엔 그의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

 

게다가 사라는 유명한 테너가수의 식사초대를 받아 값비싼 생선요리를 먹으러 다니는 도도한 여자. 이제 그는 자신의 존재와 사랑을 그녀에게 알리기 위한 고육지책을 마련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지켜보는 연주무대에서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는 것이다. 모노드라마는 여기서 끝난다. 슈베르트가 제2 바이올린 대신 콘트라베이스를 넣어 저음부를 강화한 피아노5중주 ‘송어’ 1악장이 흐른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은 쓸쓸하게 퇴장하지만 슈베르트의 ‘송어’을 선곡함으로써 콘트라베이스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자부심이 여전하다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생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콘트라베이스와 함께했던 음악은 그의 유일한 자존심이자 삶의 일부이다. 그는 아직 고독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보여줘야 한다. 분신이나 다름없는 콘트라베이스를 완전히 포기한다면 그는 실패한 음악가 아니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말 것이다.

 

 


 Scene #3  음악으로 삶의 고통을 치유하다  

 

 

 

 

 

 

 

 

 

 

 

 

 

 

 

 

 

쇤베르크와 콘트라베이스 주자보다 더 불운한 음악가 한 명을 소개해본다. 헤르만 헤세의 『게르트루트』의 주인공 쿤이다. 어린 시절, 불행한 사고를 겪어 한쪽 다리가 불편한 불구의 몸이 되고 만다. 게다가 처음으로 짝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고백을 해보지만 씁쓸하게 실패한다. 쿤은 온갖 상처와 배신을 겪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좋아했고, 음악으로 고독을 달랜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다. 무명 작곡가였던 쿤은 우연히 당시 최고의 명가수 하인리히 무오트의 눈에 띄게 되어 촉망받는 작곡가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음악 연주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주변에 새로운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그러나 쿤은 이러한 삶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한 음악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쿤에게 음악은 불행한 자신을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지 않게 만들고 기쁨과 행복을 선사해준 유일한 친구였다. 더욱이 자신의 음악을 높이 평가해주는 무오트의 성격이 못마땅했다. 무오트는 말 그대로 음악을 직업 삼아 명예를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음악은 그저 단지 자신의 이름을 드높여주고, 주변에 수많은 여자들을 오게 만드는 화려한 선율일 뿐이다. 음악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쿤의 예술과 상반되는 예술가이다. 그래도 쿤은 여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음악으로 인정을 받는 무오트를 부러워한다. 심지어 그의 삶을 동경하기도 한다. 사실 무오트가 자신이 만든 가곡과 오페라를 부르지 않았다면, 여전히 무명 음악가로 활동했을 것이다. 얄궂게도 무오트는 쿤의 음악적 단점과 결함을 극복해줄 수 있고, 그의 음악을 인정해준 유일한 지음(知音)이다. 

 

쿤이 음악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잊고 위안을 얻으려는 예술가형이라면 무오트는 음악으로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는 예술가였다. 여자들과의 관계가 복잡하고, 어디로 튈지 모를 정도로 불 같이 화내는 성격이 인간으로서의 무오트에게 흠은 있었지만, 가수(음악가)로서의 무오트는 완벽함 그 자체였다. 무오트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불행한 운명은 계속 쿤의 발목을 잡기만 한다.

 

쿤은 소프라노를 담당하는 게르트루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를 위한 노래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노래는 게르트루트를 향한 세레나데가 될 수 없었다. 쿤이 만든 오페라를 무오트와 게르트루트가 남녀 주인공으로 배역을 맡아 함께 부르기로 한 것이다. 세레나데의 주인공이 엉뚱하게 무오트가 끼어든 셈이다. 결국 게르트루트는 무오트와 결혼을 하고 만다. 그녀는 성공의 정점에 오른 무오트와의 결혼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쿤은 또 한 번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미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고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쿤은 음악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잊고, 작곡가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강한 자가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것이 강한 자’라는 말이 있듯이 고독과 고통을 오랫동안 음악으로 승화시킨 쿤이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 무오트와 게르트루트는 파혼을 맞게 되고, 첫 번째 결혼 생활의 실패에 크게 낙담한 무오트는 자살한다. 게르트루트가 떠나간 빈자리에 한꺼번에 밀려오는 고독과 외로움을 무오트는 견디지 못했다. 무오트는 애초에 외로움을 잘 타는 인물이다. 인기 가수로서의 삶 뒤에는 어두운 고독의 그림자가 늘 따라왔지만, 쿤을 제외한 무오트와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쿤은 고독의 그림자를 자신의 곁에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했다. 고독한 삶을 위로해주는 음악의 힘을 인정하는 것은 곧 무오트 자신 또한 고독을 느끼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같다. 결국 무오트는 음악으로서 고독을 이겨내는 방법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Scene #4  “백아여, 그 거문고 줄을 끊지 말게”

 

외로움에는 동전처럼 양면성이 있다. 인간은 홀로 걸어가야 하는 고독한 존재다. 인생은 홀로 왔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홀로 세상을 떠나간다. 외로움은 운명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고독은 새로운 창조와 작품을 완성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백아가 종자기에 세상을 떠난 후에 거문고 연주를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친구를 애도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친구의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우리는 그런 백아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우정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백아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그의 극단적인 행동이 아쉽기만 하다.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친구의 공백이 클수록 외로움과 마음의 상처 또한 클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종자기가 과연 자신 때문에 거문고를 끊어버린 백아의 행동을 좋아할까. “백아여, 그 거문고 줄을 끊지 말게”라고 말하면서 재능 있는 친구의 행동에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진정한 지음이라면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가 멈추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위대한 음악가, 문학가, 미술가, 학자, 종교인들은 공통적으로 오랜 고독의 시간 속에서 그들의 창조적 업적과 자기 성찰을 이루어 낸 사람들이 많다. 외로움은 고립도 아니고 소외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다. 외로움은 새로운 창조와 자기완성을 위한 또 하나의 성찰이다. 외롭다고 슬퍼하지 말고 외로움은 즐겨야 한다. 특히 음악하는 사람들은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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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낀 바다 위의 나그네」  1818년경

 

 

격랑의 파도를 눈앞에 두고 가파르게 솟은 바위 위에 한 남자가 뒷모습을 보이며 서있다. 가없는 공간 속에서 절대 고독과 대면하고 있는 듯하다. 나그네는 자신의 발 아래 펼쳐진 멋진 광경을 즐기고 있지 않다. 자연은 그동안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개발하여 이용하는 대상이 되었다. 안개가 자욱하고 파도가 심하게 치고 있지만 나그네의 자세는 마치 발 아래 펼쳐진 세상을 점령이라도 한 듯이 당당하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여 자연을 응시하는 장면은 자연을 바라보는 동양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고사관수도(古士觀水圖)」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강희안(추정)  「고사관수도」 

 

조선시대 초기에 살았던 강희안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고사관수도」는 늙은 선비가 숲 속 작은 개울가에 웅크리고 앉아 물끄러미 물속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은 듯한 장면을 묘사 한 것이다. 앞서 「안개 낀 바다 위의 나그네」에서 그림의 전면 중앙에 자리 잡고 당당히 서서 자연을 관찰하는 것에 비하면 한쪽에 웅크린 선비는 참 보잘것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늙은 선비는 바위에 자신의 몸을 기대어 턱을 괴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 그림을 가만히 들려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마가 벗겨진 선비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표정이 바위 밑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해맑다. 고요한 분위기의 그림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故 오주석 선생은 고요하지만 작품 속의 모든 것이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노자가 말한 바 최고의 선이라는 물과,내면에 사납고 크나큰 의욕을 숨겨놓은 돌의 심오함을 아우르면서 '둔하고 어리석은 듯 물러나 고요하게 지내는 웅숭깊은 하루'를 웅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풍경 속에, 선비의 미소만이 은은하게 퍼진다. 세속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하며 내면의 평화를 찾은 듯하다. 물은 거듭남을 상징한다. 물로 세수를 하고 탁족을 하듯이 잔잔한 물을 보며 마음의 때를 씻는다. 물은 관조의 수단이다

 

방안의 불빛이 차고 넘치듯, 내면의 충일감이 미소로 번진다. 물아일체의 경지다. 자연과 나는 하나가 된다. 서양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물아일체'라는 말이다. 서양의 자연관은 인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과거에 자연을 두려워하고 숭배했지만 세월이 흘러 과학과 산업이 발전했을 때 자연을 정복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 사람이기에 결국 사람도 자연이라고 여겼다.

 

자연은 살아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그동안 자연을 수단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숲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여유와 정취가 그리워진 탓일까. 오주석 선생의 마음은 지금의 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마도 선생은 지금 저 그림 속에 살고 계시겠지.

 

“<고사관수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나도 저곳에 들어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선비가 자아내는 잔잔한 삼매경과 여유와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그림 속의 인물이 되고만 싶은 것이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중에서,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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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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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

 

우리는 ‘이야기’에 묻혀 산다. 그래서 가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기이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럴 수 있다. 소설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세상이다. 그래도 소설은 거의 예외 없이 현실보다 더 기이하고 재미있다. 현실이 소설의 근본인 상상력을 뛰어넘기는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를 즐겨 듣고 만드는 능력 덕분에 문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거나 의혹과 불신을 낳기도 한다.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이 명확하지 못할 때 배후에 거대한 권력조직이나 비밀스런 단체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음모론이다. 이번 선거전도 별의별 네거티브 선전, 루머, 음모론이 다 등장했다. 특정 정당의 후보가 특정 종교와 연관됐다느니, 선거후보의 아내에 트집을 잡기도 하는 등 하루가 멀게 근거 없는 음모론이 SNS와 인터넷에 쏟아졌다. 이러한 음모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지만, 한편으론 그리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일부 소수의 사람들은 아예 사실로 믿고 있다.

 

이런 사례만 들어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긴다. 조너선 갓셜의 표현처럼 인간은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스토리텔링 애니멀(Storytelling animal)', 즉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인간이 왜 이야기하는 동물인지 증명해주는 재미있는 실험이 책의 서문에 소개된다. 밀폐된 방에 원숭이와 컴퓨터, 단 둘이 있게 했다. 원숭이는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린다. 화면에 나오는 글자는 별 의미 없는 단어만 나열된 것이다. 단 한 페이지도 문장을 쓰지 못하고 철자 ‘S’만 수없이 쳤을 뿐이다. 어찌 보면 쓸모없는 실험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고, 쓸 줄 아는 동물이 인간이 유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Scene #2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이야기의 힘

 

우리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옛날 옛적에~'라고 시작되는 전래동화가 시작되면 두 귀를 쫑긋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동화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고 하고, 한 번 이야기해주면 또 다시 해달라고 조른다. 이렇듯 어린이 교육의 매체로서 이야기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어린이 정서 발달에 동화가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보고 듣는 이야기가 오랜 기간 자아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야기는 우리 마음뿐만 아니라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그 영향력은 엄청나다. 스토 부인의 『엉클 톰스 캐빈』은 출간된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노예제 폐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과장되게 받아들이면 역효과가 나온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오페라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무명 혹은 위대한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 신화를 주제로 한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를 보고나서 정치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히틀러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이야기에 단순히 공감하는 것만이 아니라 감정을 지배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에 미치는 효과를 언급했다. 그것이 바로 '카타르시스(katharsis)'다. 카타르시스는 ‘정화’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한편,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한다는 의학적 용어로도 쓰인다. 요컨대 관객이 비극의 주인공과 자신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생각하는 동일화가 먼저 이루어진다. 마치 비극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느낀다.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의 감정에 동화된다. 비극이 그리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에 의해서 관객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된다. 그 과정에서 이들 인간적 정념이 어떠한 형태로 순화되는 일종의 정신적 승화작용이다.

 

이야기는 정서적 정화 또는 쾌감을 맛보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실제로 배설 욕구를 참으며 견디다가 볼 일을 보고나면 차마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의 시원함을 느끼듯이 인간은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그와 비슷한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답답하고 우울하고 슬플 때 억지로 웃으려는 노력보다 시원하게 한 번 울고 나면 개운해지는 그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순간의 감정이나 정서, 혹은 그러한 현상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는 가상현실(시뮬레이션)과 같은 작용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는 이야기를 즐겨 읽는 사람이 논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보다 사회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실험 사례를 소개한다.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공감 능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험 하나만으로도 이야기의 긍정적 효과를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허구적인 요소가 가미된 픽션만 읽는다고 해서 공감 능력이 키 크듯이 쑥쑥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반응의 자세가 중요하다. 19세기 미국인들이 스토 부인의 소설을 읽고 비참한 노예제도의 참상을 알게 되어 노예제를 반대하는 것은 이야기를 통한 좋은 공감의 사례이지만, 반면 히틀러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나쁜 공감도 있기 마련이다.


 
 Scene #3  이야기의 홍수에서 살아남기

 

상상력이 넘치는 이야기는 종종 돈키호테나 히틀러 같은 망상에 사로잡히는 인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의 뇌는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이 불명확한 내용의 이야기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게 만들 정도로 이야기의 효과는 단순하면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이야기는 가끔 우리를 생각의 함정으로 유도해서 그 곳으로 빠뜨리게 한다. 우리가 음모론에 쉽게 유혹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음모론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실로 믿고 싶어 한다.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내용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그럴듯한 진짜 이야기로 만든다. 그것이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고, 사실로 증명되지 않았는데도 가짜 이야기를 진짜 이야기라고 단정을 짓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 인간은 음모론이나 루머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다.

 

이것을 '셜록 홈즈 증후군'이라고 한다. 코난 도일이 창조한 명탐정 셜록 홈즈는 범죄 수사의 천재이다. 그는 여러 가지 단서들을 통해 수많은 해석을 생각해낸다. 그 중에 한 두 개의 단서는 홈즈가 의문을 품고 있는 사건의 과정에 딱 들어맞게 된다. 여기서 홈즈는 그 해석만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이러한 홈즈의 추리력은 지금도 많은 독자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실력이지만, '문학적 허구'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홈즈는 사건의 인과 관계에 적중되도록 초점을 맞추다보니 단서에 대해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어 보면 홈즈가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가끔 자의적인 해석의 추리 방식 때문에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인물을 범인으로 판단할 때도 있고, 잘못된 판단의 오류로 의해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만든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이야기에 쉽게 반응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쓰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라고 자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특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 힘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헤쳐 나올 줄 알아야 한다. 그 중에 절반은 사실을 왜곡하는 영양가 없는 추측과 오류  투성이에 가깝다.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의식주만으로 살 수 없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아니 필수적이라 해도 좋다. 실제로 이야기 없는 삶을 상상해 보라.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컴퓨터 게임이든. 거칠게 말하면 이제 허구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스토리텔링은 최근에 화두가 됐다지만 실은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던 동화책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굳이 거창한 미사여구 없이도 나의 이웃이나 동료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와 행복, 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착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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