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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Scene #1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
우리는 ‘이야기’에 묻혀 산다. 그래서 가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기이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럴 수 있다. 소설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세상이다. 그래도 소설은 거의 예외 없이 현실보다 더 기이하고 재미있다. 현실이 소설의 근본인 상상력을 뛰어넘기는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를 즐겨 듣고 만드는 능력 덕분에 문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거나 의혹과 불신을 낳기도 한다.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이 명확하지 못할 때 배후에 거대한 권력조직이나 비밀스런 단체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음모론이다. 이번 선거전도 별의별 네거티브 선전, 루머, 음모론이 다 등장했다. 특정 정당의 후보가 특정 종교와 연관됐다느니, 선거후보의 아내에 트집을 잡기도 하는 등 하루가 멀게 근거 없는 음모론이 SNS와 인터넷에 쏟아졌다. 이러한 음모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지만, 한편으론 그리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일부 소수의 사람들은 아예 사실로 믿고 있다.
이런 사례만 들어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긴다. 조너선 갓셜의 표현처럼 인간은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스토리텔링 애니멀(Storytelling animal)', 즉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인간이 왜 이야기하는 동물인지 증명해주는 재미있는 실험이 책의 서문에 소개된다. 밀폐된 방에 원숭이와 컴퓨터, 단 둘이 있게 했다. 원숭이는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린다. 화면에 나오는 글자는 별 의미 없는 단어만 나열된 것이다. 단 한 페이지도 문장을 쓰지 못하고 철자 ‘S’만 수없이 쳤을 뿐이다. 어찌 보면 쓸모없는 실험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고, 쓸 줄 아는 동물이 인간이 유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Scene #2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이야기의 힘
우리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옛날 옛적에~'라고 시작되는 전래동화가 시작되면 두 귀를 쫑긋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동화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고 하고, 한 번 이야기해주면 또 다시 해달라고 조른다. 이렇듯 어린이 교육의 매체로서 이야기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어린이 정서 발달에 동화가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보고 듣는 이야기가 오랜 기간 자아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야기는 우리 마음뿐만 아니라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그 영향력은 엄청나다. 스토 부인의 『엉클 톰스 캐빈』은 출간된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노예제 폐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과장되게 받아들이면 역효과가 나온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오페라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무명 혹은 위대한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 신화를 주제로 한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를 보고나서 정치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히틀러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이야기에 단순히 공감하는 것만이 아니라 감정을 지배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에 미치는 효과를 언급했다. 그것이 바로 '카타르시스(katharsis)'다. 카타르시스는 ‘정화’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한편,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한다는 의학적 용어로도 쓰인다. 요컨대 관객이 비극의 주인공과 자신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생각하는 동일화가 먼저 이루어진다. 마치 비극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느낀다.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의 감정에 동화된다. 비극이 그리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에 의해서 관객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된다. 그 과정에서 이들 인간적 정념이 어떠한 형태로 순화되는 일종의 정신적 승화작용이다.
이야기는 정서적 정화 또는 쾌감을 맛보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실제로 배설 욕구를 참으며 견디다가 볼 일을 보고나면 차마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의 시원함을 느끼듯이 인간은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그와 비슷한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답답하고 우울하고 슬플 때 억지로 웃으려는 노력보다 시원하게 한 번 울고 나면 개운해지는 그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순간의 감정이나 정서, 혹은 그러한 현상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는 가상현실(시뮬레이션)과 같은 작용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는 이야기를 즐겨 읽는 사람이 논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보다 사회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실험 사례를 소개한다.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공감 능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험 하나만으로도 이야기의 긍정적 효과를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허구적인 요소가 가미된 픽션만 읽는다고 해서 공감 능력이 키 크듯이 쑥쑥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반응의 자세가 중요하다. 19세기 미국인들이 스토 부인의 소설을 읽고 비참한 노예제도의 참상을 알게 되어 노예제를 반대하는 것은 이야기를 통한 좋은 공감의 사례이지만, 반면 히틀러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나쁜 공감도 있기 마련이다.
Scene #3 이야기의 홍수에서 살아남기
상상력이 넘치는 이야기는 종종 돈키호테나 히틀러 같은 망상에 사로잡히는 인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의 뇌는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이 불명확한 내용의 이야기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게 만들 정도로 이야기의 효과는 단순하면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이야기는 가끔 우리를 생각의 함정으로 유도해서 그 곳으로 빠뜨리게 한다. 우리가 음모론에 쉽게 유혹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음모론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실로 믿고 싶어 한다.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내용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그럴듯한 진짜 이야기로 만든다. 그것이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고, 사실로 증명되지 않았는데도 가짜 이야기를 진짜 이야기라고 단정을 짓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 인간은 음모론이나 루머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다.
이것을 '셜록 홈즈 증후군'이라고 한다. 코난 도일이 창조한 명탐정 셜록 홈즈는 범죄 수사의 천재이다. 그는 여러 가지 단서들을 통해 수많은 해석을 생각해낸다. 그 중에 한 두 개의 단서는 홈즈가 의문을 품고 있는 사건의 과정에 딱 들어맞게 된다. 여기서 홈즈는 그 해석만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이러한 홈즈의 추리력은 지금도 많은 독자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실력이지만, '문학적 허구'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홈즈는 사건의 인과 관계에 적중되도록 초점을 맞추다보니 단서에 대해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어 보면 홈즈가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가끔 자의적인 해석의 추리 방식 때문에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인물을 범인으로 판단할 때도 있고, 잘못된 판단의 오류로 의해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만든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이야기에 쉽게 반응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쓰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라고 자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특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 힘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헤쳐 나올 줄 알아야 한다. 그 중에 절반은 사실을 왜곡하는 영양가 없는 추측과 오류 투성이에 가깝다.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의식주만으로 살 수 없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아니 필수적이라 해도 좋다. 실제로 이야기 없는 삶을 상상해 보라.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컴퓨터 게임이든. 거칠게 말하면 이제 허구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스토리텔링은 최근에 화두가 됐다지만 실은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던 동화책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굳이 거창한 미사여구 없이도 나의 이웃이나 동료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와 행복, 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착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