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 내 젊음의 자서전 다빈치 art 17
마르크 샤갈 지음, 최영숙 옮김 / 다빈치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1911년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를 읊어보면 막연한 이국의 마을 풍경이 떠올린다. 김춘수의 시에 영감을 준 모티브는 1911년에 그려진 「나와 마을」이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화면 분할로 인한 시각적 분리가 아니다. 나와 마을의 거리를 친근하게 보여주는 그만의 독특한 예술적 질서일 것이다. 기억하는 것은 아름답다. 그래서 그에게 ’눈 내리는 마을‘은 그가 떠나온 고향이자, 아득한 희망이었으며 끝내 갖지 못한 낭만이 됐다. 재현불가능한 꿈을 샤갈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마르크 샤갈 「마을 위로」  1915년

 

 

오늘이 바로 샤갈이 태어난 날이다. 7월 7일. 지금쯤 그는 벨라와 함께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비테프스크 위로 훨훨 날다가 파리의 에펠 탑 꼭대기에서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그와 벨라의 영혼은 지금도 그림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샤갈의 그림을 보면 행복해진다.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그림들과 달리 샤갈은 원초적이고 감성적인 색체 그 자체로, 우리의 영혼을 파고든다. 달콤하고도 몽환적인 사랑의 꿈. 우리를 꿈꾸게 하는 이 행복한 그림들은, 이방의 삶을 살았던 샤갈의 어두운 현실에서 퍼 올린 것이다. 예술이 너무 안락한 삶속에서는 꽃 피우지 못한다는 새로울 것도 없는 진리가 샤갈의 경우에도 딱 맞아떨어진다.

 

샤갈은 전 세계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화가 중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샤갈은 한 번도 어떤 주의, 주장, 단체에 머문 적이 없다. 샤갈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고 설명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정규 교육도 별로 받지 않았고, 유대인이면서도 종교에 집착하지 않았고, 파리 뉴욕 등지에서 숱한 예술인들과 교류했지만 어느 유파에도 가담한 적이 없다. 이런 변경의 삶은 그의 작품 세계에 그대로 녹아 있다.

 

특이하게도 샤갈은 자서전을 이제 막 이름이 알리기 시작되는 젊은 시절에 자서전을 썼다. 제목도 거창하다. 나의 삶. 이 때 샤갈의 나이는 서른 초반이었다. 자서전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마무리된다. 샤갈은 98세로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후반기를 담을 수 있는 자서전 2부를 쓰지 않았다. 서른 초반에 자서전을 쓰기고 결심한 샤갈은 60년 인생 더 살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샤갈에 관한 책을 쓴 미술사가 모니카 봄 두첸은 자서전이 과장되고 거짓으로 가득한 과대망상증 환자의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림에 비해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자서전의 제목은 사뭇 낭만적이다.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부제는 ‘내 젊음의 자서전’  사실 인생 전반을 소개하는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유년 시절과 화가로 데뷔한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서전은 샤갈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문헌이다.

 

샤갈의 마을, 그리스 정교회당과 유대교 예배당이 자리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비테프스크. 유대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그 마을은 샤갈의 기억 중추에 굳게 자리하며 평생의 테마가 된다.

 

샤갈은 러시아 초등학교로 편입하여,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면서 상처를 받아 말더듬이가 될 정도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가수, 바이올리니스트, 무용수, 시인이 되고 싶은 꿈 많은 아이였지만, 샤갈은 자신의 그림 실력을 의심치 않았다. 그 아이는 자라서 파리로 가 화가가 되어, 버리고 온 초라한 마을 비테프스크를 떠올린다. 그의 마음 한 켠에 따뜻하게 자리 잡은 그곳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중력을 무시하고 우주 유영을 하듯 날아다니는 꽃, 사람, 동물, 집들은 ‘떠나 있지만, 매이지 않는, 그러기에 떠돌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외국인으로, 유대인으로, 방랑자로 신산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그림에는 분노가 없다. 삶의 즐거움과 행복한 꿈이 가득하다.

 

 

 

 

 

 

마르크 샤갈 「비테프스크 위로」  1914년

 

가엾은 고향 마을이여, 나를 용서해 다오. 현기증이 날만큼 그토록 높은 곳에 나는 너를 혼자 남겨 두었구나. 슬프고 기쁜 내 고향 마을이여! (10쪽)

 

눈이 하얗게 비테프스크를 덮고 있는 황량한 겨울, 어깨에 자루를 메고 손에는 지팡이를 쥔 남자가 허공을 날고 있다. 「비테프스크 위로」는 ‘아이의 눈’으로 비테프스크를 바라봤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샤갈이 환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린 샤갈은 자신의 집 다락방에 엎드려서 마을 풍경을 바라봤다. 창문으로 보이지 않으면 할아버지와 함께 지붕 위로 올라가 마을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그 곳에 가면 사랑스러운 하늘과 별들이 호기심 많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에서 하늘을 둥둥 나는 노인은 ‘아이의 눈’을 가진 샤갈 본인 혹은 그의 할아버지일 것이다. 

 

샤갈에게서 비테프스크와 그의 뮤즈 벨라를 빼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 자서전에 샤갈과 벨라의 운명적인 만남이 묘사되어 있다. 샤갈은 벨라의 친구 테아라는 여자와 사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의사인데 샤갈은 진찰실에 있는 긴 의자에 누워서 테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누군가가 진찰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테아가 아닌 벨라였다. 샤갈은 그녀의 방문에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샤갈의 심장은 벨라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뜀박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장이 샤갈에게 말한다. 저 여자가 바로 너의 아내라고. 친구의 친구를 사랑한 샤갈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는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임을 예감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눈. 그녀의 검은 눈은 얼마나 둥글고 큰가! 그것이 바로 나의 눈, 나의 영혼이다. (71쪽)

 

샤갈을 색채의 마술사라기보다는 ‘꿈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더 어울린다. 우리는 꿈을 꾸면 형상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흐릿한 형체만 느낄 뿐이다. 꿈의 장면을 컬러 TV를 보는 것처럼 볼 수 없다. 그래서 꿈을 묘사한 샤갈의 색채는 강렬하다. 그것은 샤갈 고유의 색이라기보다는 유대교의 영향에서 받은 강렬한 빨강, 깊은 심연의 파랑, 3월의 보리밭처럼 짙푸른 초록으로 자기화하고 형상화된 색채다. 파랗게 물든 파리의 하늘에서 꿈꾸는 암소를 통해서 샤갈은 시적 감성으로 자신이 꿈 꾼 세상으로 우리를 부른다. 샤갈의 그림은 양식과 유파를 뛰어넘어 세계인들에게 서정과 꿈, 순수성과 영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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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7-08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오래 전, 강남역에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란
카페가 있던 기억이나. 이름이 특이해서 친구들이랑 몇 번 다녔었지.
커피맛도 괜찮았고. 결국 그것도 세월 속에 묻히고 말았지만.
10년 전쯤엔 샤갈전도 보러간 기억도 나네. 그림이 몽환적이고, 독특하지만
참 괜찮은데 말야. 책은 또 그렇지 않는가 보군.^^

cyrus 2014-07-09 15:18   좋아요 0 | URL
샤갈의 자서전이라고 해서 특별할 줄 알았는데 특별하기보다는 특이했어요. 자서전이 자신의 삶을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글쓰기라고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편집 없이 나열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간혹 샤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고요.. ^^;;
 
센세이션 - 결심을 조롱하는 감각의 비밀
살마 로벨 지음, 오공훈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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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 중에는 물리적인 개념을 묘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속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무겁다’를 ‘마음이 무겁다’ 또는 ‘입이 무겁다’와 같이 표현한다. 범죄 집단의 굴레에서 빠져나오면 ‘손을 씻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물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낱말로 추상적 개념을 묘사하는 표현은 한둘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따뜻하게’ 느껴진다고 표현한다. 이런 사례는 마음이 존경이나 애정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때 몸의 도움을 받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교적 획득하기 쉬운 신체적 혹은 물리적인 개념으로부터 추상적인 또는 심리적인 개념을 체득하는 사회적 인지의 과정은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감각이나 움직임이 인지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체화된 인지' 이론에 집중조명하고 있다. 감각은 신체와 외부 환경 사이의 연관성을 전제로 하여 신체 반응과 행동을 통해 심리적 정보를 밝히는 것이다. 

 

감정이 신체반응을 야기하고 이 신체반응이 행동을 만들어 내며 상대방이 그 행동을 통해 심리적 정보를 해석한다. 손이나 다른 신체 부위를 이용해 접촉했을 때 느끼게 되는 촉각은 사람들이 물리적인 세상을 경험하는 기본적이고 매우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이다. 유아기에서부터 사람들은 손을 이용해서 외부의 대상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 외부 대상의 실체에 대한 느낌을 획득한다. 따라서 물리적, 환경적 요소가 우리의 행동이나 기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뜻한 물체를 만졌을 때 함께 있던 상대방에 대해 더 너그럽고 이해하고 다정하게 대하게 된다는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다. 추운 날에 뜨거운 찻잔을 손에 쥐면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따뜻하게 하는 심리적 효과를 증명했다.

 

윌리엄스 박사팀은 대학생 41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뜨거운 커피가 든 컵을, 다른 그룹에는 차가운 커피가 든 컵을 일정 시간 들고 있게 했다. 그런 다음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성격적 특징에 대한 정보를 학생들에게 주고 각자 그 인물의 성격 각 요소에 대해 평가해 보게 했다.

 

실험 결과, 따뜻한 컵을 들고 있었던 학생 그룹은 차가운 컵을 들고 있었던 학생 그룹보다 가상의 인물을 더 너그럽고 사교적이고 성품이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성격적 특징은 심리학적으로 따뜻한 성격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성품의 따뜻함과 큰 상관관계가 없는 정직성, 매력도, 힘 등에 대한 평가는 두 그룹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체화된 인지' 이론은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접촉이 우리의 감각을 조절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 어릴 적에 엄마의 약손으로 배앓이가 치유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뒷목이 아프면 자연스레 손을 얹듯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것은 치유를 위한 인간의 본능이다. 접촉은 말보다 따뜻한 몸의 언어다. 태어나자마자 충분한 접촉을 받은 아이는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안정된 애착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인간은 건강할 때는 보살핌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독한 고독에 빠지거나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소진되어 혼자 힘으로 일어서기 어려울 때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이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일어나게 된다.

 

몸은 해결되지 않은 감정 응어리를 담아 두는 저장소다. 응어리를 제때 풀지 않으면 몸속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신체 통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좋지 않은 감정은 바로 풀어 버려야 한다. 신체 감각은 은유적 표현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화가 나서 마음으로 억누르다"라는 문장처럼 우리는 실제로 좋지 않은 감정을 마음으로 조절하고, 그것을 담아둔다. 이런 과정이 반복이 되면 화병이 생길 수 있다.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몸 건강도 해로워진다. 유대교 전통 중에 새해를 맞이할 때 작년에 지은 죄나 안 좋은 감정, 기억과 관련된 물건이나 그것을 상징하는 음식 조각을 주머니에 담아 물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이 있다. 실제로 부정적인 감정을 글로 기록하여 편지 봉투에 밀봉하거나 그것을 밖으로 내다버리면 부담감을 덜 수 있다. 은유적 표현을 구체화시킨다면 안 좋았던 기분이 풀리는 것이다.

 

심리학을 인간의 마음이나 성격을 규명하는 학문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심리학 실험사례가 일상에 적용한다고 해서 100% 결과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신력 있는 실험기관에서 증명된 실험사례도 재연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실험 과정에 다양한 변수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체화된 인지에 관한 연구는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분야다. 몸과 감각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심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지금까지 소개된 실험사례들은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으로 설명하는데 용이하다. 심리학은 단지 과학적 연구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행동들 안에, 흔히 듣고 넘기는 말들 속에도 심리적 기제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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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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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이상이다. 동시에 희망이며 미래이다. 그것에 동의반복이거나 비슷한 말은 바로, ‘청춘’이다. 20대 청춘은 빛나는 시절이라지만 사실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는 안개의 시기다.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언어가 청춘을 감싸지만 정작 그 가능성보다 불확실한 미래와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고민과 방황은 젊은 날의 특권이자 족쇄다. 청춘들은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지,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되묻는다. 녹록치 않은 세상과 부딪치고 깨지면서 열정은 사그라지고 어느 날엔가 현실과 타협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의 청춘이나 젊음은 이유 없는-기성세대들의 몰이해에서 나온 단순한 평가가 대부분인-반항이거나, 방황하고 불안전하며, 치유 극복 불가능한 쾌락의 모습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자신의 나이에서 완전하고 만족스런 삶의 모습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더군다나 스스로의 날개를 달지도 못하고, 또는 방향성을 깨닫지 못한 그들의 삶에 대해 어떤 근거로 방황이나 반항이나 불안정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겠는가? 중요한 건 우리는 누구나 그 시기를 거쳤으며, 또 누구나 그 시기를 거쳐 우리가 된다는 것.

 

“청춘은 아름답다”는 식의 청춘예찬은 결코 식상해질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떤 낯두껍을 하고 있어도 청춘은 한없이 투명에 가깝다. 누가 청춘을 비하해도 그건 진심이 아니다. 청춘은 그 이름만으로 가슴을 설레게 한다, 머리끝까지 피를 역류시키게 만든다, 식은 심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것이 바로 청춘이라는 이유밖에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해 숱한 경구로 장식된 ‘청춘’의 이름은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일정 시기의 청춘을 특정한 말로 규정하고픈 욕망이 꿈틀거렸다. X세대, N세대, W세대, 등등 청춘은 시시각각 다른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각종 문구는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바뀌는 청춘의 빛깔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짓거나 정의하는 것과 별개로 정체성은 청춘의 한 페이지에 빼곡하게 들어찬 화두다. 끊임없이 자신과 주변을 되묻는 과정은 통과의례이며 위태로운 외줄타기 또한 타당한 수순이다.

 

"여전히 삶이란 내게 정답표가 뜯겨나간 문제집과 비슷하다.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151쪽)

 

나는 정답 비슷한 것도 본적이 없다. 사실은 그런 비슷한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부끄럽지만 먼 앞날이나, 뭔가 대단한 것들을 고민하면서 살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해서 첫 학기 중간고사를 볼 때였다. 당시 나는 장학금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좋은 성적이 필요했다. 논술형 필기시험에 자신이 있던 나였기에 첫 시험의 결과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교수님께 직접 찾아가 채점 결과 반영이 궁금해서 정중하게 질문했다. 확인한 결과, 나의 답안지가 논리성이 떨어지고, 독창적인 나만의 생각이 아닌 전공 책에 있는 내용 위주로 써서 감점 처리가 되었던 것이었다. 답은 맞으나 그것을 도출하는 과정이 틀린 것이었다. 그 때에야 처음 알았다. 정답만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 새삼스러운 진리를 나의 장학금과 바꾸고서야 알게 되었다.

 

사실 결과보다 그 과정이 기억에 더 뚜렷한 경우가 의외로 꽤 많다. 얼굴과 이름은 희미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며 숨 막히게 애틋했던 순간들의 기억들과 수고들은 여전히 뚜렷할 수 있다. 무언가를 이루려 쏟아 부었던 어느 순간들이 사실은 삶의 거의 모두일 수 있다.

 

추억되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다. 청춘에 관한 이야기가 열에 아홉, 아련한 후일담의 형식을 입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이 진행된 시점과 추억되는 시점 사이, 그 시간적 이격에 의해 불처럼 뜨거웠던 감정은 무심히 휘발되고, 의식의 인화지에 남는 건 기갈난 현실에 의해 윤색된 과거의 빛나는 잔해들이다.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우는” 바로 그 청춘이 회고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이상은도 노래하지 않았나.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아마도 청춘의 흔적이 점점 희미해지고 직장인이 되었을 때 진짜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어느 날 자신이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 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시간의 침식 작용 앞에서 망연자실하거나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 허기를 느낄 때, 우리는 그 때를 어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은 무엇으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미 청춘의 꿈과 희망은 다 사라지고 그 어느 것에도 우리의 열정을 퍼부을 수 없는데 이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나? 믿는 것이야말로 어리석다고 믿으며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돌이킬 수 없는 청춘의 열병에 몸살을 앓으면서 김연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존재다.”

 

김연수가 모은 청춘의 문장들은 청춘에 관한 예찬인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아쉬움 섞인 푸념인지 모호하다. 만듦새는 나쁘지 않다. 빛나는 청춘의 잔유물을 맹렬하게 기억하고 채워 넣는 김연수의 노력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그때가 ‘푸르고 싱싱한 순간’이었음을 안다. 그러나 젊음의 한때는 대부분 고통스럽다. 슬픔을 발로 차며 거리를 쏘다니고 저녁이면 쓸쓸한 어둠뿐이어서 늘 괴롭다. 아, 한심한 내 청춘. 세상은 절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욕망은 웃자라서 갈 곳 몰라 서성인다.

 

그러나 김연수가 풀어낸 청춘의 다채로운 모습은 우리의 과거진행형이며 현재진행형이고 미래진행형이다. 청춘 특유의 설렘이 잊히는 순간은 가장 고통스럽다. 『청춘의 문장들』은 그 설렘을 일깨워준다. 그 젊음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운동이 극에 달했을 때, 학생들이 시가에 쳐놓은 바리케이드 안쪽에는 여러 낙서가 씌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Ten Days of Happiness’라는 글귀도 있었던 모양이다. 열흘 동안의 행복.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살아가거나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청춘의 세월은 행복하다. 청나라 사람 장호도 비슷한 글을 남겼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 된다.” (花不可以無蝶 山不可以無泉 石不可以無苔 水不可以無藻 喬木不可以無藤蘿 人不可以癖, 68쪽)

 

이때 ‘벽(癖)’이란 병적으로 어떤 대상에만 빠져 사는 것, 소위 ‘열흘 동안의 행복’을 구가하기 위해 어떠한 고통과 희생도 감수하는 것. 알고 보면 세상은 다 살게 되어 있다. ‘어른’들이 하는 말처럼 죽으란 법은 없다. 부와 명예도, 지복과 희망도 모두 한순간이지만 ‘벽’이 남아 그래도 이 세상을 살만하게 만든다.

 

우리는 안다. 비바람이 있기에 나무는 땅을 향해 뿌리를 더 깊이 박고, 가지는 태양을 향해 더 높이 뻗는다는 사실을. 힘든 방황일수록 그 끝에 깊은 통찰과 지혜가 따라온다는 진리를. 방황은 방황으로 끝이 아니라 성숙한 나 자신과의 만남으로 가는 과정이다.

 

‘내’가 ‘나’라는 사실조차 낯설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청춘의 그림을 그리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가 내 꿈을 꾸는 것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청춘은 여러 빛깔의 홍역을 치르면서도 질긴 생명력을 보유한 채 여러 굴레를 넘나든다.

 

스무 살 즈음에 겪은 그 모든 것들이 화인처럼 맘속에 새겨져 있기에 스물에 모든 삶을 살았다고 우리는 믿게 된다. 그렇지만 삶은 스물 이후로도 한참 계속되었고, 여전히 그 삶은 진행 중이다. 스물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되풀이 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에 느꼈던 그대로의 삶이 지속되는 건 아니다. 더 깊어지고, 더 관대해졌으며, 더 충만해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것은 증명된다. 인생 스무 살은 계속되지만 결코 그때의 스무 살과 같을 수는 없다.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청춘의 시기에도 꿈, 이상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팍팍한 일상의 굴레가 수시로 젊음을 몰아세우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 선택한 꿈의 색깔 앞에 꼬꾸라질 이유는 없어야 할 터이니. 이럴 때 공자의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즐거워하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상심에 이르지 말자.” (樂而不淫 哀而不傷,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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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1 -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1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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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실은 이미 현재와 잠재가 어지럽게 뒤섞인 혼합현실이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어느새 ‘현실가상’(real virtuality)이

되고 있다.

(109쪽)

 

 

 


 Scene #1  가상과 현실의 역전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이다.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고, 가상이 현실보다 더욱 진짜 같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시대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상현실을 진짜 현실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가상현실 공간하면 항상 떠올리게 되는 것이 영화 ‘매트릭스’에서의 공간이나 만화 ‘공각기동대’에서 전뇌(電腦)에 나타나는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 가상의 세계이다.

 

여기서 가상의 세계는 디지털 매체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의 세계로 간주된다. 가상현실의 성공여부는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현실과 전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현실 같은 ‘가짜’를 얼마나 잘 만드는가에 달린 듯하다. 가상현실의 기술이 돌덩어리로 황금을 만드는 연금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이 현실과 똑같은 ‘가짜’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들은 참된 현실을 가상이라는 거짓의 침입으로부터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디지털 문명은 이 전통적 패러다임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가상은 현실이 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의 아바타를 꾸미는 데에 현실의 돈을 지급하고, 거금으로 사이버 섬을 구입하여 사업을 구상한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던 상상이 밖으로 나와 현실이 된 것들이다. 결국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가 역전돼 실재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가상이 더욱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 현상이 벌어진다.

 

 

 Scene #2  파타피직스의 세계

 

사르트르의 말처럼 상상이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상황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상상이 현재의 상황과 전혀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상상이라 할지라도 상상은 언제나 현실의 상황과 맞물려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찾으려 하는 순간 눈앞에 있는 컵은 눈에 보이는 대로의 컵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경우는 다르다. 눈앞에 보이는 물건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는 다른 어떤 다른 상황이나 현실을 상상하게 만든다.

 

플라톤 이래로 현실과 가상의 문제는 예술 담론의 오래된 주제였지만 이 문제가 오늘날처럼 인구에 회자된 시대는 없었다. 누구나 알듯이 현실과 가상의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화두가 되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과거와 달리 단순히 예술적 담론의 영역을 넘어 직접적 현실의 테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프리 쇼  「읽을 수 있는 도시」 연작, 1989~1991년

 

제프리 쇼의 <읽을 수 있는 도시>는 가상현실 예술의 고전이다. 이 작품의 관객은 인터페이스로 제공된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이나 뉴욕 맨해튼의 인터페이스로 제공된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이나 뉴욕 맨해튼의 구조를 재현한 가상의 도시를 탐험하게 된다. (중략) 이로써 자전거 여행은 도시공간을 탐험하는 것이자 데이터베이스를 탐색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64쪽)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처음 우리의 일상에 들어왔을 때, 아날로그 매체와 구별되는 디지털의 특성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한 오늘날에 ‘디지털’은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 되었다. 이미지를 텍스트로, 텍스트를 다시 이미지로 변환하는 디지털 기술은 일상으로 체험된다. 이제는 미디어가 의식을 지배한다. 전에는 텍스트를 통해 세상을 읽었다. 그러나 이제는 디자인에서 미감을 읽고, 게임에서 서사의 감각을 익히는 시대다. 문자의 자리에 사운드와 영상이 차지하고 있다.

 

'몰입기술'을 통해 현실의 주체는 가상의 세계에 입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가상현실'이다. 또 영상인식, 위치추적 기술 등을 통해 현실공간에 가상의 좌표를 중첩시킴으로써 '증강현실'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처럼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가 발생한다. 이를 파타피직스(Pataphisics)라 한다. 형이상학으로 번역하는 메타피직스(Metaphysics)의 패러디다. 파티피직스는 초(超)형이상학이다. 실은 온갖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로 가득한 사이비 철학을 말한다.

 

'파타피직스'는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디지털 생활세계의 존재론적 특성이자, 동시에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디지털 대중의 인지적 특성이기도 하다. (10쪽)

 

여기서 진중권은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파타피직스를 내세웠다. 과거에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이 메타포(비유)의 능력이었다면 오늘날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은 파타포(Pataphor)의 능력이다. 디지털 테크닉이 보편화된 파타피직스의 세계에서 ‘현실-가상’의 이분법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폐기된 도식이 되었다.

 

 

 Scene #3  상상이 개입되는 현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사진의 영역에서 현실과 가상의 테마는 그 어느 분야보다 뜨거운 감자다. 사진이 태어난 이후 그 새로운 매체의 존재 이유가 ‘현실의 객관적 재현’에 있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더 이상 그러한 존재 근거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사진의 종언’이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사진작가들은 그러나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명호  「나무... #3」  2013년

 

(이명호) 작가는 현실의 사물을 가상의 세계에 등록시킨다. 현실의 사물을 가상의 세계 속에 옮겨놓는 ‘가상현실’ 체험은 디지털의 일상이다. 사진은 예로부터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원근법적 재현의 모범이었다. 하지만 나무 뒤의 차단막은 공간의 깊이를 가진 배경을 깊이 없는 평면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결과 그 앞의 나무마저 입체감을 잃어 거의 회화처럼 보이게 된다. 이는 현실의 사물이 가상에 등록될 때 평면적 이미지의 옷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 (90쪽)

 

여전히 사진의 객관적 기록성을 고수하는 작가가 있는 반면 일군의 작가들은 디지털 테크닉을 사진의 해방으로 받아들이면서 미디어아트의 영역으로 건너갔다. 사진매체를 통해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단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우리의 상상력 혹은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의 이 무미건조한 삶에 내일의 희망을 중첩시키면서 하루를 보낸다. 상상이 개입되지 않는 삶과 현실은 무의미하며 견딜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이 개입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디어는 양날을 지닌 칼처럼 우리의 현실에서 잔인할 정도로 욕망이 제거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현실과 상상을 하나의 단일한 공간으로 중첩시킬 수도 있다. 미디어로서 사진은 디지털 사진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주로 우리의 상상력이 제거된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진을 더욱 더 그럴싸한 현실의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을 통해서 현실과 가상이 겹쳐진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 더욱 용이해졌다.

 


 Scene #4  예술의 숙명은 가상과 현실의 간극 해소

 

미디어매체가 가상적인 지각을 가능하게 한다는 진중권의 지적은 가상현실과 관련 지어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때 가상적이라는 말은 결코 말 그대로 ‘가상의’ 혹은 ‘가짜의’라는 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몸에 너무 배어 익숙해진 지각들로부터 추방된 지각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가상'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앞에서 기술적으로 실현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기획'(Projekt)이 되는 것이다.

 

‘디지털 가상’은 우리 주위와 내부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공허의 밤을 밝혀주는 빛이다. 우리는 “그런 무(無)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 무 속으로 자신을 투사(기획)하는 전조등”이다. (55쪽)

 

즉, 가상이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제3의 현실, 곧 중립적인 현실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가상현실은 바로 이러한 지각의 가능성과 맞닿아 있다. 예술이 미디어를 활용함으로써 관객과 작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른바 ‘쌍방향성’인데, 이를 통해 관객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 나아가 작품의 공동 창작자로까지 등장한다. 예술가가 만든 가상이 진짜인지 가릴 필요가 무의미해진다.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미 현실이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미디어로 이루어진 중립적인 현실을 순응하는 판단중지인 셈이다.

 

가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중첩된 제3의 현실은 미래의 예술 활동을 위해서도 너무나 매력적인 공간이다. 켜켜이 쌓여온 전통의 중압과 역사적 상상력의 한계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이 제3의 공간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원천적으로 디지털이란 낱말 자체는 불연속적으로 단절된 정보 처리 기술을 의미한다. 이 기술은 하나의 전체를 분할된 정보들의 종합으로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정보 처리 과정에서 조작과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는 오리지널과 외견상 분간할 수 없는 유사한 복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모습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재현의 질서와 가상-현실 간의 경계를 해체시킨다. 모방에서 유래된 재현의 질서에서 벗어난 디지털 이미지는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그것은 실재와 허구를 넘나드는 환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그 속에 자신의 고유한 예술적 존재를 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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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단장하는 여자와 훔쳐보는 남자 - 서양미술사의 비밀을 누설하다
파스칼 보나푸 지음,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Scene #1  누드는 왜 불편한가  

 

인간의 벗은 몸은 논란거리다. 하지만 목욕탕의 전라와 수영장의 반라가 문제되지 않듯, 문제는 “알몸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또 얼마나 드러내고 감출 것인가. 영국의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Nude)와 ‘네이키드’(Nakded)의 차이는 옷을 벗었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의 유무라고 말했다. 네이키드는 ‘벗은’ 몸이고 누드는 몸 자체다. 그의 기준에 따른다면 말끔하게 차려 입은 두 남자 사이에서 침착하고 정숙한 자태로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 등장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식 식사」는 누드화고, 벌거벗은 모습을 들키고 부끄러워하는 여인이 등장하는 「수산나와 두 원로들」은 네이키드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섹슈얼리티를 담아낸 수많은 미술 작품들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관능미뿐만 아니라 에로틱한 상상, 신체의 변형이나 왜곡을 통한 변태적 성애를 대담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어 사실상 예술에 있어서 누드와 네이키드의 구별은 상당히 모호할 수밖에 없다.

 

여자 연예인들이 누드집을 낸다고 하면 사람들은 노골적인 성의 상품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다. 전통적인 윤리가 몸의 드러냄을 억압해 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대심리를 합리화시킬 포장술이 필요하다. 바로 ‘예술’이다. 그렇다고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누드집이나 벌거벗은 여체를 그린 예술작품을 성의 상품화와 결부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금기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누드는 자유로운 자기표현이 될 수 있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누드가 관음증의 일종으로 비난을 받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이성의 알몸을 좋아하는 엉큼한 본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몸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누드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남자라면 벌거벗은 여자의 알몸을 그냥 안 보고 지나칠 수 있을까. 지금도 회자되는 호기심 가득한 영국의 양복점 직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창문으로 엿보는 행동 하나로 양복점 직원은 한순간에 관음증 환자가 되고 말았다.

 

 

 

 

 

 

존 콜리어  「고다이버 부인」  1898년

 

 

11세기 영국 코벤트리라는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는 농민 수탈에 혈안이 돼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을 본 영주의 부인 고다이버는 남편에게 과중한 세금을 줄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영주는 특별한 제안을 한다. 알몸으로 말에 올라 성 안을 한 바퀴 돌면 세금을 거두는 정책을 철회하는 것이다.

 

고다이버는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사건은 곧 농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코벤트리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는 영주 부인의 알몸을 볼 수 없다며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알몸으로 말을 타고 가는 부인의 모습을 커튼 사이로 몰래 엿본 사람이 있었으니 톰이라는 양복점 직원이었다. 하늘도 노했는지 그는 나중에 장님이 되고 말았다는데 여기서 남몰래 엿보는 사람, 즉 관음증이 있는 사람을 피핑 톰(Peeping Tom)이라고 한다.

 

 


 Scene #2  욕망, 그림의 또 다른 이름    

 

사실 고금을 막론하고 명화는 온통 여체의 이미지다. 하지만 그림 속에 유달리 여자가 많다는 사실을 이상히 여기는 사람은 없다. 예전에도, 지금도 유명한 화가는 대부분 남자였으니까. 그림은 인간의 욕망과 닿아 있다. 욕망이야말로 그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수많은 누드화를 봤을 미술사학자 파스칼 보나푸는 자신을 그동안 어두컴컴한 벽장 속에서 누드를 몰래 본 관음증 환자라고 커밍아웃(Coming out)했다.

 

"당신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그림을 보는 행위는 관음증 환자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림은 언제나 욕망과 맞물려 있었다." (8쪽)

 

그리스, 로마시대와 중세의 벗은 몸은 남녀를 불문하고 신화나 성서의 이야기를 차용해 교훈을 남기기 위한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림 속 누드는 인간이 아니라 성서나 신화속의 주인공, 즉 신의 모습인 것이다. 나체의 모델은 비너스, 아담, 이브, 제우스신, 아폴론 등이 자주 등장했다. 물론 당시도 성서나 신화의 이름으로 귀족들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에로틱한 주제의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서 음란한 생각을 해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성경 속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을 그린 한스 멤링의 「목욕하는 밧세바」를 주문한 사람이나 관람자는 한번쯤은 다윗처럼 음란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스 멤링  「목욕하는 밧세바」  1485년경

 

 

이렇듯 화가는 매혹적인 여성의 모습을 통해 남자 관람객을 만족시켜주는 그림을 제작했다. 보는 이의 마음속에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인 역시 보는 이가 혹할 정도의 자태를 뽐내고 싶어 해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몸단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오랜 시간 그림의 주제가 됐다.

 

누드화에서 여성은 피관찰자이며 관찰자는 남성이다. 여성은 그림 속의 여성을 통해 피 관찰자로서 판단되는 관습을 발견하며 보이지 않는 제3의 시선을 의식한 채 거울 앞에 앉아 몸단장을 한다. 한편 남자는 예술가로 관찰자로, 그리고 주체로 존재한다.

 

 

 

 

 

 

르누아르  「여인의 나신」  1876년

 

 

르누아르는 여성의 몸이 뿜어내는 매혹을 찬미하고 칭송하는 것에 자신의 예술혼을 쏟아 부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젊은 여인의 장밋빛 피부와 원활한 혈액순환을 짐작케 하는 피부’였다. 여성 누드는 그에게 단순히 예술의 기본이자 실험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장미를 그리면서도 여성의 누드를 위한 피부색을 연습하고 있다고 말할 만큼 이 주제에 대한 화가의 몰두는 대단했다. 노년의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으로 붓을 쥐어야 할 손이 점점 굳어가고, 진통이 오는 고생을 겪었지만 핏줄처럼 펄떡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었다. 실제 그는 “여인을 그린 경우에는 그 가슴이나 등을 쓸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그림을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누드를 사랑했다.

 

 

 

 Scene #3  욕망이라는 이름의 샘

 

누드를 본다는 것의 즐거움은 오랫동안 남성성의 대표적인 표징이었다. 남성들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된 성적 특성인 ‘관음증’이라는 명분으로 길가는 여성의 신체 부위를 훑어보며 즐거워했고, 에로틱한 시선으로 감상해왔다. 근대 서양회화의 누드화에서도 여성은 오브제로서 보이는 광경이 되고 화가인 남성은 감상자가 된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도 이렇듯 본다는 것의 즐거움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선정적인, 관음증 환자의 시선으로 보는 그림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에 있어 최고의 질료이자 탐미의 대상이 인간의 육체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여체의 그림을 보면서 야릇한 꿈을 꾼다. ‘관음증 환자’로 자처한 파스칼 보나푸는 이미 서문에서 우리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위선적인 독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림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묵인하고 있었던 욕망을 끄집어 내 예술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조반니 벨리니  「몸단장하는 젊은 여인」  1515년

 

특히 한걸음 더 나아가 ‘보는 남성, 보여주는 여성’의 구도 속에 숨겨진, 남성의 눈을 통해 여성성을 획득하고 싶은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읽어낸다. 시대에 따른 소품의 등장과 달라진 화장법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더불어 그림을 통해 아름다움을 원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마주한다. 여인을 바라보는 은밀한 시선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단장하는 여인의 욕망 말이다.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과감한 포즈나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 등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여인의 마음을 읽는 일도 즐겁다. 여성의 시선으로 남성성이 보완되듯 남성성에 의해 여성이 만개할 수 있다. 그리고 남성 화가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 속에 숨겨진 미적 에너지도 긍정적으로 보듬어 안는다.

 

‘외설’과 ‘음란’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쉬울 정도로 대중과의 소통이 용이하지 않은 누드는 계속 그려질 것이다. 욕망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화가들은 여인의 곡선이 아름다워서 누드를 그리지 않을 것이다. 옷이라는 가면을 없앤 후 가장 본래적인 육체를 통한 감정을 그려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의 샘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드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감정표현을 위한 정지동작을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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