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판미동 입니다 :)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행복의 공식'을 뒤엎는 사색

17명의 대표 인문학자가 꾸려낸 새로운 삶의 프레임!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서평단을 모집합니다.


 



 

▶ 도서 소개

 

헤르만 헤세의 시 「행복해진다는 것」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 그저 행복이라는 한 가지 의무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헤세에게는 인간의 구원과 행복만큼 중요한 문학적 화두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우리의 존재의미는 아주 간명하다. 바로 ‘행복’이다. 

“행복은 어디에 있나. 어떻게 행복을 만드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 한 권에 모았다. 한 그루의 나무를 알아야 숲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만난 18인의 고수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철학, 문학, 음악, 건축, 종교, 신화, 심리학, 의학, 과학 등의 분야에서 자기 나무 한 그루를 그들은 꿰뚫고 있었다. 이를 통해 자기 전공 분야를 넘어 더 큰 세상을 조망하고 있었다. 

 

이 책은 그들이 바라본 풍경을 이어 붙인 삶의 지도다. 18장의 지도를 모자이크해 놓은 일종의 길라잡이랄까. 지금 이 지도를 당신의 손에 건네려 한다. 어쩌면 당신은 이 안에서 스스로 행복을 만드는 법, 그 비밀스런 오솔길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 길은 드러나 있을 수도, 감추어진 길일 수도 있다. 어떤 고수라도 방향만 가리킬 뿐 당신의 길을 알려주진 않는다. 목적지를 향하는 나침반은 온전히 당신에게서 꺼내야 한다. 그것이 또한 길을 찾는 묘미가 되지 않겠는가.

 

앞서 간 이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도 괜찮다. 처음 가보는 길을 새로 내는 것도 좋다. 어차피 그 길은 세상 어느 누구의 길과도 같지 않다. 그럼 이제 걸음을 떼 보자. 

헤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서.



 

▶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하나, 해당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은 2014년 07월 23일(수)~2014년 07월 30일(수) 7일간 입니다.

셋, 총 추첨 인원은 10명입니다.

 

넷, 당첨자 발표일은 2014년 07월 31일 (목) 오후 입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4.08.04(목)~08.13(일) 10일간입니다. 

        

마지막, 당첨자 분들은 서평을 작성 한 후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서평단 발표 페이지에 온라인 서점 블로그와 개인 블로그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 서평단 지원자가 모집 인원에 미달할 시,

출판사의 의도에 따라 일부 인원만 선정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작성하지 않을 시에 다음 서평 모집 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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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거인들 이야기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거인의 이야기다. 주인공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먹을 수 있는지 자랑하고, 배변 후 뒤를 닦는 수십 가지 과정을 설명하기도 한다. 팡타그뤼엘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암소 1만7913마리가 징발됐다.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의 모험 이야기는 원래 프랑스의 민담에서 유래한다. 두 거인은 낯선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가는 곳 마다 비축된 식량들을 모조리 먹어치우면서 환상적인 모험을 펼친다.

 

라블레의 작품은 지금도 고전도서 목록에 포함될 정도로 서양문학사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라블레에 생소한 독자는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을 한 권의 책을 일컫는 제목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사실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두 작품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통상적으로 라블레를 언급할 때 이 두 작품을 한 권의 제목처럼 부른다. 『팡타그뤼엘』 이 1532년에 발표되었고, 1534년(혹은 1535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속편격으로 『가르강튀아』가 나왔다. 라블레가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을 집필했을 당시에 작가 미상의 대중소설 『가르강튀아 연대기』가 큰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각지에 떠돌면서 유행하던 일종의 구전소설을 라블레는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로 새롭게 재구성했다. 거인족 이야기 덕분에 라블레는 무명 의사에서 일약 인기 작가로 급부상했다. 

 

국내에 유일한 완역본은 대산세계문학총서 35번으로 나온 ‘문학과 지성사’ 판이다. 사실 이 책이 번역되기 전까지만 해도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서양문학사 한 페이지에 적힌 작품명에 불과했다. 유럽에서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1970년대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에 출간된 적이 있었으나 절판되었고, 2004년에 문학과 지성사 세계문학전집 작품으로 나오기 전까지 재번역이 되지 않았다.

 

 

 

 Scene #2  신에서 인간으로    

 

사실 라블레의 작품을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가 쉽지 않다. 역사적 배경 없이 읽으면 작품의 매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가 선정한 필독고전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읽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라블레를 읽기 위해서는 먼저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과 작가의 생애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르네상스’라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는 인간이 가진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래서 신이 아닌 인간이 문화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가톨릭 세력이 지배하던 중세에는 감히 표현할 수 없었던 인간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다시 살아난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문화는 진원지인 이탈리아에서 시작해서 독일, 프랑스, 북유럽 등지에서도 전파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라고 해서 다 똑같은 건 아니다. 지역마다 유행하는 르네상스에도 추구하는 정신이나 표현 양식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현실에 대한 자각이 고대의 재인식에서 시작하였다면, 북유럽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처럼 고대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기 주변의 생활에 대한 관찰로 출발한다. 르네상스가 가톨릭 중심의 중세를 한 단계 뛰어넘은 시기였고, 경제 성장에 힘입어 성장한 메디치 가 덕분에 예술가들이 든든한 후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교황의 힘은 막강했다. 이때까지도 종교화는 르네상스 화가들이 즐겨 그렸으며 화가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교회의 후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반면 북유럽은 구교로 대표되는 가톨릭과 신교인 칼뱅파 사이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심화되고 있었고, 거기에 독일의 마르틴 루터도 가톨릭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칼뱅과 루터로 대표되는 신교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확신 속에 교황의 권위와 성직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신앙을 추구했다.

 

이러한 종교 갈등은 종교 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종교 개혁은 유럽에 피바람이 불 정도로 격렬했고 유럽 지도를 달라지게 만들 정도로 르네상스 다음으로 이어진 큰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의 마음 또한 달라지게 할 정도로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는 신을 바라보고 추앙했던 종교화가 아닌 새롭게 자신의 세력을 넓혀나가는 신흥 상인 또는 민중의 취향을 반영한 예술로 변화를 맞는다.

 

라블레가 활동했던 프랑스도 새로운 문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당시 프랑스는 프랑수아 1세가 신교도를 탄압하고 있었다. 이런 혼란한 시기 속에 엄격하고 보수적인 교도의 수도사였던 라블레는 위마니슴(humanisme, 인간중심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중세적 금욕과 규율에 맞추는 삶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민중들은 신이 나오는 성스러운 이야기보다 인간의 정신을 지향하는 이야기를 선호했다. 그래서 『가르강튀아 연대기』와 같은 대중소설이 유행했고, 현란한 탐닉과 방종, 그리고 이단에 가까운 그로테스크한 문화에 열광했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그런 민중의 취향을 정확히 반영한 소설이다.

 

 

 

 Scene #3  팡타그뤼엘리슴으로 충만한 책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거인들은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데 열중하는 쾌락주의자에 가깝다. 금욕을 강조하는 가톨릭 사상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그뿐만 아니다. 도덕적이면서도 종교적 교화가 있어야 할 내용에 음담패설이 가득하다. 거인들은 일상적 현실이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환상 속에 놓여 있고 거칠고 천한 우스개 농담을 인문정신에 입각한 교양을 드러내는 행동처럼 생각한다. 이런 소설을 민중들이 킥킥 웃으면서 읽고 있으니 가톨릭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다. 일단 소설 내용이 가톨릭 사상에 맞지 않고, 외설스럽다. 게다가 가톨릭을 해학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한다. 그것도 수도원 출신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이단적인 내용의 글을 썼다. 신교와의 갈등이 커져만 가는 상황 속에 민중들이 이런 소설을 즐겨 읽는다면 구교 가톨릭 입장에서는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형국이었다. 결국, 라블레의 작품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훗날 라블레는 교황으로부터 사면을 받았지만 위대한 작품은 여전히 금서의 감옥에 갇혀야 했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이단죄에 몰려 종교 재판을 받은 적이 없다. 출판업자이자 위마니스트였던 라블레의 친구가 이단죄로 화형당할 정도였으니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았을 법한데 용케 살아남았다. 그리고 재취업도 성공했다. 사면 이후에 수도원에 복귀해 의사로 다시 일하게 되었다.

 

라블레는 먹고 즐기고, 음란한 거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중세적 질서와 사고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하였다. 라블레의 ‘그로테스크한 리얼리즘’은 중세적 지배에 대한 휴머니즘적 반역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가르강튀아』의 시작을 알리는 첫 페이지에 보면 이 작품을 ‘팡타그뤼엘리슴으로 충만한 책’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팡타그뤼엘리슴’이란 작중 인물 팡타그뤼엘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말 그대로 팡타그뤼엘의 성격과 가치관을 반영한 사상으로 라블레가 직접 만든 조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팡타그뤼엘리슴’은 좋은 음식을 잘 먹고, 육체적 만족을 추구하는 건강한 삶이다. 일반 사람보다 아주 더 많은 양의 음식과 술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거인들의 모습을 보면 지나친 폭식과 탐식에 가깝지만, 그래도 이들의 행동은 종교적 규율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자유롭다. 그동안 너무 틀에만 박힌 엄격한 종교에 갇혀있던 민중들은 이런 거인들의 삶을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한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정신적 탈출구로 라블레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Scene #4  라블레와 브뢰헬  

 

 

 

 

 

 

 

 

 

 

종교를 풍자하고, 해학이 넘치는 라블레의 작품은 피터르 브뢰헬의 그림과 비교하면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라블레와 브뢰헐.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종교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에 태어났고, 각자 작가와 화가로 활동했다. 브뢰헬도 신교를 옹호했는데 엄격한 분위기의 기독교 종교화 대신 민중의 삶을 담은 해학적인 그림을 그렸다. 라블레는 소설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전해 내려오는 속담이나 그리스 비극 작가의 작품 속에 나오는 문장들을 인용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틀어 표현함으로써 기독교를 우스꽝스럽게 비판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말 한 마디를 속담으로 인용해서 표현하는데 당시 유행하던 인문주의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동시에 현실과 동떨어진 채 학문에 집착하는 현학적인 당대 지식인들을 풍자하고 있다.

 

 

 

 

 

피터르 브뢰헬  「플랑드르 속담」  1559년

 

 

라블레가 속담을 세상을 풍자하는 언어적 도구였다면, 브뢰헬은 회화적 도구였다. 브뢰헬도 속담을 인용한 그림을 그렸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플랑드르 속담」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기만을 꼬집는 총 85가지 이상의 속담들이 하나의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상 풍경처럼 표현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속담을 표현하는 군상의 모습이 정상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우스꽝스럽다.

 

라블레의 소설과 브뢰헬의 그림에 관한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놀이’다. 『가르강튀아』 제22장은 가르강튀아가 즐겨하는 놀이가 목록 형태로 열거되는 내용이다. 가르강튀아에게 ‘놀이’는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희적 행위이다. 책에서 언급되는 놀이 종류만 해도 무려 217개나 된다. 페이지만 해도 10장에 이른다. 지금도 일부 놀이는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민속놀이로 알려져 있다. 놀이 종류 목록의 일부를 소개해본다.

 

 

 

 

 

피터르 브뢰헬  「아이들의 놀이」  1560년

 

 

네 장 플러시, 다른 무늬 카드 모으기, 패 따오기, 뺏어먹기, 패 버리기, 1백 점 내기, 피아노, 불쌍한 년 만들기, 불평분자, 용병 도박, 오쟁이를 진 서방, 몰아주기, 타로, 고문하기, 팽이 돌리기, 주사위 놀이, 체스, 목말 타기, 제비뽑기, 패가망신, 구슬치기, 공놀이, 올빼미 소리 내기, 술래잡기, 바보에게 똥가루 던지기, 불에서 쇠 꺼내기, 귀 꼬집기, 잔디 볼링, 똥 던지기, 수도사 놀이, 다시 벌리고 거꾸로 서기, 아홉 개의 손 놀이, 여왕 놀이. (110~119쪽)

 

 

 

브뢰헬은 「아이들의 놀이」라는 그림에서 80여 가지의 놀이 종류를 그렸다. 「아이들의 놀이」에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영혼이 없는 듯한 모습이다. 놀이를 즐기는 기쁜 표정이라기보다는 놀이 행위에 익숙해져 전혀 기쁘지 않는, 한편으로 지루하게 여기는 것 같다. 브뢰헬의 그림은 지금도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놀이 행위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라블레가 가르강튀아의 놀이 목록을 작성한 이유가 지나치게 놀이에 열중하는 자세를 경계하는 교훈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장치일 수도 있다. 즐겁게 노는 것도 좋지만, 학문 수양을 외면한 채 노는데 정신에 빠지는 태도는 ‘건강한 쾌락’을 위한 삶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중독’에 가깝다.

 

라블레의 작품은 과도한 속담 인용, 과장된 묘사 그리고 프랑스어를 모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장난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국내 독자들이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작품 중간에 나오는 암호 같은 시와 난해한 문장 등과 같이 여전히 의미가 불분명한 내용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국내 독자들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단어도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똥’이다. 거인들은 잘 먹고 잘 마시는 인물이라 배변도 좋은 편이다. 그래서 대화 도중에 똥과 관련된 표현도 능청스럽게 해댄다. 다음 인용한 문장은 똥 누는 사람을 주제로 가르강튀아가 만든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똥 누는 자,
설사하는 자,
방귀 뀌는 자,
똥 묻은 자,
빠져나온
똥덩어리를
우리에게
뒤덮는다.
더럽고,
냄새나고,
뚝뚝 떨어지는,
만일 너의
벌어진
모든 구멍을
떠나기 전에 닦지 않으면
성 앙투안의 불길이 너를 태워버리리라!

 

 

(79~80쪽)

 

 

라블레는 작품 속에 비판하고 싶은 대상을 ‘똥’과 연관시키는 문장으로 비꼬아 표현한다. 『팡타그뤼엘』 서문에 ‘똥싸개 비서관’(270쪽)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는데 교황 밑에 일하는 비서관을 가리킨다. 그들은 무척 방탕한 생활로 악명 놓았다고 한다. ‘똥싸개 비서관’은 불어로 ‘crotenotair’인데 ‘똥’(crotte)과 ‘와작와작 씹어먹다’(croquer)를 결합시킨 말장난이다. 이처럼 라블레는 똥을 누는 행위를 인물의 무능한 성격을 희화화하는데 사용했다. 이런 상스러운 표현은 허세 넘치고 지위 높으신 가톨릭 교인들의 혈압 올리는데 성공했고, 그들로부터 억압받던 신교도나 민중들은 무척 통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사회지배층에게 “엿 먹어라!”하고 욕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도 엿은 달콤해서 먹을 수 있지, 똥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거인들이 ‘똥’을 부끄럼 없이 언급하는 장면에 대해서 분변증에 속하는 증세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분변증은 똥과 배설에 집착하는 정신병이다. 그러나 라블레가 분변증에 속하는 증세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 해석하는 것은 금물이다. 진중권의 표현을 빌리자면 라블레 작품 속에 언급되는 ‘똥’에 관한 표현은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문학적 현상’에 가깝다고 본다. 엄격하고 부정부패가 심한 가톨릭이 지배했던 사회에 대한 분노와 피로감을 배설하는 카타르시스를 상징할 수도 있다.

 

 

 

 

 

피터르 브뢰헬  「교수대 위의 까치」  1568년

 

 

브뢰헬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교수대 위의 까치」 는 흉흉한 세상 속에서도 저항 정신을 잃지 않는 민중의 건강한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교수대는 신교도나 지배 세력에 저항하는 민중을 처형하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교수대 앞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서로 손 잡고 춤추는데 정신이 없다. 죽음 따위야 두렵지 않다는 의연한 자세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잊게 만든다.

 

 

 

 

 

춤추는 군중을 기준으로 왼쪽 구석에 살펴보면 음습한 그늘에 한 남자가 웅크린 채 앉아 있다. 남자의 자세만 보더라도 우리는 그가 똥을 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똥을 누는 남자도 교수대가 두렵지 않다. 오히려 지배세력의 강압적인 태도(교수대)를 우습게 여기고,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저항한다. 그것은 바로 교수대 앞에 당당하게 똥을 눈다. “에라이, 똥이나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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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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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멘토(Mentor)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기업에서는 선후배끼리 멘토와 멘티(Mentee)를 맺고 지식을 전수하고 상담까지 하는 것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원래 멘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오디세우스가 출전에 앞서 절친한 친구인 멘토에게 아들 텔레마코스의 양육을 부탁하고 떠났다. 멘토의 훌륭한 교육 덕분에 텔레마코스는 걸출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멘토는 선생을 넘어 조언자이자 친구이고 때론 아버지의 역할까지 하는 사람을 일컫게 됐다.

 

그러나 오늘날에 멘토는 조언자 혹은 상담자라는 의미로 축소되는 경향이 짙다. 직장 선배로서 상사의 지시에 마지못해 맞은 멘토가 아버지나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멘토라는 단어가 스승과 혼용되는 것도 마뜩찮다.

 

하지만 스승은 다르다. 멘토가 머리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경험과 지식의 전수라면 스승은 가슴을 열고 영혼을 잇는 무게가 실린다. 다산 정약용은 20년의 유배생활 중 많은 젊은이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는데, 특히 황상이라는 애제자가 있었다.

 

나이 70이 넘어서도 황상은 책을 놓지 않았다. 책을 읽고 베껴 쓰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신분이 미천했던 까닭에 그의 이런 모습은 주위의 비웃음을 샀다. “책만 읽고 있으면 떡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며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스승이 내려준 고귀한 선물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산이 황상에게 처음 문사(文史)를 닦도록 권했을 때 황상은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 둘째 막혀있고, 셋째 미욱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다산은 “공부하는 자는 세 가지 큰 병통이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첫째 외우기를 빨리하면 소홀히 하는 폐단이 있고, 둘째 글짓기를 빨리하는 사람은 부실하게 되는 폐단이 있으며, 셋째 이해가 빠른 사람은 대충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황상은 스승의 말씀을 삼근계(三勤戒)로 마음에 새겨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스승은 그러면서 부족한 것들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면’ 풀린다고 했다. 스승이 내린 이 삼근계(三勤戒)는 제자의 인생을 바꿔놓는 선물 꾸러미였다.

 

다산은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시골의 어린 청년에게, 남에게 뒤처지는 재주를 근면과 열성과 끈기로 극복하는 것이 참된 공부법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말이 황상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자극으로 다가왔겠는가.

 

황상은 다산을 스승으로 유배 생활 내내 극진히 모신다. 매사에 자신이 부족하고 소극적이었던 소년을 다산은 달래기도 하고 꾸지람도 하면서 잘 보살펴 준다. 황상도 스승의 참모습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가르침을 철두철미하게 지켜나간다. 이렇게 하면서 18년이 흘러 제자 황상은 30세에 이르고, 다산은 56세의 중년이 된다. 18년 만의 유배에서 풀린 스승은 전남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쉰다. 황상은 다산이 좋아하는 차를 정성껏 준비해 매년 다산이 사는 고향으로 보내곤 한다.

 

황상은 스승을 마냥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스승을 뵙고자 찾아 나선다. 스승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 번 뵈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열흘을 걷는 긴 여행에 오르게 한 것이었다. 18년 만의 스승과 제자의 꿈같은 해후를 만끽하고 황상은 다시 강진으로 떠난다. 그러나 귀향 도중에 스승의 부음을 듣고, 직접 상을 치른 후 강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0년 지난 후 58세가 된 황상은 스승이 그리워 열흘길을 걸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와 스승의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린다.

 

스승의 말씀을 들은 황상은 60년 세월이 지나도록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회고한다. 자상하게 이끌어주는 스승의 말씀이 삶을 바꾸어준 것이다. ‘삼근계’는 스승과 제자를 이어주는 확고한 신뢰의 끈이 되었다. 믿음이란 그토록 단단하고 강인한 것이다.

 

교육이 불신 받고 학교가 위기인 오늘, 과연 선생님들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세상이 변하다 보니, 스승과 제자의 관계 또한 예전과 같기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지나치게 도구화되고 형식화된 만남만 지속하면 인격적 감화와 도덕적 감응을 주고받는 본질로서의 교육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 그저 이루어지는 관계는 없다. 가는 정 오는 정이 켜켜이 쌓여 관계를 만들어간다. 진심과 성의라야지, 다른 꿍꿍이가 들어앉으면 중간에 틀어지고 만다.” (17쪽)

 

도타운 정과 깊은 관심을 가진 스승만이 훌륭한 제자를 키워 낼 수 있다.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학문의 지혜를 주는 스승일수록 제자들의 감동이 크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가르쳐도 되고, 고생될 것이 없는 쉬운 일이 교육이었다면 아무도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조금 서툴면 깨칠 때까지 기다려 주고, 빗나가면 바로잡아 주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독여주면서 잘하라 채찍질해 주는 사람이 진정한 스승이다. 비가 내려야 초목이 쑥쑥 자라듯, 제자가 잘되도록 제때에 바로 잡아주는 스승이 많아야 한다.

 

인생의 암흑기에 스승이 없다면 삶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스승의 존재는 어둠 속에서 만나는 불빛과도 같다. 어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부지런한 게 좋은 거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이든 정보든 내게 부지런하라고 말할 스승은 곳곳에 넘친다. 다만 내게 황상 같은 우직함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둔하고, 막히고, 어근버근한 그 우직함을 황상에게서 빌려오고 싶다. 스승 사랑 담뿍 받고 그 사랑 실천한 황상의 어진 마음을 본받고 싶다. 스승과 제자 간의 멋스러운 관계를, 그들이 속내에 품었던 따뜻한 생각과 마음을, 그들이 연출해 냈던 삶의 진정성을 따라하고 싶다. 이런 스승과 제자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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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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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임금님이 벌거벗은 이유

 

 

 

 

빌헬름 페더슨이 그린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삽화 (1849년)

 

 

 

벌거벗은 임금님은 어쩌다 벌거벗게 되었을까. 단순히 재봉사가 임금님의 재물을 노리고 일으킨 사기행각에 넘어갈 정도로 순진했던 것일까. 임금님은 매일 거울을 바라보며 착한 사람만 볼 수 있는, 세상에거 가장 멋진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자만심이 크면 클수록 그 자만심에 의해 판단력은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임금님이 벌거벗게 된 것 또한 주변에 바른 말을 하는 인물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기꾼 재봉사는 임금님의 자만심을 역이용해 그를 홀라당 벗김으로써 임금님의 자아도취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군중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나오는 '로얄 포르노'를 볼 수 있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모습은 ‘투명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타인에게 온전히 보여주려는 성향. 오늘날 ‘투명성’은 중요한 화두다.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투명성을 강조한다.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등의 발달로 정보가 모두 동등하게 공개되고 무제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는 믿음이 생겼다.

 

 

 

 Scene #2  지금도 일기를 쓰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마트폰, 페이스북을 보면서 타인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고, 하루에 있었던 일상까지 공개된다. 한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업데이트시킨 글과 사진을 모은다면 한 권의 그림일기로 만들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일기장을 많이 썼다. 기본적으로 여섯, 일곱 줄 정도까지 쓰기 위해서 지금으로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내용을 채우곤 했다. 아침에 먹은 음식 메뉴를 쓰면서 일기는 시작되고 매일 등교하면 만나게 되는 옆집 친구와 놀이터에서 놀았던 것을 쓴다. 가끔 평소에 일어날 수 없는 특별한 경험담을 쓸 때도 있다. 2박 3일 가족과 함께 멋진 곳으로 여행하는 날에는 평소보다 일기 분량보다 많아진다.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많다면 일기장 한 장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이렇게 일기를 공들여 썼는데도 이상하게 일기장이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공개되면 무척 부끄러워했다. 일기장은 단순히 경험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느꼈던 자신의 감정도 기록하는 은밀한 사색 노트이기도 하다. 부모님, 친구 때문에 감정이 상한 일이 있으면 말로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일기장에 쓴다. 그렇기 때문에 일기장이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순간, 부끄럽고 얼굴이 붉어지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지금 우리는 어떤가. 당신은 어린 시절처럼 일기를 매일 쓰는가. 부지런한 성격이 아니라면 매일 일기를 쓰는 일을 부담스럽게 여길 것이다. 아니면 바빠서 여유롭게 일기 쓸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도 일기를 쓰고 있다. 단지 일기장에 쓰지 않을 뿐이다. 트위터, 페이스북에 날마다 일기를 쓰고 있다. 그것도 24시간 내내. 어렸을 때 일기장에 썼던 내용과 비교하면 별반 다르지 않다. 친구와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은 점심 메뉴를 소개하고, 음식의 맛을 언급한다. 그림일기였더라면 음식을 직접 그림으로 그렸지만, 이제는 간편하게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으로 촬영할 수 있다. 그 다음 내가 있는 지역이나 장소도 언급한다. 그곳에 간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필수다. 매일 기분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일하는 회사직원 때문에 감정 상하는 일을 겪었다. 자신을 화나게 만든 회사직원을 향한 분노는 페이스북으로 표출한다. 이런 다양한 사진과 글이 업데이트되면 페이스북 친구(줄여서 ‘페친)들은 ’좋아요‘ 버튼을 꾹 눌러 주거나 댓글을 달아준다. 페이스북에 쓰는 일기가 친구들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Scene #3  디지털 판옵티콘에 사는 벌거벗은 빅 브라더

 

일기 비슷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글과 사진이 타인에게 공개되는 페이스북의 기능. 우리는 자신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한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인맥을 형성해서 자신의 존재를 널리 홍보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소셜 네트워크 덕분에 많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타자와 이질적인 것이 제거된 투명사회에서 발생하는 환영이다. 긍정적인 요소만 부각된 채 부정성이 제거된다.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26쪽)

 

정보가 많이 공개되면 민주주의가 발전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사회는 암울하다. 특정 정보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공유될수록 사회 내 갈등과 불평등이 심화된다. 정보를 가진 자와 없는 자 간의 비대칭적 관계는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기괴한 세상과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빅 브라더(big brother)를 태어나게 했다. 판옵티콘은 정보를 가진 감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정보가 없는 자를 감시 할 수 있는 형태. 정보가 없는 자는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 자신이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규칙을 더 잘 지키게 되고, 결국은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빅 브라더는 감시 체제를 통해 권력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감시사회는 표현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소셜 네크워크의 장점은 민주주의 발전에 요긴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정보를 공개하고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판옵티콘 감옥은 허물어지고,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빅 브라더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판옵티콘에 살고 있다. ‘감시하는 괴물’ 빅 브라더를 무서워했던 우리는 어느새 그 괴물이 되어버렸다. 남이 나를 감시하지 않아도 내가 나에 대한 정보를 매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판옵티콘 감시자보다 더 효과적으로 자기를 감시하는 것이다. 즉, 권력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하고 있다. 이 거대한 전시장이 바로 ‘디지털 판옵티콘’이다. 디지털 시대에 맞아 새롭게 개장한 거대 감옥이다.

 

이곳에서는 빅브라더와 판옵티콘 수감자의 구분이 사라진다. 서로 격리된 상태로 유지되는 판옵티콘 감옥과 반대로 디지털 판옵티콘 속에 사는 현대인은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다. 나와 타자 간에 형성되는 이질감은 제거된다. 그 대신 인맥 네트워크가 구축되면서 친밀성은 높아진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면(persona)을 벗는다.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의 가면을 벗어 던져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정보’로 전환시켜 공개한다. ‘나’를 드러낼수록 ‘나’를 향한 타인의 관심은 높아진다.

 

디지털 판옵티콘에 살고 있는 우리는 벌거벗은 빅 브라더이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빅 브라더. 완전히 발가벗겨진 투명한 '유리 인간'이다.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같아지는 획일적 인간형이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투명의 강요 아래에서는 개인이 스스로 자신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기를 원한다.

 

 

 

 Scene #4  강요되는 투명성을 거부할 수 있는 반항 정신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도덕적 심급이 허물어지면서 그 자리를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명령이 대신한다.” (98~99쪽)

 

지금 우리는 벌거벗은 빅 브라더가 되어 모두 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디지털 판옵티콘에 거주하는 벌거벗은 빅브라더는 유난히 긍정성을 강조한다. 서로 간의 관계를 이질적으로 만드는 부정성을 사라졌기 때문에 괴로움과 고통의 감정을 느낄 줄 모른다. 아니, 애써 외면한다. 자신이 벌거벗은 상태임을 알면서도 멋진 옷을 입었다고 자아도취에 빠지는 임금님처럼 벌거벗은 빅 브라더는 부정성을 외면하고, 긍정성을 더욱 강조한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성만 보는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디지털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민낯이나 다름없는 부정성을 전혀 보지 못한다. 심지어 타인의 부정성마저도. 긍정성만 쫓는 투명성의 시스템에 길들여지면 진실과 정직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상실될 우려가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과연 진정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성숙한 민주사회는 타인의 부정성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진실과 정직이 상실된 사회는 신뢰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신뢰가 퇴색된, 서로 감시하려는 투명사회. 이러한 사회에 공감의 소통보다는 갈등과 불신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타인의 부정적 감정에 쉽게 대응하지 못하고 꺼려한다. 결국 투명한 유리로 된 벌거벗은 빅 브라더는 부정성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채 산산조각 부서질 것이다.

 

긍정성이 증식되는 투명사회에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한 아이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착한 사람만 보인다는 멋진 투명 망토를 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의 눈은 그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을 드러낸 임금님이 보였다. 어린 꼬마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곧이곧대로 말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절대 권력의 무서움을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것을 용기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어쨌든 어린아이의 용기 있는 한 마디로 온 나라 사람들이 임금님이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어딘가.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라고 말한 카뮈의 반항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투명성의 강요와 명령을 거부하고 대면할 수 있는 반항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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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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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1762년 윤5월 13일. 창경궁에서는 조선왕조사의 가장 처참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조선의 사백 년 종사가 다 망하겠지만, 네가 죽으면 종사는 보존할 수 있으니, 네가 죽는 것이 옳느니라.” 노기등등한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했다.

 

의연하던 세자는 끝내 무너진다. 혈육의 정에 호소하며 매달렸다. “아버님, 어머님, 잘못하였느니, 이제는 하라 하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그러나 영조는 매몰찼다.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자 직접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자물쇠를 잠근 뒤 대못을 박았다.

 

그 여드레 뒤 세자는 숨진다. 복날이 낀 여름이었다. 세자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컴컴한 절망 속에서 죽어 갔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사도세자. 그는 영조가 마흔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유일한 혈손이었다. 7월의 여름 무더위에 사방팔방으로 꽉 막힌 뒤주 안에서 그가 겪었을 마음과 몸의 고통이 마치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의 행적이나 역사나 조상에 대한 관점은 어느 면을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리 나온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든 이유에 관한 가설도 그렇다. 사도세자는 왜 ‘뒤주의 왕’이 되어야만 했을까?

 

학계에선 그동안 사도세자가 미쳐서 영조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광증설'과 사도세자가 우수한 자질을 가졌지만 집권층인 노론 세력에 맞서다 억울하게 죽었다는 '당쟁희생설'(이덕일)이 제기됐다. 하지만 두 가지 가설 모두 확고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정병설 교수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역사서와 개인 문집 등 사료를 바탕으로 ‘광증설’과 ‘당쟁희생설’ 모두 반박한다. 사도세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영조로서도 아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주장을 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칼을 차고 영조를 죽이려고 하다 역모에 걸렸다는 가설에 힘을 실었다.

 


 Scene #2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영조는 맏아들이 죽은 뒤 7년 만에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곧바로 원자(元子)에 책봉했다. 그리고 제왕 교육을 하기 위해 그를 멀리 떼어놓고 신하에게 맡긴 채 별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결국 부모와 자식은 낯선 관계가 됐다. 그렇다 보니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가 늘 무서웠다. 영조는 쭈뼛쭈뼛하는 아들을 심하게 혼냈다. 아버지에 대한 사도세자의 두려움은 정신질환으로 이어졌다. 영조의 질책을 받으면 사도세자는 사람들을 때리거나 죽임으로써 스트레스를 풀었다. 영조는 더욱 분노했고 이것이 사도세자의 목숨을 빼앗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결국 어린 시절 부모의 무관심이 사도세자의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13일부터 21일까지 꼬박 8일 동안 뒤주에 갇힌 28살의 피 끓는 청춘, 사도세자는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하고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 영조와 생모 선희궁 영빈 이씨에 대한 끝없는 한과 원망에 속 깊이 소리 없이 울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미움에 대한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야했던 사도세자는 비극 그 자체였다. 성실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영조의 성격과 반대로 사도세자는 밥 먹기는 좋아하고 책을 싫어한 예술가형 기질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절대로 섞일 수가 없는 물과 기름이었다. 영조는 아들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세자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세자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하들 앞에서 세자를 꾸짖고 조롱하기 일쑤였다. 세자의 광증이 깊어질수록 부자의 갈등 골도 깊어져만 갔다. 세자에 대한 영조의 믿음은 점점 잃어가고 오히려 세자의 심장에 대못을 박는다. 대못을 박아놓은 뒤주에 갇히기 전에 영조는 이미 어린 사도세자를 더욱 외롭게 했고, 거대한 궁궐 안에 갇히게 만들었다.

 


 Scene #3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
 “어찌 그러하니?”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나이다.”
 “어찌하여 상하였니?”
 “사랑치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
 “내 이제는 그리 않으리라.”

 

 

(혜경궁 홍씨  『한중록』 재인용, 정병설 『권력과 인간』중에서, 150쪽)

 


사도세자는 왕이 될 수 없었다.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 다음으로 궁궐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에게 궁궐은 그저 서러움이 쌓여 있는 땅이었다. 절대 권력의 왕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슬픔과 서러움을 자신의 것으로 껴안은 눈물의 왕이었다.

 

사도세자는 참으로 비운의 주인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생전 그런 취급을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조가 뜻을 펼쳐줬다 하지만 승자를 중시하는 역사의 속성 때문에 정신이상자로 역사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 사이의 불신과 두려움, 거기에 더하여 최고 권력을 둘러싼 갈등까지 겹쳤으니 무슨 일이든 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마흔 둘에 얻었다. 늦게 얻은 아들인지라 기쁨은 남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은 피붙이를 얻었다는 데서 온 게 아니라 나라를 맡길 후계자를 얻었다는 데서 온 것이었다. 권력이 친자식에 대한 부정(夫情)을 억누른 셈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권력을 위해 아들을 죽이는 기이한 역사. 그만큼 권력은 무서운 것이다.

 

 

 

(*) 홍사용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구절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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