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다니구치 지로의 『고독한 미식가』(이숲, 2010년)를 보면서 싱거운 음식을 먹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혼자 밥을 먹으면서 음식의 맛을 음미하는 주인공 고로의 삶은 내 취향에 가까워서 공감은 했지만, 맛을 느끼는 고로의 표정이 단순하게 그려져서 그런지 음식들이 맛있게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는 그렇지 않다. 『고독한 미식가』에 나오는 식당들은 만화 원작자인 구스미 마사유키가 직접 가보고 음식을 먹어 본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일부 식당들은 운영되고 있다. 드라마 에피소드 한 편 끝나면 원작자가 에피소드의 배경이 된 실제 식당에 가서 음식을 소개하는 내용의 방송코너가 나온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음식이 나오는 드라마 한 편이 끝난 뒤에 이어서 ‘찾아라! 맛있는 TV’가 방영되어 맛집을 소개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드라마에 나오는 진짜 음식들이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는 이야기가 있는 ‘먹방’이다.

 

 

 

 

 

고로 역을 맡은 배우 마츠시게 유타카는 정말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다. 그를 촬영하는 카메라 앵글은 배고픈 시청자를 유혹한다. 카메라는 음식을 먹는 고로의 모습을 최대한 가까이 촬영한다. 절대로 야식이 당기는 야심한 밤에 드라마를 보면 안 된다. 특히 일본에 오래 살아서 그곳 음식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생각하기에도 보는 사람의 미각을 자극하게 만드는 먹방을 가장 잘 표현한 만화를 꼽는다면, 오가와 에츠시의 『신 중화일미』(학산문화사, 2004년-절판)다. 1999년에 국내에 첫 선을 보인 TV 애니메이션 ‘요리왕 비룡’의 원작이다.

 

 

 

 

 

 

 

199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이 만화를 알 것이다. 올해 스무 살인 친구들은 이 만화를 잘 모를 수도 있다. 이 만화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대 차이를 느끼게 된다. 당신이 요리왕 비룡 만화를 꼬박꼬박 챙겨봤고, 음식을 맛볼 때마다 흘러나오는 웅장한 중국풍 BGM를 콧소리로 낼 수 있다면 아저씨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아저씨 축에 들어간다. 만화 전문 케이블 채널에 질리도록 방영해준 재방송도 챙겨봤다. 

 

 

 

 

 

 

중국 음식이 나오는 만화가 이렇게 큰 인기를 얻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특히 중국무협영화에 나올법한 휘황찬란한 요리 기술과 음식 맛에 깜짝 놀라는 인물들의 과장된 묘사는 수많은 패러디와 유행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찮은 요리 재료마저 최상급의 별미 음식으로 만드는 비룡은 ‘사기캐’(흠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한 캐릭터를 뜻하는 은어)에 가깝다. 비룡은 절대미각의 소유자다. 음식을 한 번 맛을 보면 거기에 들어간 모든 재료, 심지어 조미료마저 다 맞춘다. 어렸을 때부터 비룡은 자신이 어머니이자 음식점 국화루의 주방장인 미령이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자랐는데,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만든 음식의 맛을 정확하게 기억해 자신이 직접 만들기도 한다.

 

 

 

 

 

 

"아.. 아니! 맛이 살아있다!" (『신 중화일미』)

 

만화는 동네 중국집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화려한 중국 음식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요리기술을 가진 주인공이 대결구도에 뛰어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런 만화를 어찌 안 볼 수가 없겠는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비룡의 요리 능력은 향상된다. 이제는 ‘전설의 요리 도구’까지 등장하면서 만화는 점점 산으로 간다. '요리 만화'가 점점 ‘요리 판타지 무협 만화’로 요상하게 변한다. 그리고 비룡이 만든 음식을 맛보면서 지나치게 감탄하거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인물들의 표정은 만화가의 신의 한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각을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다. 비룡이 만든 음식들이 상상 속에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먹음직스러운 느낌이 나는 것이다. 실제로 오가와 에츠시는 만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최대한 맛을 느끼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밝혔다. 비록 우스꽝스러운 면은 있지만, 만화를 보는 독자는 자신도 만화 속 음식을 직접 맛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한다.

 

 

 

 

 

 

천하의 비룡도 뛰어난 맛에 굴복해서 나오는 과장된 표정 굴욕을 피하지 못했다.

(『신 중화일미』)

 

만약에 오가와 에츠시가『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처럼 음식을 평소대로 식사하듯이 먹는 인물들의 표정을 그렸다고 상상해보라. 음식을 한 입 씹으면서 맛을 음미할 때 나오는 대사도 인물의 표정에 어울려야 만화의 재미가 산다.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그냥 입 안에 음식물을 씹으면서 ‘음.., 이거 정말 맛있어!’라고 조용히 말하는 사람(『고독한 미식가』)과 손을 쥔 숟가락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우걱우걱 음식을 탐스럽게 먹으면서 “아니! 세상에 이런 맛은 처음이야. 마치 음식이 살아있는 것 같아. 정말 맛있어서 또 먹고 싶어!”라고 흥분하는 사람(『신 중화일미』). 두 사람의 대사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방금 전에 『고독한 미식가』를 싱거운 음식으로 비유했다면, 『신 중화일미』는 환상의 진수성찬이다. 천국에 가면 맛 볼 수 있는 환상의 음식이다. 여기서 다만 『고독한 미식가』의 작품성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싱거운 음식은 조미료가 팍팍 들어가고, 순전히 자극적인 맛이 감도는 음식보다 맛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서 싱거운 음식을 찾는다. 이런 음식도 자주 먹으면 소중한 맛을 느낀다. 그동안 자신이 짠맛에 길들여졌음을. 짠맛이 덜한 음식도 맛있어 보인다. 상대방이 맛 없다고 느껴지는 음식이 내 입맛에 맞을 수도 있다.

 

『신 중화일미』에 나오는 음식들이 입맛 까다로운 상류층 사람들이 선호하는 고급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룡은 맛이 아닌 최상품의 재료와 화려한 장식으로만 내세우는 속물적인 요리를 싫어한다. 그리고 맛으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해치는 음식도 경계한다. 비룡의 목표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맛으로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비룡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초라한 재료로 훌륭한 맛을 내는 음식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값비싼 재료가 여러 가지 들어가고, 유능한 요리사의 손에 만든 음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맛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음식 중에는 먹는 사람의 건강을 망치는 것도 있다. 결국 『신 중화일미』도 결국 『고독한 미식가』처럼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서 잊고 있던 맛의 진정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소박한 음식도 맛이 있고,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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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4-12-01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독한 애서가가 고독한 미식가를 만나셨네요ㅋㅋㅋ 멋진데요ㅎ

cyrus 2014-12-01 22:11   좋아요 0 | URL
혼자서 밥 잘 먹는 만화 주인공이 혼자서 독서하는 제 모습이 비슷해서 호칭을 지어봤습니다. ^^
 

 

 

지난주에 우리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은 소식들이 많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세상을 참 멋지게 살다 간 그를 떠나 보내야한다는 사실에 믿겨지지 않아 눈물을 흘렸고, 원칙과 정의가 무참히 짓밟히는 뉴스에 스트레스가 더 쌓여만 갔다. 생각해보니 우릴 기분 좋게 해준 좋은 행복한 뉴스는 없었던 것 같다. 아예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희락’(喜樂)보다 ‘노애’(怒哀)만 불러일으키는 세상에 익숙해진 탓일까. 마음이 어수선한 상황 속에 뜬금없이 ‘그’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에 올랐을 때 세상이 제대로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말한 ‘그’는 바로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 찰스 맨슨이다.

 

그는 1969년 ‘맨슨 패밀리’로 불리는 자신의 일당을 데리고 35명을 직접 살해하거나 지시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45년째 캘리포니아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올해 맨슨의 나이는 80세인데 자신보다 무려 54세 연하인 20대 여성과 옥중 결혼을 올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레인 버턴이라는 이름의 20대 여성은 맨슨의 무죄를 주장하며 그의 방면 운동에 힘쓴 인물이다. 맨슨이 감옥에 갇혔어도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일부 세력이 남아 있다. 버턴도 맨슨 추종자의 한 사람이다.

 

희대의 살인마, 그것도 맨슨이 나이 차가 나는 여성과 옥중 결혼을 한다는 소식은 엄청난 충격이다. 한동안 잊고 있던 흉악범의 이름이 다시 주목받으면서 맨슨의 살인사건을 언급할 때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안타까운 인물도 같이 거론되었다. 1969년에 맨슨 패밀리의 침입으로 무참히 살해된 영화배우 샤론 테이트다.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였던 샤론은 살해 당시 임신 8개월 만삭이었다.
 
맨슨의 옥중 결혼 소식을 알리는 각종 언론 기사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샤론 테이트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충격적인 외신을 국내 어느 언론이 먼저 보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여러 언론들이 맨슨과 관련된 소식을 발 빠르게 전했다. 그런데 글자만 조금 다를 뿐이지, 대부분 맨슨 관련 기사들이 ‘복사하기+붙여넣기’(Crtl+C, Ctrl+V) 기능으로 후딱 만든 느낌이 났다. 무기징역으로 감옥에 갇힌 세기의 살인마의 옥중 결혼식 그리고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여배우 살인 사건까지 이 모든 내용들은 기사 조회수를 높이게 할 수 있는 적합한 소재들이다. 그리고 맨슨과의 결혼을 원하는 버턴을 '미모'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남성 독자들의 조회수를 높이도록 만들었다.  아마도 맨슨의 옥중 결혼 소식에 유독 호들갑을 떨었던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을 것이다. 불과 일주일이 지났는데 맨슨을 언급하는 기사가 족히 400건 이상은 넘는다. 평소보다 과도한 취재 열기다. 불이 날 정도로 빠른 기자들의 타이핑과 센스가 넘치는 문장력 덕분에 ‘찰스 맨슨’의 이름은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당당히 1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정작 중요한 내용은 없고, 그저 맨슨 사건을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기사가 많았다. 앵무새가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처럼 뻔히 아는 내용만 적었다. 이런 형편없는 기사를 읽는다는 것은 시간, 스마트폰 데이터 용량이 아깝다. 정확한 사건의 정보를 전달하기보다는 그저 조회수를 높이고 싶어한다. 도배에 가까울 정도로 별 쓸데없는 내용만 똑같이 옮겨 쓴 기사를 쓰는 사람들은 우리는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인간쓰레기를 소개하는 기레기라니.

 

 

 

 

 

기레기는 ‘기자’라는 명함이 아까운 존재이다. 그들이 쓰는 글은 정보의 정확성이 떨어진다. 오로지 특종을 위해서 사건의 실체가 사실(fact)인지 아닌지 검증하지 않은 채 보도한다. 샤론 테이트를 살해한 범인으로 맨슨이라고 소개하는 기사가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맨슨과 샤론 테이트가 함께 언급되는 글을 읽게 되면, 독자는 맨슨이 샤론 테이트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특히 간결한 핵심 메시지로 압축된 헤드라인만 보면 맨슨을 모르는 독자들이 오해할 소지가 있다. 예를 들면 “여배우 샤론 테이트 살해, 찰스 맨슨 옥중 결혼식”이라거나 “샤론 테이트 살인마 찰스 맨슨, 54세 연하 여성과 옥중 결혼” 같은 비슷비슷한 문구의 헤드라인이 눈에 띈다. 아무 기사 하나 골라서 베끼면 기자가 아닌 누구나 기사를 작성하는 ‘기레기 코스프레’가 가능하다.

 

 

 

 

 

 

 

 

 

 

 

 

 

 

 

 

찰스 맨슨이 어떻게 살인마가 되었는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콜린 윌슨의 『현대살인백과』(종합출판 범우, 2011년)이 참고하는 것이 좋다. 샤론 테이트가 살해되는 장면도 나름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샤론 테이트는 맨슨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맨슨 패밀리 소속인 수잔 앳킨슨과 텍스 왓슨 그리고 나중에 페트리시아 클렌윙켈까지 가담하여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이들은 맨슨의 살해 명령 지시를 받고 우연하게 샤론 테이트의 집에 침입하여 자신들만의 광기의 무대를 펼쳤다.

 

『현대살인백과』는『아웃사이더』(1997년, 범우사)의 저자가 1962년에서 1982년 사이에 일어난 세계 각국의 살인 범죄 사건을 모아 소개하고, 분석한 책이다. 비록 21년 전에 나온 책이라서 오래된 정보라는 점 그리고 하나의 범죄 사건을 정확하게 알기에는 분량이 약간 적은 감이 있다. 그래도 잔인한 범죄를 과도하게 묘사하지 않고 사건을 냉철하게 분석하려는 필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보도의 전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자라면 흉악범죄 사건을 윌슨처럼 최대한 중립적으로 소개해야 한다. 사건 담당 기자라면 살인자가 어떻게 피해자를 죽였는지 묘사하지 말고, 살인자가 왜 피해자를 죽이는 행동을 저질렀는지 심도 있게 분석하는 보도의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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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혜성 이야기 - 역사 속의 혜성, 혜성의 과학사
안상현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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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혜성을 제대로 알아야 할 때    

 

혜성은 우주 질서를 깨뜨리는 무서운 존재였다. 옛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긴 꼬리를 가진 혜성을 불길하게 생각하는 미신이 있었다. 전염병이나 전쟁, 홍수, 가뭄, 또는 왕의 죽음을 가리키는 징조로 여겼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신라에서도 비슷한 속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향가 ‘혜성가’는 혜성의 등장과 왜군의 침공이 겹쳐 신라인들이 두려워하자 융천사라는 도사가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노래다. 융천사가 혜성가를 부르자 혜성도 사라지고, 왜군도 물러갔다.

 

얼마 전 로제타 위성이 혜성의 모습을 촬영해 지구로 전송하는데 성공했다. 로제타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65억km를 비행해 지난 8월 태양을 공전하는 이 혜성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2주 전에 혜성 착륙을 시도했고 위성에서 분리된 탐사로봇 ‘필레’를 7시간 동안 약 22.5km를 낙하해 처음으로 혜성 표면에 착륙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경이로운 일이라도 아는 만큼 감동이 큰 법. 역사상 기념비적인 이벤트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기본적인 내용을 알면 좋다. 국내에 나온 과학도서 중에 혜성을 전문적으로 소개한 책을 찾기가 생각보다 힘들다. 칼 세이건의 『혜성』(해냄, 2004년)이 있지만, 혜성에 관한 최신 지식을 얻기에는 다소 부족한 책이다. 혜성의 실체를 포함해서 최근에 천문학계가 주목하는 혜성까지 알 수 있는 책으로 안상현 박사의 『우리 혜성 이야기』(사이언스북스, 2013년)가 적합하다.

 

 


 Scene #2  혜성 꼬리는 딱 하나뿐이다?

 

혜성의 구조는 크게 핵, 코마, 꼬리로 나누어지는데, 실제 몸체인 핵의 정체를 밝혀낸 사람은 미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휘플이다. 1950년 휘플은 혜성이 얼음과 가스, 먼지가 뭉쳐진 ‘더러운 눈덩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주장은 1986년 유럽우주국이 핼리 혜성을 관측하기 위해 보낸 탐사선 지오트의 근접 촬영을 통해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혜성핵은 얼음과 먼지로 구성돼 있으며 크기는 수㎞에서 수십㎞정도다. 이런 핵을 가진 혜성이 태양 근처에 오면 태양열을 받아 가스와 먼지가 증발하여 코마(coma)를 형성하게 된다. 핵의 크기는 수십㎞인데 비해, 핵을 에워싸며 밝게 빛나는 코마는 태양에 가까워지면서 핵의 1만 배가 넘는 크기로 자라기도 한다. 코마가 태양빛과 태양에서 날아오는 입자에 의해 뒤로 밀려나게 되면 혜성의 꼬리가 생긴다. 우리 사진에 볼 수 있는 혜성은 한 개의 꼬리만 보인다. 혜성의 꼬리가 한 개로 이루어진다고 착각하기 쉽다. 혜성의 꼬리는 두 개다. 이온 꼬리와 먼지 꼬리로 이루어져 있다. 평소에는 다른 행성들처럼 태양을 공전하지만, 어떤 이유로 긴 타원의 궤도를 갖게 되고 태양 근처로 다가오면 표면의 얼음과 먼지가 증발하면서 꼬리가 생기게 된다.

 

태양계를 구성하고 남은 물질들이 모여 있는 오르트 구름(Oort Cloud)에는 약 1조 개의 혜성핵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별이 지나가면서 오르트 구름을 흔들면 구름의 일부분이 깨어지면서 수많은 혜성들이 탄생하게 된다. 대부분의 혜성은 한 번 태양에 접근했다가 멀리 사라지는 수천 년 이상의 공전주기를 가진다.

 

 


 Scene #3  우리 조상들도 핼리 혜성을 알았다  

 

‘우리 혜성’이라는 제목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핼리 혜성, 헤일-밥 혜성 등 언론에 소개되는 혜성들 중에 외국 이름이 상당히 많다. 그만큼 혜성의 실체를 알아내고, 지금까지 혜성 표면에 착륙을 시도하는 엄청난 탐사가 이루어지기까지 서양 천문학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혜성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아직 독자적인 우주 사업을 실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서 이번 혜성 탐사 소식이 그들의 잔치인 마냥 시큰둥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혜성에 관심을 가졌고, 서양 천문학사에 꿀리지 않을 뛰어난 천문학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개천절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애국가에서도 하늘의 보호를 청할 만큼 우리 민족의 ‘하늘 사랑’은 남다르다. 그럼 우리 민족은 단지 하늘을 숭배하고 사랑하기만 했을까. 사실 우리 조상들은 누구보다도 과학적으로 하늘을 관측했으며 이를 많은 기록과 유물로 후세에 남겼다. 이 같은 조상들의 천문학 성과들이 최근 들어 활발히 연구되며 우리 조상의 천문학 실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음도 입증되고 있다. 우리 조상들도 서양 못지않게 혜성에 관심이 높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적 문헌 속에 혜성을 관측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서울시 유형문화재 222호로 지정된 성변등록은 1759년 영조 당시 핼리 혜성이 나타난 사건을 그림과 함께 상세히 기록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소중한 사료다. 이 사료는 1759년 3월 5일 출현한 핼리 혜성이 3월 29일 소멸할 때까지의 변화상을 빠짐없이 관측 기록했다. 날짜별로 혜성의 이동 경로, 혜성의 꼬리 길이, 모양, 색깔까지 자세히 기록했고 3월 27일 혜성이 보이지 않는데도 혜성이 소멸한 것으로 추측할 뿐 관측을 계속해 29일 소멸을 확정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방대한 자료 일부는 유실됐고, 이후 복사본으로 전해오던 지금의 기록만 남아있다.

 

이렇듯, 우리나라도 독자적인 천문 관측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소중한 명맥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많던 유산들이 ‘혜성’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란으로 인해 파괴되거나 일제 강점기에 기록이 남아있는 사료와 각종 기구들이 일본 학자들에 의해 강탈되거나 반출되었다. 이런 과정에 사료가 소실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우리 혜성 이야기』를 읽고 나면, 혜성은 그저 하늘에 내리다가 사라지는 우주의 먼지가 아니라 인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면서도 강렬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신비스러운 우주의 ‘요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혜성 이야기에 푹 빠지다가 오랜만에 윤하의 ‘혜성’이 들어본다. “다 알거야 혜성을 보면 내 사랑을 알거야. 그대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비춰 줄테니까” 이 노랫말처럼 혜성을 보면 우리나라 천문학의 역사를 알 수 있다. 혜성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비춰주는 존재였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 혜성’을 잊고 살았다. 저자는 옛 문헌 속에 잠자고 있던 혜성을 깨워 천문학에 입문하는 독자들이 혜성이 간직한 비밀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도록 소개한다. 혜성 착륙 소식에 맞춰 이 책이 같이 알려져야 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미미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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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6 12: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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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6 14: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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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6 15: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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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가 내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 창문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면 은은한 빛이 흐르는 조명 아래에서 책을 읽으면 좋다. 비 오는 날이면 가끔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이럴 때 조용한 방 안에서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읽으면 편안하다. 책에 몰입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다. 어제 비가 오는 날에 토머스 핀천의 단편소설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창비. 2014년) T.S. 엘리엇의 시집 『황무지』(민음사, 2004년)를 다시 읽었다.

 

 

 

 

 

 

 

 

 

 

 

 

 

 

 

 

핀천과 엘리엇. 두 사람이 쓰는 글의 유형은 서로 다르지만, 한 번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라는 불편한(?) 공통점이 있다. 핀천의 소설은 역사, 과학, 철학, 대중문화 등 폭넓은 분야의 소재를 마구 뒤섞어 놓고, 아주 길고 복잡한 문장으로 꼬아놓았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시인 본인이 스스로 표현한 것처럼 말 그대로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리듬감 있게 늘어놓는 불평(Rhythmical grumbling)"이다. 단테, 셰익스피어, 그리스 신화, 성서, 우파니샤드 등 동서양을 대표하는 문학과 사상을 인용하여 총 5부로 이루어진 이 어마어마한 장시는 엘리엇의 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투덜거리게 한다. 엘리엇은 이 시를 통해 무기력한 삶에 대한 리드미컬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핀천의 첫 번째 작품인 단편 「이슬비」는 엘리엇의 『황무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84년에 「이슬비」를 포함한 1950, 60년대에 발표한 초기작들을 수록한 소설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 서문에 핀천은 「이슬비」를 집필하면서 『황무지』와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참조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이슬비」는 『황무지』와 같이 읽어야 처음에 느끼지 못했던 핀천과 엘리엇의 문학적 매력을 동시에 맛 볼 수 있다. 아, 그 대신 『황무지』를 먼저 읽어야하고, 이 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까지도 찾아보는 꼼꼼한 독서를 해야 한다. 그리고 핀천이 쓴 서문을 먼저 읽은 다음에 「이슬비」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해설을 읽으면 된다. 작품의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슬비」→ 서문 → 작가 해설’ 순서로 읽어도 된다.

 

「이슬비」의 이야기는 단조롭다. 일반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에 나오는 흥미진진한 위기와 절정으로 이루어지는 특별한 장면이 없기 때문이다. 군 특수병과 소속의 상병 러바인의 평범한 일상을 그려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뉴올리언스에 파견되어 시체들을 인양하는 작업에 나서는 러바인의 모습이다. 이 끔찍한 장면을 제외하면, 러바인의 일상을 무덤덤하게 전개되고, 소설 제목을 의식한 듯 하늘이 흐려지고 간간이 비가 내리는 날씨를 묘사한 문장이 많다.

 

핀천은 첫 소설인 「이슬비」를 “되도록 문학적으로 써라”라는 신조를 믿고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1984년에 쓴 서문에서 그 문학적 신조가 「이슬비」를 미흡한 데뷔작으로 만들어버린 나쁜 충고였다고 후회했다. 핀천은 「이슬비」를 최대한 문학적인 느낌을 살려서 쓰려고 엘리엇과 헤밍웨이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을 집어넣었다. 핀천 본인은 이 데뷔작이 결함이 눈에 보일 정도로 서투른 초보 작가의 티가 난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집필 방식 덕분에 소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만약에 핀천이 기성작가 반열에 오르면서 생긴 명예를 좇았다면, 1984년에 쓴 서문에서 자신의 데뷔작이 엘리엇과 헤밍웨이를 어설프게 참고했다고 고백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4년은 『중력의 무지개』의 성공으로 핀천의 문학성이 인정받고 있었던 시기다) 핀천의 서문 덕분에 「이슬비」가 문학적으로 쓰인 좋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슬비」의 러바인은 폐쇄적인 군대 생활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물이면서도,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운명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핀천은 「이슬비」의 등장인물들이 완곡어법이나 상스러운 농담으로 죽음을 회피한다고 평가했다. 그가 알려준 대로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핀천이 의도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말이야." 러바인이 읽던 책을 배 위에 엎어놓고 말했다. "가끔 도시로 돌아갔으면 할 때가 있어. 그런데 막상 가면 별로야."
 "왜 별로일까?" 피크닉이 물었다. "난 이런 쓰레기 같은 일을 하느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학교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
 "아니야." 러바인이 찡그리며 말했다. "돌아가지 않는 게 나아. 그저 한번 돌아가본 일이 기억나. 어떤 계집애한테였지. 그런데 역시 별로였어."
 "그래." 피크닉이 말했다. "넌 나한테 말한 적이 있어. 돌아가야 했다고.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막사에 돌아가 잠이나 자게."
 "잠은 어디서든 잘 수 있어." 러바인이 말했다. "난 그래." (51~52쪽)

 

러바인은 지루한 군대를 벗어나 자유로운 도시 생활을 꿈꾼다. 군인이 되기 전에 도시에 생활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만, 이를 스스로 부정한다. 현재가 싫어서 과거를 그리워하고 되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심리 속에 죽음으로 종착하는 인생의 순리를 거부하려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러바인은 그립고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으며 인간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동료 피크닉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막사로 돌아가서 잠이나 편안하게 잤으면 한다고 농담을 한다. 그러자 러바인은 잠은 어디서든 잘 수 있다고 말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잠과 죽음의 형제」  1874년

 

 

여기서 말하는 잠은 피크닉이 원하는 편안한 수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러바인이 생각하는 잠은 어디서든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영원한 잠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히프노스(Hypnos)는 잠의 신으로,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형제다. 잠은 ‘작은 죽음’이다.

 

러바인은 시체 인양 작업을 하면서 끔찍하게 부패된 시체를 본다. 죽음은 평범한 삶을 언제 어디서 급습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종말이다. 러바인도 언젠가는 죽게 되는 인간이다. 우울함과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러바인은 인적이 드문 늪에 버려진 집에 리틀 버터컵이라는 금발 여인과 섹스를 한다. 쾌락이 주는 흥분에 외치는 두 사람의 성(性)스러운 장면은 개구리들이 야만스럽게 울어대는 소리와 중첩되어 묘사한다. 

 

사방의 개구리들은 갈수록 야만적인 합창을 주문 외우듯 읊조렸다. (중략) 개구리의 울음은 작은 숨소리와 외침으로 이루어진 거장의 이중주를 위한 건반 베이스로 바뀌었다. (73쪽)

 

 

그러나 섹스가 주는 쾌락은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즐거운 흥분을 감돌게 하여 죽음의 공포를 잠시 잊게 만드는 마취에 불과하다. 엘리엇의 『황무지』에서도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고자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현대인을 묘사하고 있다.

 

 

 

나이팅게일의 맑은 목청으로
온 황야를 채우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 짓을 계속한다.
그 울음은 더러운 귀에 '젹 젹'(Jug Jug) 소리로 들릴 뿐.

 

(엘리엇 『황무지』 2부 체스 놀이, 64쪽)

 

 

쾌감 절정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귀에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 맑은 소리를 내는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내는 야릇한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황홀한 쾌락은 남녀 두 사람 모두를 기분 최고조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절정이 지나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다. 흥분 상태가 급격히 가라앉는 ‘현자 상태’에 이른다. 섹스를 끝마친 러바인은 숙명적인 절망을 극복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되고, 두려움과 허무함을 애써 잊기 위해 말장난을 한다. 잡지의 제목 '라이프'를 가지고 죽음의 신이 내뻗는 손길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커다란 죽음의 한가운데에." 러바인이 말했다. "작은 죽음이 있다."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말했다. "하, <라이프>지의 사진 설명 같네. '삶'의 한가운데.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 오, 맙소사." (73쪽)

 

 

인간은 ‘작은 죽음’인 잠을 평생 수만 번 이상 자고 나면, 영원히 잠드는 ‘죽음’이 다가온다. 또는 ‘작은 죽음’을 취하다가, 저승사자가 부르는 대로 한순간에 지옥으로 갈 수도 있다. 이렇듯, 러바인의 표현처럼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 그것도 너무 가까이에. 오, 맙소사! 우리의 삶은 점점 죽어가는 과정에 있다.

 

 

먼 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엘리엇 『황무지』 5부 천둥이 한 말, 102쪽)

 

 

소설 마지막에 러바인의 동료 리조는 헤밍웨이와 엘리엇을 언급한다. 자신의 데뷔작에 영향을 준 선배 작가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신인 작가의 재치 있는 묘사이다. 러바인의 동료들은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가 싫다고 말하지만, 리조는 뜬금없이 엘리엇은 비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리조가 말했다. "T.S. 엘리엇은 비를 좋아해." 러바인은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멨다. "이런 식이면 비는 아주 섬뜩해." 그가 말했다. "이런 비라면 둔한 뿌리를 흔들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도 있고, 쓸어버릴 수도 있어." (74쪽)

 

그러나 러바인은 비를 섬뜩한 존재로 인식한다. 핀천은 이러한 러바인의 냉정적인 어조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일말의 희망도 찾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 즉, 황폐되고 절망적인 삶을 투덜거리는 엘리엇의 불평에 동조하는 것이다.

 

 

번쩍하는 번개 속에서. 그러자 비를 몰아오는
일진(一陳)의 습풍(濕風)

 

(엘리엇 『황무지』 5부 천둥이 한 말, 112쪽)

 

 

천둥은 비를 부른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엘리엇 『황무지』 1부 죽은 자의 매장, 46쪽) 풍요를 약속하는 구원의 상징이다. 하지만, 천둥은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불태워버리는 신의 분노와 같다. 비는 메마른 지대를 촉촉이 적셔주고, 목을 축일 수 있는 강물을 만들어주지만, 너무 많으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태풍과 홍수가 되기도 한다. 천둥과 비를 바라보는 인류의 이중적인 인식. 리조는 삶에 구원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 낙관적인 인간이라면, 러바인은 엘리엇처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찾지 않으려는 비관적인 인간이다.

 

「이슬비」는 결말에 세차게 비가 내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러바인은 잠을 잔다. 반복되는 ‘작은 죽음’을 통해 잠시나마 혼란스러운 마음을 잊으려고 한다. 「이슬비」를 텍스트 자체를 그대로 읽는다면, 별 것 아닌 문장과 대화로 이루어진 어색한 소설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핀천은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이 소설에 문학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신인 작가로서의 열정이 느껴진다. 핀천 본인은 이 데뷔작에 대해서 어설프게 느껴지는 자신의 서투른 솜씨에 대해 불평하고 있지만, 이 작품 속에 젊은 핀천의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리듬감 있게 늘어놓는 불평”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분명히 문학적으로 좋은 작품을 쓰는데 성공했다. 

 

 

 

 

P.s 핀천과 엘리엇을 같이 읽으면서 느낀 시시콜콜한 사실. 두 사람의 First name이 같다. 토머스 핀천,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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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나온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론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영국 런던경제학교의 진화학자 올리버 커리는 앞으로 10만년 뒤 인간은 지능이 뛰어나고 잘생긴 엘리트 집단과 키가 작고 괴물처럼 생긴 저능한 집단 2종류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예견했다. 커리는 배우자들이 짝을 찾는 습성과 운동량, 사회적 습관 등을 근거로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똑똑한 사람은 자신처럼 지능이 높거나 혹은 더 높은 배우자를 찾으며, 본성을 추가하면 신체적으로도 건장한 사람을 배우자로 찾게 돼 결국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명하게 발전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리고 인간은 3000년쯤 되면 키가 190cm로 훌쩍 커지게 되고, 수명도 120살까지 살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오늘날 기준으로 치면 분명 거인 족이고 초장수족이다.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열림원, 2007년)에 나오는 인류의 조상 거인 족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공허한 느낌을 주는 전망이다. 1000년 후, 나아가 10만년 후의 인류는 어떤 모습일까에 관한 예측. 말이 1000년이요 10만년이지, 오래 살아봐야 70∼80살인 보통 사람들에게는 가히 측량불가의 세월이다. 다만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그것은 후손들의 모습이자 인간이라는 종(種)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인체 이해 수준이 높아지고, 의학 등 과학기술이 크게 발달한다면 커리의 예견처럼 인류는 점점 더 신체와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기술과 의학에 대한 과잉 의존으로 면역체계가 약화되고 육체는 쇠약해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 이만 해도 찜찜한데 인류가 2종류로 양분되는 인간 세상이 무섭게 느껴진다. 내 후손이 장신에 건강하고 창조적인 인간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와 정반대가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웰스의 『타임머신』에 나오는 시간여행자라면 커리의 예견이 무척 궁금해서 당장 자신의 타임머신을 타고 10만년 후의 세계로 떠났을 것이다. 시간여행자는 802701년의 인류를 만났다. 그는 타임머신을 타기 전에는 8만년 후의 인류는 자신이 살던 시대보다 모든 면에서 진보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 본 8만년 후의 세계는 무척 암울했다. 인류는 엘로이와 몰록, 두 종족만 살고 있을 뿐이었다. 엘로이는 지상, 몰록은 지하에 사는 종족인데 전자를 부르주아, 후자를 프롤레타리아로 비유하기도 한다. 지능은 전 시대보다 떨어졌지만 순한 성격의 엘로이는 똑똑한 수준의 인간 집단이라면, 엘로이를 잡아먹는 난폭한 몰록은 저능한 인간 집단이다. 웰스는 이미 2종류로 나누어 발전된 인류의 모습과 그 시대를 묘사했다.

 

시간여행자는 몰록이 감춰 놓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곳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이번에는 더 먼 미래로 갔다. 그곳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파도도 없고 달의 흔적도 없는데 일식이 일어나고, 세상은 침묵뿐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시간 여행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난다.

 

웰스의 『타임머신』과 함께 언급되고 비교하는 작품이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필맥, 2008년)이다. 원제는 News from Nowhere, 우리말로 풀이하면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이다. 국내에선 생소한 작품이지만, 유토피아 문학을 소개할 때 자주 언급된다. 이 소설은 1891년에 발표되었다. 4년 뒤에 웰스가 『타임머신』을 발표했다. 『에코토피아 뉴스』의 부제는 '유토피아 로망스 중 평안의 시대'이다. 소설의 주인공 윌리엄(소설을 쓴 저자의 분신)은 사회주의자동맹 모임에서 미래사회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 뒤 귀가한다. 윌리엄은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2050년대의 런던 템스 강 근처에서 일어난다. 이때부터 새로운 유토피아 세계를 경험한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곳 사람들은 땀 흘리는 노동을 즐거움으로 여긴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와 교육 제도도 없다.

 

"아이들은 여름에 종종 무리를 지어 숲에 와서, 보시다시피 텐트에서 함께 몇주일씩 놀며 보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장려하지요. 그들은 스스로 사는 법을 배우고, 야생의 생물들을 관찰합니다.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습니다." (62쪽)

 

 

"보통 아이들은 15세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두세 가지 이야기책을 읽는 것 외에는 많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일찍 책을 좋아하도록 권장하지 않습니다. (중략)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대부분 그들의 어른을 닮는 경향이 있고, 대부분의 주위 어른들이 건축, 도로 포장, 정원 가꾸기와 같은 일을 마음으로부터 즐겁게 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통한 공부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67~68쪽)

 

미래의 런던은 기계가 가득한 차가운 금속의 세상이 아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사는 목가적 세상이다. 모리스는 이 소설을 통해 자본과 기계에 종속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지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다. 모리스가 『에코토피아 뉴스』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사회주의 세상은 민주적 사회주의에 가깝다. 미래의 런던은 자유와 자치가 인정되며 모트하우스라는 곳에서 공적인 문제를 토의하는 집회가 열린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아고라(agora)를 연상시킨다.

 

모리스의 진보적 사회주의는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에 가입한 웰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웰스는 이미 20살에 모리스의 집에 열린 사회주의자 모임에 참석했다. 모리스처럼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는 진보의 힘을 믿었고,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웰스는 모리스처럼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타임머신』의 8만년 후의 세계는 『에코토피아 뉴스』에 나오는 미래의 런던이 너무 평화롭게 느낄 정도로 암울하다. 오히려 인류의 계급 갈등이 심화된 문명이 퇴보된 세계이다.

 

 

 

 

 

 

 

 

 

 

 

 

 

 

 

 

이러한 웰스의 미래 세계관은 1897년에 발표한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초록달, 2014년)에서도 보여준다. 22세기 런던을 묘사하는데 마천루가 늘어나고, 전기가 발달한 편리한 세상이다. 그 곳 사람들은 굶거나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계속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며 빈부 격차가 심하다.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는  미래 도시에 사는 엘로이와 몰록을 재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웰스는 모리스의 사회주의가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사회주의가 완전히 틀렸다고 보지 않았다. 그가 가입한 협회의 이름인 페이비언은 'Fabian'은 '점진적인', '신중한'이라는 형용사에서 유래되었다. 웰스는 점진적인 개혁을 믿었고,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원칙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개혁하고 싶었다. 비록 초창기 페이비언 협회의 규모가 크지 않은데다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여론이 점차적으로 늘어났지만, 웰스는 글쓰기를 통한 사회주의 전파를 포기하지 않았다.

 

 

 

 

 

 

 

 

 

 

 

 

 

 

 

 

점진적 사회개혁에 대한 애착은 『타임머신』이 나오고 다음 해에 발표한 단편 『현미경 아래의 슬라이드』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 힐은 사회주의자이자 대학 생물학과 소속 학생이다. 그는 생물학 실험실에서 자신의 동료 학생들에게 책을 무료로 대여해준다. 그 책이 바로 모리스가 쓴 것이다. 단편에서는 책 제목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책이 『에코토피아 뉴스』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에코토피아 뉴스』의 주인공 모리스가 작가 윌리엄 모리스의 분신이라면, 『현미경 아래의 슬라이드』의 주인공 힐은 한창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은 젊은 웰스의 분신이다.

 

웰스는 사회주의자로 살았지만, 인류 문명에 대한 비관론도 견지하고 있었다. 특히 두 차례 세계 대전을 목격한 이후부터 그의 비관론적 시각은 뚜렷해졌다. 젊은 시절에 웰스의 머리에 조그만 뿌리로 시작한 미래 비관론은 과학기술의 힘이 총동원된 두 번의 전쟁 기간을 지나면서 거대한 생각의 나무가 되었다. 미래 비관론의 뿌리가 이제 막 웰스의 두뇌 속로 뻗기 시작한 시기에 『타임머신』이 나왔다. 웰스가 습득한 과학 지식은 미래 비관론의 뿌리를 자라게 만드는 영영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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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알면서도(?) 얼척없는 오역에 빠질까?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4-12-19 12:00 
    윗글에서 cyrus 님이 인용한 『에코토피아 뉴스』(윌리엄 모리스 지음, 박홍규 옮김, 필맥, 2008)의 구절들을 그대로 재인용해 봅니다. 번역문 가운데 이해가 안 되는 의아한 부분이 있어서요. 그걸 cyrus 님한테 물어도 보고싶고요. [밑줄은 인용자] ===================================== "아이들은 여름에 종종 무리를 지어 숲에 와서, 보시다시피 텐트에서 함께 몇주일씩 놀며 보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