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내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 창문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면 은은한 빛이 흐르는 조명 아래에서 책을 읽으면 좋다. 비 오는 날이면 가끔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이럴 때 조용한 방 안에서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읽으면 편안하다. 책에 몰입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다. 어제 비가 오는 날에 토머스 핀천의 단편소설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창비. 2014년) T.S. 엘리엇의 시집 『황무지』(민음사, 2004년)를 다시 읽었다.

 

 

 

 

 

 

 

 

 

 

 

 

 

 

 

 

핀천과 엘리엇. 두 사람이 쓰는 글의 유형은 서로 다르지만, 한 번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라는 불편한(?) 공통점이 있다. 핀천의 소설은 역사, 과학, 철학, 대중문화 등 폭넓은 분야의 소재를 마구 뒤섞어 놓고, 아주 길고 복잡한 문장으로 꼬아놓았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시인 본인이 스스로 표현한 것처럼 말 그대로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리듬감 있게 늘어놓는 불평(Rhythmical grumbling)"이다. 단테, 셰익스피어, 그리스 신화, 성서, 우파니샤드 등 동서양을 대표하는 문학과 사상을 인용하여 총 5부로 이루어진 이 어마어마한 장시는 엘리엇의 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투덜거리게 한다. 엘리엇은 이 시를 통해 무기력한 삶에 대한 리드미컬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핀천의 첫 번째 작품인 단편 「이슬비」는 엘리엇의 『황무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84년에 「이슬비」를 포함한 1950, 60년대에 발표한 초기작들을 수록한 소설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 서문에 핀천은 「이슬비」를 집필하면서 『황무지』와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참조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이슬비」는 『황무지』와 같이 읽어야 처음에 느끼지 못했던 핀천과 엘리엇의 문학적 매력을 동시에 맛 볼 수 있다. 아, 그 대신 『황무지』를 먼저 읽어야하고, 이 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까지도 찾아보는 꼼꼼한 독서를 해야 한다. 그리고 핀천이 쓴 서문을 먼저 읽은 다음에 「이슬비」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해설을 읽으면 된다. 작품의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슬비」→ 서문 → 작가 해설’ 순서로 읽어도 된다.

 

「이슬비」의 이야기는 단조롭다. 일반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에 나오는 흥미진진한 위기와 절정으로 이루어지는 특별한 장면이 없기 때문이다. 군 특수병과 소속의 상병 러바인의 평범한 일상을 그려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뉴올리언스에 파견되어 시체들을 인양하는 작업에 나서는 러바인의 모습이다. 이 끔찍한 장면을 제외하면, 러바인의 일상을 무덤덤하게 전개되고, 소설 제목을 의식한 듯 하늘이 흐려지고 간간이 비가 내리는 날씨를 묘사한 문장이 많다.

 

핀천은 첫 소설인 「이슬비」를 “되도록 문학적으로 써라”라는 신조를 믿고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1984년에 쓴 서문에서 그 문학적 신조가 「이슬비」를 미흡한 데뷔작으로 만들어버린 나쁜 충고였다고 후회했다. 핀천은 「이슬비」를 최대한 문학적인 느낌을 살려서 쓰려고 엘리엇과 헤밍웨이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을 집어넣었다. 핀천 본인은 이 데뷔작이 결함이 눈에 보일 정도로 서투른 초보 작가의 티가 난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집필 방식 덕분에 소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만약에 핀천이 기성작가 반열에 오르면서 생긴 명예를 좇았다면, 1984년에 쓴 서문에서 자신의 데뷔작이 엘리엇과 헤밍웨이를 어설프게 참고했다고 고백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4년은 『중력의 무지개』의 성공으로 핀천의 문학성이 인정받고 있었던 시기다) 핀천의 서문 덕분에 「이슬비」가 문학적으로 쓰인 좋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슬비」의 러바인은 폐쇄적인 군대 생활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물이면서도,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운명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핀천은 「이슬비」의 등장인물들이 완곡어법이나 상스러운 농담으로 죽음을 회피한다고 평가했다. 그가 알려준 대로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핀천이 의도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말이야." 러바인이 읽던 책을 배 위에 엎어놓고 말했다. "가끔 도시로 돌아갔으면 할 때가 있어. 그런데 막상 가면 별로야."
 "왜 별로일까?" 피크닉이 물었다. "난 이런 쓰레기 같은 일을 하느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학교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
 "아니야." 러바인이 찡그리며 말했다. "돌아가지 않는 게 나아. 그저 한번 돌아가본 일이 기억나. 어떤 계집애한테였지. 그런데 역시 별로였어."
 "그래." 피크닉이 말했다. "넌 나한테 말한 적이 있어. 돌아가야 했다고.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막사에 돌아가 잠이나 자게."
 "잠은 어디서든 잘 수 있어." 러바인이 말했다. "난 그래." (51~52쪽)

 

러바인은 지루한 군대를 벗어나 자유로운 도시 생활을 꿈꾼다. 군인이 되기 전에 도시에 생활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만, 이를 스스로 부정한다. 현재가 싫어서 과거를 그리워하고 되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심리 속에 죽음으로 종착하는 인생의 순리를 거부하려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러바인은 그립고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으며 인간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동료 피크닉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막사로 돌아가서 잠이나 편안하게 잤으면 한다고 농담을 한다. 그러자 러바인은 잠은 어디서든 잘 수 있다고 말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잠과 죽음의 형제」  1874년

 

 

여기서 말하는 잠은 피크닉이 원하는 편안한 수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러바인이 생각하는 잠은 어디서든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영원한 잠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히프노스(Hypnos)는 잠의 신으로,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형제다. 잠은 ‘작은 죽음’이다.

 

러바인은 시체 인양 작업을 하면서 끔찍하게 부패된 시체를 본다. 죽음은 평범한 삶을 언제 어디서 급습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종말이다. 러바인도 언젠가는 죽게 되는 인간이다. 우울함과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러바인은 인적이 드문 늪에 버려진 집에 리틀 버터컵이라는 금발 여인과 섹스를 한다. 쾌락이 주는 흥분에 외치는 두 사람의 성(性)스러운 장면은 개구리들이 야만스럽게 울어대는 소리와 중첩되어 묘사한다. 

 

사방의 개구리들은 갈수록 야만적인 합창을 주문 외우듯 읊조렸다. (중략) 개구리의 울음은 작은 숨소리와 외침으로 이루어진 거장의 이중주를 위한 건반 베이스로 바뀌었다. (73쪽)

 

 

그러나 섹스가 주는 쾌락은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즐거운 흥분을 감돌게 하여 죽음의 공포를 잠시 잊게 만드는 마취에 불과하다. 엘리엇의 『황무지』에서도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고자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현대인을 묘사하고 있다.

 

 

 

나이팅게일의 맑은 목청으로
온 황야를 채우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 짓을 계속한다.
그 울음은 더러운 귀에 '젹 젹'(Jug Jug) 소리로 들릴 뿐.

 

(엘리엇 『황무지』 2부 체스 놀이, 64쪽)

 

 

쾌감 절정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귀에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 맑은 소리를 내는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내는 야릇한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황홀한 쾌락은 남녀 두 사람 모두를 기분 최고조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절정이 지나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다. 흥분 상태가 급격히 가라앉는 ‘현자 상태’에 이른다. 섹스를 끝마친 러바인은 숙명적인 절망을 극복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되고, 두려움과 허무함을 애써 잊기 위해 말장난을 한다. 잡지의 제목 '라이프'를 가지고 죽음의 신이 내뻗는 손길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커다란 죽음의 한가운데에." 러바인이 말했다. "작은 죽음이 있다."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말했다. "하, <라이프>지의 사진 설명 같네. '삶'의 한가운데.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 오, 맙소사." (73쪽)

 

 

인간은 ‘작은 죽음’인 잠을 평생 수만 번 이상 자고 나면, 영원히 잠드는 ‘죽음’이 다가온다. 또는 ‘작은 죽음’을 취하다가, 저승사자가 부르는 대로 한순간에 지옥으로 갈 수도 있다. 이렇듯, 러바인의 표현처럼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 그것도 너무 가까이에. 오, 맙소사! 우리의 삶은 점점 죽어가는 과정에 있다.

 

 

먼 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엘리엇 『황무지』 5부 천둥이 한 말, 102쪽)

 

 

소설 마지막에 러바인의 동료 리조는 헤밍웨이와 엘리엇을 언급한다. 자신의 데뷔작에 영향을 준 선배 작가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신인 작가의 재치 있는 묘사이다. 러바인의 동료들은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가 싫다고 말하지만, 리조는 뜬금없이 엘리엇은 비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리조가 말했다. "T.S. 엘리엇은 비를 좋아해." 러바인은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멨다. "이런 식이면 비는 아주 섬뜩해." 그가 말했다. "이런 비라면 둔한 뿌리를 흔들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도 있고, 쓸어버릴 수도 있어." (74쪽)

 

그러나 러바인은 비를 섬뜩한 존재로 인식한다. 핀천은 이러한 러바인의 냉정적인 어조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일말의 희망도 찾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 즉, 황폐되고 절망적인 삶을 투덜거리는 엘리엇의 불평에 동조하는 것이다.

 

 

번쩍하는 번개 속에서. 그러자 비를 몰아오는
일진(一陳)의 습풍(濕風)

 

(엘리엇 『황무지』 5부 천둥이 한 말, 112쪽)

 

 

천둥은 비를 부른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엘리엇 『황무지』 1부 죽은 자의 매장, 46쪽) 풍요를 약속하는 구원의 상징이다. 하지만, 천둥은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불태워버리는 신의 분노와 같다. 비는 메마른 지대를 촉촉이 적셔주고, 목을 축일 수 있는 강물을 만들어주지만, 너무 많으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태풍과 홍수가 되기도 한다. 천둥과 비를 바라보는 인류의 이중적인 인식. 리조는 삶에 구원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 낙관적인 인간이라면, 러바인은 엘리엇처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찾지 않으려는 비관적인 인간이다.

 

「이슬비」는 결말에 세차게 비가 내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러바인은 잠을 잔다. 반복되는 ‘작은 죽음’을 통해 잠시나마 혼란스러운 마음을 잊으려고 한다. 「이슬비」를 텍스트 자체를 그대로 읽는다면, 별 것 아닌 문장과 대화로 이루어진 어색한 소설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핀천은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이 소설에 문학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신인 작가로서의 열정이 느껴진다. 핀천 본인은 이 데뷔작에 대해서 어설프게 느껴지는 자신의 서투른 솜씨에 대해 불평하고 있지만, 이 작품 속에 젊은 핀천의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리듬감 있게 늘어놓는 불평”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분명히 문학적으로 좋은 작품을 쓰는데 성공했다. 

 

 

 

 

P.s 핀천과 엘리엇을 같이 읽으면서 느낀 시시콜콜한 사실. 두 사람의 First name이 같다. 토머스 핀천,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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