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 몽마르트에서 사이버 컬쳐까지
마크 애론슨 지음, 장석봉 옮김 / 이후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변기에 ‘샘’이란 제목을 붙여 전시회에 출품했다. 오늘날 이 작품과 유사한 신형 디자인의 매끈한 ‘샘’들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존경은 받지 못한 채 도처에서 사람들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해주고 있다.

 

우리가 아는 ‘아방가르드’의 모습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괴짜 예술가들의 창의력 또는 기행(奇行)의 산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술의 개념을 뒤집는 ‘파괴적’ 행위와 실험들이 자아내는 진풍경들이다. 아방가르드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 경계를 탐험’하는 작업으로써, 그 실천 방법에는 상반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이미지 감각 충동을 좆아서 내면으로 여행’하는 방법으로서, 이 경향의 예술가들은 명상 신비주의 약물 심지어 자해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다른 하나는 ‘반항을 밖으로 표출해 경직된 규범 도덕 제도에 맞서는 예술을 창조’하는 방법으로서, 이 그룹에 소속된 예술가들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관객을 공격하며, 심지어 이들의 예술을 이해 못하는 관료들을 비난’ 함으로써 성과를 올리고 쾌락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끈질기게 지적하듯 아방가르드는 ‘전위’에 앞서 ‘반항’이었다. 모택동도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했으니, 반항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시초가 ‘일상생활, 도덕규범, 예술규범 등이 한 줄로 깔끔하게 늘어서’ 있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라면 누구나 폭로할 수 있을 정도로 종이처럼 얄팍’한 중산층의 얄팍한 삶과 문화에 대한 반항으로 비롯됐다. 그러나 반항을 아방가르드의 전제로 본다면, 반항이 일반화되고 ‘제도’가 되는 순간 아방가르드는 설 땅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문제다. 저자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다. ‘세계 도처가 아방가르드라면 도대체 뭐가 아방가르드인가?’ ‘충격적인 예술이 록 밴드처럼 대중성을 확보했다면 그 날카로움은 없어져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그 점을 잘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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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 「단테의 배」 1822년

 

 

 

 

 

현실이 어렵고 세계가 불투명하게 보일 때, 마음이 어둡고 패잔감이 쌓여갈 때 떠올리는 그림이 하나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단테의 배」다. 그림을 보면 중앙에는 두 인물이 서 있다. 왼쪽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시인인 단테이고, 오른쪽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이다. 등을 보이며 노 젓는 이는 지옥의 뱃사공 카론이다. 이들 주위로 지옥의 저주받은 자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몰려들고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하늘은 어둡고 물결은 출렁이며 저 멀리 성벽이 검은 연기 속에 불타고 있다. 단테는 스승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을 돌아다닌다. 이 대목은 지옥문을 지나 ‘디스’라는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단테는 흰 옷에 수도사의 붉은 두건을 쓰고 있다. 왼팔은 스승에 기댄 채 오른쪽을 보며 구명을 청하듯 손을 흔들고 있다. 버질은 그 옆에서 갈색 망토를 두르고 월계관을 쓴 채 믿기 어려울 정도의 평정을 유지하는 듯하다. 단테를 다독이듯 그는 그 왼손을 잡고 있다. 요동치는 물결에 배는 금세라도 뒤집힐 듯하다. 지옥의 무리들은 뱃전을 잡거나 사람을 밀치거나 서로 싸우고 있다. 배를 드러낸 채 탈진해 있는가 하면, 배 뒷전을 물어뜯는 이도 있다. 단 한 사람, 노를 젓는 카론이 위치한 건너편에서 오른팔을 배에 걸친 사람만이 화면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당신네는 누구인가라는 듯.

 

지옥의 사람들이 배 주위를 에워싼 채 불안과 분노로 흔들리고 있다면, 배 안의 두 사람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상대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내게 현실에 대면하는 어떤 자세로 보인다. 거대한 현실의 격랑 한가운데에 휘말려 사투를 벌이는 우리네 인생을 보는 거 같다. 밀려오는 현실의 파도 앞에서 성난 얼굴로 밀치고 찢고 뜯고 때리는 사람들의 싸움. 분노를 이기지 못하면 늘 불안하다. 이들의 광분과 두 시인 사이의 대조. 어둠과 빛, 광기와 정적, 삶과 죽음의 드라마. 이 모든 것은 선명한 색채 안에 녹아있다. 단테가 『신곡』에서 묘사한 장면보다 한층 더 입체적이다. 들라크루아가 묘사한 지옥은 파괴와 살육, 그리고 화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나아질 수 없는 야만을 증거”한다. 관객의 시선은 저주받은 자들에게서 항해하는 자, 노 젓는 자에게서 손짓하는 자로 나아가고, 명상하는 자로부터 허우적거리는 자로 다시 돌아온다.

 

오늘의 우리는 단테처럼, 또 단테를 그린 들라크루아처럼 지옥의 강을 따로 떠올릴 필요가 없다.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도 육체도 고통의 기억 없이, 추방의 경험 없이 살 수는 없을까? 스스로 인간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수치에 불과하다. 살아 있을 때 선하지 않으면 진흙 속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예술의 보편성은 바로 이 점, 당파나 관점을 벗어나 오늘의 지옥을 반성하는 데 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 이야기는 산 자의 행동에 대한 얘기가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단테의 시도 그르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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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 모순되는 한 쌍이 함께 묶었다는 것은, 고뇌하는 의식이라는 자궁 속에 이렇게 극과 극인 쌍둥이가 계속 갈등하며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받은 저주였다. (107쪽)

 

‘후회 없이 살고 싶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다 지난 일이다.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냐?’는 위로도 자주 나눈다. 후회라는 것이 스스로에게 가장 고통스런 채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 윤리적 불감증이나 극도의 오만, 지독한 자포자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누구든 크고 작은 실수를 하고 사는 이 세상에서 후회 없이 삶의 구원을 바라기 힘들다. 후회 없이 어찌 지난 일을 지나 보낼 것이며, 어찌 다른 미래를 꿈꾸고 현재화할 것인가? 우리의 영혼은 내 안의 하이드에게 도전받으며 견실해질 수 있다. 후회할 일은 철저히 후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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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9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3-10-30 18: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잔님. 모딜리아니의 연인 잔 에뷔테른 초상화의 프로필에다가 닉네임을 사용하시네요. 화가의 슬픈 러브스토리 때문인 것도 있지만 모딜리아니 그림,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이 소설을 맨처음에 읽었을 땐 그냥 독특한 줄거리의 괴기소설로밖에 안 봤어요. 그러다가 요즘 타 출판사에서 새 번역본이 나온 것도 해서 오랜만에 새벽에 읽다가 인용한 구절에 꽂혔어요. 여생에 앞으로 후회할 일은 분명히 많을거고, 피하기 위해서 심사숙고해도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그럴 수도 없는 운명이죠. 좀 힘들고 피곤해도 나 자신을 단속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후회하는 행위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인생 주기에 있어서 과도기를 거치면 다음 번에는 황금기가 찾아오는 것처럼요. 쟌 에뷔테른님도 가을 잘 보내시고요, 점점 쌀쌀해져가는 날씨 몸 건강하세요. ^^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 도입부에 이렇게 썼다. ‘사춘기 때 나는 인생을 증오해서 자살 일보 전까지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내 죄와 결점, 어리석은 짓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했다. 내 눈엔 내가 불행의 표본처럼 보였다.’

 

그는 그러면서 끔찍한 충동에서 벗어나게 된 건 스스로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결점에 무관심해지는 한편 관심을 밖으로 돌린 다음부터라고 적었다. 외부에 대한 관심 역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자기혐오로 생기는 것과 달리 생의 본질을 파괴하진 않는다는 주장이다.

 

러셀 같은 이도 그랬으니 보통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0대는 누구에게나 힘겨운 시기다. 사춘기는 더하다. 세상은 뒤죽박죽이고 어른들은 죄다 엉터리 같아 자꾸 화가 난다. 부모가 자신을 이해하기는커녕 무조건 구속하고 강요하려 드는 듯해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기만 하다.

 

부모와 마주하기 싫다 보니 가능하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부모들의 속을 뒤집는 이런 행동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 사춘기의 특성이다. 몸은 어른에 가깝지만 뇌, 특히 논리적 사고와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결과라는 얘기다. 안 그래도 힘든데 어렸을 때부터 줄곧 공부에 매달려야 하니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교생까지 자살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 원인은 가정불화 및 가정문제, 우울증, 성적 비관 순이지만 특별한 이유를 찾기 힘든 충동적 자살도 있다니 충격적이다.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누구 한 사람만 옆에 있어주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줘도 살아갈 용기를 낸다. 부모의 인내와 보살핌이 중요한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의 경우 선생님의 사랑과 격려는 절대적이다. 정신건강 문제가 드러나도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가정과 사회는 아이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세심히 살펴야 한다.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야말로 청소년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다.

 

행복의 사회적 요소는 살면서 주위에 믿을 사람이 많아야 된다. 동네 공동체가 활성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더 행복을 느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동네효과(community effect)’라고 한다. 공동체가 활성화되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증거다. 달라이 라마도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나 혼자만 따로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했다. 행복이라는 영어 ‘happiness’의 어원이 ‘옳은 일은 자신 속에서 일어난다’는 ‘happen’이듯이 개인과 가족이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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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술이편’(述而篇)에서 공자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말한다.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고 있을 때 그 중에 분명히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간다는 것은 단순한 설정이다. 셋이 길을 갈 수도 있고 다섯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길을 가는 상황을 공자는 예로 들고 있다. 세 사람이냐, 다섯 사람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셋이 길을 가고 있다면 자신을 제외하고 남은 사람은 두 명. 그 두 사람 중에 나에게 스승처럼 무언가 가르침을 줄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공자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그들이 많이 배워서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즉 그들의 자격 요건을 제한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같이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많이 배우지 못해서 아는 게 적은 사람일수도 있고 성질이 포악해서 사람들이 슬슬 피해 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공자는 자격 요건을 전제하지 않고 무조건 같이 가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그러니 배우지 못한 사람도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도 스승이라는 말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들이 많으니 주변에서 그리고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공자의 말처럼 자격을 불문하고 ‘무조건 같이 가는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 스승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한비자라면 공자의 말에 반박할 것이다. 세 사람을 잘못 만나면 없는 호랑이 한 마리도 만들 수 있다고(三人成虎).

 

전국 시대 위나라 혜왕은 조나라와 강화를 맺고 태자를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태자를 혼자 보낼 수 없어 방총)이란 대신을 따라가게 했는데, 그는 출발에 앞서 임금에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터무니없는 말을 누가 믿겠소." "그러면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지 않을 거요." "만약 세 번째 사람이 똑같은 말을 아뢰어도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땐 믿어지겠지." 방총은 한숨을 내쉬고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어린애도 알 만한 상식입니다.”

 

거짓도 말하는 입이 여럿이면 솔깃해지게 마련이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 셋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드는 셈이다. 내가 믿을 만한 주변 사람 세 명이 있다고 해도 그들의 말은 진정어린 말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말일 수도 있다. 세 사람이 말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반복되는 헛말도 자꾸 들으면 정말 그럴 것이라 믿어지기도 한다.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무서운 ‘사람의 말’이 지금은 인터넷, 특히 SNS를 통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흉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SNS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한다. 평소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지인에서부터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저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많으면 천 명까지 나와 친분이 있는 관계로 만들 수 있다. 이런 복잡한 관계망 때문에 밑도 끝도 없는 괴담과 헛소문, 아무런 근거 없는 거짓말 등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SNS를 타고 급속하게 번졌다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된다. 무심히 던진 말들이 모아져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심지어는 자살에 이르게까지 했던 일이 발생한다.

 

결국 내 주변에 있는 세 명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스승인지, 아니면 거짓과 부조리의 발톱을 숨기고 있는 사악한 호랑이였는지 파악하는 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어느 누군가가 선하다면 그 선함을 보고 배울 것이며 악한 사람이 있다면 그 악함을 보고 느껴서 자신을 고치고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

 

과연 그들이 진짜 호랑이를 그리며 말하는 것인지, 거짓 호랑이를 만들어 말하고 있는지를 똑바로 판단해야 한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나와서 어떤 달콤한 말로 호랑이가 나타났다 해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어떤 현상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에게 스승이 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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