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 도입부에 이렇게 썼다. ‘사춘기 때 나는 인생을 증오해서 자살 일보 전까지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내 죄와 결점, 어리석은 짓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했다. 내 눈엔 내가 불행의 표본처럼 보였다.’
그는 그러면서 끔찍한 충동에서 벗어나게 된 건 스스로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결점에 무관심해지는 한편 관심을 밖으로 돌린 다음부터라고 적었다. 외부에 대한 관심 역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자기혐오로 생기는 것과 달리 생의 본질을 파괴하진 않는다는 주장이다.
러셀 같은 이도 그랬으니 보통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0대는 누구에게나 힘겨운 시기다. 사춘기는 더하다. 세상은 뒤죽박죽이고 어른들은 죄다 엉터리 같아 자꾸 화가 난다. 부모가 자신을 이해하기는커녕 무조건 구속하고 강요하려 드는 듯해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기만 하다.
부모와 마주하기 싫다 보니 가능하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부모들의 속을 뒤집는 이런 행동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 사춘기의 특성이다. 몸은 어른에 가깝지만 뇌, 특히 논리적 사고와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결과라는 얘기다. 안 그래도 힘든데 어렸을 때부터 줄곧 공부에 매달려야 하니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교생까지 자살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 원인은 가정불화 및 가정문제, 우울증, 성적 비관 순이지만 특별한 이유를 찾기 힘든 충동적 자살도 있다니 충격적이다.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누구 한 사람만 옆에 있어주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줘도 살아갈 용기를 낸다. 부모의 인내와 보살핌이 중요한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의 경우 선생님의 사랑과 격려는 절대적이다. 정신건강 문제가 드러나도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가정과 사회는 아이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세심히 살펴야 한다.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야말로 청소년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다.
행복의 사회적 요소는 살면서 주위에 믿을 사람이 많아야 된다. 동네 공동체가 활성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더 행복을 느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동네효과(community effect)’라고 한다. 공동체가 활성화되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증거다. 달라이 라마도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나 혼자만 따로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했다. 행복이라는 영어 ‘happiness’의 어원이 ‘옳은 일은 자신 속에서 일어난다’는 ‘happen’이듯이 개인과 가족이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