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 「단테의 배」 1822년
현실이 어렵고 세계가 불투명하게 보일 때, 마음이 어둡고 패잔감이 쌓여갈 때 떠올리는 그림이 하나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단테의 배」다. 그림을 보면 중앙에는 두 인물이 서 있다. 왼쪽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시인인 단테이고, 오른쪽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이다. 등을 보이며 노 젓는 이는 지옥의 뱃사공 카론이다. 이들 주위로 지옥의 저주받은 자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몰려들고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하늘은 어둡고 물결은 출렁이며 저 멀리 성벽이 검은 연기 속에 불타고 있다. 단테는 스승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을 돌아다닌다. 이 대목은 지옥문을 지나 ‘디스’라는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단테는 흰 옷에 수도사의 붉은 두건을 쓰고 있다. 왼팔은 스승에 기댄 채 오른쪽을 보며 구명을 청하듯 손을 흔들고 있다. 버질은 그 옆에서 갈색 망토를 두르고 월계관을 쓴 채 믿기 어려울 정도의 평정을 유지하는 듯하다. 단테를 다독이듯 그는 그 왼손을 잡고 있다. 요동치는 물결에 배는 금세라도 뒤집힐 듯하다. 지옥의 무리들은 뱃전을 잡거나 사람을 밀치거나 서로 싸우고 있다. 배를 드러낸 채 탈진해 있는가 하면, 배 뒷전을 물어뜯는 이도 있다. 단 한 사람, 노를 젓는 카론이 위치한 건너편에서 오른팔을 배에 걸친 사람만이 화면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당신네는 누구인가라는 듯.
지옥의 사람들이 배 주위를 에워싼 채 불안과 분노로 흔들리고 있다면, 배 안의 두 사람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상대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내게 현실에 대면하는 어떤 자세로 보인다. 거대한 현실의 격랑 한가운데에 휘말려 사투를 벌이는 우리네 인생을 보는 거 같다. 밀려오는 현실의 파도 앞에서 성난 얼굴로 밀치고 찢고 뜯고 때리는 사람들의 싸움. 분노를 이기지 못하면 늘 불안하다. 이들의 광분과 두 시인 사이의 대조. 어둠과 빛, 광기와 정적, 삶과 죽음의 드라마. 이 모든 것은 선명한 색채 안에 녹아있다. 단테가 『신곡』에서 묘사한 장면보다 한층 더 입체적이다. 들라크루아가 묘사한 지옥은 파괴와 살육, 그리고 화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나아질 수 없는 야만을 증거”한다. 관객의 시선은 저주받은 자들에게서 항해하는 자, 노 젓는 자에게서 손짓하는 자로 나아가고, 명상하는 자로부터 허우적거리는 자로 다시 돌아온다.
오늘의 우리는 단테처럼, 또 단테를 그린 들라크루아처럼 지옥의 강을 따로 떠올릴 필요가 없다.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도 육체도 고통의 기억 없이, 추방의 경험 없이 살 수는 없을까? 스스로 인간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수치에 불과하다. 살아 있을 때 선하지 않으면 진흙 속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예술의 보편성은 바로 이 점, 당파나 관점을 벗어나 오늘의 지옥을 반성하는 데 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 이야기는 산 자의 행동에 대한 얘기가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단테의 시도 그르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