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은행나무 그늘 속의 침묵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를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라, 100퍼센트의 악도, 100퍼센트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침묵의 거리에서』1권, ‘작가의 말’ 중에서, 7쪽)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침묵의 거리에서』를 읽다 보면 가면 뒤에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들킨 것처럼 뜨끔한 경우가 있다.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결정적인 순간에 직면하면 겉과 속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그것이 독자의 내면으로까지 파고들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는 책 표지에 광고 등을 위해 덧붙이는 띠지에 “오쿠다 히데오의 새로운 최고 걸작, 탄생”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글쎄. 사실 히데오의 대표작 『공중 그네』를 포함해서 그가 쓴 소설들을 읽지 않아서 이번 신작이 걸작의 수준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띠지가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야기의 무게감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요란스럽게 느껴진다. 그래도 ‘종횡무진하는 이야기’는 작가의 말처럼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모든 정황에 대해서 흑백을 가를 수 없게 만든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중학생의 왕따’ 문제를 소재로 했지만, 비극적인 색채를 띠는 일반적인 학교 왕따를 소재로 한 소설과는 달리 가해자와 피해자를 확실히 구분하지 않는다.

 

한여름, 학교에서 벌어진 한 소년의 죽음을 둘러싸고 인간 군상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단순한 사고사나 자살인 줄 알았던 죽음에 잔혹한 학교 폭력이 결부됐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학교, 유가족, 가해 학생, 경찰, 법조계, 언론이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인다.

 

중학교에서 열세 살 학생이 죽음을 맞는다. 2층 높이의 운동부실 지붕에서 학교의 자랑인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 속 도랑에 떨어져 사망한 나구라 유이치.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당황한 어머니의 전화 한 통에 아이를 찾아 나선 교사가 소년의 죽음을 처음으로 목격한다. 최초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단순한 실족 사고인지 사춘기 소년의 자살인지 아니면 훨씬 무거운 비밀이 숨어 있는 사건인지 수사에 나선 경찰과 학생을 보호하려는 학교의 의견이 갈린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유가족, 학교 폭력 주도자로 지목된 자녀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가해자 가족, 끝내 비밀을 밝히지 않으려 애쓰는 중학생들, 전대미문의 스캔들에 당황하는 교사들, 흉악한 소년 범죄를 밝혀내려는 말단 형사, 처음으로 만난 호외 앞에서 기자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신참 기자, 잠을 줄이면서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젊은 검사, 그리고 소문을 퍼뜨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입을 다무는 마을 주민까지. 말없이 죽은 소년의 시신 앞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페이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치는 가운데 어른도 아이도 결국 가장 중요한 이야기에는 굳게 입을 다문다. 모든 진실은 소년의 죽음을 지켜본 교정의 은행나무 그늘 속에 침묵할 뿐이다.

 

 

 

 Scene #2  ‘폭력에 침묵하는 학교’, 학생들도 교사도 두렵다

 

 

 

 

 

 

 

 

 

 

 

 

 

 

초동(初動). 맨 처음에 하는 행동이다. 어떤 지역에 지진이 일어날 때, 큰 진동에 앞서 나타나는 작은 진동을 뜻하기도 한다. 작은 것부터 살피지 못하면 크게 터진 후 대책은 온전하게 받아낸 재앙에 대한 피해 수습뿐이다. 그 여파가 한 도시를 초토화시킬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면 복원 시간도, 후유증도 길고 암울하다.

 

폭력 왕따 문제도 마찬가지다. 학교는 가해자, 피해자, 침묵자만이 있을 뿐 친구도 교사도 구세주가 돼주지 못한다. 자살하고 정신치료를 받는 끔찍한 일들이 사랑과 우정, 우리를 배워야 하는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히데오의 소설에 나오는 ‘침묵의 학교’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학교는 오래전부터 아파왔다. 또 정해진 시간대로 돌아가는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학교의 일상은 무척 분주하다. 학생들은 학교폭력, 왕따, 성적 경쟁에 시달리며 아프고, 교사들은 공문 폭탄에 치여 학생들 한 명 한 명에 관심을 가질 여유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낸다. 봄이 왔지만 봄을 느끼고 음미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학교는 지금 '침묵의 봄'이다.

 

이런 기막힌 현실 속에서도 남몰래 아픔을 겪고 있는 학생들과 무척 바쁜 교사들은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고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아니 심각한 갈등 속에 방황하고 있다.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숨 돌릴 틈 없이 갈등 관계가 이어진다. 이러한 일상 중에 오랫동안 내부에서 조용히 곪고 있던 왕따, 폭력 문제가 터진다면 학교 전체가 사건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된다.

 

교사들은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라고 말하며, 사건이 발생하면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구나’라고 먼저 생각한다고 말한다. (엄기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87쪽)

 

그렇다고 교사들이 이런 심각한 문제를 알면서도 모른 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를 뿐이다. 교사가 몸이 열 개가 아닌 이상 수많은 학생을 일일이 관리하고 보호해야 하는 책무를 부담하기가 힘들다. 아무리 교사가 학생들 간의 왕따, 폭력 사건의 조짐을 알고 있다고 해도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 학생들까지 끝가지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면 교사 입장에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세우고 싶어도 해결하기가 난감해진다. 학교 폭력 문제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커지고 그동안 묵인되었던 전체적 상황이 알려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대책을 세운다. 그야말로 교사는 학생들이 조립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따, 학교 폭력 문제가 일파만파 학교 외부까지 알려지게 되면 사건에 휘말린 폭력의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학생뿐만 아니라 이들을 담당하는 교사도 괴롭다. 아니, 누구에게 쉽게 말하기 힘들 정도로 무력감을 느낀다. 가해 학생만 학교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히데오의 『침묵의 거리에서』가 이전에 나온 학교 폭력, 왕따를 다룬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입시제도 같은 구조적 억압이 작동되어 스트레스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가득한 학교현장을 묘사하지 않은 것이다. 폭력 사건의 중심이나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를 직접적으로 표출했을 법한데 놀랍게도 그런 묘사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히데오가 입시위주 교육경쟁에서 벗어난 현실과 동떨어진 학교를 애초부터 설정하고 싶은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히데오가 묘사한 학교 폭력은 학생들, 특히 어른처럼 행동하고 싶고 자신보다 약한 학생 앞에서 ‘힘’으로 우위에 서고 싶은 남학생들의 분별력 없는 감정적 표출이다.

 

나구라 유이치는 한눈에도 왕따를 당할 만한 아이였다. 몸집도 작은 데다, 부잣집 아들에 성격도 내성적이었다. (『침묵의 거리에서』1권 57쪽)

 

나구라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품이 너무나도 유약한데다가 고지식할 정도로 답답해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친구들의 심한 폭력에 시달리면 허약하게 보이면서도 또래 여자나 1학년 후배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이중적인 면도 있다. 특히 테니스 능력이 한참 부족한데도 테니스부 훈련에 매일 꼬박꼬박 나오면 무조건 값비싼 테니스 라켓을 챙겨온다. 또래친구들이나 테니스부 1학년 후배, 3학년 선배 그리고 항상 약한 친구를 괴롭히고 부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일진들의 눈에는 나구라의 모습이 유난히 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생들은 나구라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구라가 반 아이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는 왕따가 된 것은 불쌍하지만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장례식 때 분위기에 휩쓸려 눈물을 흘린 일부 여학생들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침묵의 거리에서』2권 292쪽) 나구라는 내성적이면서도 착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구라가 매일 왕따와 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였다. 주변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폭력의 방관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에 반해 가해자로 지목된 네 명 가운데 단짝인 사카이와 이치카와는 또래는 물론 교사들로부터도 신망이 두터운 학생들이다. 심지어 사카이는 3학년 일진들에게서 나구라를 지켜주려고까지 했다. 열세 살의 중학생은 왕따, 폭력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막상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면 옮고 나쁨을 구분하는 사리분별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처음에 나구라를 지켜준 사카이와 이치카와는 또래집단 내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왕따, 폭력 분위기에 동조한 것이다.

 

학교 입시제도에 의한 분노만이 학교폭력의 원인이 아니다. 또래집단에서 공통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감정적 분노도 무시할 수 없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왕따, 폭력이 단순히 가벼운 장난처럼 여길 수도 있어도 아직은 판단력이 미숙하고, 폭력에 무덤덤하다. 자신보다 약하고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한 학생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나무라는 착한지 나쁜지 알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이다. 교사에게는 나무라 같은 학생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조용하고 ‘착한 학생’일 것이다. 그러나 엄기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착한 학생’ 나무라는 어떤 학생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텅 빈 기표’이며 투명인간과 같은 ‘노바디’(Nobody)다. 학생들에게도 대면하고 싶지 않은 ‘노바디’이고, 교사들의 눈에도 띄지 않는 조용한 ‘노바디’인 것이다. 이런 학교의 ‘노바디’는 학교의 적극적인 관리 대상이 되는 순간, 언제 사고칠지 모르는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구라는 학교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보잘 것 없는’(Nobody) 학생이었다. 그냥 학생들 사이에서 괴롭히고, 놀리는데 적합한 관심 대상이었다. 이 ‘텅 빈 기표’는 죽어서도 ‘노바디’였다. 학교 폭력에 대한 기나긴 침묵 때문에 비밀 속에 묻힐 뻔한 죽음의 진상이 완전히 드러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몇 사람 아니 전교생의 침묵이 사건 결과 하나에 촉각을 곤두서는 학교와 가해 학생 부모, 나구라의 부모 사이에 서로 불신만 더욱 키우고 말았다.

 

 

 

 Scene #3  신뢰와 우정이 존립 불가능한 텅 빈 폐허     

 

사회는 수업 붕괴와 학교 폭력의 원인을 교사의 무책임과 무능력이라고 말한다. 교직이라는 ‘철 밥그릇’에 안주해 열정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교사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폭력사건이 터지고 나면 폭력 가해 학생 부모들은 말한다. 학생들이 처한 상황에 교사들이 무감각하고 무책임하다고. 하지만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학교 폭력 문제의 원인을 교사의 책임으로만 전적으로 돌릴 수 없다. 학생들은 교사와 관계 맺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고 지적한다. 학생들에게 다가가려 애를 써도 “당신이라고 꼰대가 아니겠냐?”고 밀쳐낸다. 그리고 히데오의 소설에 나오는 학생들처럼 한 사람이라도 진실을 언급하지 않는 이상 폭력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학교 폭력 사건 이후 학교의 대책에 폭력 가해, 피해 학생 부모 입장에서는 불신만 가득할 뿐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들의 부모는 모임을 조직해 대응에 나서고 나구라의 부모와 친척은 학교를 상대로 진실 규명을 요구한다. 가해 학생 부모 입장에서는 불미스러운 폭력 사건에 귀한 자식이 연루되는 것을 꺼린다. 피해 학생 부모 입장은 학교의 대책 방안을 강구하는 태도를 믿지 못한다. 가해 학생이든 피해 학생이든 이런 부모 중에는 자기 자식만 눈에 보이고,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른다.

 

나구라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이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미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는 말처럼, 당연히 아들이 인기가 많을 거라 생각했다.”(『침묵의 거리에서』2권 258쪽)

 

 

 

 

 

 

 

 

 

 

 

 

 

 

 

폭력은 밖으로 향하기도 하지만 안으로도 향한다. 똑같이 실연을 겪었는데 누구는 상대방을 찌르지만 또 누구는 자신을 찌른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밖으로 향하는 폭력뿐이다. 사실, 많은 아이들은 자기 내부를 향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그것을 혼자 감당하면서 내상을 차곡차곡 쌓아 간다. (중략) 아이들은 이 끔찍한 폭력과 스트레스의 충격을 ‘안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37~38쪽) 

 

학교는 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고통과 상처를 나누기보단 단절하고 대립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심지어 사건의 규모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으려고 학생들의 침묵은 그대로 은폐하기도 한다. 그럴수록 폭력의 중심 한가운데에 있는 가해, 피해 학생 그리고 교사는 서로 고립할 수밖에 없다.

 

친구가 죽었는데도 숨죽여야 하는 학교, 제대로 된 애도를 하지 않는 학교, 가해자를 몰아내고 나쁜 기억을 황급히 지우려는 학교의 모습 곳곳에 폭력이 도사린다. 학생들이 죽음으로써 폭로하는 것은 학교 공동체의 침묵에서 기인한 무관심이다. 폭력이 만연하면서도 침묵하는 학교는 신뢰와 우정이 존립 불가능한 텅 빈 폐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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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3-1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폭력에서 피해 학생 가족들이 제일 힘든 것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쉬쉬하려고 가해학생과 교사 학교 측이 똘똘 뭉치는 경우입니다.그래서 몇 년 전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에서도 피해 학부모(이 사람도 현직 교사더군요)는 학교와 담임교사를 고발했지요.그 사건이 일어나고서야 "맞아...교사 자녀들도 왕따되지 말라는 법이 없겠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느꼈지요.

cyrus 2014-03-12 21:39   좋아요 0 | URL
히데오의 소설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교사나 가해학생 부모 캐릭터는 나오지 않았어요. 다만 고슴도치가 제 새끼 이뻐한다고 가해학생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가해자의 위치로 낙인 찍히지 않으려고 피해 학생 부모와 학교 측과 맞서려는(?) 모습이 있을 것 같아요.
 
질투는 나의 힘 - [할인행사]
박찬옥 감독, 문성근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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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53쪽)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의 한 구절이다. 이 때 시인이 말하는 ‘질투’는 부질없는 짝사랑이요, ‘나의 힘’이란 헛된 열망을 품은 어리석은 용기이다.

 

결국 사랑을 잃은 시인은 사랑을 ‘빈집’에 가두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떠나보낸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주인공 역시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를 되뇌며 부질없는 열망을 떠나보낸다. 간혹 제목만 보고 ‘질투는 내 삶의 원동력이겠거니’ 생각하면 영화 내내 열없이 구는 주인공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영화는 간단하게 말해 한 남자에게 두 명의 여자를 빼앗긴 다른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 청년 이원상(박해일 분)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냉소적이고 냉담하다. 원상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 여자가 계속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보라고 다그친다. 그에게는 정말 이미 끝난 일인데 말이다. 미련은 오히려 그를 떠난 여자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자들이 걸어온 전화에 대고 그는 방 닦고 있다고 무심하게 대답할 뿐이다. 그는 순수해서 상처받기 쉬운 타입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상처를 받는 건 그의 여자들이다. 되는대로 말하고 연애를 저지르는 것 같은 일견 무책임해 보이는 중년의 편집장 한윤식(문성근 역)이 오히려 원상과 비교하면 성실하고 친절하다. 타인에게나 자기 스스로에게나...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은 듯한 여자 박성연(배종옥 역)의 매력에 영화를 보면서 새삼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길거리 리어카에서 어묵을 베어 물며, “우리 여관 가요.”라고 말한다.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욕구도 묻어 있지 않다. 분방한 것 같지만 사실 제일 삶에 성실하고 솔직한 사람이 그 여자이다.

 

 

 

 

 

 

에드바르트 뭉크  「질투 I」 1907년

 

 

미국의 어느 한 심리학자는 남녀가 질투를 표출하는 대상이 다르다고 말한다. 남자들이 여자의 성적 배신에 분노하는 반면 여성들은 남자의 감정적 배신에 더 분노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녀의 짝짓기 전략에서 나오는 특징인데, 남자는 여자가 다른 정자를 받아들일 가능성을 최소화 해 자신의 종족 번식력을 높이려고 하고 여자는 남자를 오래 붙들어 놓아 아이의 양육에 대한 책임을 지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나오는 원상의 명대사, ‘누나, 그 사람이랑자지 마요. 나도 잘해요’를 보면 문득 남자의 짝짓기 본능이 느껴진다.

 

원상은 ‘누나, 그 사람 사랑하지 마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가 낯선 남자의 정자를 품는 게 두려웠던 걸까. 원상은 성연과 윤식의 동침이 내내 불편하다. 그에 반해 원상이 실수로 관계를 맺는 하숙집 딸 혜옥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원상에게 차라리 돈으로 보상하라며 악다구니를 쓴다. 자신과 자신이 품었을 그의 아이를 원상이 거두어들이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원상은 한윤식과의 정자 경쟁에서 백기를 들고 나온다.“아내한테도 잘 하고 애인한테도 잘 하면 되지. 마누라한테도 못 하고 바람도 못 피는 인간들보다 백배 낫다”는 한윤식의 말에 원상은 ‘명쾌하다’고 화답한다.

 

상당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할렘의 소유주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전통사회에서처럼 원상은 윤식이 일부다처제 마냥 여성을 독식하는 데 대해 반기를 들지 않는다. 어차피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뇌까릴 뿐이다. 지배욕의 다른 표현인 질투는 어느 사이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선망으로 변한다. 결국은 삼각관계의 세 변에서 한 축이었던 성연은 사라지고 두 남자 사이의 수직관계만 남게 된다.

 

영화는 ‘질투’라고 하는 위험하고 열정적인 감정을 밋밋하고 심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에 불쑥불쑥 침투하는 ‘질투’라는 감정이 거칠고 광포한 것만은 아니다. 때론 강자에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주인공의 질투처럼 지루하고 치사하고 싱겁기까지 하다. 영화 첫 장면에 난데없이 흘러나오는 ‘마카레나’노래처럼 유행이 사그라졌을 때 생각해보면 왠지 객쩍은 느낌이 드는 것이 이성을 되찾은 질투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상, 윤식, 성연 세 인물들의 불완전한 삼각관계를 통해 우리 일상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투영한다. 세상은, 인간관계는 그리 명확하지도 선명하지도 않다. 누가 누구를 책임지고, 사랑하고, 질투하기엔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거센 물결을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등장인물들은 그 물결에 부딪히며 조약돌처럼 서로를 닮아간다. 영화 속에서 질투와 좌절이라는 내용의 암울한 터널 같은 청년 시절을 볼 수도 있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중년의 속물적 삶에서 냉혹한 현실을 볼 수도 있다. 나이와 권력의 높고 낮음이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관찰기로도 읽을 수 있다. 누구의 삶을 골라보든 그 삶은 역설적이고 모순투성이다. 하지만 누구도 밉살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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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53쪽) - 

 

 

 

이런 종류의 글을 읽고 심장이 불에 덴 듯 놀랄 때, 그때를 청춘이라고 부른다. 또 이런 종류의 글을 자신의 청춘의 면죄부 혹은 자화상이라도 되는 듯 ‘내가 읽은 글’ 따위의 글에서 요란하게 소개할 때, 그때를 속물이라고 한다. 이처럼 소년은 늙기 쉽고 청춘은 한순간이다.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질투를 힘으로 변용시키는 자의 자기모멸과 자기 연민의 뒤섞임은 기형도로 말해지는 한 예민한 청춘의 자의식이 아니고서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정서다.

 

질투란 어느 누구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의 유일한 무기다. 이 때 저 질투하는 자는 자신의 질투 때문에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내비치지 못한다. 그것이 저 가련한 자의 자존의 방식이다. 그는 질투 때문에 쓰고 또 질투 때문에 자신이 쓴 것을 믿지 못한다. 마치 세상이 쓰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 끊임없이 쓰고 또 쓰지만 그가 쓴 것은 오로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다만 ‘탄식’뿐.

 

시인의 문장에서 이 탄식의 끝에서 저 지독한 욕망, 스스로 두려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그 불멸에의 열정을 엿본 것 같다.평생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나 머뭇거릴 운명, 그러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운명, 그 어리석은 운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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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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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바람의 집 - 겨울 판화 1」중에서, 95쪽)

 

 

겨울바람의 냉기가 여전한 춘삼월이 시작되는 이 무렵, 시인 기형도와 함께 따뜻한 어머니 손길을 떠올린다. ‘겨울 판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의 시 ‘바람의 집’에 귀 기울이며 황량한 겨울바람 소리를 함께 듣는 것이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어머니는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말한다.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한다.’

 

어머니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시인은 봄날에 와서 봄날에 갔다. 1960년 봄날이 오는 3월에 세상에 와서 1989년 아직 바람이 차가운 3월에 세상을 떠났다. 3월 7일 만 서른 살 생일을 엿새 앞둔 날이었고,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이었다. 새벽의 극장, 그의 가방엔 원고뭉치가 들어 있었다.가방 안에는 시작 노트와 시 원고가 들어 있었다. 안고 있던 그 시들이 바로 어머니가 말했던 그 울음소리였던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134쪽)

 

 

기형도는 참 여린 사람인 것 같다. 보통 어린 나이엔 어머니가 겪을 고통보다는 내 자신의 외로움과 불편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인데. 그의 시에는 그의 기다림이 한 칸, 어머니의 지치고 힘든 삶이 한 칸, 이렇게 하나씩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슬프던 날도 세월이 한참 흘러 돌아보면 그리운가 보다. 시장에 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배고프고 외롭기만 하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시선이 이렇게 다정해도 되는가. 눈물겹다. 아버지도 없고 형제들도 돈 벌러 다른 데로 가버린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소년은 오직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 있어도 아랫목을 비워두는 마음을 누구라도 훔쳐본다면 다독여주고 싶으리라. 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아이를 어떻게 보듬었을지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아이가 기다린 것은 밥이 아니라 품이었으리라.

 

그래서 그의 시가 더 아프게 다가오는가 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이 자신의 처지와 교차되어 더욱 증폭된다. 그는 상대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외면할 만큼 모질지 못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시인이다. 이렇게 하나하나를 다 느끼고 아파하니, 세상을 굳세게 살아가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이 빨리 끝나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오자 그의 죽음을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참 아쉽다. 그의 부재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 집」, 81쪽)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고라도 하는 듯한 문구들이 애절하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구애 없이 자신을 잠가버리는 완숙함. 읽을수록 리드미컬한 운율에 끌려 묘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이런 기분이 있기에 생각날 때마다 기형도를 읽는다.

 

기형도의 ‘빈집’이 그것이다. 이 시는 거창하게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 삶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젊은 날의 사랑은 순수하다. 그러므로 더욱 열정적이다. 길지 않았던 사랑에의 기억은 그 열정으로 인하여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사랑을 잃고, 사랑을 하던, 그 짧았던 밤들에게,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에게, 아무 것도 모르며 타오르던 촛불에게, 눈물에게, 열망에게 아픈 작별을 고한다.

 

시인은 사랑을 잃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이 시를 쓴다고 한다. 이어서 나오는 시구들이 모두 자신의 때(더러움 혹은 먼지)를 의미한다. ‘짧은 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 ‘내것이 아닌 열망’ 등이 모두 그것이다. 살면서 고통스러워했던 대상물이다.

 

시인은 이 대상물을 그가 있던 빈집의 좁은 방에 가둬놓는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방을 나온다. 시인이 그 대상물과 함께 방에서 나와 ‘장님처럼’ 어렵사리 문을 잠그자 그 방은 빈집이 된다.

 

우리가 함께 울고 웃던 삶을 버린다는 것은 사랑을 잃은 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과감히 그 대상을 버리고 나와 문을 잠근다. 그러면서 더러움과 고통을 털어낸다. 물론 이 시는 마음속에서 이뤄지는 일을 표현한 것이다. 사랑은, 젊은 시절, 그 사랑에의 열망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혹독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진실한 것이다.

 

기형도는 실제의 삶에서는 매우 유쾌하고 사람들과의 친화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왜 그는 이런 고독하고 절망적인 시들을 남겼을까.

 

그가 세상을 떴지만 사람들이 더욱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의 시가 누구나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하고 그를 생각 할 때마다 뒤흔드는 허무와 절망에서 솟음 치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절망에서도 아름다움이 솟다니. 기형도는 왜 절망을 선택했을까. 누군가가 말했다. 인생을 살면서 결코 벗아 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죽음과 선택이라고. 죽음은 알겠는데 선택은 무엇일까. 쉽게 말하면 그것은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겸손과 오만, 용서와 원망, 정직과 속임수 등 우리에게는 선택해야 하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 아닌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선택이라고 했고 선택을 회피하는 것도 선택이라고 했다. 오늘도 우리들은 선택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라 넋도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 39쪽)

 

 

시에서 그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날은 오늘보다 더 추운 날이었던 것 같다. 그는 도시를 걸으며 참 외로워했다. 이 뼈아프고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도 참 많은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빈 트럭이 서있는 어두운 골목의 일상을 지나오면서 많이 지치고 많이 때묻어왔다.

 

도시에서 한 개인이란 늘 이렇게 소외되고 무능력한 존재다. 이것이 바로 도시 삶의 법칙이다. 모여 있으되 따로 있는 것. 그리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초라할 정도로 미미한 것. 그는 이런 삶을 원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돌아보게 되는 사람들의 아픔이 다 느껴지고 보였다. 그러나 이걸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것이 사람 간에 진정한 교감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니,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가 바라는 삶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그의 시가 우리들의 삶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역시 기형도의 시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깊이가 있다. 그래서 시인의 문장이 끌린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램프와 빵 - 겨울 판화 6」, 119쪽)

 

 

기형도의 시는 언제나 겨울이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이다. 언제나 겨울이다. 아직도 추운 늦은 겨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현실을 도피한 자가 만나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끝끝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감성의 보루이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유년시절의 가난과, 사랑을 얻지 못한 절망과, 시대에 대한 허무와, 죽음에 대한 예감이, 곧 우리 자신의 아픔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문장을 마주치면 당연히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시는 언제나 우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시인의 생이 멈춰진 3월 7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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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생각, 만들어진 행동 - 당신의 감정과 판단을 지배하는 뜻밖의 힘
애덤 알터 지음, 최호영 옮김 / 알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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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이유, 피겨 드레스 색깔로 알 수 있다?

 

‘약물 복용은 금지하면서 레슬링, 태권도, 권투 종목에서 두 선수 중 한 명에게만 빨간색 유니폼을 입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43쪽)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해 무패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레슬링의 정지현, 이스트반 머요로스, 아르투르 타이마조프, 권투의 알렉산데르 포벳킨, 오들라니에르 솔리스, 태권도의 문대성 선수는 모두 파란색이 아닌 빨간색 유니폼을 착용하도록 배정받았다. 당시 그레코로만형 레슬링, 자유형 레슬링, 태권도, 권투 종목의 모든 경기 결과를 분석한 결과, 사소한 요인으로도 승패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 수 있는 경우에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전체 시합의 62%를 이겼다. 이쯤 되면 빨간색이 ‘심리적인’ 스테로이드 약물처럼 작용한다는 말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빨간 옷을 입은 선수가 상대 선수보다 더 우월한 느낌을 받는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스포츠심리학에서는 선수들의 복장 색깔과 경기 판정과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경기를 판정하는 심판도 선수들의 복장 색깔에 영향을 받아 편견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42명의 태권도 심판들을 대상으로 빨간색 보호장비와 파란색 보호장비를 각각 착용한 두 선수 갑과 을의 경기 비디오를 여러 번 보여준 뒤에 채점을 하는 실험을 했다. 여기서 21명의 심판은 원래 경기 비디오를 보면서 채점했고, 나머지 심판은 선수들의 보호장비 색깔이 반대가 되도록 디지털 기술로 조작한 경기 비디오를 보고 채점했다. 다시 말하자면 원래 빨간색 보호장비를 착용한 갑은 조작된 비디오에서는 파란색 장비를, 반대로 파란색 보호장비를 착용한 을은 빨간색 장비를 착용했다.

 

보호장비의 색깔에 영향을 받지 않고, 객관적인 채점 규정으로 판정을 내린다면 갑과 을은 똑같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실험 결과, 심판은 전혀 다른 판정을 내렸다. 원래 경기 비디오에서 갑이 을보다 1점 많은 8대 7로 승리했다. 반면 조작된 경기 비디오에서 빨간색 장비를 착용한 것으로 조작된 을(원래 비디오에서는 파란색 장비 착용)이 8점을 받아 승리했다. 결국 심판들은 똑같은 경기를 보면서 빨간색 복장의 선수에게 더 많은 점수를 준 것이다.

 

그래도 실험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한동안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논란의 소치 동계 올림픽 이슈를 다시 언급할 수밖에. 지금도 러시아의 소트니코바의 금메달 수상에 대해서 전문가와 해외 언론들은 심판들이 개최국인 러시아 선수에게 과도하게 높은 점수를 줬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국민도 그렇고, 전 세계 사람들(러시아를 제외한)은 소치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종목의 금메달은 소트니코바가 아니라 김연아라고 주장한다. 개최국으로서의 홈 어드밴티지, 거기에다가 러시아 피겨 연맹 회장의 부인이 피겨스테이팅 여자 싱글 경기의 심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올림픽이 끝난 지금도 편파판정 의혹이 싹 가시지 않고 있다.

 

심판진 구성의 문제도 있었지만, 여기서 선수들의 복장 색깔이 심판 판정에 영향을 주는 실험 결과를 김연아 대 소트니코바 경기에 대입해보면 판정의 부당함을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사진은 소치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쇼트 프로그램에 참가한 소트니코바와 김연아 선수이다. 이 두 선수가 입은 피겨 드레스 색깔은 주목하시라. 소트니코바는 빨간색, 김연아는 옅은 노란색이었다.

 

경기 후 소트니코바의 쇼프 프로그램 점수는 74.64점으로 전체 2위, 김연아는 74.92점으로 근소하게 앞선 점수를 받아 1위에 올랐다. 쇼트 프로그램 경기가 끝난 뒤에 해외 언론들은 소트니코바의 쇼트 점수가 거품이라고 주장했다. 소트니코바의 기술 기본점수는 김연아보다 1점 낮았지만 가산점이 9점대로 더 많았다. 경기 전까지 그리 주목받지 못한 선수였던 소트니코바는 소치 올림픽 전까지 자신의 쇼트프로그램 점수가 70.73점이었지만 이날 자신의 최고 점수 기록을 무려 4점 가까이 끌어올린 것이다.

 

선수 복장 색깔 실험 결과를 생각한다면 러시아 출신 심판들은 자국 출신에, 그것도 ‘빨간색’ 피겨 드레스를 입었고, 30명의 선수들 중에서 29번째로 출전한 소트니코바에 후한 가산점을 준 셈이다. 다만 소트니코바처럼 빨간색 계열의 피겨 드레스를 입고 출전한 선수들도 있을 것이다. 쇼트 프로그램 전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소트니코바가 나오기 전에 몇 명의 선수들이 빨간색 계열의 피겨 드레스를 입었다면 복장 색깔과 판정의 연관성을 설명하기에는 타당성이 떨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스포츠심리학계에서도 빨간색 복장이 불공정한 판정으로 유도하는 결과에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다.

 

 

 

 Scene #2  난폭한 주정뱅이를 온순하게 만든 색깔은?

 

다음과 같은 스포츠 종목 사례 이외에도 인간의 행동, 감정, 판단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외부의 힘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 붉은색 복장 선수가 유리한 판정을 받는 것처럼 사소하게 보는 색깔이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더 소개하자면 ‘분홍색 주정뱅이 유치장(Drunk Tank Pink)’이라는 것이 있다. 분홍색이 미국의 소도시 구치소에서 난폭한 술주정뱅이를 가두는 유치장 벽면에 칠해지면서 나온 말이다. 분홍색 유치장에 주정뱅이들을 가두자 놀랍게도 온순해졌다고 한다. 분홍색이 사람의 감정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색만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까. 색깔뿐만 아니라 시선, 공간, 온도, 편견, 문화,·상징, 이름, 명칭도 우리의 감정을 지배한다. 더운 날씨에 우리가 불쾌지수가 올라가고 짜증나는 이유도 온도의 영향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국가에 대한 일종의 공포증과 반감을 가진 미국인들은 터번을 두른 사람만 보면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인식했는데 이것은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면 미국 텍사스에서 토네이도가 발생한다는 내용의 ‘나비효과’ 이론이 있다. 사소한 힘들이 복잡한 연쇄반응을 거쳐 우리의 마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과 그 영향을 인지하면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자신의 능력을 통제할 수 있다.

 

 

 

 Scene #3 사소한 것이 당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

 

의외의 조건들이 인간에게 미치는 과정의 사실을 다양한 심리 실험과 자료 조사를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혀진다. 그러나 책에서 소개된 모든 실험과 사례들이 다 설득력이 높더라도 일부는 실생활에 적용하면 실험 결과대로 그대로 재현될지 의문이 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심리학적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러한 사례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명하다.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아주 작은 사소한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지배받는다는 것. 몇 년 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미국의 심리상담 치료사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처럼 우리는 사소한 것에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근심에 가까울 정도로 목숨까지 걸 수준이 아니라면 이제는 사소한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이성의 힘을 빌리는 합리적인 동물에 가까울 수는 있어도, 절대로 신에 가까운 완벽한 합리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외부적인 조건은 간혹 냉철한 이성을 조종하여 우리 삶에 조용하게 다가와서 장난칠 때도 있으니까. 이런 갑작스럽고 짓궂은 장난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외부적인 힘을 세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외부적인 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과 행동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신문 속 ‘오늘의 운세’에 나오는 내용만으로 우리 삶을 결정할 수 없다. 운세 내용대로 100% 똑같이 이루어진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래도 내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인 조건을 살펴보자. ‘오늘의 운세’ 대신 오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사소한 주변을 둘러보자. 혹시 아나? 오늘 외출할 때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 밖의 날씨 상태 심지어 당신의 이름까지도 당신의 하루 운세를 결정짓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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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3-0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확실히 스포츠 선수들은 유니폼의 색깔에 따라 눈에 잘 띄기도 하고,
잘 안 띄기도 하는 것 같아요.
심판들이 빨간색 유니폼의 선수에게 더 눈이 가는 것이
남성들이 빨간 립스틱, 드레스, 구두 등에 끌리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cyrus 2014-03-06 22: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실 이 책, 일상 속 심리학 사례를 설명한 책이긴한데 일부 내용은 우리가 이미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이 많아요. 남성이 빨간 립스틱, 옷에 끌리는 것처럼요. 이 책에서도 은빛님이 언급하신 내용이 유사하게 소개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