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은행나무 그늘 속의 침묵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를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라, 100퍼센트의 악도, 100퍼센트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침묵의 거리에서』1권, ‘작가의 말’ 중에서, 7쪽)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침묵의 거리에서』를 읽다 보면 가면 뒤에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들킨 것처럼 뜨끔한 경우가 있다.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결정적인 순간에 직면하면 겉과 속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그것이 독자의 내면으로까지 파고들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는 책 표지에 광고 등을 위해 덧붙이는 띠지에 “오쿠다 히데오의 새로운 최고 걸작, 탄생”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글쎄. 사실 히데오의 대표작 『공중 그네』를 포함해서 그가 쓴 소설들을 읽지 않아서 이번 신작이 걸작의 수준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띠지가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야기의 무게감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요란스럽게 느껴진다. 그래도 ‘종횡무진하는 이야기’는 작가의 말처럼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모든 정황에 대해서 흑백을 가를 수 없게 만든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중학생의 왕따’ 문제를 소재로 했지만, 비극적인 색채를 띠는 일반적인 학교 왕따를 소재로 한 소설과는 달리 가해자와 피해자를 확실히 구분하지 않는다.

 

한여름, 학교에서 벌어진 한 소년의 죽음을 둘러싸고 인간 군상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단순한 사고사나 자살인 줄 알았던 죽음에 잔혹한 학교 폭력이 결부됐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학교, 유가족, 가해 학생, 경찰, 법조계, 언론이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인다.

 

중학교에서 열세 살 학생이 죽음을 맞는다. 2층 높이의 운동부실 지붕에서 학교의 자랑인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 속 도랑에 떨어져 사망한 나구라 유이치.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당황한 어머니의 전화 한 통에 아이를 찾아 나선 교사가 소년의 죽음을 처음으로 목격한다. 최초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단순한 실족 사고인지 사춘기 소년의 자살인지 아니면 훨씬 무거운 비밀이 숨어 있는 사건인지 수사에 나선 경찰과 학생을 보호하려는 학교의 의견이 갈린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유가족, 학교 폭력 주도자로 지목된 자녀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가해자 가족, 끝내 비밀을 밝히지 않으려 애쓰는 중학생들, 전대미문의 스캔들에 당황하는 교사들, 흉악한 소년 범죄를 밝혀내려는 말단 형사, 처음으로 만난 호외 앞에서 기자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신참 기자, 잠을 줄이면서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젊은 검사, 그리고 소문을 퍼뜨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입을 다무는 마을 주민까지. 말없이 죽은 소년의 시신 앞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페이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치는 가운데 어른도 아이도 결국 가장 중요한 이야기에는 굳게 입을 다문다. 모든 진실은 소년의 죽음을 지켜본 교정의 은행나무 그늘 속에 침묵할 뿐이다.

 

 

 

 Scene #2  ‘폭력에 침묵하는 학교’, 학생들도 교사도 두렵다

 

 

 

 

 

 

 

 

 

 

 

 

 

 

초동(初動). 맨 처음에 하는 행동이다. 어떤 지역에 지진이 일어날 때, 큰 진동에 앞서 나타나는 작은 진동을 뜻하기도 한다. 작은 것부터 살피지 못하면 크게 터진 후 대책은 온전하게 받아낸 재앙에 대한 피해 수습뿐이다. 그 여파가 한 도시를 초토화시킬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면 복원 시간도, 후유증도 길고 암울하다.

 

폭력 왕따 문제도 마찬가지다. 학교는 가해자, 피해자, 침묵자만이 있을 뿐 친구도 교사도 구세주가 돼주지 못한다. 자살하고 정신치료를 받는 끔찍한 일들이 사랑과 우정, 우리를 배워야 하는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히데오의 소설에 나오는 ‘침묵의 학교’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학교는 오래전부터 아파왔다. 또 정해진 시간대로 돌아가는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학교의 일상은 무척 분주하다. 학생들은 학교폭력, 왕따, 성적 경쟁에 시달리며 아프고, 교사들은 공문 폭탄에 치여 학생들 한 명 한 명에 관심을 가질 여유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낸다. 봄이 왔지만 봄을 느끼고 음미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학교는 지금 '침묵의 봄'이다.

 

이런 기막힌 현실 속에서도 남몰래 아픔을 겪고 있는 학생들과 무척 바쁜 교사들은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고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아니 심각한 갈등 속에 방황하고 있다.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숨 돌릴 틈 없이 갈등 관계가 이어진다. 이러한 일상 중에 오랫동안 내부에서 조용히 곪고 있던 왕따, 폭력 문제가 터진다면 학교 전체가 사건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된다.

 

교사들은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라고 말하며, 사건이 발생하면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구나’라고 먼저 생각한다고 말한다. (엄기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87쪽)

 

그렇다고 교사들이 이런 심각한 문제를 알면서도 모른 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를 뿐이다. 교사가 몸이 열 개가 아닌 이상 수많은 학생을 일일이 관리하고 보호해야 하는 책무를 부담하기가 힘들다. 아무리 교사가 학생들 간의 왕따, 폭력 사건의 조짐을 알고 있다고 해도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 학생들까지 끝가지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면 교사 입장에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세우고 싶어도 해결하기가 난감해진다. 학교 폭력 문제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커지고 그동안 묵인되었던 전체적 상황이 알려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대책을 세운다. 그야말로 교사는 학생들이 조립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따, 학교 폭력 문제가 일파만파 학교 외부까지 알려지게 되면 사건에 휘말린 폭력의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학생뿐만 아니라 이들을 담당하는 교사도 괴롭다. 아니, 누구에게 쉽게 말하기 힘들 정도로 무력감을 느낀다. 가해 학생만 학교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히데오의 『침묵의 거리에서』가 이전에 나온 학교 폭력, 왕따를 다룬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입시제도 같은 구조적 억압이 작동되어 스트레스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가득한 학교현장을 묘사하지 않은 것이다. 폭력 사건의 중심이나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를 직접적으로 표출했을 법한데 놀랍게도 그런 묘사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히데오가 입시위주 교육경쟁에서 벗어난 현실과 동떨어진 학교를 애초부터 설정하고 싶은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히데오가 묘사한 학교 폭력은 학생들, 특히 어른처럼 행동하고 싶고 자신보다 약한 학생 앞에서 ‘힘’으로 우위에 서고 싶은 남학생들의 분별력 없는 감정적 표출이다.

 

나구라 유이치는 한눈에도 왕따를 당할 만한 아이였다. 몸집도 작은 데다, 부잣집 아들에 성격도 내성적이었다. (『침묵의 거리에서』1권 57쪽)

 

나구라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품이 너무나도 유약한데다가 고지식할 정도로 답답해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친구들의 심한 폭력에 시달리면 허약하게 보이면서도 또래 여자나 1학년 후배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이중적인 면도 있다. 특히 테니스 능력이 한참 부족한데도 테니스부 훈련에 매일 꼬박꼬박 나오면 무조건 값비싼 테니스 라켓을 챙겨온다. 또래친구들이나 테니스부 1학년 후배, 3학년 선배 그리고 항상 약한 친구를 괴롭히고 부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일진들의 눈에는 나구라의 모습이 유난히 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생들은 나구라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구라가 반 아이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는 왕따가 된 것은 불쌍하지만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장례식 때 분위기에 휩쓸려 눈물을 흘린 일부 여학생들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침묵의 거리에서』2권 292쪽) 나구라는 내성적이면서도 착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구라가 매일 왕따와 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였다. 주변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폭력의 방관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에 반해 가해자로 지목된 네 명 가운데 단짝인 사카이와 이치카와는 또래는 물론 교사들로부터도 신망이 두터운 학생들이다. 심지어 사카이는 3학년 일진들에게서 나구라를 지켜주려고까지 했다. 열세 살의 중학생은 왕따, 폭력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막상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면 옮고 나쁨을 구분하는 사리분별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처음에 나구라를 지켜준 사카이와 이치카와는 또래집단 내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왕따, 폭력 분위기에 동조한 것이다.

 

학교 입시제도에 의한 분노만이 학교폭력의 원인이 아니다. 또래집단에서 공통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감정적 분노도 무시할 수 없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왕따, 폭력이 단순히 가벼운 장난처럼 여길 수도 있어도 아직은 판단력이 미숙하고, 폭력에 무덤덤하다. 자신보다 약하고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한 학생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나무라는 착한지 나쁜지 알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이다. 교사에게는 나무라 같은 학생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조용하고 ‘착한 학생’일 것이다. 그러나 엄기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착한 학생’ 나무라는 어떤 학생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텅 빈 기표’이며 투명인간과 같은 ‘노바디’(Nobody)다. 학생들에게도 대면하고 싶지 않은 ‘노바디’이고, 교사들의 눈에도 띄지 않는 조용한 ‘노바디’인 것이다. 이런 학교의 ‘노바디’는 학교의 적극적인 관리 대상이 되는 순간, 언제 사고칠지 모르는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구라는 학교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보잘 것 없는’(Nobody) 학생이었다. 그냥 학생들 사이에서 괴롭히고, 놀리는데 적합한 관심 대상이었다. 이 ‘텅 빈 기표’는 죽어서도 ‘노바디’였다. 학교 폭력에 대한 기나긴 침묵 때문에 비밀 속에 묻힐 뻔한 죽음의 진상이 완전히 드러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몇 사람 아니 전교생의 침묵이 사건 결과 하나에 촉각을 곤두서는 학교와 가해 학생 부모, 나구라의 부모 사이에 서로 불신만 더욱 키우고 말았다.

 

 

 

 Scene #3  신뢰와 우정이 존립 불가능한 텅 빈 폐허     

 

사회는 수업 붕괴와 학교 폭력의 원인을 교사의 무책임과 무능력이라고 말한다. 교직이라는 ‘철 밥그릇’에 안주해 열정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교사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폭력사건이 터지고 나면 폭력 가해 학생 부모들은 말한다. 학생들이 처한 상황에 교사들이 무감각하고 무책임하다고. 하지만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학교 폭력 문제의 원인을 교사의 책임으로만 전적으로 돌릴 수 없다. 학생들은 교사와 관계 맺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고 지적한다. 학생들에게 다가가려 애를 써도 “당신이라고 꼰대가 아니겠냐?”고 밀쳐낸다. 그리고 히데오의 소설에 나오는 학생들처럼 한 사람이라도 진실을 언급하지 않는 이상 폭력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학교 폭력 사건 이후 학교의 대책에 폭력 가해, 피해 학생 부모 입장에서는 불신만 가득할 뿐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들의 부모는 모임을 조직해 대응에 나서고 나구라의 부모와 친척은 학교를 상대로 진실 규명을 요구한다. 가해 학생 부모 입장에서는 불미스러운 폭력 사건에 귀한 자식이 연루되는 것을 꺼린다. 피해 학생 부모 입장은 학교의 대책 방안을 강구하는 태도를 믿지 못한다. 가해 학생이든 피해 학생이든 이런 부모 중에는 자기 자식만 눈에 보이고,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른다.

 

나구라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이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미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는 말처럼, 당연히 아들이 인기가 많을 거라 생각했다.”(『침묵의 거리에서』2권 258쪽)

 

 

 

 

 

 

 

 

 

 

 

 

 

 

 

폭력은 밖으로 향하기도 하지만 안으로도 향한다. 똑같이 실연을 겪었는데 누구는 상대방을 찌르지만 또 누구는 자신을 찌른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밖으로 향하는 폭력뿐이다. 사실, 많은 아이들은 자기 내부를 향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그것을 혼자 감당하면서 내상을 차곡차곡 쌓아 간다. (중략) 아이들은 이 끔찍한 폭력과 스트레스의 충격을 ‘안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37~38쪽) 

 

학교는 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고통과 상처를 나누기보단 단절하고 대립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심지어 사건의 규모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으려고 학생들의 침묵은 그대로 은폐하기도 한다. 그럴수록 폭력의 중심 한가운데에 있는 가해, 피해 학생 그리고 교사는 서로 고립할 수밖에 없다.

 

친구가 죽었는데도 숨죽여야 하는 학교, 제대로 된 애도를 하지 않는 학교, 가해자를 몰아내고 나쁜 기억을 황급히 지우려는 학교의 모습 곳곳에 폭력이 도사린다. 학생들이 죽음으로써 폭로하는 것은 학교 공동체의 침묵에서 기인한 무관심이다. 폭력이 만연하면서도 침묵하는 학교는 신뢰와 우정이 존립 불가능한 텅 빈 폐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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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3-1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폭력에서 피해 학생 가족들이 제일 힘든 것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쉬쉬하려고 가해학생과 교사 학교 측이 똘똘 뭉치는 경우입니다.그래서 몇 년 전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에서도 피해 학부모(이 사람도 현직 교사더군요)는 학교와 담임교사를 고발했지요.그 사건이 일어나고서야 "맞아...교사 자녀들도 왕따되지 말라는 법이 없겠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느꼈지요.

cyrus 2014-03-12 21:39   좋아요 0 | URL
히데오의 소설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교사나 가해학생 부모 캐릭터는 나오지 않았어요. 다만 고슴도치가 제 새끼 이뻐한다고 가해학생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가해자의 위치로 낙인 찍히지 않으려고 피해 학생 부모와 학교 측과 맞서려는(?) 모습이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