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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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바람의 집 - 겨울 판화 1」중에서, 95쪽)

 

 

겨울바람의 냉기가 여전한 춘삼월이 시작되는 이 무렵, 시인 기형도와 함께 따뜻한 어머니 손길을 떠올린다. ‘겨울 판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의 시 ‘바람의 집’에 귀 기울이며 황량한 겨울바람 소리를 함께 듣는 것이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어머니는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말한다.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한다.’

 

어머니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시인은 봄날에 와서 봄날에 갔다. 1960년 봄날이 오는 3월에 세상에 와서 1989년 아직 바람이 차가운 3월에 세상을 떠났다. 3월 7일 만 서른 살 생일을 엿새 앞둔 날이었고,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이었다. 새벽의 극장, 그의 가방엔 원고뭉치가 들어 있었다.가방 안에는 시작 노트와 시 원고가 들어 있었다. 안고 있던 그 시들이 바로 어머니가 말했던 그 울음소리였던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134쪽)

 

 

기형도는 참 여린 사람인 것 같다. 보통 어린 나이엔 어머니가 겪을 고통보다는 내 자신의 외로움과 불편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인데. 그의 시에는 그의 기다림이 한 칸, 어머니의 지치고 힘든 삶이 한 칸, 이렇게 하나씩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슬프던 날도 세월이 한참 흘러 돌아보면 그리운가 보다. 시장에 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배고프고 외롭기만 하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시선이 이렇게 다정해도 되는가. 눈물겹다. 아버지도 없고 형제들도 돈 벌러 다른 데로 가버린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소년은 오직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 있어도 아랫목을 비워두는 마음을 누구라도 훔쳐본다면 다독여주고 싶으리라. 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아이를 어떻게 보듬었을지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아이가 기다린 것은 밥이 아니라 품이었으리라.

 

그래서 그의 시가 더 아프게 다가오는가 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이 자신의 처지와 교차되어 더욱 증폭된다. 그는 상대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외면할 만큼 모질지 못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시인이다. 이렇게 하나하나를 다 느끼고 아파하니, 세상을 굳세게 살아가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이 빨리 끝나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오자 그의 죽음을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참 아쉽다. 그의 부재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 집」, 81쪽)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고라도 하는 듯한 문구들이 애절하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구애 없이 자신을 잠가버리는 완숙함. 읽을수록 리드미컬한 운율에 끌려 묘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이런 기분이 있기에 생각날 때마다 기형도를 읽는다.

 

기형도의 ‘빈집’이 그것이다. 이 시는 거창하게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 삶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젊은 날의 사랑은 순수하다. 그러므로 더욱 열정적이다. 길지 않았던 사랑에의 기억은 그 열정으로 인하여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사랑을 잃고, 사랑을 하던, 그 짧았던 밤들에게,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에게, 아무 것도 모르며 타오르던 촛불에게, 눈물에게, 열망에게 아픈 작별을 고한다.

 

시인은 사랑을 잃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이 시를 쓴다고 한다. 이어서 나오는 시구들이 모두 자신의 때(더러움 혹은 먼지)를 의미한다. ‘짧은 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 ‘내것이 아닌 열망’ 등이 모두 그것이다. 살면서 고통스러워했던 대상물이다.

 

시인은 이 대상물을 그가 있던 빈집의 좁은 방에 가둬놓는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방을 나온다. 시인이 그 대상물과 함께 방에서 나와 ‘장님처럼’ 어렵사리 문을 잠그자 그 방은 빈집이 된다.

 

우리가 함께 울고 웃던 삶을 버린다는 것은 사랑을 잃은 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과감히 그 대상을 버리고 나와 문을 잠근다. 그러면서 더러움과 고통을 털어낸다. 물론 이 시는 마음속에서 이뤄지는 일을 표현한 것이다. 사랑은, 젊은 시절, 그 사랑에의 열망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혹독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진실한 것이다.

 

기형도는 실제의 삶에서는 매우 유쾌하고 사람들과의 친화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왜 그는 이런 고독하고 절망적인 시들을 남겼을까.

 

그가 세상을 떴지만 사람들이 더욱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의 시가 누구나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하고 그를 생각 할 때마다 뒤흔드는 허무와 절망에서 솟음 치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절망에서도 아름다움이 솟다니. 기형도는 왜 절망을 선택했을까. 누군가가 말했다. 인생을 살면서 결코 벗아 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죽음과 선택이라고. 죽음은 알겠는데 선택은 무엇일까. 쉽게 말하면 그것은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겸손과 오만, 용서와 원망, 정직과 속임수 등 우리에게는 선택해야 하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 아닌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선택이라고 했고 선택을 회피하는 것도 선택이라고 했다. 오늘도 우리들은 선택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라 넋도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 39쪽)

 

 

시에서 그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날은 오늘보다 더 추운 날이었던 것 같다. 그는 도시를 걸으며 참 외로워했다. 이 뼈아프고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도 참 많은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빈 트럭이 서있는 어두운 골목의 일상을 지나오면서 많이 지치고 많이 때묻어왔다.

 

도시에서 한 개인이란 늘 이렇게 소외되고 무능력한 존재다. 이것이 바로 도시 삶의 법칙이다. 모여 있으되 따로 있는 것. 그리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초라할 정도로 미미한 것. 그는 이런 삶을 원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돌아보게 되는 사람들의 아픔이 다 느껴지고 보였다. 그러나 이걸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것이 사람 간에 진정한 교감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니,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가 바라는 삶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그의 시가 우리들의 삶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역시 기형도의 시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깊이가 있다. 그래서 시인의 문장이 끌린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램프와 빵 - 겨울 판화 6」, 119쪽)

 

 

기형도의 시는 언제나 겨울이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이다. 언제나 겨울이다. 아직도 추운 늦은 겨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현실을 도피한 자가 만나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끝끝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감성의 보루이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유년시절의 가난과, 사랑을 얻지 못한 절망과, 시대에 대한 허무와, 죽음에 대한 예감이, 곧 우리 자신의 아픔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문장을 마주치면 당연히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시는 언제나 우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시인의 생이 멈춰진 3월 7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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