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해바라기」 1888년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은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오늘 중앙일보의 ‘나를 흔든 시 한 줄’이라는 코너에 유종호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이 함형수의 ‘해라바기의 비명’을 소개했다. 아침에 만난 반가운 시였다. 그러나 옥에 티가 있었다. 시에 오자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의 부제가 표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이 수록된 시집은 1989년 문학과 비평사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됐으나 현재 절판이다. 지금은 그의 시집은 eBook로 볼 수 있다.

 

 

이 시의 부제는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다. 신경림 시인은 자신이 매우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가 쓴 책『시인을 찾아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의 분량이 적다해서 별 볼일 없는 시인이 아니다. 시는 질로 따져야지 양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 그가 남긴 시는 ‘해바라기의 비명’ 단 한 편뿐이지만, 수천, 수만의 시인들 가운데 단 한 편의 ‘해바라기의 비명’이 없는 시인이 허다하다”고 썼다.

 

여름의 뙤약볕에도 굴하지 않고 태양을 마주하던 해바라기는 가을이 되면 절로 고개를 숙인다. 마치 사람의 한 생애를 닮았다. 피 끓는 청춘의 시절 당당하게 고개 들고 운명과 대결하던 이들도 나이가 들면 운명과 맞서려 하지 않는다. 그 부질없음을 알게 된 까닭이리라. 대신 불멸을 꿈꾼다. 누구든 죽고 나서 흔적 하나쯤 남기고 싶어 한다. 훗날 ‘참 잘 살다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 노란 해바라기와 보리밭, 무덤, 태양, 꿈, 그리고 부제를 보면 이 시는 화가 반 고흐의 꿈과 죽음을 소재로 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

 

반 고흐가 자살한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 시의 모티브로 등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뒤 함형수가 반 고흐처럼 정신착란증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실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반 고흐는 정신질환 속에 권총 자살했으며, 그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 테오 역시 형이 세상을 뜬 지 6개월 만에 정신착란으로 숨졌다.

 

두 형제는 밀밭과 해바라기가 있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 나란히 묻혔다. 생전에 작품이 팔리지 않았던 반 고흐의 쓸쓸함, 이와 대비되는 열정적이고 눈부신 예술세계, 형제의 죽음 등이 함형수의 시에 무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숙연한 느낌을 준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 고갱과 함께 쓸 작업실을 장식할 목적으로 해바라기를 그린다고 하였다. 프랑스 남부의 8월에 고흐는 생의 의지를 가지고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었다.

 

고흐는 맹렬한 속도로 그린다. 자세히 보면 그림물감이 미묘하게 서로 섞이고 있고 마르지 않은 상태의 물감을 덧칠하는 것으로 독특한 생명감을 자아내고 있다. 고흐는 꽃 그 자체의 볼륨감을 내기 위해서 물감을 충분히 발라 거듭하고 있다. 거기에 따라, 마치 조각과 같은 입체감이 그림으로 태어난다.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1888년

 

 

그러나 고갱은 기억을 바탕으로 창조력을 구사하는 반면 고흐는 눈앞에 모델이 없으면 그릴 수 없었다. 정반대의 화가였던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두 명은 대립해 우정 관계는 무너져 갔다. 그렇게 위험한 공동생활 속에서 그려졌던 것이 바로 ‘해바라기’ 그림이다. 고갱의 도착을 손꼽아 기다려 그린 해바라기.

 

 

 

 

폴 고갱 「의자 위의 해바라기」 1901년

 

 

 

 

 

반 고흐 「폴 고갱의 의자」 1888년

 

 

두 명의 우정의 표시이기도 한 이 꽃을 한 번 더 그리는 것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관계를 수복하려고 했지만 오래지 않아 결국 두 사람의 공동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고갱이 떠난 아틀리에에서, 고흐는 다시 해바라기를 두 매 그린다. 이별의 해바라기를.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 뒤, 남태평양 이국 땅에서 병마로 인해 피폐해진 예술혼을 끝까지 불태우고 있던 고갱은 해바라기 그림 한 점을 제작한다. 저 먼저 세상을 떠난 고흐가 그리워서였을까. 의자 위에 놓인 해바라기는 생전 고흐가 의자 위 물건을 정물화의 소재로 그렸던 그림이 연상된다. 고갱은 고흐가 정신적 충격으로 한 쪽 귀를 자른 사건과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고, 진심으로 애도했다고 한다.  

 

아니면 이제 곧 병으로 지친 자신의 영혼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신의 숨결을 느꼈을까. 고흐의 해바라기가 태양빛처럼 이글거리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면 고갱의 해바라기는 거의 말라 죽을 듯하다. 노란 꽃잎이 듬성듬성 떨어져 나간 상태다.

 

배경과 화병조차 노란색인 이 그림은 고갱이 초록색 눈동자라고 묘사한 해바라기의 중심만 제외하고는 거의 노란색 일색이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른 것이긴 하지만, 고흐가 생의 희망을 가지고 그린 이 해바라기조차 그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열네 송이가 담긴 화병은 희망과 정열의 노란색을 띠고 있지만 화병에 담긴 해바라기들은 고흐 그 자신처럼 병들어가면서도 생의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하다.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처럼 고갱은 고흐를 떠나려했고, 고갱과 다투고 난 뒤 자신의 귀를 자르면서부터 고흐의 정신병적 발작은 시작되었다. 그는 정신병원에 있을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고통스러울 때에도 그림을 그렸다. 제 정신으로는 살 수 없었던 사람. 그 사람이 빈센트 반 고흐였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예술혼의 결정체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영혼의 꽃이다. 지독한 신경강박증이 없었더라면 누가 청년 화가의 해바라기 은유에 대해 그토록 오래토록 기억해줄 것인가. 오늘밤도 몇 번씩 제 귀를 면도날로 오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당신, 당신이야말로 해바라기 품는 예술가임을 잊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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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제임스 써버'라는 작가를 아시는가. 최근 제임스 써버의 책이 출간되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작가의 이름이지만, ‘제2의 마크 트웨인’으로 불리는 미국의 단편작가이자 삽화가다. 마크 트웨인은 『톰 소여의 모험』『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집필하기 이전에 유머 소설 작가로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렸다. 세상을 위트 있게 풍자하는 트웨인의 미국적 유머는 인간성이 상실되는 물질문명을 배격하고 대범하게 비판하는 표현으로 유명하다. 써버의 유머 또한 물질문명 속에 놓여진 개인의 고독을 뒤집어 놓은 점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써버에게 유머란 “어떠한 정서의 혼란을 성찰하여 부드럽게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써버도 트웨인 못지않게 작가 이전에 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국무성 공무원, 지방신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뉴요커> 지의 편집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릴 때부터 한쪽 눈이 나빠 말년에 실명하고 만다. 어린 시절 자신의 형제들과 ‘빌헬름 텔’ 놀이를 하다가 그만 화살이 한쪽 눈을 찌르는 사고를 겪었다. 비록 한쪽 눈은 보이지 않아도 써버는 죽을 때까지 글과 그림을 남겼다.

 

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써버의 책(e-Book 포함)은 다음과 같다.

 

 

 

 

 

 

 

 

 

 

 

 

 

 

 

 

 

 

 

 

 

 

 

 

 

 

 

 

 

* 『난쟁이 퀼로우』 민음사 (1992년, 품절)
* 『나방과 별』 동천사 (1996년, 절판)
* 『아주아주 많은 달』 시공주니어 (1998년)
* 『열세 개의 세계』 살림어린이 (2009년)
* 『공주님의 달』 이스토리 (2012년, e-Book)
*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 뗀데데로 (2013년)
* 『공중그네를 탄 중년 남자』 뗀데데로 (2014년)

 

 

알라딘에는 ‘제임스 서버’, ‘제임스 써버’로 표기되어 있는데 둘 다 하나만 검색해도 동일한 저자의 책을 확인 가능하다.

 

작년에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이 출간되었을 때 알라딘 온라인 중고샵에서 2천 원도 안 되는 싼 가격으로 『나방과 별』을 구입했다. 알라딘에서는 책 표지가 등록되어 있지 않았는데 실물은 이렇다. 초등학생이 보는 동화책이 연상된다. 사실 분량이 얇은데다 우화, 짧은 동화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초등학생이 읽어도 좋다.

 

 

 

 

 

 

그런데 이 책이 어느새 절판되고 말았다. 내가 중고샵에서 구입했을 때만 해도 구입이 가능했다. 이렇게 또 한 권의 책이 조용히 사라지는구나.

 

『나방과 별』에는 ‘우리 시대의 우화’, ‘인생의 경주’, ‘다락방의 올빼미’라는 부제목으로 우화와 동화 그리고 써버가 직접 그린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우리 시대의 우화’는 동물 또는 인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13편의 우화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우화에 삽화 한 점이 실려 있고, 이야기의 끝에 짤막한 교훈도 언급한다. ‘인생의 경주’는 글이 아닌 35개의 그림으로 만든 한 편의 이야기다. 인생을 ‘경주’로 비유하여 그림으로 표현했다. ‘다락방의 올빼미’(부제: 애완동물 상담극)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고민을 직접 써버가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답변해주는 대담 형식의 콩트이다

 

이 책은 서문의 내용이 독특하다. 써버가 직접 쓴 건데 3인칭 관점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써버는 어린 시절에 겪은 실명한 사고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별다른 일 없이 평탄했다고만 술회할 뿐이다. 나머지는 간단한 이력만 언급했다.

 

 

 

 

 

책의 동명 제목이기도 한 우화 ‘나방과 별’은 자신만의 꿈을 가지면서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력의 가치를 강조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방 한 마리는 별로 날아가는 꿈을 가지게 되었는데 나방의 부모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충고한다. 나방의 부모는 자신들은 별이 아닌 램프 주위에 맴도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별을 쫓는 방향으로 날아가지 말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별을 열망하는 나방은 저녁이 되면 별이 있는 곳으로 날기 시작했다. 날마다 아침이 돼서야 녹초가 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는 주인공 나방이 나방의 습성처럼 램프 주위에 돌다가 타버리지 못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나방은 램프 근처로 맴돌다가 타다 죽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별에 가까이 날아가고 싶었다. 그는 결코 별에 갈 수가 없다. 빛의 속도로도 4년이 넘게 걸리는 아주 먼 곳에 떨어진 곳을 연약한 날갯짓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나방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나방의 부모와 형제들은 램프 주위를 돌다가 타서 죽었다. 별을 열망하는 나방은 다른 나방에 비해 오래 살 수 있었다. 늙어버린 나방은 생각했다. 비록 실제로는 별에 다다르지 못했지만, 자신은 드디어 별에게 다가갔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자 그에게는 영원한 기쁨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오래 살 수 있도록 빛나게 해 준 진정한 꿈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방의 삶을 빛나게 해준 진짜 별이었다. 만약에 별에 가고 싶은 꿈을 가지지 않았다면 주인공 나방도 램프 빛에 타서 죽었을 것이다.

 

 

 

 

 

 

 

 

 

 

 

간혹 글 대신 그림만 구성된 이야기도 있다. ‘사냥개와 빈대’는 글이 없다. 16개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에 소개한 우화처럼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빈대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는 사냥개의 모습을 관찰해서 그림으로 묘사한 것 같다. 

 

현재 출간된 써버의 책 중에서 내용이 아주 간략해서 킬링타임용으로 읽을 수 있다. 아직 써버의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나방과 별』의 삽화가 진짜 써버가 그린 것인지 의문이 조금 든다. 사실 삽화가 너무 단순하면서도 투박하다. 아무래도 초등학생 독자 대상으로 책을 편집해서 그런지 이 책만 가지고 써버의 그림 실력을 알 수 없을 듯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방과 별』에 수록된 우화, 즉 ‘나방와 별’을 포함해서 몇 편을 제외하면 교훈성과 거리가 먼 곳도 있으며 ‘다락방의 올빼미’는 애완동물 보호자의 고민을 유머스럽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써버의 의도가 그렇게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미국식 유머는 한국식 유머와 차이가 있긴 하다. 써버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마크 트웨인 뺨치는 유머를 재미있게 살리지 못한 번역도 아쉽다. 

 

책에 수록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내용이 어이없으면서 엽기적인(?) 결말의 콩트 한 편 소개하면서 써버의 절판된 책에 관한 잡문을 마무리짓겠다. 이건 우화라기보다는 우리가 아는 동화 ‘빨간 모자’를 색다르게 비틀어버린 패러디로 봐야하나. 어쨌든 써버의 삽화와 그가 언급한 교훈 한 마디가 유머스럽다.

 

 


<소녀와 늑대> (58~59쪽)

 

 어느 날 오후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커다란 늑대가 음식을 바구니에 담아 할머니에게로 가져갈 한 소녀가 숲을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소녀가 숲으로 걸어왔다. 음식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서 말이다.
 “너는 그 바구니를 할머니께 가져가는 거냐?” 늑대가 물었다.
 소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자 늑대는 소녀의 할머니가 어디에 사는지를 물었다. 소녀는 늑대에게 할머니의 집을 가르쳐주고 숲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할머니가 계신 집의 문을 열었을 때 소녀는 침대 위에 누군가가 나이트캡을 쓰고 잠옷에 갖춰 입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침대로부터 스물다섯 발자국 이상은 가까이 가지 않았다. 소녀는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할머니가 아니라 늑대라는 것을 눈치 챘던 것이다. 아무리 늑대가 나이트캡을 썼다 해도 할머니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녀는 들고 있던 바구니 속에서 자동권총을 꺼내 늑대를 쏘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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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 피터 - 인생을 바꾸는 목적의 힘
호아킴 데 포사다.데이비드 S. 림 지음, 최승언 옮김 / 마시멜로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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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인생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사람들은 이 질문 앞에서 누구나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낀다. 그 어떤 질문보다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가급적 피하고 싶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또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가장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물음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살아갈 세상은 어떤 곳인지,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내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진정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까닭이다.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시련 속에서도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이렇듯 중요한 인생의 목적이란 무엇이고, 왜 그리 중요하며,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인생의 목적은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즉 존재의 이유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깊은 의식이다. 그것은 정체성, 소명, 가치와 신념, 욕구 등이 망라된 우리의 존재와 삶을 규명하는 본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이고 방향이며 최종 목적지이다. 그리고 성취, 직업, 인간관계 등 우리 삶을 통제하는 근원이며 에너지의 원천이다. 인생의 목적은 이처럼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먹고살기에도 바쁘다는 이유라든가 특별한 사람이나 가지는 것으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부와 신분상승이 인생의 목적이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모든 것을 이룬 순간 오직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모두가 가는 길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자신의 삶이 옳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실패와 좌절을 겪고 희망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런 상황이 찾아오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표류하는 배처럼 방황의 연속일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피터’ 역시 그랬다.

 

피터는 불행했다. 가난하고 무식한 부모에게서 태어났기에 나면서부터 가난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게다가 그는 선천적으로 키가 작았다. 유전적 질병은 아니었지만 또래 아이들에 비해 현저하게 키가 작았던 그를 친구들은 난쟁이라고 놀려대며 왕따를 시켰다. 또한 분노조절장애가 있어 ‘욱’하는 성격으로 놀려대는 친구들과 싸움질하기 일쑤다. 그래서 친구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유일하게 그의 편이었던 엄마마저 아빠를 대신해 생계를 꾸려가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빠는 툭하면 술을 마시고 손찌검을 해댔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힘든 거리 생활을 하게 됐지만, 그의 주변에는 그를 돕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생기게 된다.

 

끊임없이 독서를 권하는 학교 선생님부터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알렉스 경 등 피터를 지지하고 독려하는 소중한 존재들이 피터를 어둠으로부터 끌어낸다. 낮에는 택시운전을 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하며 피터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또한 피터는 우리가 사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어들을 모아 드림 카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피터는 노숙자에서 택시 운전사가 되기까지, 그리고 하버드 출신 변호사가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아버지를 용서하고 화해한 피터는 어느새 진정한 거인이 돼 있었다. 예컨대, 피터의 무료 법률사무소는 노숙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실제 해결을 못한다 해도,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노숙자 출신의 변호사가 자신들의 말을 들어준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 큰 위안을 주는 부분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피터는 처음의 목적, 즉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인생의 목적을 차근차근 이뤄 간다.

 

 

 

 Scene #2  우화 형식 자기계발서의 등장

 

『난쟁이 피터』는 전작 『바보 빅터』 이후로 3년 만에 나온 호아킴 데 포사다의 신작이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에 출간한 『마시멜로 이야기』가 국내에서 빅히트를 친 이후 인생에 교훈을 주는 우화 형식의 자기계발서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마시멜로 이야기』가 성공한 것은 흡입력 있는 깔끔한 우화 형식의 이야기가 가진 힘도 있었지만 출판사 한국경제신문(한경BP)의 철저한 마케팅의 덕분이다.

 

처세서나 실용서, 그리고 우화는 모두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로 들려주느냐가 관건이다. 그런 점에서 『마시멜로 이야기』는 ‘잘 참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바꿔냈다. 성공한 갑부 조나단이 운전사 찰리에게 들려주는 성공의 비결에 따라 찰리가 스스로 삶의 방식을 바꾸는 과정을 실감나게 진행된다. 대가없이 도움을 주는 후견인이 생겼으면 하는 ‘키다리 아저씨’의 환상도 충족시켜준다.

 

『마시멜로 이야기』는 아나운서 정지영 씨의 대리번역 논란 이후로 판매량이 주춤할 듯 했으나 새 번역자와 새 출판사(21세기북스)로 옮겨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바보 빅터』는 한경BP에서, 이번에 나온 『난쟁이 피터』도 한경BP 소속 계열의 출판사인 ‘마시멜로’에서 출간되었다.

 

포사다의 신작 『난쟁이 피터』에 관한 언론과 독자의 관심이 높아서, 역시 ‘마시멜로 열풍’을 일으킨 저자의 인기를 다시 한 번 실감케 한다. 현재 4월 1일 기준으로 알라딘 에세이 분야 주간 베스트셀러 4위,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1위로 출간된 지 1주일 만에 상위권에 진입했다. 

 

 

 

 Scene #3  『바보 빅터』『난쟁이 피터』, 다르면서도 같은 이야기

   

그러나 냉정하게 이 책에 대해서 따져보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누구다 다 아는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처럼 들려줘야 독자의 흥미를 유도할 수 있다. 너무 뻔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는 절대로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과연 『난쟁이 피터』가 포사다의 전작들과 비교해서 ‘누구나 다 알면서도 흥미진진한 새로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마시멜로 이야기』『바보 빅터』『난쟁이 피터』에는 불행한 일을 겪는 주인공을 돕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주인공에게 진짜 성공의 의미를 알려준다. 이들은 책에서는 조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주인공이 성공의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중요한 인생의 멘토 또는 조력자로 나온다. 『마시멜로 이야기』에는 갑부 조나단, 『바보 빅터』는 문학교사 레이첼 그리고 『난쟁이 피터』는 크리스틴 선생님, 알렉스 경, 윌리엄 교수 등이 있다. ‘성공한 자’와 ‘성공을 원하는 자’의 인물 구도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면서도 독자들이 마지막까지 극적 긴장감을 놓지 않도록 이끈다. 그러나 비슷비슷하면서도 단순한 플롯은 우화라는 형식에서 볼 수 있는 한계이기도 하다. 우화는 장르적으로 보면 서사적인 것과 교훈적인 것이 절충된 단순 형식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비교적 저차원적인 사리 분별을 위한 것이나 실용주의적인 것이다. 그만큼 글의 밀도가 떨어지고, 자칫 가볍게 읽혀질 수 있다.

 

그리고 『난쟁이 피터』는 포사다의 두 번째 전작 『바보 빅터』의 인물과 플롯이 유사하다. 『바보 빅터』의 주인공 빅터는 IQ 173의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수줍음 많고 말도 더듬은 자신감 없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IQ 테스트에서 담임선생님의 실수로 73이 나오자 아이들로부터 아예 ‘바보 빅터’로 낙인찍힌다. 그는 학교를 자퇴하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진짜 바보로 살아간다. 또 다른 주인공 로라의 상황도 비슷하다. 부모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조차 그녀를 못난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예뻐질 수 없다는 자괴감에 늘 우울해하며 매사에 비관적이다. 결국 결혼생활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난쟁이 피터』의 피터처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유년기 시절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바보 빅터』의 빅터와 로라, 『난쟁이 피터』의 피터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어 열등감과 자괴감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빠져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숨어있는 잠재력과 재능을 서서히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이때부터 그동안의 상처를 함께 치유하며 새로운 긍정과 희망의 씨앗을 심기 시작한다. 두 책 다 이미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볼 수 있었던 ‘희망적인 삶을 위한 긍정의 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인생에 가장 필요하고도 중요한 교훈이지만 자기계발서 열 권 중에 두 세 권 정도만 읽어도 나오는 흔한 내용이다.

 

 

 

 Scene #4  전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신작   

 

출판사는 이 책이 ‘『바보 빅터』이후 400만 독자가 기다려온’ 최신작이라고 홍보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출판사가 말한 그 ‘400만 독자’는 『난쟁이 피터』에 만족했을지 의문이 든다. 포사다가 쓴 책을 한 번 이상 읽어보고, 그의 신작을 정말 기다리는 독자라면 기대에 못 미쳐 실망하지 않았을까.

 

나는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는 편이 아닌데다 ‘베스트셀러’ 딱지가 붙어도 잘 읽지 않는다. 운 좋게도 출판사로부터 포사다의 신작을 무료로 제공받아 읽게 됐는데, 사실 포사다의 책은 『난쟁이 피터』가 처음이다. 그 다음에 『마시멜로 이야기』『바보 빅터』순으로 읽어나갔다. 세 권 다 읽으면서 왜 우리나라 독자들이 자기계발서에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책의 교훈적인 주제는 정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번 곱씹어 봐야 할 좋은 내용인 것은 사실이다. 책을 읽다보면 성공한 명사의 격언이나 밑줄 긋고 싶은 문장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지극히 주관적이고, 좀 박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준수한 정도인 별 3개의 평가를 주고 싶지 않다. 읽는 내내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라서 그런지 나의 가슴을 울컥하게 해주는, 그런 감동이 밀려오지 않았다.

 

자기계발서를 읽고 나면 지금보다 나은 성숙한 삶으로 계발하고 발전하기 위한 실천이 꼭 따라야만 한다. 책을 덮고 나서 진부하게 중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거나 인상 깊은 구절로 채우는 서평을 쓴다고 해서 제대로 된 자기계발서 독서라고 보기 어렵다. 책의 내용을 평가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자기계발서를 읽었던 그 시간은 낭비에 불과하다. 심장으로 교훈을 느꼈으면 머리로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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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와이어스  「핀란드 인」 1969년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텅 빈 공간에 외로이 앉거나 서서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시선을 보내고 있는 부동의 인물이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의 그림이 지닌 공통된 표상이다. 「핀란드 인」도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에 속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포착한 듯한 세세한 인물의 표정과 자태, 잠시 일손을 멈추고 있는 순간의 꾸미지 않은 차림새와 용모, 자연스러움이 눈에 잡힐 만큼 선연히 그려진 극세필의 필치에서 인물의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벗겨진 이마와 민머리, 귀밑의 짧은 흰 머리칼 몇 올과 하얀 눈썹,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굴곡을 이룬 주름살, 그을린 피부 빛과 반점, 저 멀리 아득한 곳을 향해 주시하고 있는 시선,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에 젖어 있는 눈빛. 화폭 속의 '고독'이 가슴으로 밀려온다. 주시하고 있는 저 시선의 아득함, 건조한 공기와 투명한 빛, 텅 빈 공간의 고요, 꾸밈없는 황량한 분위기 속의 인물은 미국의 풍광과 땅의 표정에 다름없는 이미지이다.

 

 

 

 

앤드루 와이어스  「Field Hand」 1985년

 

 

와이어스는 펜실베이니아 주 채즈퍼드에서 출생한 후 평생 동안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 고향마을의 하찮은 정경과 인물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돌아보며 낱낱이 그려 왔다. 그는 미국의 정경과 일상생활을 사실적인 화법으로 묘사하여 땅을 터하고 사는 삶의 가치를 주장하고 지킨 ‘미국 정경주의’ 화가답게, 특히 지방주의 그룹의 대표 작가로서의 삶을 실천하였다. 지방의 작은 도시나 마을을 찬미하여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향수어린 욕구에서, 미국 중서부와 서남부지방의 삶과 풍경을 주로 그렸다. 

 

건조한 공기, 따가운 햇살,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의 아득하고 아득한 인적 없는 땅. 그 주체할 수 없는 광막함을 바라보면서 이 지상에 보잘 것 없이 존재하는 한 외로운 나그네로서의 '고독'이 가슴 저리게 느껴진다. ‘아득함’과 ‘덧없음’. 이 교차되는 가운데 피어오르는 명징한 ‘고독함’이야말로 와이어스가 그림으로 말하고자 한 메시지라고 보고 싶다.

 

 

 

 

 

앤드루 와이어스  「Wind from the Sea」 1947년

 

 

그 한없이 투명한 명징함으로 하여 마침내 작가는 허공과 같은 무아(無我)가 되고 무화(無化)된 나머지 온통 전체를 포용하여 그 자체로 될 수밖에 없는,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만나는 이웃사람들의 평소의 모습들, 허물어진 농막, 버려진 하찮은 물건, 빈 들녘, 바람결에 일렁이는 창문의 커튼 등 그야말로 존재하는 주변의 모든 것이 그의 분신으로, 작품의 소재가 된다.

 

그는 자신이 전통적인 의미의 사실주의자임을 부정하고 평소에 ‘나는 내 생각대로 그리는 순수한 추상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림 속의 인물은 그의 마을에 있는 이웃사람으로 핀란드에서 온 이민자인 조지 에릭숀이다. 한 때는 필라델피아의 조선소에서 일을 한 적이 있고 채석장에서 석공으로 오래 일했으며 지붕에서 떨어져 등을 다친 뒤부터 일을 못하고 있지만 대단히 강건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늦게 결혼하여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열다섯 살의 예쁜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은 와이어스 작품의 모델이 되어 인물과 누드화까지 그리게 해주었다.

 

 

               

 

 

우연하게도 이 핀란드 인의 얼굴 위로 영화 <가을의 전설>에 나오는 인디언 원스텝이 떠올랐다. 그가 지켜보고 회상한 미국 서부 몬타나 주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진 러드로우 일가의 파란만장한 가족사.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 그리고 죽음에 대한 장대한 스케일의 드라마. 특히 슬프고도 장엄한 영화 OST인 James Horner의 'Off to War'가 와이어스의 그림과 묘하게 어울린다. 그 음악의 흐름 속에서 아득함과 덧없음과 고독함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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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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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예술은 가짜다

 

바다 물은 파랗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란 색깔을 띠지 않는다. 이렇게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현상과 실제 사실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는 육체적 감각을 통한 인식의 확실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여기서 사물이나 현상의 실재 사실에 대해 육체적 감각과 경험에 기초한 주관적 인식이 객관성과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가가 문제다. 우리는 감각과 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을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앎의 개념과 연관시켜 생각하지만, 경험을 통해 인식하는 지식은 실제로는 진실이나 사실에 대해 불확실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험은 육체적 감각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화가나 시인에 의해 표현되는 예술은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현상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상의 본질인 이데아(idea)와 두 단계나 떨어져 있어 실재를 왜곡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 현상이고, 현상에 대한 또 한 번의 모방을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참다운 실체인 이데아로부터 동떨어져 있어 실재가 아닌 허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예술은 가짜다.

 

 

 

 Scene #2  표절도 가짜다

 

세계 철학자들의 할아버지에, 할아버지에, 그 고조할아버지보다 더 오래된 철학의 조상님 플라톤이 이정서의 소설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를 읽었다면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에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현상에 대한 또 한 번의 모방을 시도하는, 사이비 같은 예술 안에서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모방을 시도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플라톤은 예술을 일종의 사이비라고 생각했는데 그 중에 제일 싫어했던 예술가가 바로 시인이었다. 아마도 책 제목처럼 멋진 문학적 수사로 가득 찬 시, 소설을 읽고 감동받는 우리에게 위험하다고 경고했을 것이다. 너희들은 현실의 모방에 모방, 특히 윤리적으로 어긋나고 거짓에 가까운 표절의 예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하고 있었다고.

 

물론 처음에 현상을 모방한 원작자도 플라톤의 비판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원작자 순수의 창작물을 허락도 없이 자신이 창작한 것처럼 모방하는 것도 이데아의 본질에 맞지 않으며 실재의 현상을 더욱 왜곡하는 것이다. 진짜 실재를 부정하는 대신 거기에 자신이 그 실재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표절이다. 원작의 일부이든 전체이든 원작자의 허락 없이 몰래 모방하는 것은 실재가 아닌 허상에 불과하다. 표절자는 실재가 아닌 허상을 자신이 만든 실재인 것처럼 연기한다. 말 그대로 표절도 가짜다.

 

 

 

 Scene #3  ‘표절’이라 쓰고, ‘인용’이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심심하면 표절 논란이 생긴다. 남이 쓴 논문이나 소설에 일부 문장을 똑같이 따와서 자신이 쓴 문장처럼 사용한다. 표절을 의심받은 사람들은 다들 입을 맞춘 듯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인용했을 뿐이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원작자의 동의 없이 인용하거나 ‘인용’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민망할 정도로 흡사한 문장이 버젓이 보이는데도 표절을 부정한다. 가방끈 짧은 사람도 보면 표절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가방끈 긴 사람들은 오리발을 내민다. 표절과 인용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말하는 ‘인용’은 글을 좀 쓰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해보는 표현(?)의 방식쯤으로 여긴다. 즉, 학계나 문단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 표절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표절이 드러나면 재수 없는 것이며 안 걸리면 장땡이다. 일단 절대로 자신의 표절이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하에 표절자는 원작의 모방을 몰래 시도한다.

 

원작의 악의적 모방을 시도하는 표절 행위 자체도 잘못한 것이지만, 그것을 묵인하고 면죄부를 주는 사회도 더 잘못됐다. 이러니까 우리 사회가 ‘표절 공화국’ 소리를 듣지. 잘못된 표절을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당연히 정의롭고 옳은 행동이지만, 의외로 표절 문제를 처음 제기하거나 밝혀내려고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은 환영을 받지 못한다. 특히 오랫동안 사회적 명성을 두텁게 유지하고 있는 거물급 인사일수록 표절 논란에서 운 좋게 살아남는다(?). 표절이 증명되면 자신의 명예에 약간 흠집이 생길 뿐,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흠집은 잊히기 마련이다. 오히려 거물급 인사의 표절 행위를 문제 제기한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롭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명예에 심한 흠집이 생긴다. 이렇듯 부당한 표절 행위를 증명하려는 소수의 아웃사이더는 외롭고 쓸쓸하다.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대중이나 아예 진실을 왜곡하기 위해서 눈을 가리는 위선자들로부터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맞을 각오는 해야 한다. 아마도 이 사람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는 ‘문단의 게릴라’로 통한다. 혹자는 ‘비평계의 골칫거리’라고도 한다. 하지만 불편부당한 ‘독립적 지식인’으로 인정하는 이도 적지 않다. 문학평론가 이명원. 그는 극단의 평가를 받는다. 2000년에 낸 첫 평론집 『타는 혀』가 발단이다. 교수들에게는 일개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김현 같은 한국 비평계의 거목을 겁 없이 비판한 것이다. 뭐, 일단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이명원이라는 이름의 석 자로 인해 학계 전체가 발칵 뒤집혀버린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김윤식 교수의 저작물을 ‘표절’이라고 제기한 것이다.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 드나? 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너무 강한 거 아냐?”, “자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 역시 자네를 제도적으로 매장시킬 수밖에 없어.” (219~220쪽)

 

이 사건 때문에 아웃사이더는 스스로 ‘이단’의 십자가를 졌다. 이런 파문으로 대학원 박사과정도 자의반 타의반 중도하차해야만 했다. 학계의 권위주의와 패거리주의의 벽은 개인이 돌파하기엔 높고 두터웠다. 이씨는 스승을 비판한 뒤 자신에게 가해지는 제도적 폭력에 견디지 못해 자신이 다니던 대학원을 자퇴하며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자퇴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정서의 소설이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이명원 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소설에서는 실명 대신에 ‘이인서’라는 가명을 썼지만, 표절 논란의 당사자인 김윤식 교수는 실명 그대로 나온다. 후학이 선학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 없게 만들고, 표절 행위를 묵인하는 권위적인 학계의 몰상식한 모습을 다시 한 번 고발하고 부각시키려는 작가의 비판의식이 돋보인다.

 

 

 

 Scene #4  나의 작품을 만든 건 팔할이 ‘뻥’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권위만 남은 학계를 비판만 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작가의 표절 논란 그리고 특정 작가의 책을 팔기 위해서 출판사가 주도한 ‘사재기’ 등 은밀하게 감춰진 문학계 전체의 병폐를 은근슬쩍 고발한다.

 

우리가 감동받으면서 읽었던 유명 작가의 시나 소설이 알고 보니 작가를 꿈꾸는 무명의 문과생이 쓴 습작을 그대로 모방했다면? 베스트셀러라는 책 광고 문구에 혹해서 고른 책이 출판사의 사재기로 판매 부수를 올렸다면? 그것은 독자를 기만하고,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수 창작물이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작품은 진짜가 아니라 허상, 말 그대로 ‘뻥’이 된다. 우리는 작가와 출판사가 꾸민 ‘뻥’, 즉 남의 문장을 표절하고, 출판사가 만든 베스트셀러에 현혹되어 감동을 느낀 것이다. 시인이야말로 현실을 모방하는 사기꾼이라고 비아냥거리던 플라톤이 문학의 사기꾼들에게 당하는 독자들을 보면 하늘에서 배꼽 잡아 웃었을 것이다.

 

현실을 모방하는 문학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지 않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문학을 ‘뻥’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이미 누군가가 현실을 모방한 문학을 버젓이 자신의 문학이라고 모방하면서 ‘뻥’ 치는 행위야말로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문학성 떨어지는 문학을 문학성 있는 것처럼 ‘뻥’ 치는 출판계도 마찬가지. 문학가의 표절이나 출판사의 사재기 논란은 잊혀질만하면 뉴스에 나온다. 특히 출판사 사재기 논란은 정부 부처에서도 경고를 줄 정도로 단속과 처벌을 강화했지만, 최근에 모 출판사가 사재기 판정을 받은 사실을 생각한다면 고질적인 병폐가 쉽게 고쳐지지 않을 듯하다. 상황이 이런데 과연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이 읽는 것은 모두 진실인가. 이래서 그들이 팔할의 뻥으로 만들어 낸 문학의 감동은 위험하다.

 

 

 

 Scene #5  당신이 우습게 보는 대중의 분노도 위험하다

 

이인서 아니 이명원이 본 교수사회는 만신창이가 됐다. 붕괴 일보 직전이다. 거친 풍랑에 휩싸인 난파선과 같다. 들이닥친 수모와 시련은 교수사회 스스로 초래했다. 교수사회는 그 동안 성채였다. 고인 물이 썩듯이 성채는 자기정화력이 약하다. 논문 표절 등 그릇된 관행이 지속됐다. 제어장치가 없어 오히려 분파돼 나갔다. 고전적인 기법인 논문 표절은 도를 넘어섰다. 제자의 논문 훔치기는 일상화가 되다시피 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지식범죄이지만 통제기능은 전무하다. 심지어 대학과 교수가 한통속이 되어 학문적 범죄의 극단에 서 있다.

 

교수사회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글뿐만 아니라 사진 심지어 남의 인생 자체를 그대로 자신의 인생처럼 행동하는 경악스러운 사람도 있으니 ‘표절’이라는 모방에 전혀 죄책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겁 없이 표절과 도용을 행하고, 그것을 눈 감고 모른 척 하는 이 세상에서 과연 플라톤이 찾고자 했던 현실의 실재는 있을까. 진짜도 못 찾을 판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정말 만신창이가 됐다.

 

플라톤도 이데아를 찾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현실을 모방하는 사이비인 예술은 죽지 않았고, 시인이라는 직업은 쇠퇴하지 않았다. 예술의 힘이 유지할수록 플라톤의 이데아 찾기가 힘든데 거기에 정당한 ‘모방’이라고 예술을 ‘표절’하는 사기꾼이 늘어나니 천하의 플라톤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세상은 진짜를 가장한 가짜 문학과 예술이 많다. 그리고 그 가짜에 우리는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가 감동받고, 가짜에 현혹되어 진짜를 외면하고 무시할 때도 있다. 참으로 이 세상이 혼란스럽고 머리가 아파온다.

 

그래 맞다. 인생은 어차피 표절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모두들 누군가를 조금씩 베끼며 살아간다. 티 안 나게 살짝 살짝.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능이 모방이야말로 창조의 원천이라고 자신의 스승을 반박했으나 안타깝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그 모방은 지금 표절의 원천이 되고 말았다.

 

모방을 악용하는 이 세상을 완전히 고치기는 힘들 것 같다. 표절 행위를 근절하는 것은 물론이요, 표절로 이루어진 가짜 문학을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명원이 자퇴서에서 인용한 체 게바라의 말처럼 문학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는 건 힘들지라도 진짜처럼 행동하는 가짜에 맞서는 용기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용기마저 우리 스스로 죽인다면 결국 가짜에 속고, 감동받는 우리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온다.

 

표절 행위를 용인하고, 우리도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표절을 한다면 현실을 어지럽게 하는 허상에 맞서는 용기의 힘은 줄어들고, 점점 죽어간다. 또 현실의 실재를 구별하고 찾는 분별력도 떨어진다.

 

착한 모방은 또 다른 창조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혹은 짝퉁이 원조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것에 비하면 표절은 찌질할 뿐이다. 더욱이 ‘모방’, ‘인용’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갖다 대는 변명은 더 찌질해진다. 그러한 구차한 변명을 하는 예술이나 문학이 대중을 가짜 문학에 쉽게 감동받는 어리석은 존재로 본다면 오산이다. 불편한 진실이 끝내 밝혀지는 순간, 대중이 냉소적인 비난을 가득 담아 던지는 돌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우습게 보는 우리의 분노도 위험하다.

 

그러니 김윤식 교수님, 그 때 그 사건이 잊혔을 거라 안심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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