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골리앗 -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
말콤 글래드웰 지음, 선대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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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시합에서 왠지 계속 질 것 같아 보이는 인간 샌드백,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쳇바퀴 돌 듯 시장을 뺏기는 중소기업들, 공권력에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폭력조직, 미국과 붙어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발을 감행하는 중동 국가들.

 

이런 존재들을 통칭하는 단어가 바로 언더독(Underdog)이다. 투견대회에서 항상 패배하는 개들을 지칭했던 이 말은 거대한 존재 앞에서 한 없이 작아 보이는 존재들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됐다.

 

 

 

과연 언더독들은 거대한 권력과 맞붙어 얼마의 비율로 승리를 거뒀을까? 말콤 글래드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10번 중 3~4번은 언더독들이 이기는 것으로 관찰됐다. 1등은 강자고 꼴찌는 약자다. 둘이 경쟁하면 1등이 이긴다. 그러나 세상엔 약자가 반드시 약자가 아니며 강자가 항상 강자가 아니다. 강자가 우리가 생각하듯이 항상 힘 센 자가 아니다. 강한 힘은 오히려 그 원천이 유약함일 수도 있다.

 

3000년 전 이스라엘의 양치기 소년 다윗은 돌팔매질 하나로 블레셋의 210㎝ 거인전사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흔히 약자와 강자의 무모한 또는 의미 있는 싸움을 일컫는 대명사. 사실 약자와 강자가 붙을 땐 강자가 이기는 것이 공식이다. 하지만 반전은 있다. 허를 찌르는 약자의 전술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저자가 비중을 둔 건 ‘강자의 한계’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꼼꼼히 들여다보니 골리앗의 육중한 몸을 감싼 45㎏짜리 갑옷이 걸리더라는 거다. 차라리 질곡이던 그 갑옷 탓에 다윗의 민첩성은 무기가 될 수 있었다는 논지다.

 

『다윗과 골리앗』은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이길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권력과 자본에서 배제되거나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모든 것을 갖춘 이들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파고 든다. 또한 힘의 한계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영국군은 북아일랜드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내전을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구교도를 무력으로 억압했다. 그들은 시민들을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고 통행을 금지했다. 잠옷 차림으로 산책하던 노인, 십대 청소년 가릴 것 없이 총으로 사살했다. 무력은 북아일랜드 구교도들의 분노를 키웠다. 북아일랜드에 주둔한 총사령관 이언 프리랜드는 점점 더 강경하게 대처했다. 몇 달 만에 끝날 줄 알았던 상황은 30년 내전으로 번졌다.

 

저자는 힘과 성취의 관계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U자형 곡선(∩)으로 설명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힘과 성취가 정비례 관계를 취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수가 적은 학급이 높은 학습효율을 보이는 것이 많지만 일정한 지점을 지나 학생 수가 너무 적어지면 학생들끼리 배울 것이 적어 오히려 학습효과가 떨어진다. 또 돈이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줄 수 있는 것은 맞지만, 너무 돈이 많은 부모의 자녀는 그렇지 못한 아이들보다 성취율이 떨어질 수 있다. 실제 돈 많은 부모들이 하는 걱정이다. 저자는 강경한 체벌이 사회의 법과 질서를 바로 잡아준다는 통념에도 뒤집어진 U자형 곡선을 적용한다. 특정지점 이후엔 효과가 없거나, 역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무력으로 인한 통치보다 약자들을 포용하고 지원하는 정책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다윗’을 굳이 약자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부당한 대우, 열악한 조건, 강고한 편견 등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의 긍정성에 따르면 이는 ‘바람직한 역경’일 뿐이다. 세상이 발전하는 건 상처받은 다윗에 의해서지 잘난 골리앗 덕분이 결코 아니라고 했다. 지금 당신 눈앞에 포진한 강적들. 그들의 치명적 약점은 ‘강하다’일 수 있단 얘기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시련과 역경이 꼭 우리를 성장시키기만 할까. 때로는 약화시키고 파괴하기까지 하는 것 아닐까.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점점 주제와의 연관성이 흐려지면서 작가의 주장을 애써 강요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이 있다. 키가 작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골리앗과의 싸움에 앞서 사울 왕이 갑옷을 입혀줬을 때 다윗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며 벗어 던지고, 자신의 주특기인 돌팔매에 쓸 강가의 돌을 골라 들었던 사실을 기억하자. 다윗처럼 삶에서 약점을 강점화 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이 약자라는 사실을 평범한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바꿔놓은 사람들이 있다.

 

강자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약자 다윗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커버할 나름대로의 비책을 준비하지 않으면 결코 승산이 없다. 강자 골리앗의 힘이 영원하지 않듯이 약자 다윗의 지혜도 변화하지 않으면 영원히 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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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지 길이 있다. 문을 열고 나서면 여러 길들은 손을 내민 채 떠나고 만나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길은 시각의 감정을 먼저 열어준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순간 어떤 본능적인 갈망들이 교차하다가 이내 선택한 희망을 믿고, 따라나서게 하는 힘이 있는듯하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의 엔딩에서 보여주는 길의 풍경이 그러했다. 가난과 희망의 조화를 안은 채 연인과 함께 적막한 길을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답게 남았다면... 펠리니의 영화 '길'에선 안소니 퀸과 줄리에타 마시니가 고집스럽고 순수한 삶의 전향을 떠올리게 하는 그들의 길을 짙은 향수로 전해주었다.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서 어색하지 않은 자기 의자에 앉은 것 같이 흔쾌히 길을 나서게 될까. 수없이 많은 질문과 대답들은 잊혔다가도 한 번씩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어 묻는 것 같다.

 

누구든지 각자의 길이 있다. 가보고 싶은, 가야만하는, 갈 수 없는 길까지...

 

망설이다가 각자의 주사위를 던지고 떠나지 않는가. 그러면 길은 거대한 수평선의 고요함이 되어 현대인의 고립된 방을 만들어 주다가도, 뒤흔드는 파도를 만들어 어디론가 다시 떠나가도록 돛단배 한 척을 내던져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길위에 서면 덩그러니 비어 있는 끝없이 먼 대지가 다가온다. 그것은 텅비어 있는 도로가에서 향기가 피어나는 것 같은 어떤 세계로 인도한다. 희망의 안단테가 들려오는 곳으로 말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기형도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가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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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20대에 대한 갖가지 정의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는 20대가 어떤 세대인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증거일 것이다.

 

그럼에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 20대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그 누구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88만원세대’도 그네들이 처한 경제적 고통으로 세대의 특성을 규정했으며, ‘20대XXX’론도 정치사회적 역할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한 채 개인적 관심사에만 몰두하는 20대들을 비아냥거릴 뿐이다. 20대 ‘청년학도’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소설 『표백』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2011년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장강명의 『표백』이 결정된 순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표백 세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떤 것도 보탤 수도, 보탤 것도 없는 사회에서 단지 ‘표백’될 뿐이다. 그에 대한 극단적인 대응책으로 주인공들은 자살을 선택한다. 그것은 의도적이며 사회적인 자살이다. 표백 세대는 자살을 통해 세상에서 자신들을 완전히 지워버리면서 자신들의 상실감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기성세대가 고달프지만 내일을 향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면, 젊은 후배세대들은 안온하지만 희망 없는 시대를 목도하고 있다는 절규인 셈이다.

 

암울한 미래에 별다른 희망을 갖지 않는 ‘나’는 아버지처럼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나는 대학 동기인 휘영, 후배 병권, 여자친구인 세연과 추윤영 등과 어울리며 대학생활을 끝내 간다. 이 중 몇 년 전부터 자살을 준비해온 세연은 친구들을 설득, 자신이 자살한 5년 후에 자살할 것을 다짐받는다.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성공했을 때 사회에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는 흰 그림이야. (중략)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77~78쪽)

 

 

과연 이 시대의 청춘들은 아무것도 보탤 수 없고 보탤 것도 없는 표백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시대가 낳은 청춘들의 슬픈 비망록 ‘표백’은 독자들에게 이 같은 물음을 남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작가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지금의 세상이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하다는 사회라는 점에서 20대들은 변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정도로 강하게 반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표백』이 나온 지 3년도 채 안 되어 제2회 한국경제신문 청년신춘문예에 김의경의 『청춘 파산』이 당선되었다. 『표백』보다 제목이 인상적이면서 너무나 절망적인 느낌을 든다. 이제 청춘은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산되었음을 보여준다.

 

김의경이 묘사한 파산 선고 받은 청춘의 모습은 예전에 ‘88만원 세대’와 더불어 20대의 현실을 어둡게 표현했던 ‘삼포(三抛) 세대’를 상기시킨다.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하는 세대. 바늘구멍 같은 취업의 길, 불어나는 학자금 대출 빚, 치솟는 집값 등의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만다.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인 만큼 『청춘 파산』은 자전적 성격이 짙은 소설이다. 인간 CCTV, 위장 손님, 두상 모델 등 발 닿는 곳마다 이어지는 지난날 아르바이트의 추억과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채권추심 서류, 사채업자들의 예측 불가능한 독촉 방식과 그들을 따돌리기 위한 주인공의 절박한 위장술에는 빚 독촉을 피해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로 일관했던 작가의 한 시절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올해 나이 서른셋. 아르바이트라면 안 해 본 일이 없다. 하루에 세 번 취직하고 세 번 잘린 적도 있으니 이 정도면 알바 계의 고수. 그녀는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신용 불량자에다 개인 파산자다.

 

인주의 아르바이트 인생은 엄마의 사업 부도와 함께 시작됐다. 신용카드는커녕 한 달에 30만 원 이상은 써 본 적도 없건만 자고 일어나니 빚더미 위. 귀신같이 알고 직장으로 몰려드는 사채업자들 탓에 웬만한 일자리는 엄두도 못 내던 그녀는 아르바이트 인생, 즉 프리터 족이 되어 간다. 불행 중 다행으로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져 억울하게 상속받은 빚의 그늘에서 벗어나는가 싶던 찰나, 이상한 공문서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저는 현재 직장을 구하지 못한 취업준비생입니다. 최정현은 제가 얹혀살고 있는 친구 집에 압류를 하여 가구와 가전제품에 딱지를 붙였고, 또 친구에게 전화하여 돈을 갚으라고 괴롭히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나중에 취업이 된다고 해도 계속 괴롭힘을 당할 걸 생각하면 차라리 취업 준비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불안합니다. 이러한 저의 사정을 참작하시어서 귀 법원의 채권압류 및 집행취소 신청을 허락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62쪽)

 

빚이 대물림 되어 갈 길 바쁜 청춘의 발목을 잡는 세상. 작가는 쳇바퀴처럼 돌기만하는 아르바이트 인생과 법 관련 전문용어로 가득한-아직 빚 독촉에 시달리는 경험을 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머리 아픈-수많은 공문서의 기록을 통해 파산당한 청춘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장강명의 소설처럼 어려운 시절을 겪는 청춘을 등장인물로 설정하고 있지만, 세상을 대응하는 인물의 방식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장강명은 절망적 처지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일련의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 김의경은 숨 막힐 정도로 절박한 청춘의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운명의 횡포에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의 의지가 사채업자의 빚 독촉보다 끈질기게 그려냈다. ‘표백 세대’는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무기력에 빠진 울분과 저항을 부각시켰다면 ‘파산 세대’는 맨몸으로 현실의 벽을 스스로 뚫고 가려는 분투의 의지가 돋보인다. 김의경의 당선 소감에서 언급된 표현대로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은 운명에 저항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운명에 저항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파산 시대의 청춘을 위로하는 메시지가 된다. 『청춘 파산』의 주인공 인주는 자신을 괴롭히는 빚쟁이들과 맞서기 위해서 혼자 채무, 파산과 관련된 법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회생절차’를 밟는다.

 

다만, 운명에 저항하는 인주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씁쓸한 뒷맛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에게 빚을 잔뜩 안긴 기성세대를 믿지 못한 채 혼자 회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주의 모습은 더욱 힘겨운 현실을 상기시켜 줄 뿐이다. 작가는 인주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청춘이 겪은 어두운 현실을 공유하는데 성공했으나 과연 이것을 작가의 의도대로 희망적인 위로 차원으로 독자들이 공감했는지 의문이다. 빚갚는데 신경 쓰다보면 연애며 결혼은 언제 할 수 있을까. 취업은 제대로 할 수 있을라나. ‘빚에 시달리더라도 같이 시달리면 좀 나을 거야’(365쪽)라는 위로를 받으면서 인주가 개인회생을 위한 진술서를 쓰는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결론을 보면서 앞으로 더 고생해야 하는 청춘의 가시밭길이 불현듯이 떠오른다. 

 

작가들은 심사평에서 『청춘 파산』은 ‘프리터의 삶은 힘겨운 현실’임을 상기시킨 대목이 좋다고 썼으나, 이미 힘겨운 현실을 다 겪어 본 젊은 독자 입장에서는 썩 좋아할 만한 대목은 아닐 것이다. 소설이 오랫동안 아파왔던 독자, 특히 오늘날의 청춘의 환부를 다시 찌른 격이다.  ‘88만원 세대’, ‘삼포 세대’ 거기에 불행한 우리들에게 위로의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등장했던 슬로건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등 우리 현실을 반영한 또 다른 청춘의 이름이 나왔으나 문제의식만 부각될 뿐이지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전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의 소설도 더 이상 청춘에게 어떠한 위로도,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래나 저래나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들은 뭐하나 마음 편할 일 없고 아픈 상처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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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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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이 여자를 아시는 분? 아! 생각났다. 나훈아 ‘18세 순이’와 송대관 ‘우리 순이’. 우디 앨런 아내 순이 그리고 현기영의 단편 『순이 삼촌』에 나오는 제주도 출신 순이.

 

순이가 살다 갔던 제주도는 아름답다. 바다며 산이며 들이며 할 것 없이 모두 아름답고, 몸을 낚아챌 정도로 부는 바람도 아름답다. 누군가 그랬다. 이 땅에 제주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밋밋했겠느냐고. 신혼부부가 손을 맞잡고 유채꽃 사이를 달린다. 조랑말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노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제주의 이미지는 ‘신혼부부의 섬’이요, ‘낭만의 섬’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유채꽃에는 한(恨)이 서려있음을 아는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구석구석에는 역사의 상처가 베어있다. 이틀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끝없는 오름들, 쉴 새 없이 불어대는 바람, 바다에 몸을 숨기는 해녀들 그리고 곳곳에 남아 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

 

여기에서 저기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무친다’는 형용사를 끝없이 떠올린다. 아름다운 섬이 분명한데, 그저 예쁘고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사무침이 이 섬에 있다.

제주 북촌 마을 옴팡밭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 1978년 현기영이 『순이 삼촌』에서 이야기했던 바로 그 옴팡밭이다.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갈라 세웠다던 운동장에서 죽음이 결정된 사람들은 옴팡밭에서 처형당했다.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선택하라는 군인들 앞에서 사람들은 헷갈렸겠지. 어느 편에 서야 진짜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인지 열심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겠지. 애초에 이념을 가지고 저항한 이들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힘겹게 살아왔을 뿐인 사람들이기에,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디든 선택하라는 명령에 다만 얼떨떨할 뿐이었겠지.

 

그렇게 수백 명의 목숨은 까닭도 모른 채 쓰러져 갔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살 장소인 옴팡밭까지, 채 10분도 안 걸리는 길을 걸었다. 생의 마지막 10분, 그 길이 그네들에겐 얼마나 길고 아득한 길이었을까?

 

트라우마는 강간, 억압, 전쟁과 같은 육체적, 심리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 외상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때론 만물을 만들어낼 정도로 강력하지만, 어떤 때엔 조그마한 충격에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나약하다. 그래서 육체는 멀쩡한데 정신은 멀뚱멀뚱한 사람들이 많다.

 

『순이 삼촌』은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일인칭 화자인 나는 한때 우리 집에 식모살이를 했던 순이 삼촌(제주에서는 먼 친척어른을 남녀 구분 없이 삼촌이라 부른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30여 년 전 제주도 4.3 학살사건을 떠올린다.

 

당시 사건은 무장대에 의해 발단되었다. 2연대 3대대 군인 일부가 시찰을 마치고 함덕으로 돌아가는 도중 무장대가 군인들을 기습하여 군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심각하게 여긴 마을 원로들은 죽은 군인들의 시신을 들고 함덕에 있는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그런데 분노한 군인들은 부대를 찾아온 마을 원로들 10명 가운데 9명을 즉석에서 총살해버렸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군인들은 2개 소대 병력을 풀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주민 모두를 초등학교에 집결시키고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총을 장전한 채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했고, 현장에서 주민 7~8명을 즉결 사살했다. 그리고는 군경가족이나 민보단 가족을 주민들에서 분리시켰고, 이런 군인들의 조치에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에 있는 당팟과 서쪽 너븐숭이 일대로 끌고 가 총살을 시작했다. 총성은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500명 가까운 주민이 목숨을 잃고 나서야 우여곡절 끝에 멈췄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태어나도 이름을 짓거나 호적에 올리는 등의 일을 미루던 시기였기에, 유아 대부분이 이름이 없던 시기다. 피해자 수가 아직까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이유다.

 

순이 삼촌도 북촌사건 당시 군인들에 의해 총소리 통곡소리가 진동하는 옴팡밭으로 끌려갔다. 순이 삼촌이 현장에 끌려갔을 때 사람들은 밭에 안 들어가려고 밭담 위에 엎어져서 이마에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순이 삼촌은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직전에 실신해서 넘어졌으므로 총탄을 피할 수 있었고, 깨어났을 때는 그의 몸은 시신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무구한 주민들이 목숨을 잃은 장소였던 옴팡밭은 순이 삼촌네 소유였다. 사건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 옴팡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신들이 널려 있었고, 사람을 빌어 시신을 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 수 있었다.

 

북촌사건이 발생했던 1949년은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지만, 옴팡밭에는 죽은 시신을 먹은 고구마들이 목침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또 다른 친척 어른이 당시를 회상하는 증언이다.

 

“그핸 숭년(흉년)이라, 보릿겨범범 먹던 때지만 그 아지방네(아주머니네) 밭에서 난 감저(고구마)는 사름(사람) 죽은 밭엣 거라고 사름(사람)들이 사먹질 않했쥬.”

 

학살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이 삼촌은 그 후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한번은 순이 삼촌이 이웃집에서 메주콩을 잃어버린 일로 시비가 벌어진 적이 있는데, 이웃사람의 ‘경찰서로 가자!’라는 말 한 마디에 철퍼덕 주저앉아 똥오줌을 싸는 바람에 범인으로 오해받으면서 환청이 시작되었다. 평생 30년 전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 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를 골라내며 살다 결국 살육의 현장에서 약을 먹고 개처럼 죽고 말았다. 그녀는 지금 죽었지만 그녀는 이미 30여 년 전에 죽어버린, 유예된 죽음을 살았던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정권도 바뀌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제주도를 트라우마 섬이 아니라 '익사이팅'한 관광의 섬으로만 기억한다. ‘4.3특별법’이 제정되고,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 등이 이어지고 있지만, '어떤 위로와 사과로도 제주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다 지우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몇 마디 위로의 말로 혹은, 요식행위에 불과한 법 제정만으로 그들이 겪은 '팔열지옥(八熱地獄)'의 고통을 지울 수 있을까?

 

아직도 제주에는 제삿날이 같은 집이 동네마다 지천이다.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어둡고 습한 그늘. 이 비극의 역사를 위정자들은 ‘4.3폭동’, 우리들은 ‘제주 4.3항쟁’이라 부른다.

 

언제나 외세와 육지 사람들로부터 수탈당하고 차별과 억압을 당해왔던 섬 제주는 어느 곳보다 공동체가 살아있고 평화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제주도민은 남과 북이 갈리기를 원하지 않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지 않았기에 통일과 자주를 외치며 저항했다. 또 친일경찰들이 해방 이후에도 버젓이 세를 누리며 민중을 억압하고 3·1절 시위에서 무력진압을 해 사람을 죽이고도 사과를 하지 않는 불의에 저항한 것뿐인데 그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던 것이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도록 역사적으로는 빨갱이로 몰리고 그 가족마저 연좌제의 고통을 당했다. 피해자들은 억울한 피해자이면서도 무조건 빨갱이 취급을 받을까봐 피해 사실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하며 숨죽여 살아야 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지나간 역사의 충격과 아픔을 잊어버리고 가끔씩 생각해내겠지만, 순이 삼촌 같은 분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과거의 그 한 순간에 영원히 머물러 고통 받으면서 산다. 지제주도 바람에 묻어오는 순이 삼촌의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커플티를 입고 온 신혼여행객들의 자지러지는 웃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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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특별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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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하늘에서 우주의 과거를 보다

 

태양은 하루 종일 서쪽을 향해 조용한 항해를 계속하면서도 가슴속 깊이 묻어놓은 용광로에 풀무질을 한다. 힘겨운 풀무질로 녹여낸 이글거리는 황금색 쇳물을 응축시켜 아무도 모르게 내면 깊숙이 숨겨둔다. 이윽고 서편 하늘에 도착하면 아련한 청산들이 겹겹으로 웅크려 잠들어 있는 곳에 허공과 청산의 계곡마다 쇳물을 흩뿌린다. 눈물겨운 석양을 하늘 가득히 채워 놓고는 황혼이 그 검은 장막을 내리기 전에 서둘러 서산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진다.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순간에 서쪽 하늘에 뜨는 낭만적 노을은 지상에서 인간의 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일종의 우주 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반복되는 이 노을 현상은 태양이라는 거대한 항성의 인력에 종속돼 지구가 궤도를 이루고 주기적으로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는 날까지 이루어 질 것이다.

 

천문학적인 개념으로 볼 때 애초의 태양은 태양계와 비교적 가까운 오리온좌에서 태어났다. 은하계 안에서는 가장 큰 우주의 가스와 먼지들이 복잡하게 압축된 오리온성운 속에서 형제들과 떼를 지어 함께 탄생한 것이다. 오리온성운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면 지금도 어둡고 침침해 보이는 구름의 내면 깊숙이 새로 태어나고 있는 거대한 항성들,즉 태양의 동생들이 찬란한 빛으로 눈부시게 발광하고 있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 항성들은 오리온성운을 뛰쳐나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길을 떠난다.

 

이렇듯 하늘을 보는 일은 우주의 과거를 보는 셈이다. 낮에 우리에게 밝은 빛을 주는 태양은 이미 8분전에 태양을 떠난 것이다. 지금 보는 북극성은 800년 전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은하 안드로메다는 220만 년 전의 모습이다.

 

 

 

 Scene #2  우리는 별의 자녀

 

인류는 명백히 우주의 산물이다. 먼저 인간과 생명체를 이루는 원소들이 모두 별의 폭발에서 만들어졌다. 초기 우주는 수소와 헬륨뿐이었지만 별이 핵융합을 하다 신성(또는 초신성) 폭발로 생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반복함에 따라 탄소 산소 질소 마그네슘 황 등 무거운 원소가 생긴다. 칼 세이건은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 성분인 철 등 원자 하나하나가 모두 별에서 합성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라고 말한다.

 

태양도 주변 초신성 폭발 후 탄생했을 것이며 태양으로부터 자외선이 닿아 지구 최초의 유기물이 생겨났을 것이다. 공룡이 사라진 덕분에 포유류가 번성하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하게 된 것도 우주적 환경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실 우주를 들여다볼수록 인간의 존재는 경이다. 거꾸로, 인간의 눈으로 우주를 바라보기에 경이롭게 보이는 측면도 없지 않다. 예컨대 인간은 기적적으로 낙원 같은 지구를 만난 것이 아니라 지구 환경에 적응한 결과물이다. 지구에 산소가 풍부해진 것은 인간에게는 행운이지만 산소 없이 살던 미생물들에게 재앙이었다.

 

화성인 논란은 또 어떤가. 로웰 천문대를 세운 퍼시벌 로웰은 화성 표면을 가로지르는 선들이 거대한 운하라고 생각했고, 행성 규모의 토목공사를 벌이는 고등한 지적존재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물론 순전히 그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우주를 탐사하고 관측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화성에 이끼 같은 생물을 살게 하고, 덕분에 지표가 어두워져 더 많은 태양빛을 흡수하고, 얼음이 녹고, 얼어붙었던 대기가 풀려나 언젠가 인류가 화성에 거주하게 되리라는 상상은, 사람의 지적 능력이 아니라 꿈꾸는 능력에서 나온다. 화성인이 침공하는 공상과학과, 화성인이 산다는 로웰의 생각이 없었다면 과연 화성탐사선 프로젝트가 현실이 됐을까.

 

언젠가 화성의 극관(極冠, 화성의 극에서 얼음으로 덮여 하얗게 빛나 보이는 부분)에서 녹아내린 물을 적도 지대에서 받아쓰도록 거대한 운하를 건설할 날이 올지 모른다. 그 날이 오면 우리가 바로 ‘로웰의 화성인’이라고 세이건은 말하고 있다.

 

 

 

 Scene #3  만약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무한의 공간’인 우주를 탐험하는 지적 존재는 과연 인류뿐일까? 인간만이 고등한 기술을 갖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까? 외계인과의 만남은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환상’이다. 그러나 소수지만 어른이 돼서도 이 꿈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이건은 조바심치며 외계인과 조우를 고대하는 아이와도 같다.

 

전파는 외계의 존재를 확인하는 수단인 동시에 인간의 존재를 외계에 알린다. 지구에서 유래한 전파신호는 빛의 속도로 전 우주로 퍼져나간다. 세이건은 언젠가 외계 문명이 해독할지도 모를 인간의 TV 전파를 우려하기도 한다. 인류라는 존재는 고작 아무 생각 없는 광고, 끊임없는 국제 분쟁, 지지고 볶는 가정사에 얽매여 산다니. 도대체 외계 문명인이 인류를 뭘로 보겠는가.

 

외계 생명체의 모습이 지구인과 닮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러 유기체에 분산 존재하는 지적 개체’ 같은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인간처럼 상온에서 전기신호를 주고받는 뉴런이 아니라 저온에서 작동하는 초전도 소자 뉴런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그들은 1,000만배나 빠른 속도로 생각을 하고, 동떨어진 뉴런끼리도 전파를 주고받을 것이다. 그래서 분신들이 여러 행성에 흩어져 존재하면서 하나의 총체적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우주의 주인이 인간만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우주적 시야에 걸맞은 윤리를 따라야 한다. 예를 들면 고래와 같은 지구의 지적 생물을 저잣거리에서 파는 물건으로 취급할 게 아니라 이해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고래와 돌고래는 사람만큼이나 다채로운 언어를 구사한다. 긴수염고래는 20㎐의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이처럼 낮은 주파수는 바다에서 거의 흡수되지 않아 지구 정반대편의 고래와도 대화할 수 있을 정도다.

 

보이저 호는 이 광막한 우주에서 얼마나 오래 날아가야 생명체를 만날 수 있을까. 아마 못 만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레코드판에 수록된 정보의 수명은 10억 년은 된다고 하니, 그 사이에 새로운 우주 생명체가 탄생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후손은 외계 지적생명체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우주의 저쪽 그 먼 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실제 풍경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현란한 광경이다. 현대의 최첨단 망원경으로서도 감지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로서만 상상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의 우주의 풍경들을 점토를 빚어 형상화하는 것이 천문학자의 역할이다.

 

세이건은 우리에게 우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당당한 우주의 일원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 '모험'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인간은 이제 겨우 달에 두 발을 디뎠을 뿐이다. 화성까지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것도 아직은 힘겨워 보인다. 하지만 우주로의 모험이 시작된 이상 인간 종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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