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삼촌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순이. 이 여자를 아시는 분? 아! 생각났다. 나훈아 ‘18세 순이’와 송대관 ‘우리 순이’. 우디 앨런 아내 순이 그리고 현기영의 단편 『순이 삼촌』에 나오는 제주도 출신 순이.

 

순이가 살다 갔던 제주도는 아름답다. 바다며 산이며 들이며 할 것 없이 모두 아름답고, 몸을 낚아챌 정도로 부는 바람도 아름답다. 누군가 그랬다. 이 땅에 제주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밋밋했겠느냐고. 신혼부부가 손을 맞잡고 유채꽃 사이를 달린다. 조랑말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노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제주의 이미지는 ‘신혼부부의 섬’이요, ‘낭만의 섬’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유채꽃에는 한(恨)이 서려있음을 아는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구석구석에는 역사의 상처가 베어있다. 이틀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끝없는 오름들, 쉴 새 없이 불어대는 바람, 바다에 몸을 숨기는 해녀들 그리고 곳곳에 남아 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

 

여기에서 저기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무친다’는 형용사를 끝없이 떠올린다. 아름다운 섬이 분명한데, 그저 예쁘고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사무침이 이 섬에 있다.

제주 북촌 마을 옴팡밭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 1978년 현기영이 『순이 삼촌』에서 이야기했던 바로 그 옴팡밭이다.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갈라 세웠다던 운동장에서 죽음이 결정된 사람들은 옴팡밭에서 처형당했다.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선택하라는 군인들 앞에서 사람들은 헷갈렸겠지. 어느 편에 서야 진짜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인지 열심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겠지. 애초에 이념을 가지고 저항한 이들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힘겹게 살아왔을 뿐인 사람들이기에,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디든 선택하라는 명령에 다만 얼떨떨할 뿐이었겠지.

 

그렇게 수백 명의 목숨은 까닭도 모른 채 쓰러져 갔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살 장소인 옴팡밭까지, 채 10분도 안 걸리는 길을 걸었다. 생의 마지막 10분, 그 길이 그네들에겐 얼마나 길고 아득한 길이었을까?

 

트라우마는 강간, 억압, 전쟁과 같은 육체적, 심리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 외상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때론 만물을 만들어낼 정도로 강력하지만, 어떤 때엔 조그마한 충격에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나약하다. 그래서 육체는 멀쩡한데 정신은 멀뚱멀뚱한 사람들이 많다.

 

『순이 삼촌』은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일인칭 화자인 나는 한때 우리 집에 식모살이를 했던 순이 삼촌(제주에서는 먼 친척어른을 남녀 구분 없이 삼촌이라 부른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30여 년 전 제주도 4.3 학살사건을 떠올린다.

 

당시 사건은 무장대에 의해 발단되었다. 2연대 3대대 군인 일부가 시찰을 마치고 함덕으로 돌아가는 도중 무장대가 군인들을 기습하여 군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심각하게 여긴 마을 원로들은 죽은 군인들의 시신을 들고 함덕에 있는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그런데 분노한 군인들은 부대를 찾아온 마을 원로들 10명 가운데 9명을 즉석에서 총살해버렸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군인들은 2개 소대 병력을 풀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주민 모두를 초등학교에 집결시키고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총을 장전한 채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했고, 현장에서 주민 7~8명을 즉결 사살했다. 그리고는 군경가족이나 민보단 가족을 주민들에서 분리시켰고, 이런 군인들의 조치에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에 있는 당팟과 서쪽 너븐숭이 일대로 끌고 가 총살을 시작했다. 총성은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500명 가까운 주민이 목숨을 잃고 나서야 우여곡절 끝에 멈췄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태어나도 이름을 짓거나 호적에 올리는 등의 일을 미루던 시기였기에, 유아 대부분이 이름이 없던 시기다. 피해자 수가 아직까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이유다.

 

순이 삼촌도 북촌사건 당시 군인들에 의해 총소리 통곡소리가 진동하는 옴팡밭으로 끌려갔다. 순이 삼촌이 현장에 끌려갔을 때 사람들은 밭에 안 들어가려고 밭담 위에 엎어져서 이마에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순이 삼촌은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직전에 실신해서 넘어졌으므로 총탄을 피할 수 있었고, 깨어났을 때는 그의 몸은 시신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무구한 주민들이 목숨을 잃은 장소였던 옴팡밭은 순이 삼촌네 소유였다. 사건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 옴팡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신들이 널려 있었고, 사람을 빌어 시신을 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 수 있었다.

 

북촌사건이 발생했던 1949년은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지만, 옴팡밭에는 죽은 시신을 먹은 고구마들이 목침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또 다른 친척 어른이 당시를 회상하는 증언이다.

 

“그핸 숭년(흉년)이라, 보릿겨범범 먹던 때지만 그 아지방네(아주머니네) 밭에서 난 감저(고구마)는 사름(사람) 죽은 밭엣 거라고 사름(사람)들이 사먹질 않했쥬.”

 

학살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이 삼촌은 그 후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한번은 순이 삼촌이 이웃집에서 메주콩을 잃어버린 일로 시비가 벌어진 적이 있는데, 이웃사람의 ‘경찰서로 가자!’라는 말 한 마디에 철퍼덕 주저앉아 똥오줌을 싸는 바람에 범인으로 오해받으면서 환청이 시작되었다. 평생 30년 전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 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를 골라내며 살다 결국 살육의 현장에서 약을 먹고 개처럼 죽고 말았다. 그녀는 지금 죽었지만 그녀는 이미 30여 년 전에 죽어버린, 유예된 죽음을 살았던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정권도 바뀌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제주도를 트라우마 섬이 아니라 '익사이팅'한 관광의 섬으로만 기억한다. ‘4.3특별법’이 제정되고,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 등이 이어지고 있지만, '어떤 위로와 사과로도 제주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다 지우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몇 마디 위로의 말로 혹은, 요식행위에 불과한 법 제정만으로 그들이 겪은 '팔열지옥(八熱地獄)'의 고통을 지울 수 있을까?

 

아직도 제주에는 제삿날이 같은 집이 동네마다 지천이다.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어둡고 습한 그늘. 이 비극의 역사를 위정자들은 ‘4.3폭동’, 우리들은 ‘제주 4.3항쟁’이라 부른다.

 

언제나 외세와 육지 사람들로부터 수탈당하고 차별과 억압을 당해왔던 섬 제주는 어느 곳보다 공동체가 살아있고 평화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제주도민은 남과 북이 갈리기를 원하지 않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지 않았기에 통일과 자주를 외치며 저항했다. 또 친일경찰들이 해방 이후에도 버젓이 세를 누리며 민중을 억압하고 3·1절 시위에서 무력진압을 해 사람을 죽이고도 사과를 하지 않는 불의에 저항한 것뿐인데 그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던 것이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도록 역사적으로는 빨갱이로 몰리고 그 가족마저 연좌제의 고통을 당했다. 피해자들은 억울한 피해자이면서도 무조건 빨갱이 취급을 받을까봐 피해 사실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하며 숨죽여 살아야 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지나간 역사의 충격과 아픔을 잊어버리고 가끔씩 생각해내겠지만, 순이 삼촌 같은 분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과거의 그 한 순간에 영원히 머물러 고통 받으면서 산다. 지제주도 바람에 묻어오는 순이 삼촌의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커플티를 입고 온 신혼여행객들의 자지러지는 웃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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